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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자료
금강산은 한반도 중부지방의 동,서해안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는 태백산맥 줄기의 북부에 자리잡고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원도 고성군과 금강군, 그리고 통천군의 일부에 해당된다.
금강산의 규모는 금강산을 어디서 어디까지를 설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 회양편에는 '금강산은 장양현 동쪽 30리에 있다. 회양부를 167리에 걸쳐 있다'라고 나와 있다. 그 수치는 통천의 금수봉에서 외무재령 남쪽의 국사봉까지를 일컫는 것 같다. 현재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는 금강산은 남북으로 60km, 동서로 40km 정도이며, 그 면적은 530㎢에 달한다.
금강산 주능선은 호룡봉-외무재령-내무재령-월출봉-비로봉-옥녀봉-상등봉-온정령-오봉산으로 이어진다.
주능선의 분수령을 경계로 동쪽은 산세가 웅장하고 기발하고 씩씩한 것이 남성적이라고 하여 외금강이라 하고,
서쪽은 산세가 온유하고 수려하며 우아한 것이 여성적이라고 하여 내금강 구역으로 설정되어 있다.
외금강 중에서도 호룡봉-월출봉에 이르는 분수령의 동쪽 지역은 신금강이라 부르기도 한다.
외금강 만물상과 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오봉산을 지나 북쪽으로 선창산-금수봉-사령-널막령-추지령-망마바우산-깃대봉으로 이어지는 동쪽 지역은 통천군인데, 이들 지역도 광역 금강산에 해당되며 별금강 이라 한다.
한편, 고성의 남강 하구와 통천의 총석정·시중호 일대의 바닷가 절경들을 묶어 해금강이라 한다
명칭의 유래
금강산의 명칭은 참으로 다양하다. 그것은 산의 모습이 다양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힘을 가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산의 명칭을 놓고 보면 불교와 도교의 이미지와 연관되어 명명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이름이 원래부터 불교나 도교의 이미지와 결합하여 나타난 것은 아니다.
초기의 기록으로 우리는 [삼국유사]를 들 수 있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금강산의 이름은 주로 상악(霜岳), 개골(皆骨), 풍악(楓岳) 등에 집중되어 있다. 물론 설화적인 측면에서는 불교적 이미지와 결합된 것이 많지만, 그것은 [삼국유사]라고 하는 책 자체가 가지는 불교적 성격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고려 중기 이전만 하더라도 금강산은 그 산이 보여주는 표면적인 이미지, 즉 서릿발같이 흰 산이라는 의미의 상악(霜岳), 잎이 모두 떨어지면 바위가 그대로 드러나면서 온통 뼈만 보이는 산이라는 의미의 개골(豈骨), 단풍으로 아름다운 산이라는 의미의 풍악(楓岳)처럼 산이 보여주는 표면적인 아름다움으로 산의 이름을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전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당시까지의 산 이름에는 관념적인 부분이 착색되어 나타나지는 않은 것이다.
고려 말, 조선 초에 이르면 금강산을 노래한 시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그 명칭도 도교적인 내용을 반영하는 것과 불교적인 것을 반영하는 것들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봉래산(蓬萊山)은 동해 바다 한가운데에 신선이 살고 있는 섬 혹은 산이 셋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봉래산이라는 설화에서 채택된 이름이다. 이것은 신선의 이미지와 관련하여 이름이 붙은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선산(仙山)'이라는 표현 역시 도교적이다. 이 명칭은 고유명사로 형성된 것은 아니지만 금강산을 지칭하는 가장 널리 알려진 문학적 표현이다. 신선이 사는 산이라는 의미인데, 이 산이 그만큼 도선적(道仙的)인 의미로 알려졌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렇지만 가장 다양하면서도 널리 알려진 이름은 불교적 명칭이다. 우선 우리가 가장 일반적으로 부르는 '금강산'이라는 이름부터가 불교적이다.
'금강(金剛)'이란 너무도 굳세고 단단하여 불변의 성질을 가지는 것을 지칭한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굳은 마음, 혹은 불도를 구하기 위한 굳센 마음을 상징하면서 불교의 여기저기에 수식어로 붙는다.
석굴암 입구를 지키는 유명한 조각작품인 '금강역사(金剛力士)'에서처럼 강한 이미지로 불법을 수호하려는 뜻을 나타낸다든지, '금강경(金剛經)'에서와 같이 불경의 이름에 붙기도 한다.
이 말은 원래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라는 경전에 나오는 산 이름을 그대로 빌어온 것이다. 부처가 살고 있는 동해 한가운데의 아름다운 산이 나오는데 그 산 이름이 금강산이었으므로, 중국이나 우리 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금강산으로 비정(比定)한 것에서 비롯한 것이다.
또, 금강(金剛)은 바즈라(Vajra)라는 범어를 한자로 의역한 것이다. 당나라 때의 스님인 징관(澄觀)은 동해 가까운 곳에 금강이라는 산이 있는데, 위 아래 및 사방의 산 사이에 흐르는 물과 모래 중에 금이 있어서 멀리서 보면 금처럼 보인다고 했다. 또한 금강산은 담무갈보살(법기보살이라고도 번역한다.
