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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사티(Erik, Satie, 1866.5.17 ~ 1925.7.1)
신고전주의의 선구자로서 활약한 프랑스 근대의 독특한 작곡가.
해운업자의 아들로 옹프루르에서 태어나, 오르가니스트 비노로부터 피아노와 그레고리오 성가와 신비 사상에 관한 기초를 공부했다. 색다른 성격의 숙부로부터 성격적인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1878년에 파리 음악원에 입학했으나 아카데믹한 교풍을 싫어하여 중퇴한 다음 안데르센 동화를 탐독하였다. 1888년에 피아노곡 《3개의 짐노페디》를 발표하였고, 1890년에는 조표(調記號)와 마딧줄(小節線)을 폐지한 《3개의 그노시엔느》를 작곡했다. 이것은 드뷔시나 라벨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몽마르트르의 카페에서 피아노를 쳐서 생계를 꾸려 나가면서 장미 십자단이라는 종교단체에 들어가 《별의 아들》(1891)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미사》(1895)를 작곡했다. 1898년에 파리 교외의 빈민가 아르퀴유-카샹으로 거주를 옮겨 동회 일이며 아동 복지를 위해 힘쓰는 한편, 밤에는 몽마르트르의 흥행장에서 일하면서 수많은 샹송을 작곡했다.
1903년에 드뷔시로부터 ‘좀 더 형식을 생각해야 한다’는 충고를 받고, 피아노 연탄용의 《배(梨) 모양을 한 3개의 피아노곡》을 써서 이 충고에 보답했다. 1905년, 30살 때에 뱅상 댕디가 주재하는 스콜라 카토룸에 학생으로 입학하여 대위법과 이론을 연구하고 1908년에 수석으로 졸업했다. 1910년에 독립음악협회에서 ‘사티의 밤’을 개최했는데, 이로부터 그의 명성이 급속히 높아갔고, 사티주의자도 증가해갔다. 《관료적인 소나티네》, 《바싹 마른 태아》, 《엉성한 진짜 전주곡(개를 위한)》이라는 기묘한 제명들이지만 순수하고 아름다운 피아노곡을 발표하였다. 또한 권총이나 사이렌, 비행기의 폭음까지 도입한 발레 음악 《파라드》(1917) 등으로 충격적인 활동을 계속했다. 《파라드》는 장 콕토가 대본을 쓰고, 피카소가 무대 장치와 의상을 맡고, 마시느의 안무에 의해서 디아길레프 무용단이 상연했는데, ‘큐비즘의 발레’라는 소문이 자자 했었다. 만년에는 교향적 극작품 《소크라테스》 등으로 간소한 작풍에 이르러서 후의 신고전주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 후 영화음악이나 발레에도 손을 댔으나 1924년에 성 조세프 병원에서 타계했다.
사티의 작품은 드뷔시, 라벨, 프랑스 6인조, 아르쾨유 악파의 젊은 작곡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음악성은 간결하고 순수하여 이내 친숙해 진다. 정신적으로는 반골적이지만, 낭만적인 정감이나 철학적인 정신성을 철저히 배격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근년에 젊은이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오재원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짐노페디’는 고대 그리스 스파르타에서 행했던 아폴론를 찬양하는 연중 축제이다. 이 축제에서는 전라의 젊은 남자들이 합창과 군무로써 춤을 추며 신을 찬양하였는데, 이 의식 무도를 ‘Gymnopaedic’이라 하였다. 엄격함과 혹독한 훈련으로 잘 알려진 스파르타의 교육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에릭 사티가 이를 인용하여 ‘짐노페디’라고 이름을 붙였다. 사티는 22세에 이 이색적인 소재를 프로벨의 소설 『사란보』의 일부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1888년에 3곡의 피아노 모음곡으로 작곡하게 된다.
