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지심(至心)! 그가 다쳤대!”
다소 날카로운 인상의 아름다운 미녀가 방 안으로 뛰어들며 소리쳤다. 방 안에는 검은 피부에 호리호리한 몸매를 흑의경장으로 감싼 붉은 입술의 진토인(塵土人) 미녀가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였다.
“뭐 해? 해노야 아니지, 라혼 대가가 다쳤다구!”
“주인님이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가 누굴 말하는 줄 알았어?”
그녀들은 다름 아닌 한포포와 라혼에게 차레족의 족장으로부터 보답(?)으로 주어진 지심이란 이름의 차레족 여전사였다.
“어서 가자!”
“예!”
한포포와 지심은 서둘러 차비를 하고 방을 나섰다. 그러나 마음이 다급한 그녀를 막아서는 그림자가 있었다.
“너는 어딜 가려는 게냐?”
“어, 어머니…?”
“….”
바로 한포포의 어머니인 묘랑(猫娘) 묘호란(猫好丹)이었다. 한포포는 갈 길이 바쁜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그림자가 모친임을 알자 무척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다급한 어조로 어머니 묘호란을 채근했다.
“어머니, 그가, 그분이 다쳤다구요!”
“안다. 그렇게 들은 바 있다.”
“그런데 왜?”
“몰라서 묻는 것이냐?”
“….”
“그에게는 이미 아내가 있다. 당금 천하를 위진하는 백호나한과 천하제일미 천상천화가 부부지간이란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간 일부러 잊고 지냈던 일을 묘호란이 상기시키자 한포포는 금세 풀이 죽었다. 그러나 그건 그것이고, 해노야는 생명의 은인이며 사부(師父)였다.
“알아요! 하지만 그분은 제 사부라고요! 사부님이 다치셨는데 찾아가 뵈어야 도리죠!”
“….”
단호한 한포포의 입장에 잠시 침묵하던 묘호란은 이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우~! 포포야, 지금 천수교로 달려간다 해도 아마 백호나한을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예? 그게 무슨? 어머님,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지금 하남천원군 내부에서 백호나한의 입장이 매우 미묘하단다. 너도 한동안 왕부에 있으면서 황궁(皇宮) 출입을 해보아 알 것이다. 그는 너무 뛰어나기에 누군가를 모시고 있을 그릇이 아니다. 그것은 백호나한도, 하남천원군의 금영월 대장군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요?”
“삼관을 단 사흘 만에 점거한다는 것은 참으로 경천동지할 일이다. 만약 백호나한이 그 공을 내세워 호도 공략까지 한다면 그 공은 결코 가볍지 않다. 하지만 그는 공을 세우기보다 호도를 공략하는 공을 하남천원군 대장군에게 양보함으로써 인화(人和)를 생각하고 있단다. 그러니….”
“대가가 꾀병을 부리고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단다. 너도 잘 알 것이다. 그 누가 있어 백호나한을 해할 수 있겠니, 하지만 하남천원군의 수뇌는 총력을 기울여 호도 공략에 나설 것이고, 십중팔구 백호나한이 이곳 봉수성의 수비를 맡게 될 거야. 그리고 그는 하남천원군에 복귀하는 것보다 수군을 꾸미는 데 전력을 다할 것이니 지금 경솔하게 행동하는 것은 백호나한에게도 우리 백수회에도 좋지 않다.”
백수회주 묘랑 묘호란은 상경묘가의 후예로 다름 아닌 백수회를 이끌던 묘묵의 외손녀로 잠시 집을 떠나 있었기에 ‘묘묵의 옥’의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묘묵의 옥’ 사건이 일어나기 수년 전 묘묵의 사위인 묘호란의 부친에게 반역을 도모했다는 이유로 집안 전체가 참살되고 그것이 훗날 상경묘가의 멸문으로 이어졌다. 각각의 이유는 달랐지만 수년 전부터 호제가의 노골적인 견제로 일어난 사건으로 당금에 와서 그 일은 천자(天子)인 호황이 덕(德)이 없음을 증명하는 가장 커다란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었다.
***
라혼은 선맥(仙脈)을 발견하고, 드워프들을 만나면서 마음의 변화가 있었다. 홍진(紅塵)을 피해 그만 은거하고 싶었다. 그러나 설화의 장난스런 부탁을 듣고 그 이야기는 결국 꺼내지 못했다. 깊은 생각을 하고 말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그동안 겪고 느낀 바를 말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무량수불, 시주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시오?”
