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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윈회 습격
<무엇보다 급선무는 심 중위의 거처를 파악해내는 일일 것이네.
헌병에게 체포되어 갔으니까 물론 헌병대에 수감되어 있으리라 믿어지나, 심 중위에게 씌워진 지목이 죄목인 데다가, 그런 죄목을 다루는 특별수사기관이 따로 있는 실정이니 그 거처를 알아내는 일도, 군인이 아닌 민간인의 입장에서는 막연지난한 일이 아닐까 싶네.
그런고로 그 일에 도움을 줄 지인 한 사람을 여기 소개하는 바일세.
그 사람이 누구인고 하니, 서울신문 기자직에 임하고 있는 민기홍일세.
민군은 나의 제자로, 자네보담 서너 해 연장이 아닌가 하네. 의롭고 심지가 굳은 사람으로, 기자직을 택한 것도 다 그런 마음에서 연유된 것이니, 연락을 취하면 최선을 다해서 도움을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네. 이런 일이 아니고서도 소개를 할 만한 사람이니 허심탄회하게 도움을 청하고, 친교를 맺기 바라는 바일세.
내가 민군 앞으로 따로이 편지 쓰도록 하겠네.>
김범우는 서민영 선생의 편지 중에서 이 대목을 다시 읽었다.
민기홍, 민기홍, 언제인가 들어본 이름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서 김범우는 편지 속의 이름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그러면서 그는 엉뚱하게도 국도신문의 이학송을 떠올리고 있었다. 정치부 기자인 이학송에게 연락하면 일이 금방 해결될 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이학송과는 이미 술도 서너 차례 나눈데다가, 그가 정치부에 몸담고 있다는 사실이 김범우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민기홍은 서울신문 어느 부에 소속되어 있을까. 혹시 학예부 같은 데는 아닐까?
김범우가 지레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이학송을 만나면 일이 쉽게 풀릴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일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을 두고 면식이 없는 사람을 굳이 찾아가 일을 부탁한다는 것이 어딘지 번거롭고 부담스럽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러나 서민영 선생의 편지 한 구절이 마음에 걸렸다. 민기홍에게 따로 편지를 쓰겠다고 한 대목이었다. 서민영 선생은 자신에게 편지를 띄우면서, 민기홍이란 사람에게도 동시에 편지를 띄웠을 것이 거의 틀림없을 것으로 여겨졌다. 편지를 받은 민기홍은 연락이 오기를 기다릴 것이고, 자신이 연락을 하지 않을 경우 서민영 선생과 민기홍, 양쪽에 결례를 범하게 될 입장이었다.
어려운 일일수록 도움을 청할 사람이 많은 게 좋다.
이렇게 생각한 김범우는 두 사람 다에게 일을 부탁하기로 마음먹었다.
두 신문이 차지하고 있는 사회적 영향력이 분명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이학송 쪽으로 먼저 마음이 기우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김범우는 서민영 선생의 편지를 주머니에 넣고 하숙집을 나섰다. 전화는 어차피 전차 총점에 나가야 빌려 쓸 수 있었다. 학교가 가까운 안암동 근방에 자리 잡지 않고 돈암동에 하숙을 정한 것은 시내로 연결되는 교통의 편의 때문이었다. 돈암동에서 종로4가로 직결되는 전차는 더없이 편리했다. 그렇다고 돈암동의 하숙비가 안암동보다 비싸지도 않았다. 돈암동 뒷산을 넘어 다니는 학교길은 운동 삼아 걷기에 적당했다.
담배를 사며 얼굴을 익히게 된 상점에서 전화를 빌었다. 교환대로 통하는 발신 손잡이를 돌리면서 김범우는, 그가 자리에 있을까, 하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정치 만개의 시절답게 정치부 기자 이학송은 언제나 분주해서 통화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네에, 교환입니다."
"예, 소공동 국도신문 부탁합니다."
"아, 국제신문사요? 기다리세요."
교환수는 입에 익은 대로 '국제신문사'라고 했다.
그 세련된 음성에서는 전혀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없었지만, 그녀는 내심으로 왜 '제'자를 '도'자로 바꿔 일하기를 복잡하게 만드느냐고 짜증스러워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국제신문은 모종의 '오보 사건'에 얽혀 서너 달 전에 제호를 변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교환원은 그 사정을 모르고 있기가 쉬웠다.
개인이고 집단이고 간에 좌익적 냄새를 풍기거나 색깔을 드러내게 되면 무사할 수가 없었고, 그 선명도를 의심받게 되는 경우에도 결과는 다름이 없었다. 그 강경 일변도는 여순사건을 기점으로 더욱더 전국적인 양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기자요? 지금 없는데, 아닙니다, 저기 옵니다, 기다리세요."
이렇듯 성급한 말바꿈을 들으며 김범우의 마음도 예민하게 명암이 바뀌고 있었다.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이 기잡니다."
울림이 좋은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십니까, 이 선배님. 저 김범웁니다. 한 가지 특청이 있는데요, 뵐 시간이 있을지요."
김범우는 기자의 생리에 맞추어 용건부터 털어놓았다.
"김형이 나한테 특청이라, 이거 영광인데. 특청이라면 전화로는 얘기가 안 될 게고, 점심시간에 만나도록 합시다. 그 동안에 난 처리할 기사가 한 건 있으니까. 어떻소?"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12시까지 길 건너 다방으로 나가겠습니다."
김범우는 맑고 개운한 기분으로 전화를 끊었다.
일부러 '특청'이라고 강조했는데도 이학송은 싫어하거나 귀찮아하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둥글넙적하게 생긴 얼굴이 떠올랐다. 남자답지 않게 흰 얼굴에는 언제나 웃음이 감돌고 있었다. 여성적으로 느껴지는 그런 안온한 얼굴을 가진 사람이 내부에는 사회주의적 열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승만정권이야말로 반민주적이고 반민중적인 양키들의 모조정권이요. 이건 김일성이나 공산당 입장에서가 아니라 역사의 입장에서 그렇소. 정치에서 현실만 강조하는 것처럼 아둔한 인식도 없소. 정치는 현실과의 씨름이면서 역사와의 대결이요. 이승만정권이 그나마 모조성을 면하느냐, 못 면하느냐는 특위 활동의 성패에 달려 있소. 허나, 돌아가고 있는 기류로 봐서는, 글쎄, 가망이 점점 희박해지고 있소."
술을 마시고 이런 말을 하면서도 그의 얼굴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의 말과 얼굴이 걸맞지 않아 김범우는 처음에 묘한 혼란을 겪어야 했다. 진정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사회양심이 있는 척 직업적 가장을 하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식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런 혼란이 심해진 것은 어조 때문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아주 울림이 좋았는데, 그 목소리는 말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이 아무런 어감도 담지 않은 채 나직한 흐름을 일정하게 유지했다. 그러나 유심히 살펴본 결과, 그의 내부감정을 표출해내고 있는 곳이 한 군데 있었다. 그의 큰 눈과 짙은 눈썹이었다. 평소에는 선량하게 보이던 큰 눈에는 열기가 가득했고, 얼굴의 치장물에 지나지 않은 것 같던 짙은 눈썹은 말을 따라 꿈틀꿈틀 움직였다.
"그 사람, 진중하면서도 정열을 가진 사람이오. 타향생활에서 믿을 만한 말벗이 될 수 있을 것이니 사귀어보도록 하시오. 여러 모로 서로가 유익할 테니."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음을 알리자, 법일 스님이 한동안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가 입을 열어 꺼낸 이학송에 대한 소개말이었다.
