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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역사>를 쓴 유시민을 비판한다!
강진철(법철학 전공)
1. <역사의 역사> 이 책은 2018년에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다. 유시민은 인기 작가이다. 그가 쓴 책들은 모두가 많이많이 팔렸다. 돈도 많이 벌었겠다. 그는 서울대 경제학과(78학번)를 다니던 시절에 학생운동을 하다가 강제 징집됐고 군대 갔다 와서 복학하여 소위 ‘학원뿌락치’사건으로 구속되었는데 그때 1985년에 쓴 ‘항소이유서’는 운동권 사람들에게 많이많이 읽혔고 유시민은 그것으로 떴다. 이미 그 전부터 영특했던 유시민은 그 때부터 유시민 자체가 현대사에 있어서 ‘역사를 만드는 역사가’가 되었다. 젊었던 유시민이 쓴 그 ‘항소이유서’의 끝은 이렇게 비장하다!
“모순투성이기 때문에 내 나라를 사랑하는 본(本)피고인은 불의가 횡행하는 시대라면 언제 어디서나 타당한 격언인 네크라소프의 싯귀로 이 보잘 것 없는 독백을 마치려 합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
근래에 그가 맡은 ‘노무현 재단 이사장’이라는 직책이 말해 주듯이 그는 노무현 직계 사람이고 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냈던 정치인이었지만 지금은 정치에 공식적으로 은퇴하였다. 근래 T.V. 알쓸신잡에서의 그의 맹활약은 그의 주가(株價)를 더욱 높였다. 어느 분은 “유시민이 다시 정계에 입문하여 대통령을 노릴 것”이라고 했지만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역사의 역사는 내게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다. 인간의 본성과 존재의 의미를 알면, 시간이 지배하는 망각의 왕국에서 흔적도 없이 사그라질 온갖 덧없는 것들에 예전보다 덜 집착하게 될 것이라고 충고해 주었다. 역사에 남는 사람이 되려고 하기 보다는 자기 스스로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인생을 자신만의 색깔을 내면서 살아가라고 격려했다”(320쪽)
고 쓴 것을 보면 다시는 정치를 하지 않을 것 같다.
참으로 유식하고 똑똑하고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유시민이라지만 그가 좀 이질적인 <역사의 역사>라는 책을 썼다는데 과연 어느 정도인가가 궁금하였다.
2. 여기에 나오는 역사서 대부분을 나는 읽어보지를 못했다.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와 비교적 근래에 출판된 유발 하라리의 <사피언스>와 <호모 데우스>는 읽었다. 여기에서 언급되는 책들은 모두가 다 참으로 유익한 책일 것 같지만 사마천의 <사기>나 이븐 할둔의 <역사서설>과 같이 워낙 지금의 나와는 시대적 공간적으로 큰 격차가 있어 별로 읽고 싶은 마음도 없다. 신채호·박은식의 <조선상고사/한국통사>는 언젠가 읽고 싶다.
전문적으로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여기에서 언급되는 책과 인물들을 어떤 식으로든지 한번쯤은 섭렵하고 나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나같이 교양을 쌓기 위해서 역사책을 간간히 읽는 사람이라면 여기에 나오는 책들은 하나 같이 두껍고 재미없고 이해하기도 어려워 안 볼 것이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9권짜리 책이고 사마천의 <사기>의 한국어판 완역본은 6권으로 본문만 3600쪽이라 하는데 유시민은 이런 책들을 다 섭렵하고 이 책을 썼겠지!
3. 이 책의 앞 부분에 나오는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사마천, 이븐 할둔은 시대적-지역적-문명적 한계가 뚜렷했지만 랑케는 그렇지 아니했다. 19세기를 산 랑케는 베를린 대학 교수를 무려 45년간을 한 전문 역사학자였고 잘 나가던 프로이센 왕의 은총을 받아 유럽의 많은 자료들을 충분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이때는 그 전(前)시대와 달리 도서관의 엄청난 자료와 종이와 인쇄술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시대였다.
유시민은 그런 랑케를 비판하고 있는데, 그 비판의 이유는 유시민이 다음의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과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랑케의 야심,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쓴 역사를 과학적 역사라고 한 추종자들의 호언은 인간 정신과 문자 텍스트의 한계에 대한 인식 부족이 빚어낸 착각이었을 뿐이다” (139쪽)
엄청난 업적과 화려한 경력을 가진 랑케가 이상한 착각을 할 정도로 멍청한 사람이었을까? 그 추종자들도? 그러한 사람이 왜 유명할까?
