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남군성을 차지한 주유는 조운에게 성을 빼앗기고, 유비는 공자 유기를 내세워 형주와 양양을 차지한다. 이어 백미 마량으로부터 네 군을 취하여 전략 요충지로 삼으라는 계책을 듣고 유비는 곧 군사를 내어 조운으로 하여금 계양을 차지하게 한다. 한편 동오군의 서성·정봉 두 장수는 가까스로 주유를 구해 영채에 이르러 주유의 환부를 살피니 상처가 꽤 깊은 듯했다. 서성·정봉 두 장수가 주유를 떠메어 장막 안에 눕히고 급히 군의를 불러 주유의 상처를 치료하게 했다. 화살은 의외로 깊이 박혀 쇠집게로 화살촉을 빼내고 상처에다 금창약(창이나 칼에 찔린 쇠독에 바르는 약)을 발랐으나 고통이 심해 주유는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지경이었다. 여러 장수들이 수심에 잠겨 있는데 군의가 더욱 놀라운 말을 했다. "이 화살촉은 원래 독을 발라 둔 것이기 때문에 상처가 빨리 아물지 않습니다. 특히 격동하시거나 크게 충격을 받으면 상처가 다시 터져 덧날 것이니 유념하십시오." 정보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주유의 목숨만은 구해야 할 판이라 전군에게 영을 내렸다. "적이 싸움을 걸어 와도 굳게 지키기만 하고 나아가 싸우지 말라!" 그러나 주유가 화살에 맞은 걸 알고 있는 조인군 쪽에서 주유의 상처가 낫기를 기다려 줄 리 만무했다. 사흘이 지나지 않아 우금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 싸움을 돋우었다. 아무리 싸움을 걸어도 주유 쪽에서 응해 오지 않자 우금은 갖은 욕설을 퍼부어대며 주유군을 격동시키려 했다. 온종일 욕설을 퍼붓다가 날이 저물 무렵에야 군사를 물린 우금은 다음 날, 날이 밝기가 무섭게 다시 군사를 이끌어 왔다. 우금은 어제보다 더 심한 욕설을 퍼부었으나 정보는 주유의 마음을 자극할까 봐 알리지 않았다. 그 다음 날에도 우금은 영채 바로 밖에까지 다가와 참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부어댔다. "주유는 죽었느냐, 살았느냐? 아무 대답이 없으니 이 진중에 군사들은 없고 쥐새끼들만 있구나." 몇날째 우금의 거친 욕설을 듣고 있던 정보는 참다못해 여러 장수들과 의논해 일단 동오로 돌아가 주유의 상처가 다 나은 후에 다시 진병하기로 했다. 한편 주유는 상처의 고통이 여전했음에도 정신은 말짱했다. 조인의 군사가 영채 앞에 와서 싸움을 돋우며 욕설을 퍼붓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아무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자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조인이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와 일제히 북을 울리며 함성을 지르게 하니 그 소리가 들판을 메웠다. 정보는 여전히 나가 싸우려 하지 않고 있는데 문득 주유가 장수들을 장막 안으로 불러들여 물었다. "저 북 소리와 요란한 함성은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 그 뜻밖의 물음에 여러 장수들이 찔끔했으나 입을 모아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군중에서 군사들을 조련시키는 소리입니다." 그 말에 주유가 버럭 역정을 냈다. "그대들은 왜 나를 속이려 드느냐? 나는 이미 조인의 군사가 매일 우리 영채 앞에 이르러 욕지거리를 퍼붓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정덕모(정보의 자)는 나를 대신하여 병권을 쥐고 있으면서도 어찌 조인군의 방자한 짓거리를 잠자코 보고만 있는가?" 주유는 노기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정보마저 불러들여 꾸짖었다. 정보는 그제야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도독의 심사를 격하게 하면 상처가 덧난다고 군의가 말했소이다. 그래서 조인군이 싸움을 걸어 와도 일체 알리지 않았던 것이외다." "그들과 싸우지 않겠다면 앞으로 어찌하실 작정이오?" 