“아니, 별것 아니오! 묻겠소. 당신은 선불이오. 그래서 세상사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소.”
보리대불은 귀선의 물음에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 이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신선들은 세상이 도의에 맞게 흘러가도록 하며, 자기 자신이 끊임없는 수도를 하는 존재지요!”
“….”
“신선은 스스로 깨달아 그 깨달음을 통한 부차적인 힘을 얻은 존재입니다. 부처 또한 그 방법을 달리하나 진정 아는 존재지요. 그런데 시운을 읽고 1백세(世) 앞을 내다보게 되면서 1만 년마다 세상이 뒤바뀌는 것을 알게 되었소.”
1세(世)는 30년(年)이다. 이것은 우주의 시간을 말하는 방법으로 1세는 우주의 시간으로 1시진(두 시간)이다. 우주의 1년은 129,6백년 이것을 1원(元)이라 하고, 1년이 12개월로 이루어지듯 1원은 12회(會)로 이루어지고 1회(會)는 10,8백년, 1회는 30운(運)으로, 1운은 360년이다. 하루 12시진으로 이루어지듯 1운은 12세(世)다.
보리대불은 말하다 말고 귀선의 표정을 슬쩍 살피고는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반고족을 아시오?”
“고대에 살았다는 거인들을 말하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무량수불, 태초에 이 땅을 지배하던 이는 반고의 후예지요. 그 높은 도력(道力)으로 천지(天地)를 짓고 스스로 신의 반열에 오르려 했던 그들은 천지신명(天地神明)의 노여움을 사 멸족되었소. 그리고 세상에 나온 것이 용(龍)이오. 천지의 신들은 다시는 피조물이 신의 위치를 넘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용들에게 쓸데없는 꿈을 꾸지 못하게 했소. 그러나 꿈이 없는 용들은 신을 섬기려 들지 않았소. 그래서 천지의 신들은 조화롭고, 고요하며 아름다운 종족을 만들었소. 그것이 선인(善人)들이오. 그러나 그들은 자연의 조화만 생각할 뿐인 그런 종족이었소. 그러나 아직 만족하지 못한 지신(地神)들은 땅의 다른 가치를 아는 종족을 만들었소. 아니, 그들은 선인(善人)들의 일부를 땅에 맞게 만들어 고집 세고 긍지 높은 토지신들을 지었소. 그러자 야수(野獸)들의 신은 탐욕스럽고 난폭한 오귀(惡鬼)들을 만들었소.”
선인(善人)이란 선남선녀(善男善女)를 말하는 것으로 다름 아닌 엘프(Elf)였다. 토지신(土地神)은 드워프(Dwarf), 오귀(惡鬼)란 다름 아닌 오크(Orc)를 말했다.
“하지만 천지신명은 만족하지 못했소. 꿈을 꾸고 꿈을 이루는 종족을 만들고 싶어했소. 그리고 천지의 신들은 거인(巨人) 반고의 몸에서 사람을 지어냈소. 그러나 모든 천지의 신들이 인간을 만드는 일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소. 그리고 결국 천지의 신은 신(神)과 마(魔)로 나뉘어 끝도 없는 전쟁을 시작했소.”
“그리고 그 전쟁에 천지가 견디지 못해 상제(上帝)의 뜻에 따라 신계와 마계로 나뉘어 봉신(封神)되었다가 1만 년에 한 번 세상은 신과 마가 싸우는 전장을 만든다.”
“무, 무량수불! 그렇습니다.”
보리대불은 귀선이 말을 받자 약간 놀라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상대는 감당 못할 힘을 가진 귀선이었다. 계속 신선의 반열에 있었기에 모르진 않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럼 신선이란 1만 년마다 오는 대변혁의 시기를 대비하여 힘을 기르는 존재들인가?”
“무량수불, 그렇습니다. 사바세계의 일은 그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에 되도록 관여하고 있지 않지요. 그러나 인연(因緣)은 그리 간단히 끓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가끔 세상사에 관여하는 신선도 있지만, 그것은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일 뿐이지요.”
라혼은 보리대불의 말을 들으며 그간 마음 한구석에 걸려 있던 무언가를 비로소 풀 수 있었다. 칸 대륙에 신선이란 존재가 있다면 시드그람 대륙에는 ‘하이랜더(Highlander)’라는 존재가 있었고, 허밋(Hermit : 은둔자)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그리고 각 종파별로 템플러(Templar)가 있어 종말에 대비했다.