그것이 아니라 문제는 유시민은 철학과 사조(思潮)에는 지식이 짧아 랑케의 값어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데에 있다.
랑케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보여주려 한 것은 그 당시 사조를 반영한 것이었다. 랑케가 활약했던 19세기 후반의 사조는 실증주의(實證主義)였다.
두산백과사전에는 <실증주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요령있게 정리하고 있다. 좀 길지만 이것을 알아야 랑케와 19세기를 이해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 서유럽에서 나타난 철학적 경향으로 형이상학적 사변을 배격하고 사실 그 자체에 대한 과학적 탐구를 강조하였다.
실증주의는 일반적으로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사변(思辨)을 배격하고 관찰이나 실험 등으로 검증 가능한 지식만을 인정하는 인식론적 방법론적 태도로 폭넓게 나타난다. 하지만 고유한 의미에서는 19세기 후반 콩트(Auguste Comte, 1798~1857)를 중심으로 서유럽에서 나타난 철학의 한 경향을 가리킨다....
실증주의는 어떤 사실이나 현상의 배후에 초월적인 존재나 형이상학적인 원인을 상정하는 것에 반대하고, 경험적으로 주어진 사실에 인식의 대상을 제한한다. 그리고 사실들 간에 성립하는 관계들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그 자체로 해명하려고 한다. 곧 실증주의는 근대 자연과학의 방법과 성과에 기초해 물리적 세계만이 아니라 사회적 정신적 현상들까지 통일적으로 설명하려는 지적 태도로서 나타났다.
콩트 사상의 가장 커다란 특징은 과학에 대한 신뢰이다. 그는 자연과학에서 사용되는 실증적 연구 방법이 인간과 사회 현상에 대한 탐구에도 적용될 수 있으며, 그래야 한다고 여겼다. 그는 실증적 과학이 '형이상학적이며 오직 사물의 본질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철학을 대신해야 한다고 여겼으며, 과학의 방법을 인간 지식의 원천으로 인정하는 태도를 실증주의(positivism)라고 나타냈다. 그리고 인간의 인식을 신화적 단계, 형이상학적 단계, 실증적 단계로 발전하며, 이러한 3단계가 학문뿐 아니라 각 개인의 발전에도 적용된다고 주장하였다. 과학적 지식의 성장을 인간 역사의 진보와 동일시한 것이다.
19세기 후반에 실증주의는 자연과학의 비약적인 성장과 함께 매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실증주의’는 단지 콩트의 학설만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학설에 반대하여 사실에 대한 인식만을 참된 지식으로 보고 과학적 방법을 신뢰하는 태도들을 폭넓게 가리키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실증주의는 과학의 성립과 근거에 관한 연구를 진전시키며 인식론의 영역에서도 연구를 확산시켰다.”
이 책에는 아주 짧게 나오지만 19세기는 과학기술이 눈부시게 발달하던 시기였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전기-전화, 증기기관-내연기관, 선박-자동차-기차 등이 19세기에 발명되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신학이나 인문과학만이 주를 이루었던 서양의 학문세계에 물리학, 화학, 생물학, 천문학, 지질학, 의학, 생리학 등 자연과학과 공학이 폭발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이런 과학의 발전에 따라 자연과학의 방법론이 득세하여 인문-사회과학(정신과학) 분야도 접수하기 시작했다. 자연과학에서는 객관성 내지는 보편타당성이 정신과학에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이런 객관성은 때와 장소를 초월하여 대상의 모든 것에 예외 없이 유효하고 타당한 성질이다. 이 객관성과 반대되는 것이 주관성이다. 자연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개인의 주관적인 견해는 편견이나 선입견과 같은 것으로 부정적인 의미로 그것들이 개입하면 객관성을 해친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역사학자인 랑케는 주관과 신념에 따라 달라지는 역사가 아닌 경험적으로 주어져 있어 누구든 검증 가능한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보여주려 했다. 그 시대를 살았던 마르크스가 객관적인 역사법칙을 세우고자 했던 그 무모함(!)도 다 19세기의 시대적 작품들이다. 실제로 있는 것만 믿을 수 있다는 실증주의가 19세기 후반기에는 대세였다. 랑케도 마르크스도 다 그 시대의 아들들이었다. 내가 전공한 법철학(法哲學)에서도 독일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고, 그래서 ‘쓰여져 있는 법률 문구(文句)에 충실해야 한다’는 법실증주의가 독일에서도 우리나라에서도 19세기 이래 20세기 중반까지 압도했다.