그가 진중하면서도 정열을 가진 사람이라는 법일 스님의 말은 자신의 혼란을 정리하고, 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해방 직후부터 1년 가깝게 제가 그분 밑에서 심부름을 했죠. 그분은 뜻 맞는 사람들과 순천 주변에서 읽히는 신문을 발간하셨는데, 전 그때 홍콩이나 오키나와 등지에서 발신하는 단파방송을 청취해서 번역해 가지고 그분에게 올리곤 했죠. 그러니까 뭐랄까, 외신부 기자 노릇을 한 셈인가요? 허허허……”
이학송의 헛웃음에서 김범우는 이상하게도 섬뜩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건 얼핏 헛웃음으로 들릴 뿐 비웃음이 분명했다. 시대를 향하여 터뜨리는 야유와 조롱이 섞인 소리 나는 비웃음.
"국제신문에 근무하게 되어 서울로 올라온 것도 다 그 인연 때문이고요."
김범우는 서울로 와서야 법일 스님이 그 사회의식이 강했던 신문의 발행인의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적잖은 놀라움이었다. 그 신문이 순천에서 자취를 감춘 것은 공산당활동 불법화 그 즈음이었다.
그것이 혹시 좌익의 지하신문이 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럼, 지하신문 발행 자금으로 금융조합의 돈까지 끌어댔다는 처남과 법일 스님과의 관계는? 그리고, 법일 스님은 승려의 몸으로 어떻게 그런 적극적인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그분은 서민영 선생과는 다른 차원의 입장에서, 종교는 이미 버린 것이 아니었을까?
자신의 이런 의문에 대해 이학송의 말은 명료한 해답이 되었다.
"그 신문은 재정난으로 발행이 중단됐구요, 그분은 공염불이나 일삼는 상식적인 승려도, 해탈이나 꿈꾸는 몽상적인 승려도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남다르게 투철한 실천불교 사상을 가진 분으로, 우주의 질서에 의한 생명의 생성과 소멸은 믿되 내세니 극락이니 지옥이니 하는 부분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이타와 자비를 석가모니의 제일 큰 가르침으로 파악하고 있었고, 석가모니의 평생에 걸친 고행을 그 가르침의 몸소 실천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석가모니의 그 행위는 중생제도라는 말로 다시 표현되는 시범적 인간혁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중생제도란 당대의 가장 중요한 인간의 문제를 석가모니 같은 태도의 실천으로 해결해나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해탈은 그런 몸가짐 마음가짐이 일치하여 행동할 때 얻어지는 기쁨이나 보람, 그것이 곧 해탈이지, 해탈을 하겠다고 면벽하고 앉았으면 무릎만 곯아가고 엉덩이에 군살만 박힌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절박한 생존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종교가 부인된다면 그것도 당연한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애초에 인간을 위한 종교였지, 종교를 위한 인간이 아니었으므로 인간의 종교 부정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며, 인간의 다면적인 속성은 어느 땐가는 또 종교를 필요로 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승려로서 두 가지 후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혜초와 같은 순례의 길을 떠나지 못한 것과, 불교를 민족을 위한 진정한 종교로 그 체제를 개혁할 기회를 놓친 거라고 했습니다."
빗장뼈가 부러진 몸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인생 사고(四苦)에다 아고(餓苦)를 하나 더 첨가해야 한다며, 그 이유를 설명하던 진지하면서도 처연하게 느껴지던 모습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법일 스님은 종교적 입장에서 사회개혁 의지를 실천하고자 한 것이지 처남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순천이 진압된 직후 며칠에 걸쳐 경찰·군인·서북청년단·피해자가족·반장들까지 동원되어 좌익 합동색출에 나섰고, 읍민들 중 오만여 명이 동네 단위로 북초등학교 운동장에 끌려나와 심사를 받는 수난을 겪었는데, 손가락질 하나로 무수한 사람들이 즉결처분을 당하는 그 수라장의 위기를 법일 스님이나 처남이 어떻게 넘길 수 있었는지, 새삼스럽게 신기하고 기적 같을 뿐이었다.
이학송은 김범우보다 네 살이 위였다. 그래서 한 차례 술을 마시는 것을 계기로 하여 '이 선배'와 '김형'으로 서로의 호칭을 합의했던 것이다.
이학송은 5분쯤 늦게 나타났다.
"김형, 우리 밥을 먹으면서 얘기하는 게 어떻소."
이학송은 자리에 앉지도 않고 약간 큰 키를 구부정하게 숙인 채 말했다.
"그러지요, 그럼."
김범우는 지체 없이 일어섰다.
둘이는 설렁탕을 시켰다.
"자아, 특청이 될 만한지 어디 얘길 들읍시다."
이학송의 얼굴이 사람 좋아 보이게 웃고 있었다.
"예에, 다름이 아니라……
김범우는 그 동안에 요약 정리해둔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 중간에 설렁탕이 나왔고, 김범우는 설렁탕에 양념을 치면서도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어디에 갇혀 있는지를 알아달라는 거지요. 이만하면 특청감이 됩니까?"
김범우는 이학송을 건너다보았다.
"될 만한데. 결국 그 일을 꾸민 주범은 김형이로구만?"
"그런 셈이죠. 그 정도 일이 어디 이런 식으로 확대될 줄을 알았습니까?"
"충분히 가능한 일이오. 김형 얘길 듣자니까 그 심 중위란 사람이 구해낼 만한 가치가 있는 군인 같은데, 잘못했다간 몸뚱이에 얼병께나 들게 생겼는데 수사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모르겠소. 우선 어디에 갇혔는지 알아보도록 합시다. 필동 헌병대가 아니면 조선호텔 앞 대륙공살 데니까."
"대륙공사요?"
"아, 특무대를 위장하느라고 붙인 간판 이름이오."
"혹시, 서울신문의 민기홍 기자라고 아십니까?"
"예, 사회부에 있지요. 아는 사이요?"
"아닙니다. 어느 분이 이 일을 부탁하라고 소개를 했는데, 찾아가야 할지 어쩔지 몰라서요."
김범우는 다시 망설임이 생겼던 것이다.
"그 민형이 나와는 의식이 일치하는 입장은 아닙니다만, 동문이고 해서 아는데, 사람은 믿을 만하니 만나도록 하시오. 세상이 이렇게 엉망진창인 판에다가 용공으로 얽혀들었으면 힘을 합칠 사람이 많을수록 좋소. 보아하니 혼자 찾아가기가 옹색한 모양인데, 내가 연락을 취해 함께 만나면 어떻겠소?"
"폐가 되겠지만, 그리 해주시면 더 고마울 게 없지요. 초면에 부탁을 해야 하는 입장이 돼놔서……"
말을 얼버무리고 있는 김범우의 얼굴에는 반가운 빛이 역연하게 드러났다.
"이거 참, 세상이 갈수록 쑥밭이요. 온통 사바사바에 빽이면 안 통하는 일이 없고, 미운 놈은 빨갱이로 몰아치면 깨끗하게 제거되고, 이거 볼장 다 본 세상이요. 갑시다, 민 기자나 만나러."
이학송은 한숨을 푹 쉬며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민기홍 기자는 작은 체구에 안경을 낀 것이 안창민과 흡사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얼굴 생김은 차이가 많이 났다. 한눈에 보아 미남이라고 할 만큼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 사색이 깃든 무게감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그러잖아도 김 선생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서 선생님 편지를 통해서 사건 내용이나 제가 해야 할 일은 알고 있습니다."
민기홍이 초면 같지 않게 친근한 느낌이 들도록 말했다.