금강산에 법기봉이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이라는 분이 그의 1만 2천 권속들과 함께 항상 머물면서 설법을 하는 곳이라고 한다. 이러한 기록 때문에 우리 선조들은 그곳이 실제로 우리 나라의 금강산을 지칭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외에도 기달이나 열반(涅槃), 중향성(衆香城) 등의 이름 역시 불교에서 비롯한 명칭이다. 이것은 금강산에 수많은 절과 암자가 들어서고 수행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자 산 이름 자체가 불교적 색채를 띤 것이 유행하게 되고, 나아가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되어 통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이 조선 후기에 이르면 몇 가지 이름으로 통일된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사계절에 따라 다르게 부르는 방식이다. 봄에는 금강산, 여름에는 봉래산,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에는 개골산으로 부르는 방식이다.
금강산에 전해지는 전설
금강산 산신령의 예언과 토정 이지함
토정 이지함(1517-1578)은 {토정비결}의 작자로 유명한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그는 일찍이 금강산을 유람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짐작했다고 한다. 만년에 이지함은 조선 팔도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유람을 하였다. 그러던 중 금강산에 들르게 되었다. 기이한 산수를 두루 구경하던 이지함은 저물녘이 되어서 바위 위에 세워놓은 초라한 암자에 머물게 되었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느라 피곤했던지 이지함은 그만 자기도 모르게 지팡이를 세우고 벽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그런데 얼마 후 스님 두 분이 나와서 병풍도 펴고 자리도 깔면서 무엇을 준비하는 눈치였다. 이지함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지금 우리 나라 여러 산의 산신령들이 나라에 일이 생길 것을 근심하여 의논하러 모인다는 것이었다. 잠시 후 촛불이 일렁이더니 위엄 있는 옷차림을 한 산신령들이 속속 도착하여 자기 자리에 좌정하였다. 여러 산신령들이 갑론을박하며 논의가 어지러운 중에 금강산 산신령이라며 자신을 소개한 노인이 일어나더니 남쪽 왜국이 동방예의지국인 조선을 넘보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니 각자 돌아가서 나름대로 대책을 세워 일본의 침략을 막아 보자며 말하는 것이었다. 그의 말을 마지막으로 산신령들은 작별을 하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지함이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지팡이를 세워 놓았던 곳은 바위 모서리에 지나지 않았고 자신이 기대어 잠이 들었던 곳은 소나무 둥치였다. 그리고 환히 빛나던 불빛은 하늘에 걸린 새벽달이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이지함은 자신이 꿈을 꾼 사실을 깨달았다. 이 사건 이후 이지함은 임진왜란이 일어나 우리 나라가 유린당할 것을 알았다고 한다. 후에 그가 삼척 지방에 잠시 있을 때였다. 승려의 복장을 한 어떤 사내를 만났는데, 자세히 보니 영락없는 왜놈이었다. 그 놈을 잡아다 문초를 하니 왜국의 첩자로 드러났다. 이 일 때문에 왜군들이 조선을 쳐들어 왔을 때 이지함이 살던 삼척 고을에는 들어가지 말라는 당부를 하였다고 한다.
금강산 도라지 유래
옛날 금강산에는 화전을 일구며 근근이 살아가는 도씨 노인이 살고 있었다. 노인에게는 예쁘고 효성스러운 딸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은 라지였다. 이미 라지의 어머니는 돌아가셨으나, 두 부녀는 사랑과 효성으로 잘 살아가고 있었다.
도씨 노인의 이웃집에 나무꾼 총각이 살고 있었다. 라지와는 나이도 비슷하여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랐으므로 총각은 노인의 집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돌보아 주었다. 그런데 어느날 이웃 마을의 부자에게 도씨 노인이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갚아 주기 위해 총각은 한 푼 두 푼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나 돈이 모이기도 전에 이웃 마을의 부자는 도씨 노인에게 돈을 갚으라고 요구하면서, 만약 기한 내에 돈을 갚지 못하면 딸인 라지를 자신의 후실로 들이라고 하였다. 그날부터 노인은 식음을 전폐하고 몸져누웠다. 딸은 아버지의 걱정을 덜기 위해 아무 걱정 마시라고 위로하였다.
약속된 날이 오자 부자는 가마 한 채를 보내 라지를 데려오기로 하였다. 라지는 아버지와의 애끊는 생이별을 하고 가마를 탔다. 가마가 고개마루에 이르렀을 때 라지는 가마를 잠시 멈추게 하고 가마에서 내렸다. 라지는 아버지 계시는 쪽을 향해 절을 하고 어머니의 무덤 쪽을 향해 절을 하였다. 그리고는 즉시 앞의 낭떠러지로 몸을 날렸다.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일이었다.
처녀가 죽은 후 처녀의 어머니 무덤 가에는 하얀 꽃을 하나 단 풀이 봉긋이 고개를 들고 피어났다. 사람들은 그 꽃이 처녀의 죽은 넋이라고 여겨서 '도라지'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유점사와 53불의 전설
2,500년전 불타가 열반하신 후 인도에서 문수보살이 많은 불상을 만들게 하여 불속에 던졌더니 순금으로 만든 53불만이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여 그 뜻을 널리 포교하고자 돌로 만든 석선 속에 53불을 안치하고 큰 종을 만들어 넣어 바다에 띄웠다.