자연과학적 실증주의가 인문-사회과학을 잠시 점령하고 호령했지만 19세기말부터 벌써 이 객관주의적-자연과학적 방법론은 비판받기 시작하였고 20세기를 지나 21세기인 이제는 실증주의 비판은 한풀꺾긴 아주 낡은 주제일 뿐이다. 그래서 지금의 역사학자들은 저러한 실증주의적 사고를 답습하지도 않거니와 특별히 비판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유시민의 책은 많은 부분을 그러한 실증주의 비판에 할애하고 있다. 이는 마치 한참 전에 지나간 사람에게 뒤에서 눈을 흘기고 손가락질 하는 느낌이고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사람을 다시 불러와서 잘못을 추궁하는 그런 모습이다. 법철학에도 한때 치열했던 법실증주의 비판은 이제 연구 소재조차 되지 않는다.
4.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이러한 실증주의가 퇴조한 후에 철학적 해석학이나 현상학 같은 반(反)실증주의적 철학적 사고가 보편화되는 시점인 1961년에 쓰여졌다. 이제는 정신과학에서는 자연과학적인 객관성보다는 연구자의 주관적인 평가와 해석이 필연적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또한 그러한 평가와 해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각 연구자가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통찰력이 필수적이다.
이 책에도 언급되었듯이 역사학에서도
“역사적 사실은 순수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면서 발언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와 해석이라는 주관적 요소의 세례를 받은 다음에야 비로소 존재를 인정받고 무언가 말할 수 있다”(231쪽)
역사적 문헌이건 유물이건 모든 역사적 사실도 역사가의 이해와 해석과 평가에 열려 있다는 의미로 텍스트(text)라고 볼 수 있다. 법학에서 헌법과 법률도, 신학에서 오래전에 쓰여진 성경도 모두다 해석에 열려 있는 텍스트다.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contemporary history)라고 선언했다. 역사란 본질적으로 현재의 눈으로 현재의 문제에 비추어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며, 역사가의 임무는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232쪽)
이러한 사고는 이제는 역사학에는 아주 당연하고 보편적인 인식에 속하여 모든 역사연구에 기본적인 전제조건이 되어 있어 이제는 특별히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그런데 유시민은 역사학계에서는 한풀 간, 이미 당연시되는 이러한 전제들을 다시 끄집어내어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대중들의 입맛에 맞게 요리하여 내놓았고 많은 대중들이 호응하고 있다.
랑케와 마르크스가 19세기 후반의 시대정신에 충실하였듯이 E.H.카나 크로체도 20세기의 사조에 잘 순응했다. 역사연구에 발자취를 남긴 이 연구자들도 그 시대정신을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는 있었다. 그렇지만 역사가들이 활약했던 그 시대를 들여다보지 않고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서 지금의 잣대를 들이대면 앞 시대의 인물들은 명백한 진리도 보지 못하는 바보 같은 사람이 될 수가 있다. 그 똑똑한 유시민은 왜 그 시대적 격차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가 철학자도 역사학자도 아니어서 그랬을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하기야 우리나라의 지금의 그 많은 역사학자들의 연구들은 학술 논문이나 저서로 발행되었어도 도서관이나 연구실에서 썩고 있고 자기들끼리도 서로 읽어 보지 않을 정도로 방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유시민은 자기의 지명도를 십분 발휘하여 역사 분야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인물들의 이야기들을 접근하기 쉽게 각색하여 대중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이런 유시민의 업적은 인정받아야 하고 결코 폄하될 수는 없다. 오히려 강단의 연구자들은 반성하고 본받아야 한다.