"예, 그러셨군요. 제가 연하인데 말씀을 낮추시지요."
"민형, 자네도 나처럼 하게. 그래야 서로의 입장이 다 편해질 것 아닌가."
이학송이 김범우의 말을 거들었다.
"서로가 편해진다면 그리 하세."
민기홍이 엷은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말야, 민형, 심 중위가 갇힌 델 알아내는 거야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닌데, 문제는 빼내는 것 아니겠어? 자네 혹시 그만한 빽 가지고 있나."
자신이 바라는 바를 미리 헤아려 말하고 있는 이학송의 마음씀에 김범우는 더 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글쎄…… 나도 그 문젤 잠시 생각해봤는데 좀 막연한 형편이네. 군부 쪽 문제가 돼놔서 쉽지가 않네."
"그래, 자네도 나나 비슷하겠지. 우선 소재부터 파악하기로 하세. 나는 나대로, 자넨 자네대로 헌병대부터 뒤져보는 게 어떻겠나?"
"그리하세. 이형하고 별일을 다 함께 하게 됐군."
민기홍이 빙긋 웃었다.
"이게 다 세상살이 아닌가. 요새도 술은 멀리 하나?"
"뭐 그저 그렇지."
"어떤 멍청한 작자가 조선 크리스천한테만 술을 못 마시게 전돌 했는지 원. 그 말을 그대로 순종하는 신자들은 더 멍청하지만 말야. 기자라는 직업도 자넬 술 마시게 만들진 못하는 모양이군."
“너무 서운해 하지 말게. 한두 잔씩은 마시게 만들었으니."
"그래? 그게 언제부턴가?"
이학송은 놀라움을 과장해 보이며 큰 눈을 더 크게 떴다.
"꽤 오래 됐네."
"이런, 그러고 보니 우리가 못 만난 지도 벌써 언젠가."
"이 사람아, 솔직하게. 내가 예수꾼이라고 일부러 안 만나려고 한 거 아닌가."
"어쨌거나, 자네가 술을 한 잔이라도 할 수 있다니 이젠 됐네. 이 일부터 해결해놓고 우리 한잔 해보세."
"제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김범우가 말했다.
"김형은 술을 잘하시오?"
민기홍이 물었다.
"말 말게, 내가 꼼짝을 못하는 판이야."
이학송이 몸을 돌리며 손을 저었다.
"아이구, 그럼 대단하신 모양인데……"
민기흥이 놀라워하며 안경을 밀어 올렸다. 김범우는 민망한 웃음을 흘렸다.
한편, 헌병대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심재모는 범죄사실을 모두 시인하고 있었다.
순천에서 기차로 갈아탄 심재모는 자신이 왜 용공혐의를 받게 되었을까를 줄곧 생각하다가 서울이 가까워져서야, 혹시 여자를 율어로 들여보낼 일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던 것이다. 그런데 헌병대에서 조사가 시작되자 그 어렴풋했던 추측이 확실한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다.
자신이 모함을 당했다는 사실과 함께 심재모는 대처방안을 신속하게 생각했다.
그것이 엄연한 모함이었지만 일단 혐의를 받고 갇혀 있는 입장에서는 혼자의 힘으로 그 모함을 벗어날 길이 없었다. 해명은 변명이 될 것이고, 용공부인은 용공시인의 폭력을 부를 터였다. 자신이 모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 모함을 물리칠 만한 현지의 응원이었다. 그것이 탄원서가 됐든, 진정서가 됐든 현지로부터 어떤 힘이 작용되어야만 신빙성이 확보되고, 자신의 결백도 입증될 수 있었다. 심재모는 권 서장을 믿었고, 서민영 선생을 믿었다. 더구나 거기에는 당초에 일을 시작한 손승호가 있었다. 그 사람들이 자신을 위하여 힘을 모아줄 것이고, 그 사람들의 힘이라면 유지들의 모함을 능히 물리칠 수 있을 것을 그는 믿었다.
그 시간을 요령 있게 벌어야 했다. 그 요령이 모든 '범죄사실'의 시인이었다.
어설프게 해명하거나 부인하고 들었다가 폭행을 자초해 몸을 망그러뜨릴 이유가 없었다. 경찰의 고문도 일제시대 그대로 무지막지하게 자행되는 실정이었지만 헌병대의 고문도 그에 못지않다는 소문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더구나 좌익이나 용공혐의자에게 가해지는 고문이 극악하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심재모가 그런 식으로 해서 풀려나는 것에만 정신을 집중한데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그는 이미 현재와 같은 상황 속에서 군인생활을 한다는 것에 근본적으로 회의를 느꼈던 것이다. 군부 안에서 관동군 출신들이 판을 치고 오히려 광복군 출신들이 수세에 몰리는 것까지는 그나마 수적인 열세로 보아 넘겼던 것인데, 계엄사령관으로 근무하게 되면서, 무엇을 위한 군인이며, 누구를 위한 군인인지 회의가 자꾸 깊어져 갔던 것이다.
"이 새끼 이거, 딱 총살감이구먼."
조사관이 이렇게 말할 정도로 심재모는 '빨갱이'가 되어 있었다.
그들의 모함을 일거에 뒤엎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탄원서를 만들기 위해 몇 천 명이고 도장을 받으려 했던 서민영의 의도는 무참하게 좌절되고 말았다.
경찰서에서 풀려난 서민영은 지체 없이 다음날부터 도장받기를 시작했는데, 사람들의 태도는 이미 달라져 있었다. 서민영이 나서기 전에 벌써 경찰과 청년단원들이 동네마다 들쑤시고 다니며 엄포를 놓았던 것이다. 도장을 찍는 자는 빨갱이이기 때문에 무조건 잡아들인다는 것이었다. 백남식이 내린 그 명령은 서민영의 행동을 완전히 봉쇄하다시피 하는 효과를 나타냈다. 두려워하고, 난처해하고, 주저하는 사람들을 대하면서 서민영은 도장을 찍어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강요였을 뿐만 아니라, 젊은것들 서넛이 자신의 뒤를 멀찍이 따라붙는 노골적인 감시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악랄할 수법이 동원될 줄은 서민영으로서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서민영은 도장 받기를 일단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발길을 돌리는 서민영의 심정은 난감하기만 했다. 계엄사령관이란 자를 찾아가 항의를 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고,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시켜 은밀히 도장을 받아낸다는 것도 될 일이 아니었다.
서민영이 집으로 돌아오니 이지숙이 먼저 돌아와 있었다. 서민영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모든 말을 대신했고 생략했다. 이지숙은 아무 말 없이 서민영을 뒤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쩌년이 저거, 어지께 그리 혼쭐나고도 도장 받으로 나선 것 봉께로 배짱이 영 씨시?"
"긍께로 빨갱이허고 연애치는 것 아니겄냐?"
"글고 봉께 그러시."
"빨갱이허고 연애치는 사인디 저것은 삘건 물 안 들었을끄나?"
"재판받고 나온디다가 야학 선상 허는 것 보먼 고것이야 아닌갑제."
"그건 그려. 근디, 쩌것이 처녈끄나 아닐끄나?"
"고것이야 지 혼자 알 일이제. 근디, 워째서?"
"잉, 쩌년이 우리 고상시킴서 도장받으로 댕기먼 우리 둘이서 착 뒤집어놓고 돌림빵을 혀서 버리장머리럴 고칠 수도 있다 그것이여."
"허! 고것 존 방뻡이시."
뒤를 따르고 있는 두 녀석이 일부러 들으라는 듯 떠벌리던 소리가 아직도 귓속에 남아 있었다.