주유가 언성을 높였다. "잠시 군사를 거두어 강동으로 돌아가 도독의 상처가 낫기를 기다려 다시 싸울까 합니다." 정보가 그렇게 말하자 주유는 침상에서 분연히 몸을 일으키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나라의 봉록을 먹고 사는 대장부가 일단 싸움터에 나왔으면 죽어 그 시체를 말가죽에 싸서 돌아갈 뿐이오. 어찌 나 한 사람을 위해 나라의 큰 일을 뒤로 미룰 수 있다는 말이오?" 그 외침과 함께 주유는 갑옷을 입더니 성큼 말 위에 올랐다. 그 모양을 본 여러 장수와 군사들은 한결같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윽고 주유가 기병 수백을 거느리고 나아가 보니, 조인이 이미 군사를 진 앞까지 이끌고 와 있었다. 조인은 문기 아래 말들을 늘여 세운 다음 채찍을 들어 큰 소리로 꾸짖고 있었다. "이 젖비린내나는 주유야. 네놈은 필시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이제 두 번 다시 우리 군사를 대적하지 못하리라!" 조인은 동오군을 꾀어 내기 위해 계속해서 온갖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그러자 기병들 속에 섞여 조인을 보고 있던 주유가 불쑥 나서며 소리쳤다. "조인, 이 어리석은 놈아. 네놈 눈에는 이 주랑이 여기 계신 것이 보이지도 않느냐! 동자 없는 눈망울이나마 똑똑히 보아라." 조인과 군사들이 그 소리에 놀라 보니 크게 다쳐 병상에 누워 있을 것으로 알았던 주유가 호기롭게 말 위에 버티고 있지 않은가. "아니, 주유는 다친 데도 없이 멀쩡하구나." 조인군의 군사들이 놀란 눈으로 주유를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조인도 내심 크게 놀랐으나 다음 순간 여러 장수들을 돌아보며 가만히 영을 내렸다. "온갖 욕설을 퍼부어 저놈이 화가 치밀도록 하라!" 조인의 군사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입에 담지도 못할 험악한 욕설을 마구 퍼부었다. 그러자 주유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노기가 충천하여 휘하 장수 반장을 불러 영을 내렸다. "그대는 급히 나가 저 버르장머리 없는 놈의 목을 댕강 잘라 오라!" 반장이 주유의 명이 떨어지자 곧장 말을 달려나갔다. 그러나 조인을 맞기도 전에 주유가 갑자기 외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입에서 시뻘건 피를 쏟으며 말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이를 본 조인이 군사들을 향해 크게 소리치며 영을 내렸다. "주유가 피를 토하고 거꾸러졌다. 모든 군사는 지체없이 나아가 주유를 사로잡으라!" 이에 주유의 장수들이 황급히 달려가 밀려드는 조인군을 막는 한편 주유를 떠메어 진중으로 돌아갔다. 주유를 장막 안 침상에 눕힌 장수들은 모두 근심스런 얼굴이었다. 정보가 주유의 장막 안으로 들어와 얼굴을 살펴보며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도독께선 정신이 드시오?" 그러자 뜻밖에도 주유가 슬며시 눈을 뜨더니 가만히 말했다. "정덕모께서는 걱정하지 마시오. 이것이 다 내가 꾸민 계책이오." 그 말에 정보가 놀라는 한편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계교라니 무슨 계교입니까?" "내 몸의 통증이 원래부터 그렇게 심한 것은 아니었소. 내가 피를 토하고 쓰러진 것은 조인에게 내 병이 위중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짐짓 꾸민 것이오. 그러니 장군께선 진문마다 조기를 세우고 군사 몇을 남군성으로 보내 내가 죽었다고 말하고 거짓으로 항복하게 하시오. 그러면 조인은 반드시 군사를 이끌어 우리 영채를 급습해 올 것이오. 이를 대비하여 사방에 군사를 매복해 두었다가 그들을 에워싸고 들이쳐서 단번에 조인을 사로잡고야 말겠소." 정보도 주유가 편 계책을 다 듣지 않아도 알 만했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정보가 감탄해 마지않았다. "과연 놀라운 계책입니다." 