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2:1~22)
(큐티학교 홍보 관련) 큐티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통과하는 한 가지 방식. 큐티를 함으로써 드러나는 변화 -- '무엇을 해 주세요'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순종할까요?'로.
(이후 말씀 요약) 1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현실 고발, 진단, 처방. 그것을 이사야에게 환상으로. 2장에서는 말씀을 부여함. 1절 말씀은 히브리어로 '다가르?' 그것은 '말씀'이자 곧 '일'로 번역. 만약 달에서 지구를 육안으로 본다면.... 우주에서 달과 별은 옆집. 붙어 있음. 달에서 보면 지구상의 어떤 지역도 서로 붙어 있다. 시간이 그렇다.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붙어 어떤 시점도 서로 붙어 있음.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현실이 되는 것임. 영원적 관점에서. 누가복음 엘리사벳이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예언과 낳은 것은 10개월 차이가 나지만, 지금의 관점에서는 1구절이면 됨. 말일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부터. 이사야가 예수 보다 600년 전이지만, 그 간격은 없는 것이나 다름 없음. 말씀과 성취. Forward back. 성취를 향한 갈망이 아무리 길어도 일단 성취되고 나면... 출산과 함께 고통이 사라지듯이 긴 기다림의 갈망과 거리감도 일순간에 사라지는 것처럼. 예수님의 오심이 재림의 완성처럼. 그래서 그날을 오늘처럼 살아가야 함. 그래서 이사야를 그런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음. 재림의 약속은 먼 미래이지만 한날의 세계로 기억하게 할 영원의 사람으로 사는 것.
말일(종말)은 무엇인가? 2~3절, 시온산이 모든 높아진 산보다 꼭대기에 선다. 예배가 가장 높아지는. 수없이 많은 우리를 현혹하는 것보다 높아지는. 모든 날카로운 힘과, 권력, 창과 칼을 녹여들게 하는. 전쟁과 폭력에 신음하던 백성들이 예배로 모여드는. 지금도 전 세계 모든 곳에 예배가 있다. 위치가 바뀌어 가면서도... 예배를 통해 생명, 능력, 빛을 보여주는, 그것을 가르치는 하나님을 만남. 말씀을 따르는 것이 생명, 능력, 빛임. 그것이 사실 가장 급한 것임. 세상의 많은 것들이 급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류. 생명으로 모든 관계를 살리게 됨. 그러나 말씀을 따르지 않고 타협하는 인생들. 말씀을 기준으로 만민을 판단하게 될 것임. 극단적인 차별을 부추기는 세상. 의심과 두려움을 증폭시키는 세상. 변화의 힘은 말씀에만 있다. 세상은 욕망을 자극하는 말이 판침. 세력을 끌어 모으고 의미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결국 죽음의 소리라는 것이 점점 드러날 것임. 반면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은 것이 생명의 소리였음을 깨닫게 될 것임. 4~5절, 생명의 소리를 따르는 자들의 결국을 언급하는 부분임. 무력하게 보이지만 생명을 살리는 자들. 반대로 금, 은 보화를 보유하고 세력이 있는 듯하지만..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6절) 동방풍속이 가득하여 점을 치며 이방인과 더불어 손을 잡아서.... 결국 버림 받을. 우상 앞에 조아리고 절을 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거기에 엎드리다니.... 놀랍게도 지금도 결국이 뻔한데도 그 길을 걷고 있다. 그러면서도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음. 이런 모양새는 결국 정신분열로 가게 됨. 사울처럼. 