석선은 인도를 떠난 지 5백년만에 신라의 땅 금강산의 해변에 도착하였고 53불은 금강산을 보고 인연의 땅이라 믿고 모두 금강산을 향하였다.
그 때 고성태수가 이들을 찾아 헤매다가 용천 우은동의 큰 느릅나무에 올라 앉아있는 53불을 발견하고 신라의 남해왕에게 알렸고 왕은 그 느릅나무 밑에 있던 큰 연못을 매워 유점사를 짓고 53불을 모셨다.
그런데 그 연못에 심술 사나운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는데 자리를 비켜주지 않아 부처가 불력으로 못의 물을 남겼더니 용들이 외금강의 구룡연과 상팔담으로 달아났다.
사람들의 손길을 용서하지 않는 불로초 - 금란굴 전설
금란굴의 천정바위에는 잎사귀가 방울꽃 잎새처럼 생기고 대칭이 되게 붙어 있는 식물이 3~4포기 탐스럽게 자라고 있었다. 어느 때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이름은 무엇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바위가 꽁꽁 얼어붙는 동지섣달 엄동설한에도 푸르름은 식지 않았고, 사나운 동해의 풍랑이 집어삼킬 듯 덮쳐 들어도 결코 흔들림이 없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예나 지금이나 포기 수는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며, 시들거나 마르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르기를, 신선들이 마신다는 감로수를 받아먹고 사는 '불로초'라 하게 되었다.
이 신비한 풀이름은 금강산의 명성과 함께 이웃나라 중국까지 알려졌다. 당나라에서도 그렇게 알려졌고, 보로국의 군신들도 불로장생약으로 믿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1천년 전, 새로운 용좌에 앉은 보로국의 임금의 근심거리는 세찬 말갈족의 공격으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였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하는 외동딸의 병세가 날로 악화되는 것이었다. 임금은 딸의 병이 낫기만 하면 딸을 말갈족의 추장에게 후실로 보내 추장을 매수함으로써 그들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천하의 명약이라는 어떤 약도 소용이 없었다. 어느 날 신하 중 하나가 해동국의 금강산에 불로초가 있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임금은 곧바로 대신들을 대궐로 불러들이고는 이렇게 말했다.
"공주의 병세는 날로 위독하여 내일을 기약하기 힘들게 되었다. 내 들어보니 해동국 금강산에 금란이라는 굴이 있고, 그 안에 불로장생하는 불로초가 있다 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임금의 말을 들은 대신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 중 하나가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제가 들어보니 금란굴의 그 불로초는 하도 신비스러워서 누가 뜯자고 하면 곧 큰 풍랑이 몰려와 접근할 수 없게 된다고 합니다. 상황이 이와 같으니 뜻을 이루기 어려울까 심히 염려되옵니다."
하지만 그 자신도 불로초를 뜯는 일이 위험하다는 것을 전해 들어 알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임금의 생각을 알아챈 늙은 대신이 재빨리 아뢰었다.
"공주님의 무병장수를 가져올 금란초는 어떤 위험이 있어도 캐와야 지당한 줄 아뢰오."
많은 대신들은 속으로 난감하였으나 중대사 앞에서 망설이는 모습을 보일 수 없어 입을 모아 "지당한 줄 아옵니다"하고 되뇌이었다.
이에 임금은 즉각 출정할 것을 명하고 서복과 같은 낭패가 없도록 엄하게 말했다. 서복은 진시황의 명을 받들어 3천 명의 동남동녀를 거느리고 불로초를 찾으러 나섰으나 일본땅에 머물며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튿날부터 불로초를 캐오기 위한 준비를 하느라 일대 소란이 벌어졌다. 수십 명의 인원과 수많은 식량, 온갖 기자재를 실은 큰 배 한 척이 포구를 메우고 있었다. 책임자는 작은 배를 내려 장인들과 함께 금란굴 입구로 다가갔다. 위를 자세히 쳐다보니 정말 이상한 풀이 3~4포기나 탐스럽게 자라고 있었다. 배에는 사다리가 놓여지고, 날고 기는 채집꾼들이 동료들의 부축을 받으며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난데없이 번개가 번쩍이더니 '우르르 꽝' 하는 천둥소리가 온 굴 속을 흔들었다. 불로초를 캐려고 사다리를 오르던 사람들은 낙엽처럼 한꺼번에 떨어졌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책임자는 다른 채집꾼들을 사다리로 올려보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천지가 시커멓게 흐리더니 소낙비가 쏟아지면서 잠자던 바다는 사나운 태풍과 함께 집채보다 큰 파도를 몰고 왔다.
쏴- 하는 소리와 함께 성난 파도는 흰 이빨을 드러내며 쪽배와 사람들을 삼켜 버렸다. 두 번째 파도는 동굴 앞 멀찍이 있던 큰 범선을 칼날처럼 모가 난 금란굴의 총석정바위에 박아 놓았다. 모든 배와 사람들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이윽고 다시 바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해지며 하늘은 맑게 빛났다.
수 천년 간 고이 간직 되어온 불로초는 어떤 침략자의 손길과 발길을 용납하지 않았고, 마치 금강산을 지키는 초병처럼 꿋꿋하게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지금 금란굴 입구 바닷물에 엎어져 있는 배바위는 바로 그때의 이웃 나라 배라고 전해져 내려온다.