"손 선생은 언제 끝나는지 아시오?"
자리를 잡은 서민영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오전수업이라고 했습니다."
"이리 오도록 연락을 좀 취해주시오."
"네…… 다녀오겠습니다."
이지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일어섰다. 손승호와 자리를 함께 하게 되면 자연히 나올 말이었으므로 물을 필요가 없었다.
서민영 앞에 나타난 손승호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코언저리가 어찌나 부어올랐는지 코를 찾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자네 얼굴이 어찌 그런가? 코가 크게 상한 것 아닌가?"
놀란 서민영이 연거푸 물었다.
"예, 좀 부은 것뿐입니다."
손승호는 얼굴을 수그리며 손으로 코 부분을 가렸다.
"부은 것만이 아니군요.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잖아요."
이지숙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상처 부위를 주시하며, 꼬집어 내듯이 말했다.
"뭐, 그저, 조금씩 흘러요."
손승호는 감추려는 기색이 완연한 채로 말을 얼버무리듯 하고 있었다.
"어허 이 사람아, 그때가 언제라고 여태 코피가 흐르게 둔단 말인가. 당장 병원으로 가세."
서민영이 안타까운 얼굴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선생님, 아닙니다. 정말 조금씩밖엔 안 흐릅니다. 솜을 반시간에 한 번 갈아 끼울 정도밖에 안됩니다."
"어허, 아무리 소량으로 흐르는 피라도, 피가 계속 흘러서는 사람이 살 도리가 없는 법 아닌가. 일어나게, 어서."
"예, 병원엔 곧 가도록 하겠습니다. 아까 이 선생이 써놓고 간 편지를 보고 일이 방해받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에 대한 선생님 말씀부터 먼저 듣고 싶습니다. 선생님, 그리 하게 해주십시오."
손승호는 일어날 낌새라곤 없이 완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선생님, 그렇게 하시는 게 덜 번거롭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지숙의 말이었다.
"사람들 참……”
서민영은 자리에 앉기가 바쁘게,
"사람들 도장을 가능한 한 많이 받기로 한 계획은 어려울 것 같네. 그렇다고 탄원서를 내기로 한 걸 포기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그러니 받을 만한 사람한테서만 받아 일단 탄원서를 내고, 그 다음 방도는 더 생각해보도록 하는 게 어떻겠나?"
그의 말은 평소보다 한결 빨랐다.
"사람 수가 적어 효과가 안 나면 선생님께서 하신 수고만 허사가 되겠군요."
손승호의 맥 빠진 소리였다.
"꼭 그렇진 않네. 처음부터 사람 수가 많다고 해서 효과가 보장되어 있던 일은 아니었으니까. 사람 수를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하려고 했던 것은 우리의 계획일 뿐이었고, 묵살하려 들면 사람 수의 다과를 상관하지 않고 묵살해버릴 것일세. 용공사건인데다가, 군부를 상대로 한 민간인들의 탄원서고, 거기다가 시골구석 사람들의 소리 아닌가."
손승호는 갑자기 할 말이 없어지는 걸 느꼈다.
이미 그런 장애요인들을 다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탄원서 만들기에 발 벗고 나선 선생님의 마음이 야릇한 슬픔과 진한 고마움으로 가슴을 적셔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나한테 한 가지 생각이 있으니 그걸 마음에 정할 때까지 기다려보게나. 자아, 얘기 다 끝났으니 어서 병원으로 가세나."
서민영은 일어날 자세를 취했다.
"선생님, 제발 앉아 계십시오. 병원엔 저 혼자 가도 되잖습니까."
"자네가 미련하게 또 안 갈까봐서 그러는 게지."
"아닙니다, 지금 당장 가겠습니다."
"그러게, 당장 가게. 코는 얼굴의 중심이고, 남자 인물을 좌우하는 맥일세."
"선생님, 저는 어차피 코가 못생겼는걸요."
손승호는 씨익 웃으며 일어섰다. 이지숙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 사람아, 못생겼으니까 탈이 나면 더 안 되지."
서민영의 얼굴에도 웃음이 감돌았다.
전 원장은 부어오른 콧등을 조심조심 눌렀고, 그럴 때마다 손승호는 등줄기로 맞통하는 자극적 아픔에 몸을 떨었다.
콧속까지 몇 번씩 들여다보고 난 전 원장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보기엔 코뼈가 부러진 것 같군요. 코뼈는 원래 연골이라 부러지기도 잘하고, 붙기도 잘하지요. 그런데 붙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부러진 자리끼리 잘 붙어주는 게 아니라 근육의 방해로 제멋대로 붙어버리거든요. 코가 이상하게 휘어지거나 구부러진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다 치료를 받지 않고 방치해서 그리 된 겁니다. 제 진단은 손끝으로 만져본 것에 불과하니까, 전문의한테 가서 렌트겐 사진을 찍고, 부러진 부분을 정확히 찾아 치료를 받아야 되겠습니다. 출혈도 그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어떻게, 원장님 손으로 안 되겠습니까?"
손승호는 귀찮다는 생각이 앞서고 있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까징끼 정도 발라드리는 것뿐입니다. 좀 멀더라도 광주로 가서 치료를 받도록 하세요. 제가 좋은 의사를 소개 해드리겠습니다."
"그냥 둬버리면 어떨까요?"
"그건 좀 곤란합니다. 뼈가 잘못 붙어 외관상 보기 싫은 거야 둘째 문젭니다. 우리의 모든 기관은 복합기능을 갖게 마련인데, 뼈가 잘못 붙게 되면 그 기능에 장애가 생기게 되고, 그에 따른 후유증이 병을 일으키게 됩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뼈가 잘못 굳어지는 과정에서 콧구멍이 비정상으로 좁아지게 됩니다. 그 구조 변화로 콧물의 배설이 지장을 받아 축농증이 생기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코만으로는 호흡곤란이 일어나니까 자연히 입호흡을 하게 되고, 그 기간이 길어지면 기관지에 탈이 생기고, 폐가 나빠지게 됩니다. 이러니 치료를 안 받으시면 곤란합니다."
"빌어먹을 자식!"
손승호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소리였다.
전 원장은 그렇게 심하게 다친 연유가 궁금했지만 차마 물을 수는 없었다. 단지 자신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그런 것을 묻는다는 것은 손승호에 대한 지나친 결례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제가 소개장을 쓸까요?"
"예에, 고맙습니다."
부어오른 손승호의 얼굴은 울상이 되고 있었다.
바로 그날 전투복 차림이 아닌 정장 차림을 한 남인태가 느닷없이 경찰서에 나타났다. 그는 문을 걷어차듯 하는 기세로 사무실을 들어섰다.
"그간 자알들 있었나!"
어리둥절해하기도 하고, 의아해하기도 하는 옛 부하들을 향해 그가 거침없이 던진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말 뒤에다 그는 너털웃음을 길게 매달았다.
그가 보성 경찰서장으로 부임해 가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옛 부하들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보성 경찰서장은 잔치술을 마시다가 기습당한 사건을 문책 당하게 되었고, 그 결과 남인태와 자리가 맞바꿔진 것이었다.
마침내 소원성취를 하게 된 남인태는 보성으로 가는 길에 마음이 급해서 벌교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금의환향을, 실속이야 벌교만 못하지만 행정단위로는 엄연히 상위인 군 경찰서장으로 영전하여 되돌아온 자신의 당당한 모습을, 자신을 몰아낸 김사용을 위시해서, 자신이 떠날 때 그리도 냉정했던 기관장들이며 유지라는 것들에게 한시라도 빨리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바로 남인태요. 보성 경찰서로 부임하게 됐소. 오늘은 업무지시차 순시가 아니니 안심하시오."