정보는 장막 밖으로 나오기가 무섭게 장하에 있는 모든 장수들에게 영을 내렸다. "도독께서 상처가 터져 마침내 돌아가셨다. 진문에 조기를 달고 모든 군사들은 상복을 입고 곡을 하도록 하라." 정보가 그렇게 영을 내리자 놀란 장수들은 곧 군사들에게 정보가 이른대로 영을 내리는 한편 자신들도 큰 소리로 곡을 했다. 그렇게 되니 온 진중이 곡소리로 떠나갈 듯했다. 한편 남군성으로 돌아온 조인은 우선 여러 장수들을 모아 놓고 득의에 찬 어조로 말했다. "주유가 분기를 누르지 못하고 화를 내다가 상처가 덧나는 바람에 피를 쏟고 쓰러졌으니 필시 머지않아 명이 끊어질 것이다." 조인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문득 수하 한 사람이 들어와 알렸다. "주유의 군사 10여 명이 투항해 왔습니다. 그 중 두 사람은 그 동안 적군에게 사로잡혔던 우리 군사라고 합니다." 조인은 그렇지 않아도 주유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던 터라 즉시 그들을 불러들이도록 했다. 그들이 들어오자 조인은 우선 주유의 영채 소식부터 물었다. "네놈들의 진중에 별다른 일은 없는가?" 투항해 온 군사 중에 하나가 그 물음에 대답했다. "오늘 밤 대도독 주유가 금창이 터져 장막 안으로 옮겨 치료를 했으나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지금 모든 장수들은 상복을 입고 곡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항상 정보에게 심한 구박을 받아 한을 품고 있던 중, 이틈을 타 장군께 투항하고 특별히 이 급보를 알려 드리러 왔습니다." 그 말에 조인은 그들을 조금도 의심치 않고 크게 기뻐했다. 주유의 일은 자신이 직접 보았는데다 머지않아 주유가 죽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던 터였다. 조인은 여러 장수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하늘이 내리신 기회요. 오늘 밤 주유의 영채를 급습하도록 하겠소. 주유의 시체라도 그 목을 잘라 허도로 보내면 승상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소?" 여러 장수들이 그 말에 반대할 리 없었다. 적벽에서 주유에게 크게 패한 조조에게 주유의 목을 바친다면 그보다 더한 공훈이 어디 있겠는가. 거기다가 주유가 쓰러진 걸 본 장수들이라 주유의 죽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에 진교가 조인을 재촉했다. "이런 계책은 지체하지 않고 빨리 시행해야 합니다. 머뭇거리다간 자칫 일을 그르칠 수가 있습니다." 조인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우금을 선봉으로, 조순을 후군으로 삼는 한편 스스로는 중군이 되어 진병키로 했다. 조인은 진교에게만 군사 약간을 주어 성을 지키게 했을 뿐 대부분의 군사를 이끌고 그날 밤 초경이 되자 서둘러 성을 빠져 나갔다. 조인은 지름길로 군사들을 재촉해 주유의 대채를 덮쳤다. 그런데 주유의 영채에 이르자 깃발과 창만 무수히 세워져 있을 뿐 군사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조인은 많은 깃발과 창을 세워 두고 군사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음을 알고 황망히 소리쳤다. "적의 계략이다. 물러나라!" 조인이 허겁지겁 말머리를 돌릴 때였다. 사방에서 요란하게 포성이 일더니 홀연 동쪽에서 한당, 장흠이, 서쪽에서는 주태, 반장이 군사를 이끌고 내달아왔다. 또한 남쪽에서는 서성과 정봉, 북쪽의 책문에서는 진무·여몽 등 동오의 손꼽히는 장수들이 일시에 몰려와 조인군을 덮쳐 들었다. 비어 있는 진지 속을 살피던 조인군은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자기 편 군사들끼리 부딪고 짓밟혔다. 선봉과 후군, 중군을 가릴 것 없이 혼란 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동안 동오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곧바로 조인군을 유린했다. 