쑥밭과 월명수좌콩밭 - 구성동 쑥밭 전설
옛날 옛날 구성동 입구 쑥밭(蓬田) 마을에는 착하고 부지런한 노인이 농사를 지으며 가난하나 즐겁게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노인은 나무 하러 산으로 들어갔다가 초립동자를 만나 그의 뒤를 따라갔다. 깊은 계곡으로 들어가니 초당이 하나 나왔는데, 이 초당에는 월명수좌(月明首座)라는 신선이 살고 있었다. 그 신선은 노인을 반갑게 맞이하면서 대접할 것을 만들겠다면서 콩 몇 알을 가지고 산 능선으로 올라갔다. 신선이 심은 콩은 짧은 시간에 싹이 트고 자라 노인이 보는 앞에서 열매가 익었다. 신선은 콩을 따다가 두부와 음식을 만들어 노인을 대접했다. 노인은 풍성한 대접을 받고 정담을 나누느라 집에 돌아가는 일을 잊어 버렸다.
얼마쯤 놀다가 집 생각이 나서 신선과 이별하고 돌아와보니, 노인이 살던 마을은 모습이 변하고 낯선 사람들이 살고, 자기가 살던 집은 보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기억을 더듬으면서 노인들이 돌아가신 지는 여러 대 이전의 일이고 그 후손들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고 하였다.
노인이 살던 집터에는 사람이 살지 않아 쑥이 자라 쑥밭이 되어 쑥대만 우거져 있었다. 그래서 쑥밭 즉 봉전리(蓬田里)라 부르게 되었고, 그 신선이 콩을 심고 가꾼 능선을 월명수좌 콩밭 등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하늘로 오르지 못한 옥황상제 - 세존봉 옥황상제바위
외금강 구룡연 구역 만경교를 지나 왼쪽으로 세존봉을 바라보면 산중턱에 맨머리로 앉아 있는 사람 모양의 바위가 있다. 이것을 사람들은 옥황상제바위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하늘의 옥황상제가 금강산이 천하명승이라는 소문을 듣고 금강산으로 내려왔다. 때는 삼복이라 금강산의 경치를 다 돌아보고 세존봉 구룡연 기슭에 이르렀을 땐 땀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구룡연에서 흘러 내리는 맑고 시원한 물을 보자 목욕이 하고 싶었다. 옥황상제는 체면도 돌보지 않고 관을 벗어 바위에 얹어놓은 다음 옷을 벗고 물 속에 뛰어 들었다.
그 때, "뉘가 감히 여기서 벌거벗고 목욕을 하는고" 하고 엄하게 꾸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금강산을 지키는 산신령이었다. 산신령은 이 물은 천만 종류의 약초를 씻고 흘러내리는 신령약수라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물에 목욕을 하는 것은 큰 죄이며, 더구나 창피도 모르고 목욕을 하는 것은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하면서 상제의 관을 가지고 사라졌다.
상제의 상징인 관을 빼앗긴 옥황상제는 다시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세존봉 턱에 맨머리로 굳어져 이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외침을 미리 막은 사자와 용 - 사자바위/화룡담 전설
내금강의 유명한 팔담의 맨 위에 있는 소는 화룡담이고, 그 동쪽 봉우리는 법기봉이다. 그 북쪽 담벽 위에는 사자바위가 있는데 여기에는 호종단을 물리친 전설이 깃들어 있다.
호종단이라는 사람은 본래 다른 나라에서 고려에 귀화하여 벼슬살이를 한 사람이다. 고려왕의 신임을 얻어 중서성의 기거사를 지냈다. 그는 5도 양계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한반도의 땅기운을 돋우겠다고 제의하고 국왕의 승인을 받았는데, 그의 진짜 속셈은 명소들을 못쓰게 만들어 장차 고려를 침입하기 쉽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는 잘 다듬어진 비석의 글자를 갈아 부숴버리거나 물 속에 쳐넣었다. 강릉의 한송정의 비석도 바다 속에 던져버리고 삼일포에 있던 비석도 부숴버렸으며, 경주 봉덕사의 종도 쇠를 녹여 입구를 막아버리려고 하였다.
호종단이 어느 날 안무재를 넘어왔다. 그는 금강산의 산기운을 망쳐놓으려고 꿍꿍이를 하면서 만폭동으로 들어갔다. 이때 팔담(八潭)의 윗목을 지키고 있던 사자는 나쁜 놈이 온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호종단이 가까이 오자 사자가 일어나 크게 포효하니 호종단은 혼쭐이나서 부리나케 도망가 버렸다.
이때 사자는 펄쩍 뛰어 단숨에 몇 길이나 되는 앞산 바위턱에 올라앉으려고 했는데, 앞발과 뒷발 하나만 간신히 붙일 수 있을 뿐이었다. 뒷다리 하나가 공중에 떠 있게 되어 몸의 중심을 잃은 사자는 아래의 화룡에게 소리를 질렀다.
"지금 내가 위태로운 곳에 올라와 당장 떨어질 것 같구나. 물 속에 내가 떨어지면 너도 있을 자리가 없지 않느냐. 그러니 돌을 하나 가져다가 내 발 밑에 괴어 주려무나."