5. 물론 그렇다고 유시민의 책 내용이 다 타당하고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고 또한 시대적으로 적절하다고 볼 수도 없다. 그리고 유시민은
“이것은 특정한 사회나 국가, 왕조, 민족의 역사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사회의 변화 원리를 밝히는 추상적 이론이다. 우리가 오감으로 인지할 수 있는 물체의 모든 운동에 작용하는 뉴턴의 물리법칙처럼 이 역사법칙도 우리가 그 존재를 아는 동서고금 모든 사회에서 작용한다. 하지만 겉모양이 자연과학의 법칙을 닮았을 뿐, 뉴턴의 물리과학과 달리 마르크스의 역사법칙은 진리인지 아닌지 실험으로 증명할 수 없다.”(151쪽)
고 했다,
당연한 얘기다. 그렇지만 저 19세기에는 지금과 달리 그 역사법칙도 자연과학의 방법론에 의지해야 했던 시절이었지만 마르크스의 역사법칙은 실험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역사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철학자의 임무는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하는 것이라 했다. 그 변혁은 반드시 성취되어 민중에 대한 착취를 끝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고 노력하고 실천하면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혁명의 성공을 통해서 역사법칙을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유시민은 마르크스를 마냥 비판할 수 없었기에 다른 방식으로 마르크스를 옹호한다.
“논리의 천재 마르크스가 자신의 이론에 내포한 논리적 모순을 인지하지 못했다면, 그건 아마도 열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불평등과 인간에 대한 인간의 억압을 지독하게 혐오했으며 그 만큼 간절하게 계급적 억압과 착취가 없는 세상을 원했다. 그런 세상을 이루려고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확신과 용기를 주려면 이론 자체의 논리적 모순을 덮어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162쪽)
내가 보기에는 그건 확실히 아니다. 물론 마르크스는 유물사관에 따른 역사적인 발전 단계 법칙이 있다는 언급을 했지만 그는 역사가(역사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현실 사회 비판자였고 더 나은 사회를 기획하는 혁명가였고 정권에 저항하는 확신범이었다. (유시민이가 그랬고 이 책에 나오는 뤼순 감옥에서 옥사하신 걸출한 사료 연구자였고 위대한 독립운동가였던 신채호 선생이 그러하듯이.) 마르크스에게 그 모든 것의 강조점은 자본주의 비판에 있었다. 지금과 같이 근로기준법이나 노동법이 없었던 마르크스 그 시절에는 ‘아동 노동’을 비롯한 열악한 노동 환경과 무자비하고 처참한 노동조건이 판을 치던 시절이었다. 마르크스는 당대의 노동자들이 겪는 고통과 절망에 감응(感應)해 혁명운동에 뛰어들었고 세상을 변혁하는데 필요한 이론과 사상을 탐구했으며 자본주의의 모순과 불합리를 극복하고 부르주아의 착취가 없는 미래를 꿈꿨다. 그 미래는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허황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 당시에 만연한 자본주의적 착취와 노동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미래가 오리라는 것은 그에게는 (과학과 역사의 법칙에 따라)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의 그러한 믿음은 몹시도 불만족스러웠던 현실에 대한 위안이고 (유시민이 프롤로그에서 언급한 그러한) 욕망이었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마르크스는 자신의 이론에서 논리적 모순을 느낀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세력과 결탁하여 혁명세력을 탄압하려는 정부의 부당한 권력의 속성에 모순을 느꼈을 것이고, 그래서 상부구조인 정부기구는 하부구조인 경제구조에 종속된다는 이론을 전개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리고 마르크스가 예상한 자본주의 타도 이후의 역사 단계, 즉 부르주아 계급이 사라지고 당연히 프로레타리아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시대와 공산주의 사회는 그에게는 매우 추상적이고 불투명한 것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막연하기에 이상적인 모습을 띨 뿐이다. 그에게는 그 당시의 제어되지 않은 초기자본주의 비판이 주목적이었다. 나중에 공산주의 사회를 표방한, 전횡과 독재와 폭력과 살인이 판을 치던, 레닌과 스탈린의 소련 사회는 마르크스가 염두에 두고 소망한 그런 사회가 전혀 아니었다. 또한 전(全)세계적으로 일어난 저 소련을 둘러싼 ‘정통이론’과 ‘수정주의’ 사이에 일어난 치열한 논란과 소모적인 다툼도 마르크스가 의도하거나 예상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마르크스의 책임은 아니다. 마르크스에게 도의적인 책임조차 없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6. 여하튼 유시민의 이 책은 많이 팔렸고 베스트셀러가 가질 수 있는 장점을 두루 갖추고 있지만 (역사학이 아닌 법철학을 전공한) 나의 눈에 세세한 부분에 있어서는 문제점이 눈에 띤다. 그가 역사학자도 철학자도 아니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19세기 후반에 활약했던 랑케와 마르크스에 대한 그의 평가는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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