조인군은 크게 패해 삼군의 군마가 제각각 사면 팔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조인은 겨우 10여 기를 이끌고 동오군의 포위를 뚫고 나오다 조홍을 만났으나, 거느린 군사를 모두 합쳐도 동오군을 맞서 싸우기에는 역부족인지라 하는 수 없이 패군을 이끌고 달아나기에 바빴다. 쫓겨 달아나던 조인의 군사는 오경 무렵이 되어 겨우 남군성 부근에 이르렀다. 그제서야 한숨을 돌리며 남군성을 향해 말을 모는데 사방에 북 소리가 요란히 울리더니 능통이 한 떼의 군사를 거느리고 길을 막았다. 능통을 피하기 위해 말머리를 돌릴 수도 없었다. 뒤에서는 주유의 대군이 뒤쫓고 있는 터였다. 이에 조인은 죽기로 작정하고 능통을 맞아 싸우며 간신히 옆길을 앗아 달아났다. 그렇게 얼마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는데 이번에는 감녕이 길을 막고 있었다. 또 한바탕 남은 힘을 다해 싸워 간신히 길을 열었으나 그때쯤 조인의 군사는 이미 꺾일 대로 꺾여 있었다. 조인은 다시 남군으로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양양의 길목으로 달아났다. 동오군은 조인을 한동안 뒤쫓다 그가 남군으로 들지 않고 다른 길로 달아나자 더 이상 뒤쫓지 않았다. 한편 조인군을 크게 깨뜨린 주유는 전군을 수습하여 남군성으로 달려가 성 앞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성벽 위에는 낯선 정기가 가득 꽂혀 있고 망루에는 범 같은 장수 하나가 떡 버티고 서 있다가 주유를 향해 소리쳤다. "도독께서는 이 몸을 너무 허물하지 마시오. 우리 군사의 영을 받들어 이 성을 거둔 지 오래이외다. 나는 상산의 조자룡이오." 주유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자 경악해 마지않았다. '내가 공명에게 속았구나!' 주유는 속이 뒤집히는 듯했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군사들에게 공격 영부터 내렸다. "즉각 이 성을 쳐 빼앗으라!" 그러나 조운이 주유가 성을 공격하도록 가만히 놓아 둘 리 없었다. 주유의 공격 명령이 떨어지자 성 위에서는 화살과 쇠뇌가 빗발치듯 쏟아졌다. 그렇게 되니 동오군은 성에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군사를 뒤로 물렸다. 군사를 거둔 주유는 장수들과 의논한 끝에 형주·양양의 두 성을 빼앗은 후 다시 남군을 도모하기로 하고 감녕과 능통에게 명을 내렸다. "감흥패는 군마 수천을 거느리고 가 형주를, 능공속은 군마를 거느려 양양을 빼앗도록 하라. 남군성은 그 두 성을 취한 다음 도모하리라." 주유의 영을 받든 감녕과 능통이 군사를 거느려 떠나려는데 정탐을 보냈던 군사가 급히 달려와 알렸다. "제갈량이 남군을 취한 뒤, 조인의 병부(총사령관의 징표)를 써 조인의 영이라 하며 형주를 지키던 군마를 불러 내어 남군을 구하라고 명했습니다. 군사들이 성을 빠져 나가자 이 틈에 장비를 보내 형주성을 차지해 버렸습니다." 또다시 공명에게 뒷덜미를 호되게 얻어맞은 꼴이었다. 주유가 크게 당황하고 있는데 또 다른 탐마가 달려와 알렸다. "양양을 지키던 하후돈에게 제갈량이 사람을 시켜 조인의 병부를 보여 주며 남군이 위급하니 구원해 달라고 한 후 하후돈이 군사를 이끌어 떠나자 관운장을 보내 양양을 빼앗게 했다 합니다." 실로 기막힌 보고였다. 유비는 조인의 병부 하나로 화살 하나 쏘지 않고 형주와 양양 두 성을 순식간에 차지한 것이었다. 주유는 머리 끝까지 치받는 화를 억제하지 못하고 고함을 쳤다. "제갈량 그놈이 어떻게 그 병부를 구했다는 말이냐?" 그 호통에 정보가 고개를 떨어뜨리며 대답했다. "조자룡이 남군성을 거두었을 때 군사 진교가 그들에게 사로잡혔으니 자연 진교가 병부를 제갈량에게 바쳤을 것입니다." 주유가 그 말을 듣자 더욱 울화가 치솟아 호통을 치는 순간 그만 상처가 터져 신음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적벽의 싸움에서 조조를 크게 이겼다 하나 주유는 어느 한 군데도 거둔 것이 없이 헛되이 힘만 쏟은 꼴이 되고 말았다. 거기다가 유비가 힘들이지 않고 남군성과 형주·양양까지 가로챘으니 주유가 그 통분을 어찌 삭일 수 있었으랴. 마침내 분기를 달래지 못해 금창이 다시 터진 것이었다. 주유는 까무러친 지 반나절이 되어서야 깨어났다. 