“그럼 신선들은 누구와 싸우는 것이오?”
“무량수불, 그것은 각 선맥마다 다릅니다. 신과 마가 싸우는 틈바구니에서 사람을 보호하는 선맥도 있고, 신을 도와 마와 싸우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선맥도 있습니다.”
“그럼 마를 도와 신과 싸우는 쪽도 있겠군.”
“부끄럽게도 그런 마인들도 있습니다. 힘에 욕심낸 나머지 혼을 저당잡히고 마의 힘을 빌려 쓴 족속들…. 무량수불!”
라혼은 보리대불의 마지막 말에서 선기(仙氣)와 마기(魔氣)를 함께 지닌 자신을 책함을 느끼고 쓴웃음을 지었다.
***
라혼이 천수교에서 떠난 지 이레가 지나고 백록산에 온 지는 꼭 사흘째 되던 날, 남례성 천수교에 주둔 중인 백호영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전환을 통해 받은 보고 내용은 금영월 대장군으로부터의 친서와, 호도의 열지족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것이었다. 라혼은 일단 남례성 천수교로 가서 금영월 대장군의 친서 문제를 해결한 뒤 다시 북지성 백록파로 돌아와 설화에게 다시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얘기를 했다.
“나는 이만 남례성으로 가야겠다.”
“서방님….”
라혼은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설화의 얼굴을 들어 이마에 입을 맞추고 가만히 끌어안았다. 그러다 문득 설화를 번쩍 들어올려 왼팔로 둔부를 받쳐들었다.
“꺄아~!”
“다음에 만날 때는 설화가 해준 밥을 먹고 싶다.”
“뭐야, 내려줘요!”
“솔직히 말해봐. 여인천궁에선 요리 같은 걸 가르쳐주지 않지?”
“그런 건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어요.”
“뭘?”
“밥이오!”
설화는 일곱 살 무렵부터 밥을 지었다. 그러나 그 후 여인천궁에 들어설 때까지 밥 외에 불을 사용하는 요리는 하지 않았다. 그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라혼이었다.
“사람이 밥만 먹고 어떻게 살아? 밥 말고는?”
“알았어요. 서방님이 드시고 싶은 요리가 있다면 꼭 해드릴게요. 뭐 드시고 싶어요?”
“맛있는 거.”
“뭐예요!”
설화는 서방님이 자신을 땅에 내려주자 왠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이제 진짜 이별이기 때문이었다. 라혼은 설화를 내려놓고는 정색을 하며 물었다.
“사실 내가 널 찾은 것은,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기 위해서란다.”
“….”
라혼의 말에 설화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서방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는 설화 네가 원주로 가서 네 신상 내력을 확인했으면 한다.”
“예? 하지만….”
“지금 가자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굳이 숨길 이유는 없다. 일단 힘을 기르고 나서 원주로 가자!”
아직 어린 설화지만 서방님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설화가 호랑이, 그것도 신수(神獸) 백호(白虎)라는 것은 철저한 비밀이었다. 그러니 스스로 백호임을 밝히고 원주에 나서면 그 여파가 상상을 초월할 것이란 것은 불 보듯 자명한 일이었다.
“숨어 살 것이 아니라면 당당하게 나서는 것이 낫겠지. 네게도 할아버지나 다른 친인이 있을 것이니 그들 앞에 당당하게 나서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준비하겠다.”
“….”
설화는 미처 생각 못했던 일을 이야기하는 서방님이 너무나 고마웠다. 어머니는 직접 장사 지냈지만 아버지에 대한 일은 언제나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친가인 후려의 강무세가에도 나서지 못한다는 것이 가끔 답답할 때가 있었다.
“서방님….”
라혼은 조용히 눈물을 글썽이는 설화를 보듬어 안았다. 그렇게 무언의 동의를 얻은 라혼은 보리대불과 함께 백록파를 떠났다. 설화 또한 불타는 장동성의 화마에서 구한 사람들을 백록파에 맡기고 여인천궁으로 돌아갔다. 세상에 나선다는 구체적인 목적이 생긴 이상, 설화의 사부이자 여인천궁의 궁주(宮主) 섬섬옥수(纖纖玉手) 상유란(桑楡蘭)과 앞으로의 일을 상의해보아야 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