남인태가 권 서장에게 내던진 말이었다. 권 서장을 노려보듯 하는 그의 얼굴에는 자만과 비웃음이 뒤섞여 있었다.
그런데 읍내는 작년 시월 하순처럼 살벌한 기운 속에 뒤집어져 있었다.
신임 사령관 백남식의 명령으로 좌익세포 색출과 전체 읍민의 사상 재검토가 실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반장과 이장들은 백남식 앞에 불려와 세포 색출의 책임량을 할당받았고, 입산자 가족들은 백남식에게 직접 취조를 받아야 했다. 장흥으로 떠난 외서댁까지 불려왔고, 소화도 제외될 수가 없었다.
백남식은 취조라는 것을 하다가 걸핏하면 지휘봉 끝으로 여자들의 가슴을 마구 찔러대거나, 목줄기를 사정없이 후려치고는 했다. 그러다가 소동이 벌어진 것이 염상진의 아내 죽산댁을 다루면서였다. 죽산댁은 그녀의 기질대로 억세게 나갔고, 백남식의 지휘봉은 점점 자주, 그리고 세차게 그녀를 갈겨댔다.
"온냐 이눔아, 나럴 쥑여라아. 부부지간이먼 정이나 통허제 사상할라 통허는지 아냐, 요런 돌대그빡, 문딩이 자석아아!"
눈을 부릅뜬 채 이런 소리를 부르짖으며 죽산댁은 순식간에 백남식에게로 덤벼들었다. 아무리 몸이 날랜 백남식이었지만 덤벼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앉아 있다가 그대로 오른쪽 팔을 덥석 물리고 말았다. 엉겁결에 몸을 일으킨 백남식은 왼팔을 휘두르며 죽산댁을 갈겨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갈겨댈수록 어느새 두 팔로 그의 허리까지 감아 잡은 죽산댁은 부들부들 떨며 이빨에 힘을 가하고 있었다. 백남식은 발로 걷어차려 했지만 허리가 잡혀 있어서 발을 쓰기가 거북했고, 이빨이 살을 파고드는 아픔이 갈수록 심해져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그는 신음을 악물며 여자를 더욱 난폭하게 갈겨댔지만 여자는 떨어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악착스럽게 달라붙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말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백남식은 더는 고통을 견뎌낼 수도 없었다.
"뭣들 하고 있는 거야! 이년을 떼내, 빨랑!"
마침내 백남식이 소리 질렀다.
그가 주먹질을 멈추고, 서너 명이 달려들어 뜯어내서야 죽산댁은 물고 늘어졌던 팔을 놓았다. 옷 위로 물었는데도 백남식의 팔에는 이빨이 박혀들다가 빠진 자국이 횟가루로 만든 본처첨 뚜렷하게 찍혀 있었다.
"내 참 드러워서. 허 참 드러워서."
백남식은 연상 이런 소리를 내뱉았고, 아랫사람들은 그의 눈을 피해가며 키득거리고 웃어댔다.
"허어, 고것 참, 우리 사령관 각하님이 짠허니 되얐네 그려. 우리 형수씨가 진돗개 중에서도 싸납디 싸나운 진돗개라는 거슬 나가 살짝허니 갤차줬어야 허는 것인디, 암것도 몰름시롱 뎀비다가 기엉코 당해뿌렀구마잉. 그려도 천행이다, 붕알 안 물린 것이 천행이여."
염상구는 여기저기에 얼굴을 내밀며 이런 소리를 능청맞게 지껄였고,
"내가 재수가 좋았지. 그 망신당하고 그걸 죽일 거야, 살릴 거야."
토벌대장 임만수가 맞장구를 쳤다.
백남식이 함부로 매질을 하다가 체면손상을 한 것도 체면손상이었지만, 또 하나 불찰을 저질렀다. 이빨에 물린 자리를 치료하지 않고 그냥 넘긴 것이었다. 하룻밤을 자고 나자 퉁퉁 부어올랐고, 약간 나아지는 듯하다가 며칠이 지나자 견딜 수 없도록 욱신대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병원을 찾아갔다.
"이거 째야 되겠습니다."
전 원장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째요?"
백남식이 놀라서 물었다.
"수술을 해얀단 말입니다. 속으로 곪았어요."
"개쌍년!"
"곪은 부위는 마취가 안 듣습니다. 좀 아프더라도 참으세요."
"아니, 그냥 살을 짼단 말입니까?"
"그럼 수술을 안 받으시겠어요? 이대로 두면 팔을 절단하게 됩니다."
"아, 알겠어요. 개쌍년!"
"자아, 이빨을 악무세요."
"우악! 아우아, 아-아……"
백남식이 발악적으로 지르는 비명이 병원을 흔들었다.
전 원장도 새삼스럽게 불려가 백남식에게 조사를 받았던 것이고, 손승호의 코가 그 지경이 된 것은 백남식의 주먹질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전 원장은 백남식을 환자로 대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싸늘해져 있었다.
심재모의 면회는 물론 되지 않았다.
김범우는 이학송과 민기홍을 통해서 사태 변화를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심각한 상태였다가 탄원서가 접수되면서 다소 호전되기는 했지만 벌을 면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총살형을 의미했으므로 사태가 호전되었다 하더라도 중형을 받게 될 것이었다.
심재모가 왜 처음부터 용공 사실을 다 시인했는지에 대해 두 기자는 의문을 표시했다. 심재모에 대해 김범우가 무언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했다. 김범우 자신도 그 점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두 기자의 의문을 풀어줄 수가 없었다. 다만, 무슨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라는 말만 강조했던 것이다.
그런 것이야 어찌 됐든 간에 김범우의 관심은 심재모가 벌을 받지 않고 풀려나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뭐 여러 말 할 것 있겠소. 강력한 빽을 동원하는 수밖에, 탄원서 정도 가지고는 어림없소. 직격탄이야 물론 군부 빽이고. 그 다음으로 곡사 화기가 될 만한 빽으로는 장관이나 국회의원 정돌 거요. 도지사 정도로는 벌써 화력이 약하고. 심, 그 사람 집에서도 손을 쓰고 있는 눈치던데, 합동작전을 전개해도 괜찮지 않겠소?"
이학송의 말이었다.
김범우는 전에 혐오를 느껴왔던 '사바사바'니 '빽'이니 하는 말을 이제 실감 있게 뇌며, 그럴 만한 사람을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해야 했다.
사바사바는 '통역정치'또는 '요정정치'라고 불리었던 미군정의 음성적 정치로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말이었고, 빽은 이승만정권이 세워지면서 연줄과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는 풍조 속에서 생겨난 유행어였다
김범우는 수원으로 심재모의 집을 찾아갔다.
그의 부모를 대하게 되자 김범우는 자신의 죄의식이 한층 깊어지는 것을 느꼈다.
심재모의 아버지는 벌써 국회의원과 도지사를 동원하고 있었다.
"때맞춰 잘 오셨소. 그러잖아도 그쪽 사람들과 선을 댈 수 없어서 애를 태우던 참이었소. 필요한 말만 하자면, 이쪽 국회의원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게요. 보증을 서야 하는데, 그쪽에서 일어난 일이니 그쪽 국회의원이라야 된다지 않소. 내, 비용은 얼마든지 댈 테니까 그쪽 국회의원을 움직여주시오. 그게 장자요, 장자.”
심재모의 아버지 말은 절박했다.