화룡이 이 말을 듣고 즉시 건너편 법기봉에서 돌을 하나 가져다가 괴어 주었다. 그 후 사자는 그만 굳어 돌이 되고 말았다. 지금도 사자 발 밑에 고인 모난 돌의 생김새가 맞은편 법기봉의 돌 뽑아낸 자리와 맞는다고 한다.
이 전설은 다른 식으로도 변형되었는데 사자와 용의 싸움이 그것이다.
옛날 인도땅에서 법기보살이 사자 등에 대장경을 싣고 와서 자신은 오른쪽 산꼭대기에 살고 사자는 그 아래 살게 하였다. 그런데 바위 아래 큰 연못에 한 마리의 큰 화룡이 살고 있었다. 화룡은 외지에서 들어온 사자를 좋아하지 않았고 그들 사이에는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에서 진 사자는 뒷다리 발목이 떨어진 채 건너편 바위로 뛰어 올랐는데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이것을 본 법기보살은 재빨리 돌 한 개를 뽑아다가 사자 뒷다리를 괴어 주었다. 그것이 변하여 '사자바위'가 되었고, 싣고 온 대장경은 '장경암'이 되었다고 한다.
옥황상제에게 벌 받은 토끼
옛날 옛적, 금강산이 천하절승이라는 소문이 하늘나라에까지 퍼져 갔다. 그 소문은 선녀들이 팔담에 내려와 목욕을 하기 시작하고부터 더욱 널리 퍼져 나갔다. 그리하여 하늘나라에서는 누구나 금강산 구경 한 번 가는 게 소원처럼 돼 버렸다.
하루는 성미 급한 토끼가 그 소문을 듣고 안달이 나 달에 가서 더 이상 절구를 찧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토끼는 참다 못해 옥황상제를 찾아가 자기의 절절한 소원을 아뢰었다.
"옥황상제님, 듣자온데 한반도 땅에 금강산이라는 소문난 명승지가 있다고 하온 즉 이 못난 토끼도 한 번 보고 왔으면 평생 소원이 없겠사옵니다."
옥황상제는 토끼의 소원이 하도 간절한 것 같아 쾌히 승낙해 주었다. 그러나 보름이 되기 전에 반드시 돌아와야 된다고 다짐을 해두었다.
제일 먼저 외금강 입구에 도착한 토끼는 세존봉 줄기를 타고 기어오르다가 금강문 근처에 이르러 완전히 어리둥절해 버리고 말았다. 눈 앞에 펼쳐진 경치가 너무나 아름다워 혼절할 지경이었다.
어느날 밤 토끼가 동해바다 위를 보니 휘영청 둥근 보름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제야 토끼는 '아차!'하고 정신이 퍼뜩 들었으나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그때 하늘에서부터 옥황상제의 노기 띤 목소리가 울려 왔다.
"요 괘씸한 토끼야! 너는 예전에 달리기에서 거북이에게 지더니 이번에 또 거북이 보다 느리게 행동했구나. 그러니 너는 그 벌로 앞으로 아예 거북이가 되거라!"
옥황상제의 명이 떨어지자 토끼의 몸뚱이는 서서히 거북이로 변해갔다.
그러나 토끼는 오히려 달에서 절구질이나 하고 있는 것보다 이 아름다운 금강산에서 실컷 구경하며 사는 게 낫다고 생각되었다. 그러자 토끼는 금강산 절경에 감탄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점점 돌로 굳어져 갔다. 나중에 보니 몸은 거북이, 머리는 토끼가 되어 있었다. 이 바위는 전망 좋은 세존봉 중턱에 있다고 한다.
울소
내금강 만폭동 계곡을 찾아들면 장안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장방형의 큰 바위 한 개와 그 후면에 좀 작은 바위 3개가 나란히 놓여 있는 수심 깊은 연못에 서너 길 되어 보이는 아름다운 수련폭포가 걸려있는 절경을 볼 수 있고, 또 그곳에서 수 백 미터쯤 계곡 따라 더 올라가면 영선교 다리를 지나 북쪽으로 높이가 6미터쯤 되는 3각형으로 된 큰 바위가 서 있는데 그 바위 앞 정면에는 큰불상 3체가 조각되어 있고 양쪽 옆면과 후면에는 작은 불상 63체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경관에 얽힌 전설에 따르면 長安寺에 거처한 뇌옹조사와 表訓寺에 거처한 금동 거사가 불력시험을 위해 서로 표훈사 입구 바위에 불상을 새기기로 하였다고 한다.
뇌옹은 3佛, 금동은 60小佛을 약속기간에 완성했으나 금동이 조성한 불상은 조잡하여 금동이 스스로 불심이 부족한 것을 인정하여 연못에 투신자살을 하였고 이 비보를 듣고 달려온 삼형제가 슬피 울다가 연못에 빠지면서 폭우가 내리고 날이 개인 후 그 자리에 금동의 시신은 바위가 되고 물가에 3형제 바위가 나타났다고 한다.
선녀와 나뭇꾼 - 문주담
우리들의 전래 민화에 심성이 착한 나무꾼과 고운 선녀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데 그 무대가 금강산의 문주담이다.