20세기 음악계의 이단아였던 에릭 사티는 당시 평론가들에겐 인정받지도 못했고 기존 음악계가 쌓아놓은 기법과 미학을 무시하고 자신의 고집대로 평생을 빈곤 속에서 살다 갔다. 파리음악원을 졸업한 후 1884년부터 피아노곡을 중심으로 작곡계에 뛰어든 그는 〈오지브〉〈세 개의 사라방드〉〈세 개의 그노시엔느〉 등을 통해 감정의 표출을 절제한 채 단순하면서도 기발한 단일 선율의 투명한 음악들을 선보였다. 그의 엉뚱한 아이디어와 신랄한 유머, 그리고 신비주의와 순수성이 그 특유의 음악세계를 만들어냈다. 1899년 몽마르트로 이사 간 후 그는 기괴한 옷을 입고 클럽에서 피아노를 치며 생계를 이어갔다. 드뷔시와 친교를 가지기도 한 이 시기 항상 주변에서 아마추어로 취급받는 것에 불만을 느낀 사티는 스콜라 칸토룸에 입학하여 알베르트 루셀에게 다시 음악을 배웠으나 그의 음악은 과대망상증, 기벽증으로 치부되었다. 1917년 장 콕토의 대본과 피카소의 무대장치에 의한 발레 <파라드>의 음악을 맡으면서 그의 가치는 반전되었다. 시대를 초월한 대담한 작곡법과 혁신적인 그의 사상은 미래주의 출현을 예고해 주었고, 초현실주의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까지 외로웠다. 화가 르누아르와 드가의 모델이자 화가로도 활동했던 수잔 발라동과의 일생 동안 단 한 번의 사랑으로 짧지만 격렬했던 석 달간의 사랑 후 격렬한 말다툼 끝에 수잔은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그 뒤로 둘은 영원히 헤어졌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방에 들어간 친구들은 문 위에 걸린 두 장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 하나는 사티가 그린 수잔의 초상화이고 곁에 걸린 다른 하나는 수잔이 그린 사티의 초상화였다. 사티는 그의 일기에서 “나는 이 낮고 낮은 땅에, 왜 왔을까. 즐겁기 위해서? 형벌로? 무언가 알 수 없는 임무를 갖고? 휴식 삼아? 아니면 그냥 우연히? 나는 태어나 얼마 안 된 때부터 내가 작곡한 음들을 흥얼거리고 노래 불렀지. 그래, 내 모든 불행은 거기서 시작된 거야…”라고 그의 인생을 되씹었다.
<세 개의 짐노페디>는 단음으로 연주되는 애조 띤 선율과 그것을 지배하는 섬세한 불협화음만으로 구성되어 있어 사티 만의 독특한 개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 곡을 연주할 때 일정 속도 이상으로 느려지면 곡의 가락이 끊어지게 되기 때문에 리듬을 충분히 살릴 수 있는 속도를 잘 조절해야 한다. 악보의 속도지시는 사티 자신이 붙인 것이 아니고 출판사에서 붙인 참고 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곡의 느낌은 마치 청정지역의 맑은 샘물처럼 세속의 때가 묻지 않고 투명하기만 하다. 화려한 기교와 장엄한 분위기를 음악의 미덕으로 삼던 19세기 낭만주의 음악에 반기를 든 그의 음악은 장 콕토가 그린 흑백의 스케치처럼 솔직하고 담백할 뿐이다.
△제1곡 느리고 비통하게(Lent et Douloureux).
△제2곡 느리고 슬프게(Lent et Triste).
△제3곡 느리고 장중하게(Lent et Grave).
이 작품을 형성하는 짧은 프레이즈의 길이가 통일되지 않았고 비기능적인 화성이 이유 없이 불안감을 자아내고 있다. 장단조 리듬에 의한 반주에 실려서 조용히 흐르는 이국적이면서 단조로운 선율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 변화가 없다. 드뷔시는 〈세 개의 짐노페디〉의 제1곡과 제3곡을 서로의 순서를 바꾸어 관현악으로 편곡했는데 당시 본래의 성격을 왜곡했다 해서 비난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드뷔시는 친구 사티에게 경의를 표한 것이었고 사티에게도 도움이 되었다. 현재도 관현악 버전으로 많이 연주되고 있는데 관현악의 하프연주 뿐 아니라 바이올린 선율도 무척이나 감미롭고 아름답다.
오재원 <한양대구리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그의 작품
3개의 짐노페디(1888)
3개의 그노시엔느(1890)
별의 아들(1891)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미사(1895)
배(梨) 모양을 한 3개의 피아노곡(1903)
파라드(1917)
관료적인 소나티네
바싹 마른 태아
엉성한 진짜 전주곡(개를 위한)
소크라테스
에릭 사티
수잔 바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