"예, 알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김범우는 다짐했다.
서울로 돌아오며 그의 가슴은 우울한 안개로 덮여 있었다.
심재모가 당하는 고생과, 최익승 같은 인물을 필요로 해야 하는 처지와, 그런 부류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현실과……
그런 모든 것들이 안개의 미립자로 가슴속을 어지럽게 떠돌고 있었다.
심재모가 왜 용공을 다 시인했는지 수원에 가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맹목적이고 우격다짐인 현실을 감안할 때 그건 현명한 판단이고, 결정이었다.
아니, 그의 판단과 결정이 현명하게 되려면 그가 예상했던 바대로 이쪽에서 적극적인 구출작업을 펼쳐야 하는 것이었다. 그 믿음을 전제로 해서 심재모의 행동은 이루어진 터였다. 심재모의 그 믿음은 곧 자신에게 지워진 책임임을 김범우는 느끼고 있었다.
김범우는 늑장을 부리는 편지에 의지할 수가 없어 권 서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떤 방법으로 최익승을 신원보증인이 되게 할 수 있을 것인지 서민영 선생에게 알아보아 달라는 내용이었다. 최익승과는 흥정이 있을 뿐이었다. 그가 만약 신원보증인으로 나선다면, 그는 그에 상응하는 그 무엇을 요구할 것이 틀림없었다.
돈, 그리고…… 표, 둘 중에 하나가 되리라고 김범우는 생각했다.
전화가 오가며 며칠이 지나자 김범우의 그 예측은 적중했다.
전화로 서민영의 부탁을 받은 최익승은 대뜸 그 대가가 뭐냐고 물었고, 서민영이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최익승은 다음 선거에 자신을 적극 지지하면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했고, 서민영은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여서 그러겠다고 하자 최익승은 말로는 소용없으니 서약을 하라고 했으며, 그럼 서약서를 써서 보내겠다는 서민영의 말에 최익승은 자기와 마주앉아 써야 한다고 했다.
"최익승이 덕에 서울 구경을 하게 생겼네.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하세나."
멀게 들리는 서민영 선생의 목소리에 실린 웃음기가 전화를 끊고서도 김범우의 가슴에 여운을 끌며 남아 있었다. 그 웃음은 자조적인 것 같기도 했고 허탈한 것 같기도 했다.
김범우는 이튿날 저녁 무렵 서민영 선생을 마중 나갔다.
무질서하게 앞을 다투어 쏟아져 나오던 승객들이 뜸해진 다음에 서민영 선생은 다리를 절룩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선생님, 접니다."
김범우는 앞으로 나서며 허리를 깊이 숙였다.
"응, 나왔나. 건강은 하지?"
서민영은 피곤해 보이는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
"네에. 선생님, 피로하시겠습니다."
"아닐세, 내내 잠만 자고 왔네."
"민 기자도 나오기로 했었는데 갑자기 취재할 사건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아니네, 안 나오기 잘했어. 헌데, 자네 혜화동 쪽 잘 아나?"
"네, 좀 아는 편입니다."
"잘 됐네. 최익승이를 오늘밤에 만나기로 했으니까 어둡기 전에 집을 찾아야지. 보성중학교하고 혜화국민학교 사이, 목욕탕 옆 골목이라고 하더군. 고 근방에 와서 아무 가게서고 자기 이름을 대면 다 안다더구만."
"그 정도 위치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몇 시에 만나기로 하셨습니까?"
"9시께라고 했네."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시장하실 덴데 식사부터 하시지요."
"아닐세, 나 시장하지 않아. 집부터 찾아놓고 먹세."
"그러시죠. 그럼, 가실까요."
아무리 시장하더라도 일을 앞에 놓고 밥부터 먹을 서 선생이 아님을 김범우는 익히 알고 있었다.
"서울이 변한 건 사람이 늘어난 것뿐인 것 같구먼."
서민영이 길을 건너며 말했다.
"네, 월남한 사람들에, 지방에서 몰려드는 사람들에, 서울의 인구문제가 현실적으로 심각한 모양입니다. 150만 명이 들끓고 있으니까요."
"그렇겠지. 갑자기 인구가 늘어나니 주택난에, 실업난에, 교통난에 어디 문제가 한둘이겠나."
김범우는 서민영 선생을 부축해서 종로행 전차를 탔다.
퇴근시간이어서 그런지 전차 안은 몸 돌리기도 어렵게 사람들이 차 있었다. 다리가 불편한 분이 서 있어야 하는 것이 김범우는 너무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자리 양보를 부탁할 수도 없었다. 그건 서 선생이 용납할 일이 아니었다. 농사일도 해내시는 분이니까, 김범우는 마음을 편한 쪽으로 먹기로 했다.
"선생님, 최익승이가 자기와 마주앉아 서약서를 쓰자는 건…… 무슨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하려는 게 아닐까요?"
김범우는 꺼림칙하게 마음을 차지하고 있던 생각을 조심스럽게 내놓았다.
"아마도 자네 생각이 틀리지 않을 것 같구먼."
서민영은 무심한 듯 창밖을 바라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전차는 덜컹거리며 남대문을 돌고 있었다.
"심 중위를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선생님께서 그자의 선거운동원이 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합니다."
"너무 심려 말게나. 최야 이번 기회에 날 옭아매서 선거에 최대한 이용하려 들게고 난 그와는 반대 입장으로, 그의 힘을 빌어 심 중위 일을 해결하되 선거에는 최소한 이용당하려는, 일종의 줄다리기 싸움 아니겠나."
"선생님, 그렇지만…… 그자를 최소한이나마 돕게 되면 선생님의 위신이나 체면이…… 이 타협은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는 게 어떨는지요."
"자네의 신중한 생각 잘 아네. 허나, 한 가지 가정을 해보세. 다음 선거에 나와 최가 경합을 한다고 치세. 자네 생각엔 누가 당선될 것 같은가? 그거야 물론 최네. 그게,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된 현실적 힘이네. 그러니 그와 타협해서 심 중위를 구해내는 건 양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욕될 게 없네. 나 하나 위신과 체면을 위해 궁지에 빠진 무고한 젊은이를 외면하는 게 오히려 위선이고 비겁하지. 최도 다음 선거에 자기가 당선되리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네. 그런데 왜 나와 거래하려 하는가? 돈도 힘도 안 드는 신원보증을 서주고, 심정적인 반대파 하나를 없애자는 거지. 그가 절대로 필요로 하는 건, 될 수 있는 한 선거를 쉽게 치르는 거니까. 나도 타협할 선을 정하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말게나."
종로4가에서 전차를 갈아탔다. 혜화동에 내렸을 때는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참 문제로군. 서울엔 일본놈들이 남기고 간 흔적이 너무 많아. 외관이 동경과 비슷하니 원."
서민영은 혜화동 쪽으로 길을 건너며 혼잣말처럼 하고 있었다.
집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혜화국민학교의 담을 마주보고 있는 골목길을 걸어들어 오른쪽 네 번째의 한옥에 최익숭의 문패가 붙어 있었다. 골목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넓은 길 양편으로 한옥들이 정연하게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집들의 대문은 하나같이 크고 담 또한 높았다.
"소문대로 부자동네구먼."
눈을 껌벅이며 서민영이 중얼거렸다.
"예, 최익숭 같은 사람이나, 부재지주, 신흥부자 등이 몰려 산다고 하더군요. 경복궁을 중심으로 해서 효자동 ·가회동 · 제동 · 팔판동이 서울토박이 양반동네라면 명륜동이나 혜화동은 각지에서 모여든 부자들이 주를 이룬다고 합니다."
