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 사람이오 (1871)
안토니오 치세리
안토니오 치세리(Antonio Ciseri, 1821-1891)는 스위스 출신으로
일찍이 르네상스의 진원지인 피렌체로 건너가 미술을 공부했다.
그는 라파엘전파처럼 라파엘로의 화풍을 이어받아 밝고 우아한 작품을 남겼고,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성경을 눈으로 볼 수 있게 사실적이고 극적으로 묘사하였다.
1871년에 그린 <자, 이 사람이오 Ecce Homo>는
요한복음 18장 28절부터 19장 27절이 그 배경이다.
그는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받는 법정을 예루살렘의 빌라도 관저가 아니라
당시 세계를 정복한 로마제국의 수도였던 로마의 중심부
포로 로마노(Foro Romano)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법정 밖으로 중앙에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오벨리스크가 보이고,
군중은 대전차경기장에 운집되어 있다.
이 설정은 세상의 권력과 하느님 나라의 권력을 극명히 대조시키는 효과를 낸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9,36)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했으나 그분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군중 앞에 세워놓고 “자, 이 사람이오.”하고 말하며,
손짓으로 예수님을 가리키며 군중에게 예수님을 어떻게 할지 묻고 있다.
군중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르고 있다.
광장에 가득 찬 군중들과 심지어 맞은편 건물의 옥상까지 사람들로 가득 찬 것이 보인다.
빌라도는 군중이 폭동이라도 일으킬까 봐 두려워,
군중이 원하는 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
예수님께서는 두 손을 뒤로 묶이고 위통이 벗겨져
자주색 옷을 반쯤 걸치신 채 가시관을 쓰고 아무 말 없이 군중 앞에 서 계신다.
예수님의 표정은 보이지 않으나 몸 전체에서 고통에 가득 찬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표현대로
도살장에 끌려간 어린양처럼 고통받는 주님의 종이 되어
수난을 상징하는 자주색 옷을 입고 서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거대한 권력 앞에 아무런 저항 없이 무기력하게 서 계신다.
하지만 예수님과 대조를 이루는 빌라도는 세상 모든 권력을 쥔 성공과 힘을 상징하듯
금빛으로 화려한 로마 귀족의 옷인 토가를 걸치고 있다.
그는 군중을 바라보며 오른손을 들어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피에 대한 책임은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군중에게 있다는 것을 몸짓으로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 맞은편에 검은 옷을 입고 두루마리를 들고 서 있는 자가 바라빠이다.
바라빠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반란과 살인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자였다.
빌라도는 축제 때마다 유다인들에게 한 사람을 풀어 줄 의무가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을 풀어 주고 싶어서 군중에게 이야기하였지만,
군중은 일제히 소리를 질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바라빠를 풀어 주시오.” 하고 외쳤다.
그리하여 그는 바라빠를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풀어 주고,
예수님을 그들의 뜻대로 하라고 넘겨주었다.(루카 23,17-20.25)
그래서 바라빠의 손에 특별사면을 알리는 두루마리가 들려 있는 것이다.
예수님 뒤에는 투구를 쓰고 창과 로마군단의 황금독수리 깃발을 들고 있는
군사들이 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예수님 머리에 씌우고 자주색 옷을 입히고,
그분께 다가가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뺨을 쳐 댔던 이들이다.(요한 19,1-3)
또 빌라도의 의자 뒤에는 예수님을 고발한 수석 사제가 있는데,
그는 군중을 선동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고,
“우리 임금은 황제뿐이오.”(요한 19,15) 하고 빌라도에게 말하고 있다.
빌라도 뒤에는 예수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것을 보고
슬픈 표정으로 걸음을 돌리는 부인의 모습이 보이는데,
그 부인은 빌라도의 아내이고,
그 부인의 시녀는 그녀의 팔을 부축하며 애처롭게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다.
빌라도의 아내는 지난밤 흉몽으로 인해 사람을 보내어,
“당신은 그 의인의 일에 관여하지 마세요.
지난밤 꿈에 내가 그 사람 때문에 큰 괴로움을 당했어요.”(마태 27,19)
하고 말하였지만 벌써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여인들 곁에는 예수님의 사형 선고를 멀찍이 서서 바라보는 두 남자가 있다.
한 사람은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으로 예수님을 찾아와
새 인생을 시작한 니코데모이고,(요한 3,1)
다른 한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다인들이 두려워 그 사실을 숨기고 있다가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게 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했던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다.(요한 19,38)
그렇다면 세속의 권력과 천상의 권력 중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