전설에 따르면 천계 선녀들이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구경하고 만물상을 둘러보고자 문주담에 내려와 목욕을 하는데 외롭게 사는 나무꾼이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을 구해주고 그 대가로 사슴에게 선녀를 유인하는 계책을 전해 듣고 연못가에서 목욕을 하는 선녀의 날개옷을 훔쳐 선녀를 아내로 맞았으나 아이 셋을 낳기 전에 날개옷을 선녀에게 보여주어 선녀가 아이 둘을 데리고 하늘로 올라갔다.
남아 있던 나무꾼은 다시 그 사슴에게 하늘에 올라갈 수 있는 계책을 듣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두레박을 타고 승천하여 하늘에서 선녀와 재회하여 행복하게 살았으나 금강산에 대한 그리움을 잊지 못해 나무꾼 부부는 다시 금강산에 내려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보덕각시
내금강의 보덕암에 관련한 이야기는 7세기의 고구려 설화와 12세기의 고려시대의 설화가 전해 내려 온다.
고구려 설화는 보덕대사가 금강산에 거처한다는 법기보살을 알현하러 가는 길에 내금강 만폭동 골짜기를 들렸을 때 童女의 안내로 3년간 석굴에서 기거한 뒤 관음보살과 법기보살의 화신을 친견했다고 전한다.
12세기의 설화는 회정 대사가 관음보살의 친견을 지성으로 기도한 지 3년만에 산신의 암시를 받아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의 화신을 만났는데 그가 찾던 관음보살은 젊은 여자로 금강산에 나타나 이 관음보살이 물에 비추인 곳을 影娥池라고 하고 보덕암까지 안내해준 젊은 여자(관음보살의 화신)를 보덕각시라 칭했다는 것이다.
지금 전해오는 보덕암은 회정이 암자로 지어 수도한 곳이라 한다.
목침을 잃어 버린 용의 아들 - 정양사 전설
고려 충숙왕 13년(1326) 왕사 조형이 정양사의 약사전을 다시 세우는 공사를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어린 소년이 일터에 찾아와 일하기를 청했다. 이에 중들이 따져 물으니 소년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용화라고 하는 16세 소년으로 강릉에 살고 있습니다. 듣자 하니 이곳에서 약사여래의 전각을 다시 짓는다고 하기에 저도 목수 일을 돕고자 이렇게 왔습니다. 저에게 목침(나무못) 깎는 일을 맡겨 주십시오."
여러 중들은 나이가 어린 것을 우려하여 목침 깎는 일을 맡겨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정 그렇다면 자기 솜씨를 한 번 보고 나서 시켜달라며, 큰 통나무 하나를 골라와 잠깐 사이에 몇 개의 토막을 내고 다시 손질하여 목침 덩이 만한 것을 척척 깎아 내는 것이었다. 그 솜씨가 실로 날래고 익숙하여 몇 십년 동안 대목 일을 한 사람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
"어디서 배웠는지 정말 훌륭하구나. 그럼 일을 맡아 보아라."
소년은 날마다 수십 개의 목침을 보기 좋고 정확하게 만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이 만든 목침은 산더미를 이룰 만큼 많아졌다.
너무나 감탄한 왕사와 중들은 슬그머니 장난기가 돌아 의논하기를,
"저 애가 만든 것을 하나만 슬쩍 감추어 봅시다. 정말 똑똑한 아이라면 알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넘어갈 것이 아니오"
하고는 실행에 옮겼다.
며칠 후 전각을 지을 부재가 모두 마련되었다. 이젠 그것들을 조립만 하면 되었다. 소년은 자신이 만든 목침을 용도와 모양에 따라 분류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엉엉 우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왜 그러느냐"고 하자 소년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지금까지 여러 겁년(불교에서 한 겁은 수천, 수만억년이 된다는 오랜 시간)을 두고 부처를 위해 일해 왔습니다. 그 동안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도 실수를 한 적이 없지요. 그런데 오늘 나의 성의가 모자랐는지 분명히 수효를 따져가며 만들었거늘 목침 한 개가 보이질 않아요."
왕사와 중들은 혀를 내두르며 목침을 가져다 주고는 사실대로 말해 주었다. 그러자 소년은
"나는 남해에 사는 용의 아들인데 사가라 용왕의 명령을 받들고 여기 왔었죠"
라는 말만 남긴 채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 아무리 찾아도 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지금도 정양사 약사전 천정을 짜 올린 구조물 가운데 나무토막 부재 하나가 비어 있는데, 그것은 소년 목수가 한 번 잃어버린 것은 부정 탄 것이라며 다시 쓰지 않아서 그렇다고 전해져 온다.
유점사와 53불의 전설
2,500년전 불타가 열반하신 후 인도에서 문수보살이 많은 불상을 만들게 하여 불속에 던졌더니 순금으로 만든 53불만이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여 그 뜻을 널리 포교하고자 돌로 만든 석선 속에 53불을 안치하고 큰 종을 만들어 넣어 바다에 띄웠다.
석선은 인도를 떠난 지 5백년만에 신라의 땅 금강산의 해변에 도착하였고 53불은 금강산을 보고 인연의 땅이라 믿고 모두 금강산을 향하였다.
