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버거(John Berger)의 '사진의 이해'는 존 버거가 사진에 대하여 쓴 글(에세이, 인터뷰, 서신, 비평문, 전시)을 총망라하여 엮은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존 버거가 사진에 대한 생각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 사진은 외양들에서 인용한다.'이다. 사실적인 그림이라고 할지라도 부득이하게 붓을 쥔 사람의 해석이 들어갈 수 밖에 없는데, 사진의 해석은 사진기(기계)가 대신한다. 그리고 '앞으로 대상의 신비를 벗겨내는 이 기술에 대해 더 깊이 실험해야 할 것.'이라는 말을 하였는데, 사진은 있는 그대로의 장면을 포착한 거지만, 그 장면을 바라본 우리가 그 장면에 느낀 것들을 강한 정치적인 행동(사회구조의 문제를 비판과 시위를 통한 강한 비판)으로 옮기는 것만이 사진이 보여준 것에 대한 효과적인 반응이라는 것이 존 버거의 생각이었다.
《노 시그널》은 사진 이론가 존 버거(John Berger)의 '사진의 진짜 내용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경구를 부제로 삼아, 본다는 행위와 보(이)고 있는 대상과 맺게 되는 복합적인 관계를 살펴보려는 전시이다. 이 사진에서 나는 불안정한 마음을 표현한다고 느껴졌다.
이순희 작가의 이 작품은 문명의 신호와 소음을 차단하고 자연의 생명 순환에서 체득한 감각과 자연의 비물질적 요소(빛, 그림자, 소리, 기운)를 시각 이미지로 보여주고자 한다. 작가는 역사적 장소에 자리한 나무를 '영[靈]'으로 표현했다. 여기서 존 버거의 생각을 통해 이 작품을 해석하자면, 밤의 어두움과 스산한 느낌을 주는 스트로보 광, 나뭇잎이 없는 나뭇가지들의 모습을 이용해 나무를 표현했다는 점에서, 작가는 나무를 흡사 비통하게 죽은 자의 망령으로 표현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현재 인간들은 숲을 파괴하며 개발하고 있는데, 이 상황은 나무 입장에서 본인이 곧 인간에게 베여질 운명이라는 슬픈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나무의 절망감이 작품의 나무의 영적인 분위기를 통해 표현되지 않았나 싶다. 이 사진은 관람하는 우리들에게 직접 자연을 파괴하는 우리의 모습이 비극적이라는 강한 인상과 숲을 보호할 수 있는 행동들을 실천하게 하는 동기를 주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녹음(문소현, 휴키이스)의 청영은
서동신 작가의 이 작품은 사진 이미지를 중첩해 색을 제거하거나 교차 반복하여 이미지 간의 충돌과 상호작용을 통해 대상의 구체성은 약해지며 사진적 추상에 이르게 되게 한다. 이 작품은 정해진 뜻이나 사진의 전통적인 의미의 속성으로부터 탈주를 통해서 작품의 의미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조성연 작가의 이 작품은 식물의 발아·성장·소멸 과정을 주목하면서 자연의 이치와 질서를 깨닫고 삶과 예술의 관계를 탐색하는 작업을 지속한다. 나는 이 작품이
안준 작가의 이 작품은 일상속에서 육안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순간을 시각화했다. 그림과 큰 창문이 있는 궁전 내부에 사람보다 큰 바위가 공중에 더 있는 모습은 일반적으로 생각하기 힘들다. 나는 작가가 비일상적인 상황으로 사회에서 발생하는 특이한 일에 집중하려 했다는 생각을 했다.
기슬기 작가의 이 작품은 사진 찍기와 사진 보기의 프로세스를 전복하여 사진 이미지의 생산과 소비의 과정에서 사진의 재현력, 시각의 가능성과 한계, 실재와 가상의 경계 등에 질문하는 작업을 했다. 내 생각에 이 작품은 지구를 사람의 표정과 닮았는데 마치 복잡한 지구의 시스템처럼 사람들의 관계를 나타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