주술적인 계시로 나라를 지휘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상한 모양새. 전형적인 인물. '롯'. 하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뒤를 돌아보는 것. 분열적 현상. 부녀 사이에 자녀를 만들어서 세대를 이어가는 분열적 행태. 말일에는 멸망을 피할 수 없음. 스스로 자멸적 행동을 하고 있기에. 결정적 문제는 '스스로 높아진 "교만"임.' 11~17절, '교만'의 교자를 한자로 보면, 매우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음. '키 큰 말이 날뛰다가 비극을 맞이하는' 의미로 구성. 본문에서 모두 객관적으로 좋은 것들을 나열했지만, 어떤 과정에 따라서는 소멸될 수 있는 것들. 버젓한 겉모양 안에 이미 취약함이 담겨 있는 것. "탁월, 위엄, 교만, 자랑." 스스로 높인다는 객관적 이유와 스스로 높일 수 없는 객관적 이유가 공존하는 것이 교만. 13절 솟아오른 작은 언덕이라는 표현. 솟아올라봤자 작은 언덕. 타인이 올려주면 자랑스럽지만 스스로 올리면 누추한. 교만을 영어로 prime. 자부심과 교만이 동시에 해석 가능한. 격투기 개체량할 때 상대를 모멸하거나 도발. 왜? 두려워서, 심리전, 자기 암시.... 상대방 선수는 가만히 바라볼 때 관객은 가만히 있는 자가 이기기를 바라게 됨. 교만한 자에 대한 현상. 그런데 그런 우리도 교만해지는 이상한 존재. 이상하게 큰 소리를 치고 싶어지는 우리. 여전히 의심과 두려움이 있기에. 자신이 그닥 신뢰할 수 없는 존재함을 알면서도 신뢰하게 하고 싶음. 게임을 시작하기도 전에 게임이 끝나는 것이, 그것이 교만. 하나님이 무너뜨리기 이미 전에, 스스로 무너질 것임. 하나님 영광 앞에 그것이 너무나 쓰레기 같은 것임을 보게 되어서. 그것을 그동안 너무나 중요하게 추구하고 열렬하게 소유하고자 했다는 치욕적 사실을 보아 알게 될 것. 19~21절, 결국 돌아보고 성찰할 수밖에 없음. 욕망과 습관, 실체를 제대로 보아야 함. 놓으면 하나님이 쥐어 주심. 자유해야 평화가 온다. 놓으면 영원히 놓칠 것 같은 착각. 정신차리면 그것 없으면 죽을 것 같은 심리. 이러한 잘못된 본능을 냉정하게 바라보아야 함. 이런 우상을 내려 놓아야 함. 인정, 안전, 질서는 하나님 앞에 맡겨야. 완전히 믿고, 하나님의 품에 맡겨야 함. 그것이 예배임.
하나님의 1차 결론, 22절.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인생은 고귀하지만 비참하고 누추하게 시들어 간다. 양면성이 다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겸손하게 다가가야 함. 인생을 아름답게 살아야 하지만 거기에 (하나님 없이) 온전히 의지하는 것은 안됨. 망망대해에 떨어진 쓰레기 국물 한 방울 같은 세상의 것들에 현혹되지 말고. 말씀은 앞으로 있을 일을 향하도록 하는 것도 있음. 우리는 몰라도 말씀은 우리의 앞 일을 알고 있음. 말씀을 의지하는 것이 앞으로에 대한 가장 확실한 것임. 의지할 만한 세상의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도 교만. 왜? 그런 것이 의지할만하다고 생각하는 '나'를 믿는 것이기 때문에. 말일을 사는 우리는 서로에게 엘리사벳이 되어 주어야 함. 마리아가 의심할 때(불가능성으로 방어할 때)...천사는 성령의 가능성으로 설득. 그때 엘리사벳의 임신 이야기를 하여 마리아가 결단하게 됨. 그것은 엘라사벳의 평소 믿음을 마리아가 알았다는 반증. 그의 진실한 겸손의 삶을 잘 알았기에.
신뢰와 사랑이 만나야만 가능. 절망에 빠진 사람을 다시 살게 하는 것은 얄팍한 전략에 있지 않고 신실하게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엘리사벳과 같이. 불가능과 가능의 선택 중에서 가능의 길을 선택하게 하는 능력. 허무한 이 땅은 오직 그가 누구라도 한 줌 호흡에 불과하는 것을 지나치게 추앙해서는 결코 고쳐지지 않는다. 묵묵하게 하나님을 쫓는 겨자씨, 누룩과 같은 삶이 중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