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21절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
첫째 문단은 실천윤리 중에서 가히 중심부요, 결론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본받는 자 되라,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1-2)는 이보다 더 탁월한 윤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10절에서는,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말씀하고, 18절에서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합니다. 이를 네 단원으로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첫째 단원(1-2)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둘째 단원(3-7)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셋째 단원(8-14)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넷째 단원(15-21) 주의 뜻을 이해하라
첫째 단원(1-2)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1).
사도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고 말씀했는데, 에베소 성도들을 향해서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 합니다.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은 연약하고 성실하지 못한 인간이 하나님을 본받는 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하나님의 어떤 점을 본받아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1-2절은 두 절에 불과하지만 “사랑”이 3번이나 등장하는데,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독생자를 주시는 것으로 나타났고, 독생자 그리스도는 대속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본받는다”(1)는 것은, “사랑 가운데서 행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기독교윤리의 강령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본받음
하나님께는 공유적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이 있다고 신학은 정의합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심, 불변하심, 전지전능하심, 무소 부재하심 등은 하나님만의 고유한 성품들로 피조물인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넘볼 수 없는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는 비공유적 속성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는 인간에게 베푸신 속성들이 있는데 하나님의 “의로우심, 선하심, 인자하심, 사랑하심, 긍휼, 오래 참으심, 용서하심, 진실하심” 등은 공유적 속성으로 하나님께서도,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는 4장 마지막 절에서,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4:32)는 말씀을 하다가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들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5:1)고 말씀하는 문맥인 것입니다. “용서하심”은 우리도 본받아야 할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받은 자녀 같이
그러므로 사도는 아무에게나 덮어 놓고,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첫째는, “자녀”이기 때문이요, 둘째는 “사랑을 받는 자녀”(1)이기 때문에 “본받으라” 하는 것입니다. 그냥 자녀가 아니라, “사랑을 입은 자녀”라는 교리에 입각해서 권면하는데 이는 우리의 신분과 지위를 다시 한번 확인해 주고 일깨워 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어떠한 사랑을 받았는가를 간략하게나마 생각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9), 보내신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고 말씀합니다. 그리하여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엡 2:4-5),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녀된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을 본받는 삶을 살기를 열망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자녀이면 상속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만이 아니라, “자녀”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자녀됨이 끝이 아니라,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롬 8:17) 합니다. “상속자”란 특별한 의미가 있는데 왕에 비한다면 왕자(王子)와 같은 지위를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히 1:14)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요, 상속자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본받지 않는다면 그것이 도리어 비정상적인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1장에서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1-3장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어떠한 사랑을 입었는가를 말씀한 연후에야,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1) 하는 것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1:4-5)는 복음진리를 말씀한 후에 권면하는 너무나 당연하고 합당한 권면인 것입니다. 좀 더 설명이 필요하다면 베드로 후서 1:4절을 보십시오.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즉 “신성(神性)한 성품” 곧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훈련학교
또한 사도는 윤리를 말씀하는 4장 첫 머리에서,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있지도 아니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4:14) 한, 어린 아이에게 하나님을 본받으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4:20),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4:21) 하고, 하나님의 자녀요, 상속자들을, “듣고, 배우고, 가르침”, 즉 훈련을 한 후에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이끌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교회란 하나님의 자녀, 후사들을 양육하고 훈련하는 학교인 셈입니다. 그러면 이 학교의 스승은 누구인가? 주님은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6:14, 14:26)고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성령님이 하나님의 자녀, 왕 같은 제사장 학교의 유일한 스승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학교에서 이수해야 할 과목은 첫째로, 1-3장에서 진술한 성삼위 하나님께서 행해주신 “부르심의 소망, 기업의 영광의 풍성,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할게 하는”(1:18-19), 한마디로 “하나님을 알게”(1:17)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불신 시절에 행하던 구습(舊習), 즉 나쁜 습관과 행실을 다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이 새롭게 되어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게”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도록” 지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라야 할 만큼 자라지를 못하거나 가르침을 받은 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선생이신, “성령님은 근심하신다”(4:30)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성화는 확고한 교리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합니다. 축복을 받기 위해서, 상급을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에 앞서 우리의 신분과 지위와 장래 소망이 무엇인가에 확고해야만 하나님을 본받는 삶을 살기를 열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별에서 온 자”가 아니라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로되 이러한 사랑과 훈련을 받았기에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