김범우는 이학송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옮겼다.
"각지에서 모여든 부자라……"
"가세, 요기를 해야지."
서민영이 다리를 절룩이며 앞서 걸었다.
저 양반, 대단하신 분이야…… 김범우는 뒤따라 걸으며, 서민영 선생의 절룩거리는 다리에서 발산되는 이상한 마력이 자신을 압박해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서민영 선생은 고기를 굳이 마다고 곰탕을 시켜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달게 비웠다.
"역시 곰탕은 서울음식이로군 자알 먹었어."
서민영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입을 훔치고는,
"얘기가 길지 않을 것이니 자넨 어디서 좀 기다리게나. 필시 최는 누가 옆에 있는 걸 꺼릴 테니까."
그는 의미 있는 웃음을 지었다.
"그러믄요. 저하고는 감정이 있는 사입니다."
김범우도 따라서 웃음 지었다.
최익승은 서민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형식적인 인사가 오가자 서민영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전화로 대강 말씀드렸으니 심 중위에 얽힌 일은 재론할 필요가 없겠고, 바로 서약서를 작성하도록 하지요."
"그거 좋습니다. 헌데, 서약서를 쓰되 막연하게 날 지지하겠다 해서는 곤란하다 그런 말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날 지지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표시해야 합니다."
최익승은 주도권을 잡고 있는 사람답게 거드름을 피우며 느릿느릿 말했다.
"좋습니다. 그 구체적인 사항을 말씀해보시지요."
"에에, 딱 잘라 말하자면……,"
최익승은 마른침을 삼키며 자리를 고쳐 앉고는,
"날 지지하는 연설을 최소한도 두 번은 해야 한다 그것이요."
그는 상기된 얼굴로 서민영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좋은 말씀이요. 허나, 내가 제의하는 바는, 내가 출마를 포기하는 것으로 최 의원에게 협조하려고 하오."
서민영도 최익승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요?"
최익승은 깜짝 놀라는 한편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어려울 것 없는 말이요. 최 의원도 알다시피 지난번 선거에 많은 사람들의 출마 종용을 받고서도 나서지 않았던 걸 난 후회하고 있소. 그래, 다음번에는 출마하려고 내심으로 작정하고 있었소."
저놈이 날 이용만 해먹고 제놈 몸 더럽히지 않으려고 여우같은 수를 쓰는 거지, 이놈아, 감히 누굴 홀리려고. 저놈을 엎어치기로 넘기려면 배짱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지. 헌데, 저놈 말이 사실이면 어쩐다? 저놈이 나서면…… 그거야말로 골치 아파진다. 허나, 아무나 출마하나. 일단 배짱으로 밀어붙여라.
최익승은 머리를 빨리 회전시키고 있었다.
"하아! 듣던 중 해괴한 소리요, 그거. 얼마든지 출마하시오. 우리 얘기는 끝났소."
“좋소. 어디 한번 겨뤄봅시다, 누가 이기나."
서민영이 다리가 불편한 사람답지 않게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그 순간 최익승의 의식은 헝클어졌다.
저놈이 저거 참말인 모양이네. 저놈을 그냥 보냈다가는 병신 오기를 부릴 텐데, 내가 실수했구나. 저걸 어쩐다?
서민영은 거침없이 방문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서 선생, 나 좀 봅시다!"
최익승은 소리치며 일어섰고, 서민영은 그대로 대청으로 나서고 있었다.
"서 선생, 서 선생, 내가 잠시잠깐 잘못 생각한 것 같소. 앉읍시다, 앉어서 얘기합시다."
서민영을 붙든 최익승의 목소리는 더없이 다급했다.
서약서.
본인은 차기 선거에 불출마함과 아울러 최익승 후보를 성심껏 후원할 것을 이에 서약하는 바이다.
한지에 먹으로 쓴 서약서 내용이었다.
돈암동으로 가는 전차 안에서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난 김범우는 자꾸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서 선생이 손상당할 것 아무것도 없이 최익승을 이용하게 된 것이 더없이 통쾌할 뿐만 아니라, 최익승의 허점을 정통으로 찌른 작전이며, 최익승의 거부로 방을 나설 때의 서 선생의 심정이며, 다시 서 선생을 붙들어 세운 최익승의 모습이며를 생각하는 김범우의 얼굴에는 웃음이 어리고 있었다.
"심 중위가 갇힌 것이 한 스무 날 되나?"
"예, 그렇게 됩니다."
"그간 고생 많이 했구먼. 조사받는 기간에 비하면 정작 옥살이는 마음이 편한 법이지. 내일 당장 보증을 서기로 했으니 곧 풀려나겠지."
"다 선생님 노고 덕입니다."
"싱거운 소리. 그래, 공분 할 만허등가?"
갑자기 화제를 바꿔버리는 서 선생의 솜씨가 최익승의 허점을 찌른 것과 같다고 느끼며 김범우는 고개 숙여 웃기만 했다.
김범우의 하숙에서 잔 서민영은 다음날 떠났고, 사흘 뒤에 심재모는 풀려났다.
"심 중위님,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너무 고생하셨습니다."
김범우는 심재모와 악수를 나누며 말했다.
"그 무슨 서운한 말씀입니까. 제가 오히려 감사해야지요. 그런 혐의로 헌병대에 들어가서 이렇게 말짱하게 나온 건 아마 나 하날 겁니다. 이게 다 누구 덕입니까."
약간 파리한 안색의 심재모가 구김살 없이 말했다.
"아직 근무지 결정은 안됐겠죠?"
"마음 같아서는 예편을 하고 싶은데 그게 뜻대로 안될 것 같고, 명령대기 하라니까 당분간 집에서 쉴 작정입니다."
그와 헤어지고 나서도 예편을 하고 싶다는 그의 말이 오래도록 김범우를 우울하게 했다. 심재모의 그 말에, 교직을 떠나고 싶다는 손승호의 말이 겹쳐지고 있었다.
떠나고 싶은 사람이 어디 그 두 사람뿐일까.
그들은 떠나고자 하지만 정작 갈 곳은 그 어디인가.
그들을 떠나고 싶게 만든 세상, 그 세상이 떠나야 하는 게 아닌가.
6월 6일 아침 8시 30분경 명동 입구를 중심으로 한 남대문로에는 기마경찰대 20여 명이 한국은행 방향과 을지로 방향, 두 쪽으로 갈려 정연하게 줄을 서 있었다.
그들은 말에 올라탄 채 말들을 인도에 세우고 있었으므로 차량 통행에는 별다른 지장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인도는 반으로 줄어든 형편인데다가 기마경찰대가 내뿜고 있는 삼엄한 분위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레 방향을 바꾸어 그 앞 지나가기를 꺼렸다. 그래서 인도는 자연스럽게 교통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정시대의 기마경찰들은 고등계 형사들만큼이나 공포의 대상이었다.
말발굽 소리, 긴 가죽장화, 번쩍이는 닛본도, 큰길이고 골목이고 가리지 않고 누비는 기동성, 말 위에서 닛본도를 내리쳐 사람의 목을 날리는 포악함, 그런 것에 기질린 사람들은 기마경찰을 먼발치에서 보아도 진저리치며 미리 피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반민특위 본부는 정사복 무장경찰관들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 권총이나 카빈총을 제각기 든 경찰관들은 하나같이 살기에 찬 눈들을 번뜩이며 금방이라도 총을 쏴댈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 살벌한 경계 속에서, 출근을 하는 특위 관계자들은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무장해제를 당함과 동시에 수갑을 차게 되었다. 경관들의 수나 그들의 기세가 워낙 살벌했으므로 저항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으나, 어쩌다 무기 소지증을 내보이며 저항하는 사람에게는 여지없이 폭행이 가해졌다. 어떤 사람은 개머리판에 맞아 이마가 터져 수갑을 차기도 했고, 어느 사람은 옷이 찢어져 안으로 떠밀려 들어가기도 했다.