그 때 고성태수가 이들을 찾아 헤매다가 용천 우은동의 큰 느릅나무에 올라 앉아있는 53불을 발견하고 신라의 남해왕에게 알렸고 왕은 그 느릅나무 밑에 있던 큰 연못을 매워 유점사를 짓고 53불을 모셨다.
그런데 그 연못에 심술 사나운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는데 자리를 비켜주지 않아 부처가 불력으로 못의 물을 남겼더니 용들이 외금강의 구룡연과 상팔담으로 달아났다.
고성 사람들 부부사이가 좋은 이유 - 해금강 부부바위
해금강의 총석정 아래에는 의좋게 나란히 서 있는 두개의 총석이 있다. 이 총석을 부부바위라고 한다. 이 바위에는 사이가 나쁘던 부부가 화목하게 살게 된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옛날 총석정 마을에는 사이가 나쁜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몹시 다투고는 더는 함께 살 수 없다고 단정하고 고향 마을을 떠났다. 그때 바닷가에서 "게 섰거라!" 호통치는 소리가 들렸다. 해금강 부부바위가 크게 노하여 마을을 떠나는 부부를 불러 세운 것이다. 남편바위는 남편과 헤어지려는 아내를 향해 섰고, 아내바위는 아내에게서 떠나는 남편을 향해 서게 되었다.
"당신네들이 그렇게 사이가 나쁘다니 오늘부터 나하고 사는 것이 어떠냐?"
고 각각 묻는 것이었다.
어느덧 남편 앞에는 절세의 미인이 미소를 띠며 걸어가고 있었고, 아내 앞에는 풍채 좋은 미남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새로운 사람과 부부가 될 것을 기약하고, 마을로 돌아와 새 집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그런데 다음 날 깨어보니 집은 자기가 살던 집 그대로였고, 상대는 함께 살아온 남편과 아내도 그대로였다.
서로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데 부부암 쪽에서
"듣거라. 부모가 정해준 배필이 곧 하늘이 맺어준 배필이니 의좋게 살지 않으면 천벌을 받을 거다"
고 엄하게 꾸짖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해서 사이가 나빴던 부부는 그 동안의 일을 후회하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고 하며 이후 이 지방에는 사이 나쁜 부부가 없어졌다고 한다.
가마꾼 중과 악독한 관리 - 만폭동 전설
옛날에 거만하고 독살스럽고 매정하기로 이름난 여씨 성의 벼슬아치가 있었다. 그는 백성들을 가혹하게 착취하여 제 몸만 불리던 자로 몸집이 절구통만하였다.
어느 여름날 금강산 여행을 떠난 그는 가마꾼이야 어떻게 되든 제 몸이 편안하니 빨리 구경을 하자고 철령을 넘어서부터 다그쳤다. 보통 사람이면 장안사에서 하룻밤 묵고 다음 날 만폭동으로 구경 가는 것이 관례였지만, 이 사나운 벼슬아치는 금강산에 도착한 그 날로 만폭동 구경을 하겠다고 서둘렀다.
장안사의 가마꾼들은 그래도 비교적 평탄한 길을 가게 되어 좀 나았지만 고생하게 된 것은 표훈사 중이었다. 그 날 가마를 메게 된 중들은 이른 새벽부터 땔나무를 하고 방금 돌아온 참이었다. 가마를 준비해 가지고 삼불암까지 내려가니 이미 그 벼슬아치를 태운 가마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벼슬아치는 표훈사 가마꾼을 보자 왜 늦었는가를 추궁하고 빨리 가자고 독촉했다.
두 사람은 어찌나 무거운지 몇 걸음을 못가서 땀이 비오듯 하였다. 얼마 후 가마는 표훈사 앞뜰에 도착하였는데 벼슬아치는 절간구경을 안해도 되니 빨리 만폭동으로 가자고 요구하였다. 벼슬아치는 그 좋은 구경을 감상하면서 천천히 가자고 말하기는커녕 해가 지기 전에 오늘 팔담을 모두 보자고 하였다.
가마를 멘 두 중은 이대로 가마를 메고 가다가는 죽을 것 같았다. 죽을 힘을 다해 한 걸음씩 올라가던 그들은 진주담 옆 벼랑길에 이르렀다. 이때 중 한 사람이 그만 미끄러져 가마가 곤두박질할 뻔하였다. 겨우 일어선 그는 다른 중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우리가 죽기는 매일반이니까 그럴 바에야 저 놈과 함께 물에 빠져 죽는거야" 하자, "그렇게 하세" 라며 동의했다.
모진 마음을 먹은 그들은 진주담의 폭포가 내리는 높은 벼랑에 이르자 실수하는 척하고 낭떠러지로 떨어져 물에 빠졌다.
그 뒤부터 양반 관료들은 가마를 탈 때마다 이 일이 생각나 행패를 부리지 못했다고 한다.
