내가 살았던 우리 집 이야기(2)
◎ 연신내(대조동) 집
다시는 선을 보지 말자고, 웬만하면 해를 넘기기 전에 결혼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히고 만나기 시작한 남자가 살고 있는 곳이 북아현동이라고 했다.
지금은 2호선 아현역이 들어선 굴레방다리 입구에서 중앙여고 방향으로 조금 올라간 곳에 누이동생과 남동생, 그리고 밥 해주는 아이, 이렇게 네 식구가 방을 얻어 살고 있다고 했다. 우리 집도 굴레방다리 버스정류장에서 도보 3분 거리인 가구거리에 있었다. 아주 가까웠다.
그와 나의 근무처도 똑같이 을지로 입구에 있었다. 그는 한국증권거래소 직원이었고, 나는 중소기업은행 본점 의무실의 약사였다. 교제 기간 중, 점심시간이나 퇴근 후에 만나면 명동에서 식사를 하였고, 집에 올 때는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곳에서 내렸다. 그래서 그는 여자 친구를 집까지 데려다 주기 위해 멀리 돌아가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동안 많은 사람을 소개 받고, 만나보고 하며 찾았던 인연이 같은 동네에서 살고, 같은 거리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것이 신기했다.
동생들과 살고 있는 집이 우리 집에서 걸어서 갈 정도의 거리에 있다기에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한 번 보고 싶어서 집으로 놀러가겠다 했더니 오지 말라고 하였다. 누이동생만 한 차례 불러 보여준 것이 전부였다. 사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그러는가 보다 했는데, 못 오게 한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신혼은 연신내에서 시작했다. 지금은 은평구가 됐지만 그때는 서대문구 대조동이었다. 방 세 개 거실 하나가 있는 제법 큰 단독 주택을 전세로 얻었다. 사촌 언니가 그 근처에 살고 있어서 함께 돌아다니면서 집을 구했다.
남편이 식구들을 데리고 대조동으로 이사하던 날, 시골 부모님은 오시지 못하고, 젊은 애들끼리 이사를 한다는 말을 들으신 친정아버지께서 걱정이 되어 보러가셨다. 퇴근하여 저녁 때 아버지를 뵈니 이삿짐 속에 책상이 셋이나 있었고, 남동생 말고도 학생 둘이 더 있더라고 하셨다. 누구냐고 물어보니 조카들이 이사를 돕기 위해 왔다고 하더라며 고개를 갸우뚱 하셨다.
1969년 11월 12일, YWCA 회관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해운대로 떠나는 신혼 열차 안에서 그가 조심스레 말했다. 함께 있는 식구가 더 있다고 했다. 큰 누님의 아들 둘이 학교를 다니기 위해 올라와 있다는 것이었다. 왜 그 말을 이제야 하냐고 물었더니, 결혼 전까지는 이를 말하지 말자고 가족들끼리 입을 맞췄다는 것이다. 신혼에 시동생 시뉘를 데리고 있는 것도 힘든 일인데 생질 둘까지 있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결혼을 물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얼마나 미안하면 말을 안 했을지 이해도 되어, 화를 내지 않고 넘어갔지만 속으로는 ‘큰일이구나!’ 생각하였다.
새색시를 맞이하는 잔치는 부모님이 계신 논산에서 동네가 떠들썩하게 해주셨기 때문에, 대조동 집에는 21살 된 시누이, 고등하교 2 학년인 시동생과 생질, 중학생인 생질, 그리고 살림을 도와주는 여자 아이가 나를 맞아주었다. 어머님과 큰 시누님도 올라와 계셨다. 친정 부모님이 나를 데리고 와서 짐을 정리해 준 뒤에 집으로 돌아 가셨다. 나중에 들으니 집으로 돌아가시는 부모님의 마음이 많이 착잡하셨던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막내딸을 절벽 아래로 등 떠밀고 온 것 같다며 눈물을 글썽거리셨고,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보고 “그럼 맏아들은 장가도 못간 단 말이요?”하고 역정을 내셨다고 한다.
그렇게 말씀은 하셨지만 딸에 대한 아버지의 걱정이 더 크셨기에, 내가 결혼 후에도 직장을 더 다닐 수 있도록 주선해 주셨고, 우리 시뉘 둘도 취직을 시켜주시는 등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될 대책들을 마련해 주셨다. 어머니는 언니들 집에 가서 좋은 것이 보이면 달라고 하시어 내게 갖다 주시곤 했다. 친정에서 나는 여전히 막내딸로서 받기만 하는 사람이요, 도움과 보호가 필요한 존재였지만, 결혼 한 순간부터 나는 큰 며느리로서, 주어야 하고, 돌봐주어야 하고, 해결해 주어야 하는 존재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다.