여러 장수들이 주유를 좋은 말로 달래며 위로했으나 주유는 이를 갈며 말했다. "내가 한낱 촌놈인 제갈량을 죽이지 못한다면 어찌 이 원한을 풀겠소. 정덕모는 나를 도와 남군을 쳐서 반드시 빼앗아 기필코 동오 땅이 되게 해 주시오." 주유가 남군성을 빼앗기 위해 의논을 하고 있는데 때마침 노숙이 들어왔다. 노숙을 보자 주유가 분연히 말했다. "나는 지금 군사를 일으켜 유현덕·제갈량과 결전을 벌이려 하오. 자경은 힘써 나를 도와 주시오." 그러자 노숙이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 될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는 조조와 서로 맞서 싸우고 있는 처지로 아직 이기고 짐을 가리지도 않았습니다. 거기다가 주공께서 지금 합비를 공격하고 있으나 아직 빼앗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유현덕과 서로 싸우는 동안 그 틈을 노려 조조가 동오로 밀어닥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더구나 유현덕은 일찍이 조조와 교분이 있는 사이입니다. 우리와 싸우다 형세가 다급해지면 조조에게 성을 내주고 그와 손을 잡고 함께 동오를 도모할 것입니다." 듣고 보니 노숙의 말도 그냥 들어넘길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주유는 당장 가슴 속의 통분을 삭이지 못해 탄식하듯 말했다. "우리가 적벽을 깨뜨리기 위해 그간 갖은 계책을 짜내며 얼마나 많은 군마를 희생시켰소? 그 많은 재화와 양곡을 소비했으면서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 꼴이 되고 말았소. 하지만 현덕은 가만히 앉아 여러 곳을 제 손아귀에 넣었으니 어찌 울분이 맺히지 않겠소? 그런데도 이것을 가만히 두고만 보라는 말씀이시오?" "도독께서는 참고 계십시오. 제가 현덕을 찾아가 이치를 따져 그를 타일러 보겠습니다. 그래도 듣지 않는다면 그때 군사를 일으켜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노숙이 주유에게 좋은 말로 권하자 여러 장수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노숙의 말을 도왔다. "자경의 말씀이 과연 옳은 듯합니다." 여러 장수들이 한결같이 의견을 모으자 주유는 하는 수 없이 노숙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노숙은 곧 종자 하나를 데리고 남군으로 달려가 성문을 열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성문을 열라. 동오의 노숙이다." 그러자 조운이 성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어쩐 일로 문을 열라 하시오?" "유 예주께 드릴 말씀이 있어 왔소이다." 그런데 남군성에는 유비가 없었다. "우리 주공께서는 군사와 함께 형주로 가시었소. 그곳으로 가보시오." 노숙은 별수없이 형주로 말머리를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형주성에 이르러 보니 성벽 위에는 정기가 질서 정연히 열을 지어 늘어섰고 군사들이 곳곳을 지켜 서 있는데 그 위세가 당당했다. '공명이 과연 비상한 인물이로구나.' 일찍이 강하에서 본 유비의 군세가 아니어서 노숙이 내심 감탄하며 성 위를 향해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공명은 노숙이 왔다는 말을 전해 듣자 직접 달려나가 성문을 활짝 열어 반가이 맞아들였다. 관아로 노숙을 인도하여 서로 예를 갖춘후 주인과 손님의 자리에 앉자 노숙이 대뜸 따져 물었다. "나는 우리 주공과 도독 공근의 뜻을 유 황숙께 전하러 왔소이다. 지난번 조조가 백만 대군을 이끌어 남정한 것은 실은 유 황숙 어른을 치기 위함이었소. 그런데 다행히도 우리 동오가 군사를 내어 조조를 깨뜨려 황숙을 구해 드렸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형주의 아홉군은 우리 동오에 귀속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숙께서 속임수로 형주와 양양을 취하셨으니 이는 대장부의 도리가 아니라 할 것입니다. 