푸른 털의 사나이를 만난 이야기
옛날 전라도에 조순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금강산이 빼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천리길을 머다않고 유람을 나섰다. 그가 백천시왕동(百川十王洞)을 구경할 때였다. 이리저리 살피면서 길을 가다 보니 바위 틈에 잣송이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씨를 까먹고 껍데기만 남긴 것이었다. 그는 이런 심심산골에 이렇게 많은 잣송이가 있는 것을 보면 필시 산짐승의 소행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며칠 전 내린 비가 아직 마르지 않아 땅은 질척거리는데, 사람의 발자국이 있었다. 그는 발자국을 따라가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몇 리쯤 갔는데, 저 앞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옷을 입지 않은 알몸인데 온 몸에는 길고 푸르스름한 털이 잔뜩 나있었다. 푸른 털의 사내는 낯선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자 도망갈까 말까 망설이는 듯 하더니 이내 포기하고 조순에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하였다.
푸른 털의 사내가 전라도 말을 알아 듣느냐고 묻길래, 조순은 자신이 바로 전라도에서 오는 길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사내는 자기를 따라 오라고 하면서 앞장 서서 걸어 나갔다. 깊은 산골로 들어가자 맑은 시냇물이 흰 돌을 적시며 졸졸 흐르는 경치 좋은 곳이 나타났다. 그러나 지세가 워낙 험한 곳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나뭇꾼들의 발자취도 쉽게 닿지 못할 곳이었다.
움집 같은 곳에 앉자 푸른 털의 사내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본시 전라도 사람입니다. 출가하여 이 산으로 들어왔는데, 먹을 것이 없어서 잣을 따서 요기를 하곤 했지요. 그런데 처음에는 피부에 윤기가 돌더니 점점 몸에 푸른 털이 나기 시작하여 이제는 온몸이 푸른 털로 덮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옷을 입지 않아도 한겨울의 추위를 느끼지 못할 정도랍니다. 이렇게 지낸 지가 이미 100년이 지났습니다."
그 날 밤 조순은 사내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사내는 간 곳이 없었다. 이후로는 조순 역시 금강산을 떠돌면서 잣을 따먹고 지냈는데, 그의 자취를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겸재 정선이 그린 금강산 그림
겸재(謙齋) 정선(鄭敾 : 1676-1754)은 조선 후기 실학 시대를 대표하는 실경산수화의 대가이다. 그는 특히 금강산 곳곳을 그림으로 옮겨 많은 사람들의 찬탄을 받고 있으며, 그의 금강산 그림의 대부분은 지금까지 남아서 우리의 예술적 자산을 풍부하게 하고 있다.
언젠가 정선이 알고 지내던 사람의 집에서 정선의 집에 비단치마를 봐 달라며 보내왔다. 안방에서 그것을 펴 보던 정선의 아내가 실수를 해서 그 위에 고기국물을 쏟고 말았다. 비단옷이 너무 더러워지자 근심이 된 정선의 아내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안절부절 이었다. 정선이 살펴보니 국물로 인해 더러워진 부분이 너무 젊어서 어떻게 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한참동안 생각하더니 아내에게 말기를 뜯고 주름을 펴서 더러워진 부분을 씻으라고 하였다.
하루는 집안에 앉아 있자니 날씨가 청명하고 상쾌하여 갑자기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는 즉시 화구를 펼쳐놓고 비단 폭을 쭉 펴더니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을 그려 나가기 시작하였다. 붓 끝 하나 하나에서 아름다운 봉우리들이 펼쳐 나왔다. 내친 김에 옆에 있던 비단 두 폭에도 역시 금강산을 그려서, 모두 세 폭을 완성하였다.
얼마 후 비단치마의 임자가 그것을 찾으러 정선에게 왔다. 정선은 금강산 그림이 그려진 비단치마를 꺼내 놓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얼마 전에 갑자기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소. 그런데 그림의 바탕으로 쓸 비단이 없어서 안타까웠는데, 마침 비단치마가 눈에 띄길래 거기에다 그림을 그렸지요. 그림을 그리고 나서야 이것이 당신의 것일 줄 알게 되었소.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정선을 슬며시 세 폭의 그림을 내놓았다. 비단치마의 임자 역시 그림을 아는 사람인지라 정선이 그린 금강산 그림을 보더니 천하의 보물을 얻게 되었다면서 기뻐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가지고 갔다. 비단치마의 임자는 그림 중 가장 큰 것을 표구해서 집안의 보물로 보관하고, 나머지 두 폭은 마침 중국으로 사신으로 가는 행렬에 따라가는 길에 가지고 갔다.
그 그림을 중국 시장에 내놓으니 어떤 지나가던 스님이 찬탄해 마지 않으면서 은 100냥을 줄 터이니 자기에게 팔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떤 선비 하나가 지나가다가 그 그림을 보면서 은 20냥을 더 얹어줄 터이니 자기에게 팔라고 하는 것이었다. 스님이 크게 화를 내면서 말하기를, "명색이 공부하는 선비라는 사람이 이럴 수가 있소? 내가 이미 값을 정해서 흥정을 마쳤으면 그만이지 당신이 어째서 도리를 모르고 사이에 끼어 들어 흥정을 망치는 것이오? 내가 거기에 30냥을 더 얹어 150냥을 드릴 터이니 나에게 주시오." 하였다. 비단치마의 임자는 이 말에 감동해서 선비에게는 120냥에 한 폭을 팔고, 행장에 넣어 두었던 또 한 폭을 꺼내서 스님에게 50냥만 받고 팔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