하루 이틀 더 집에서 쉰 후에 직장에 출근하였다. 기업은행 통근 버스가 집 근처에 서서, 남편과 함께 그 차를 탔다. 출근하기 위해 현관을 나서려는데 시뉘가 아랫목 이불 밑에 넣어 따뜻하게 덥혀놓은 신발을 얼른 꺼내 놓는 것이었다. 겨우내 그렇게 해주었다. 시뉘는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과 고무신을 들고 버스 정류장에서 나를 기다려줬다. 그 시절에는 장화 없이는 못사는 동네가 많았었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교 진학을 포기한 채, 아니 남동생을 위하여 희생한 채, 서울에 올라와 오빠의 살림을 돕고 있었다. 그 시절 어린 시뉘가 나에게 주었던 섬세한 사랑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ROTC 장교 출신인 남편은 동생과 조카들을 소대원을 다루듯 대했다. 그들은 형님과 외삼촌을 어려워하고 명령 한마디 떨어지면 즉시 움직이고 시행하였다. 그래서 집안에 질서가 있었다.
집안 살림은 시뉘와 부엌일 하는 아이가 맡아서 했다. 그들은 밥 한번 지어보지도 못한 채 시집온 나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고, 말없이 지켜보며 내가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시골에 계신 시어머님은 딸에게 ‘네 올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불평하고 내게 고자질 하면 가만 안두겠다.’고 단단히 다잡아 놓으셨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 이 말을 전해 들으신 친정어머니는 무던한 시댁 인품에 한 시름을 내려 놓으셨다고 말씀 하셨다.
아랫사람들만 남편을 어려워 한 것이 아니었다. 부모님도 손 위 시누님들도 마찬가지였다. 대학교 졸업하고 취직하자마자 동생들 학비를 대고 큰살림을 하고 있는 아들이 안쓰럽고 미안해서였을 것이다. 남편의 이러한 집안에서의 위치는 나의 위상도 높여주는데 일조하였지만, 살아가면서 나를 많이 힘들게 한 것도 사실이다. 형제들이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도움을 청하면 꼭 나에게 와서 부탁을 하곤 했다. 그들 모두 나를 통해 남편과 소통을 하고, 의사를 전하고자 하여, 그들을 대신하여 부탁하고, 사정하고, 졸라서 겨우 승낙을 얻어 내곤 했다. 내 형제도 아니고, 자기 핏줄인데 왜 이렇게 까지 내가 해야 하는 지, 때로는 나도 외면해버리고 싶었지만 성격상 나는 그게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임신을 하자 나도 어머니를 닮았는지 지독한 입덧을 하였다. 물에 담근 오이지 서너 쪽과 밥 한두 수저만을 겨우 입에 넘기고 출퇴근을 하였다. 체중은 30kg 대로 줄어들었다. 다행히 그 고비를 넘긴 후로는 밥을 먹게 되어 1970년 12월 26일 첫 딸을 낳았다. 직장은 그 몇 달 전에 그만 두었다.
퇴원하자마자 어머니는 해산구완을 해주시겠다고 우리 모녀를 당신 집으로 데려가셨다. 친정집은 벽돌로 된 2층 양옥이었지만, 어머니는 오랜 투병생활 중에 있는 작은 오빠와 함께 가까운 거리에 있는 자그마한 한옥 집에서 따로 살고 계셨다.
옛날 집이 다 그랬듯이 어머니가 살고 계신 집도 외풍이 무척 심했다. 그래서 안방에다 연탄난로를 설치하고, 그 위에 커다란 물주전자를 항상 올려놓고는 뜨거운 물을 찬물과 섞어 아기 목욕을 시키고 빨래도 했다. 마루에서 툇돌을 밟고 내려가 마당에 있는 수돗가에서 어머니 손으로 기저귀를 빠셨다. 마당보다 더 깊은 부엌을 들락날락 하시며 오빠의 식사와 산모의 국밥을 해서 나르셨고, 사위를 위해 조기 찌개를 끓이셨다. 남편은 퇴근하면 집으로 가지 않고 어김없이 내가 있는 곳을 들렸다 갔기 때문이다.
삼칠일을 친정어머니의 보살핌을 받고 대조동 집으로 돌아왔다. 아기를 포대기에 폭 싸서 아랫목에 눕혀 놓고 나는 하루 종일 아기를 들여다보았다. 너무나 신기했다. “너는 어디서 와서 내 곁에 있는 거니?”