우리 동오는 그 동안 엄청난 전량을 썼으며 많은 군마와 양곡을 허비했는데도 모든 이익을 황숙께서 차지하셨으니, 이를 두고 어찌 이치에 맞다 하겠습니까?" 노숙이 사리를 따져 공명에게 말하니 그의 말이 어긋난 데가 없었다. 그러나 공명은 조금도 거리낌이 없이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경은 고명한 선비로서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옛말에 이르기를 세상의 모든 물건은 반드시 주인에게 돌아간다 하였습니다. 형주와 양양 아홉 군은 원래 유경승(유표)이 다스리던 땅이었지 동오의 땅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주공께선 바로 유경승의 아우가 되십니다. 유경승은 이미 죽었다고 하나 그 아들이 지금 살아 있습니다. 숙부가 조카를 도와 형주를 되찾았는데 어찌 이를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십니까?" 노숙으로선 생각지도 못한 공명의 대답이었다. 가슴이 철렁한 가운데 잠깐 할 말을 잃고 있던 노숙이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공명의 말꼬리를 붙잡고 따졌다. "공자 유기가 선대의 기업을 이어받기 위해 이 땅을 차지하셨다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공자는 강하를 지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찌 선생의 말씀에 이치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자경께서 직접 공자를 뵙겠소?" 공명이 노숙에게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되묻더니 좌우에게 명했다. "공자를 모셔 오라." 노숙이 적이 놀라고 있는데 병풍 뒤에서 유기가 종자의 부축을 받으며 나타났다. 유기가 노숙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몸이 불편하여 진작 나와 인사를 드리지 못했으니 공께서는 너무 나무라지 마시오." 노숙이 깜짝 놀라며 유기의 병색이 짙은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원래 주인인 유기가 그곳에서 선대의 업을 이어받는다는 데에는 노숙으로서도 할 말이 없었다.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노숙이 거무죽죽하게 혈색을 잃어버린 유기를 보며 공명에게 물었다. "만약 공자께서 계시지 않을 때는 어찌하시겠습니까?" "단 하루가 되더라도 공자께서 계시는 한 우리는 이곳을 지킬 것이오. 그러나 만일 공자가 계시지 않는다면 그건 그때 가서 이 일을 따로 의논해야겠지요." 공명이 조금도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공자 유기가 계시지 않는다면 성은 다시 우리 동오에게로 돌려 주셔야 합니다." 노숙이 다시 공명의 말꼬리를 붙들어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공명은 쾌히 응락했다. "그건 자경의 말씀이 옳소이다." 노숙에게 공자 유기를 내세워 명분을 세운 공명은 그 말에는 더 이상 다른 말을 끌어대지 않았다. 노숙에게도 그가 돌아갔을 때 주유를 달랠수 있는 명분을 세워 주어야겠다는 배려에서였다. 공명은 그제야 잔치를 벌여 노숙을 대접했다. 잔치가 끝나자 노숙은 유비와 공명에게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서둘러 주유가 있는 대채로 밤낮을 달려 당도했다. 노숙은 공명과 나눈 이야기를 소상히 들려 주었다. 주유로서는 노숙이 들려 준 말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노숙의 말을 듣고 나서 불쑥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유기가 아직 젊은 청춘인데 곧 죽을 리가 있겠소? 그렇다면 어느 세월에 형주를 돌려받을 수 있다는 말이오?" 주유의 마음을 알고 있는 노숙이 달랬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이 노숙이 기필코 형주, 양양을 동오의 것으로 만들고 말겠습니다." 