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대차산(六大茶山)
보이부 영내에는 명나라 때부터 차를 대량으로 재배하던 여섯 곳이 있었는데 이를 육대차산이라고 합니다. 1729년 운귀(雲貴) 총독 ‘악이태’가 이곳에는 나는 차를 조정에 공납하기 시작합니다.
또 1735년부터 다법이 시행되면서 보이부에서 생산되는 차에 세금을 부과하고 차인(茶引)이라는 서류를 발부하여 유통하게 합니다. 그래서 보이차는 ‘보이부’에 세금을 납부하고 유통된 차(茶)’, 또 북경에 공납 된 것은 ‘보이부에서 바쳐진 차’라는 의미로 보이차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운남에서 생산되던 대부분의 차는 티베트와 사천의 장족들에게 공급되었습니다. 1729년 부이부 설치 후 여린 잎으로 만든 소량의 보이차가 북경에 공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보이차가 홍콩에 판매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 경부터입니다.
운남에서 만들어지던 차의 제조법은 항상 같았지만 보이부가 생기기 전에는 ‘운남의 차’로 불렸다가 보이부가 생긴 후 ‘보이차’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보이차가 티베트뿐만 아니라 현재 사천성 등지에도 팔리는 이유는 사천의 일부가 과거 티베트 영역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의 차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차가 전매품이라면 하동 군수가 세금을 징수한 것은 하동 차이고, 보성 군수가 관할하는 곳의 차는 보성차가 됩니다. 둘 다 부르는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 녹차이듯이 당시 보이차도 녹차였습니다.
북경에 공납되어 서태후가 마셨다는 기록과 홍루몽에 등장하는 보이차, 그리고 조선의 사신들이 북경에서 구해 정조의 부마 홍현주가 눈을 녹여 마신 보이차는 모두 여린 잎으로 만든 녹차였지만 부르는 이름이 ‘보이차’였습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발효 개념이 있는 보이차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종종 인용되는 ‘본초강목습유’의 보이차도 녹차로서의 효능입니다.
운남에서 생산되던 대부분의 차는 티베트와 사천의 장족들에게 공급되었습니다. 1729년 부이부 설치 후 여린 잎으로 만든 소량의 보이차가 북경에 공납되기 시작 하였습니다. 그러나 보이차가 홍콩에 판매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 경부터입니다.
운남에서 만들어지던 차의 제조법은 항상 같았지만 보이부가 생기기 전에는 ‘운남의 차’로 불렸다가 보이부가 생긴 후 ‘보이차’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보이차가 티베트뿐만 아니라 현재 사천성 등지에도 팔리는 이유는 사천의 일부가 과거 티베트의 영역이 속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의 차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차가 전매품이라면 하동 군수가 세금을 징수한 것은 하동차이고, 보성군수가 관할하는 곳의 차는 보성차가 됩니다. 둘 다 부르는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 녹차이듯이 당시 보이차도 녹차였습니다.
북경에 공납되어 서태후가 마셨다는 기록과 홍루몽에 등장하는 보이차, 그리고 조선의 사신들이 북경에서 구해 정조의 부마 홍현주가 눈을 녹여 마신 보이차는 모두 여린 잎으로 만든 녹차였지만 부르는 이름이 ‘보이차’였습니다.
현재 우리가 알고있는 발효 개념이 있는 보이차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종종 인용되는 ‘본초강목습유’의 보이차도 녹차로써의 효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