내가 집으로 돌아온 지 사흘 후는 시동생과 큰 생질의 대학교 입학시험 날이어서 어머님과 큰형님이 올라오셨다. 어머님은 점심 때 운동장에서 밥을 해 아들에게 먹이시겠다고 솥단지까지 싸들고 오셔서 나를 기함시키셨다. 밥 해 먹일 짐을 미리 꾸려놓고 일찌감치 자리에 드셨는데, 한밤중에 다급히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나가보니 할머님의 부음을 갖고 올라온 당숙이 와 계셨다. 모두들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머님은 노환으로 앓아 누어계신 시모님 곁을 지키며 온갖 고생을 다해 오셨는데, 잠시 자리를 비운 새에 돌아가신 시모님이 야속하기도 하고, 임종을 못하셨다는 죄책감으로 밤을 새우시고는 다음날 황급히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없었던 한 생명이 태어나고, 있었던 한 생명이 사라지셨다. 나는 할머님을 딱 한번 뵈웠고, 우리 아기는 한 번도 증조할머님을 만난 적이 없다. 그러나 증조할머님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 아기도 내게 오지 않았을 것이다.
시동생, 생질은 둘 다 시험을 무난히 보아 자기가 원하는 학교에 합격하였다.
시조모님이 돌아가시고 4개월 후가 아버님의 61세 생신날이었다. 아직 상중(喪中)이었음에도 회갑연을 여신다고 했다. 두 분은 동갑이셨기 때문에 한날에 같이 하시게 되었다. 어머님은, 소는 못 잡아도 돼지는 잡아야겠고, 아들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서라도 그럴싸하게 벌이고 싶어 하셨다. 문제는 잔치 비용이었다. 서울이라면 축의금 들어오는 것으로 어느 정도 비용을 충당할 수 있었겠지만, 시골 부조라는 것이 몇 십 원, 몇 백 원짜리가 대부분이었다. 돈 나올 때가 없는 농촌에서 그만큼 하는 것도 쉬운 것이 아니었다. 콩나물 한 시루, 식혜 한 동이, 집에서 빚은 술 등 먹을 것으로 대신 하는 사람도 많다.
이제 겨우 만 30이 되었고, 동생 가르치며 여러 식구를 거느리고 사는 아들에게, 돈 얘기를 하시는 어머님이나 그 말을 듣는 남편 모두가 난감해 하였다. 나는 여러 날 고심한 끝에, 내가 들었던 10만 원 짜리 적금을 헐어 남편에게 주었다. 쌀 한 가마니 시세가 6천 원 정도 되던 때였다. 그렇게 하여 우리가 드린 돈에 손 위 시누님들도 한 몫 보태어 회갑잔치를 성대하게 치러 드릴 수 있었다. 어머님은 너무 기뻐하셨고, 잔치 내내 우리 아들이 거금을 보내주었다는 자랑을 입에 달고 계셨다. 큰 아들은 당신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힘의 원천이었다.
살면서 대소가의 경조사가 있을 때마다 어머님은 당신 아들이 내는 금액이 남보다 더 많기를 바라셨다. “너는 배곯아 죽는데 그들은 배 터져 죽는 줄 알고 있으니 어떡하니? 네가 좀 더 해라.”
한편 친정 쪽에서의 나는 “너희는 형편이 어려우니 안 해도 된다.”라고 하셔서 모른 척 넘어간 적이 많았다.
회갑 잔치 때 6개월 된 딸아이를 데리고 갔는데 밤새도록 울어서 온 식구가 잠을 설쳤었다. 워낙에 예민한 아이여서, 낯선 환경과 모르는 사람들 때문에 흥분했었고, 물을 갈아 먹어서 배도 아파서, 그랬었던 것 같았다. 다행히 다음날은 진정되어서, 잔치 후 부여로 떠난 가족 나들이까지도 아빠한테 안겨서 잘 다녀올 수 있었다.
친정 부모님도 잔치에 초대되어 오셨다. 어머니는 잔치에 온 손님이 엄청 많은 것에 놀라셨다. 어느 집에서 잔치가 벌어지는 날이면, 이웃 삼(三) 동네에 연기가 안 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온 식구가 모두 와서 몇 번이나 와서 먹고, 싸가고 해도 배부르게 대접하는 것이 시골 인심이었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가 또 하나 놀라신 것은 사돈 마님의 억척스럽고 시원시원한 일솜씨였다. 엄마는 후에 내게 말씀하셨다. “저런 양반에게 너 같은 며느리가 얼마나 갑갑하시겠느냐, 그럼에도 예쁘게 봐주시니 고맙기 짝이 없다.”
우리는 대조동 집에서 2년을 살고, 모래내(남가좌동)로 이사를 했다. 부엌이 깊고 환기가 잘 안 돼, 신혼 초에는 연탄가스를 마셔 한바탕 소동을 벌인 일도 있었고(김장 이야기 참조), 부엌바닥에서 물이 차올라 여름이면 그 물을 바가지로 퍼내야 하고, 모기도 생기기 때문에 오래 살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