그 말에 주유는 기대에 찬 얼굴로 다시 물었다. "자경은 무슨 계책이라도 있다는 말씀이오?" "제가 보건대 유기는 주색이 지나쳐 병이 골수에 미친 듯했습니다. 얼굴은 파리하고 마른데다 피까지 토하며 기침을 할 정도였습니다. 아마 반 년도 넘기지 못해 그 명이 다할 듯하니 그때 형주·양양을 취한다면 현덕도 더 이상 딴말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노숙이 목소리를 가다듬어 좋은 말로 얘기했으나 주유는 여전히 분기를 억누르지 못해 얼굴을 붉히고 있는데, 군사 하나가 손권이 보낸 사자가 왔음을 알렸다. 주유가 그를 재촉해 들게 하자 사자가 예를 갖추며 고했다. "주공께서는 그 동안 합비성을 에워싸고 여러 번 공격을 했으나 아직도 성을 깨뜨리지 못하셨습니다. 이에 도독께서는 군사를 이끌어 주공의 싸움을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주공의 명이니 주유는 하는 수 없이 모든 군사를 거느려 그날로 합비로 향했다. 그러나 상처가 덧나 주유는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주유는 시상에 이르러 치료를 받기로 하고 정보만 합비로 보내어 손권을 돕게 했다. 적벽 대승 이래 거둔 것 없이 병까지 얻게 된 주유로서는 더없이 참담한 회군이었다. 한편 유비는 형주·양양, 그리고 남군의 세 성을 한꺼번에 얻게 되자 그 기쁨은 실로 컸다. 적벽에서의 싸움이 있기 전만 해도 의지할 곳 없이 떠돌다 겨우 강하의 유기에게 객장으로 머물고 있던 처지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세 성을 잘 지켜 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주유가 기회만 있으면 세 성을 우려빼기 위해 노리고 있으며 허도에 있는 조조 또한 언젠가 이곳을 노려 군사를 이끌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에 유비는 모두를 모아 이땅을 지킬 일을 의논하고 있었다. 이때 한 사람이 대청으로 올라오더니 유비를 향해 절을 올린 후 입을 열었다. "제가 주공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유비가 보니 그는 다름아닌 이적 이었다. 지난날 유표에게 머물고 있을 때 채모가 유비를 죽이려 하자 그 일을 미리 알려 주어 목숨을 구해 준 적이 있는 은인이었다. 유비는 그때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는 터라 이적을 공경하여 윗자리에 앉게 하고 물었다. "제게 어떤 가르침을 주고자 하십니까?" "형주를 오래 지키고자 하시면서 어찌하여 어진 선비를 청하여 물으려 하지 않으십니까?" "어진 선비라니, 그분이 대체 어느 분이십니까?" 유비가 반색을 하며 이적에게 물었다. "이 일대에서는 마씨 형제가 재명이 높습니다. 다섯 형제중 가장 나이 어린 이가 마속으로 자가 유상이며, 가장 어진 사람은 마량으로 자를 계상이라 하는데, 눈썹 사이에 흰 털이 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마씨 오 형제 중 흰 눈썹(백미 :여럿 가운데 가장 빼어난 것)이 가장 뛰어나다'고 말하고들 있습니다. 주공께서는 어찌 마량 같은 이를 불러 앞일을 세워 보지 않으십니까?" 유비가 이적의 권유에 기뻐하며 곧 사람을 보내 마량을 청했다. 이윽고 마량이 성 안으로 들자 유비가 그를 극진히 대하며 물었다. " 공께서는 부디 이곳을 오래 지키기 위해 어떤 계책을 베풀었으면 좋을지 그 가르침을 주십시오." 마량이 주저없이 유비의 물음에 답했다. "형주·양양은 그 지세가 사방으로부터 공격을 받기 쉬워 오래도록 지키기가 어려운 곳입니다. 먼저 공자 유기를 이곳에 머물게하여 그 병을 조리하고 지난날 유경승의 휘하 사람들에게 이곳을 지키게 하십시오. 한편으로 조정에 표를 올려 유기를 형주자사로 세우시고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민심은 모두 유 황숙의 너그러우심과 공명정대한 처사에 감격하여 유 황숙을 기꺼이 따를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남 으로는 무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