그때 한 남자가 특위 정문의 맞은편에서 길을 가로질러 뛰어오고 있었다. 그는 길을 건너 뛰어온 속도 그대로 정문을 통과할 것 같은 기세였다.
"서라, 누구냐!"
경찰 두 명이 소리치며 총으로 그를 가로막았다.
"기자요, 기자."
숨을 헐떡거리는 남자는 토하듯 대꾸하며 앞으로 내닫을 기세였다. 그는 국도신문의 이학송이었다.
"이 새끼 이거, 기자면 다야!"
경찰 하나가 총으로 이학송의 가슴팍을 떠밀며 외쳤다.
"기자새끼들 꼴도 보기 싫다. 피 보기 전에 당장 꺼져!"
다른 경찰이 잔인한 얼굴로 내뱉었다.
"비키시오. 기자한테 이러는 법이 어딨소."
얼굴이 땀범벅인 이학송은 그들을 밀치며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언제나 감돌고 있던 웃음은 간 곳이 없고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져 있었다.
"이 새끼, 뒈지고 싶어"
경찰 하나가 째지게 소리쳤고,
"이 새끼야, 법 여깄다."
다른 경찰이 맞받듯 소리치며 개머리판을 휘둘렀다, 개머리판은 이학송의 옆 볼을 후려쳤고, 그는 윽 소리를 토하며 비틀거렸다.
"이 새끼. 떡대 값 하네."
그 경찰이 침을 내뱉으며 다시 개머리판으로 이학송의 어깻죽지를 내리쳤다.
이학송은 푹 주저앉았다.
"거기 뭐야!"
뒤에서 들려온 외침이었다.
"옛, 기자 놈이 뛰어들려고 해서 막고 있는 중입니다."
개머리판을 휘두른 경찰이 부동자세를 취하며 보고했다.
"새끼, 냄새도 빨리 맡았군. 이리 끌고 와."
이학송은 혁대를 틀어 잡혀 사복을 입은 사내 앞으로 끌려갔다.
그제서야 눈앞이 겨우 트이는 것을 이학송은 느끼고 있었다.
또 다른 사복차림 하나가 서류를 한 아름 안고 있었다.
"얌마, 뭘 먹겠다고 여길 끼어들어, 우리 경찰이 니놈들 밥인 줄 아냐."
사복은 손등으로 이학송의 볼을 탁탁 치며 말하고는,
"이 새낄 저쪽 방에다 함께 가둬. 그리고 딴 놈들도 나타나면 모조리 잡아들여."
그는 정문보초에게 명령했다.
이학송은 총부리에 떠밀려 꼼짝없이
특경대원들이 갇혀 있는 방으로 걸어야 했다. 이곳은 특위 결성 후 자주 드나들었던 본사무실 뒤에 있는 형무관실이었다. 거기에는 20여 명의 눈에 익은 얼굴들이 수갑을 찬 채 붙들려와 있었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경찰 4명이 그들을 향해 서 있었다.
이학송은 그 현장을 두 눈을 뜨고 똑똑히 보고 있으면서도 특경대원들이 그 꼴이 되어 있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도, 납득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다 총을 휴대하고 있었고, 어제까지도 친일범죄자들을 잡아들이던 특수임무 수행자들이었다. 그들이 무기를 다 빼앗기고 쇠고랑을 찬 신세로 겁 질리거나 풀죽은 모습들로 흩으러져 있었다. 어둡지도 않은, 해가 떠 있는 시간에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건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가 무너지고 있는 현장의 모습이었다.
이학송은 그들을 더 볼 수가 없어 눈을 감아버렸다.
정말 이럴 수도 있는 것인가……
그는 절망감과 참담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학송은 머리를 감싸 잡으며 어금니를 맞물다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때서야 그는 왼쪽 어금니자리 전부가 화끈거리고 욱신거리는 통증을 의식했다.
그뿐이 아니라 왼쪽 귀도 먹먹한 채 모기 우는소리가 연이어 울리고 있었다.
"쌔끼야, 개소리 치지 말고 처박혀 있어!"
"이 자식들이 이거, 내가 누군지 알어!"
"아가리 닥치라니까!"
이학송의 눈길은 반사적으로 문 쪽으로 날아갔다.
"아이쿠쿠……"
경찰이 한 남자의 등을 개머리판으로 찍었고, 그 남자가 비명을 토하며 꼬꾸라지는 것이 이학송의 눈에 한 장면으로 잡혔다.
"개새끼, 과장이면 다냐. 우리 경찰과장들을 개좆으로 알고 잡아들일 때 이런 꼴 안 당할 줄 알았냐. 특위 새끼들 씨를 말리고 말 거다!"
꼬꾸라진 채 꼼짝을 못하고 있는 남자를 경찰은 한 번 더 걷어차고 밖으로 나갔다.
그 뒤로도 열네댓 명이 더 잡혀 들어왔다.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이학송은 구석으로 밀려가며 잡혀들어 오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 중에 기자가 세 사람 끼여 있었다.
"기자새끼들 일루 나와!"
문을 박차고 들어온 경찰이 독촉하는 몸짓으로 팔을 휘둘러대며 소리쳤다.
기자 넷은 서로 눈짓만 하며 밖으로 끌려 나갔다.
"이 새끼들, 꼼짝 말고 저기, 저쪽에 서 있어."
경찰이 총대를 가로 잡아 그들을 밀어붙였다. 네 사람은 뒷걸음치며 벽 쪽으로 밀렸다.
"너희들은 꼼짝 말고 여기 서 있어. 움직이면 쏴버린다."
경찰은 협박하고 돌아섰다.
잠시 후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떠밀려 나왔다. 아까보다 많아진 수십 명의 경찰들이 말없는 속에 제각기 움직이고 있었다. 끌려나온 사람들은 줄지어 정문을 나갔다. 그리고 건물 뒤에 대기하고 있던 두 대의 스리쿼터에 실려졌다. 그 스리쿼터는 40명의 경찰들이 타고 왔던 것이었다.
"밀어 박어라, 빨리, 빨리"
사복차림이 권총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수갑을 찬 40여 명은 짐짝 실리듯 스리쿼터 안으로 밀어붙여졌다.
"각자 최대한 빠른 속도로 본서로 귀대한다. 행동개시!"
사복차림이 명령하자 정사복의 무장경찰들은 잠깐 멈췄다가 일시에 작동하는 기계들처럼 민첩하게 움직여 삽시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이학송은 아까부터 경찰들과 잡혀가는 특경대원들의 수를 헤아리고 있었다.
경찰의 수는 밖의 기마경찰까지 합하면 60여 명이 될 것 같았다.
이학송은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이형, 어딜 가오?"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는 아는 척 않고 이학송은 특위 사무실로 뛰었다.
특위 사무실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책상들은 엎어지고 뒤집어지고 해서 제대로 놓인 것이 거의 없었고, 의자들도 부서지고 넘어져 아무 데나 나뒹굴고 있었고, 서류장들이 열어 젖혀진 채 종이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 수라장 속에 두 사람이 박힌 듯 서 있었다. 그건 의외였다.
이학송은 두 사람을 향해 걸음을 빨리 옮겼다. 그는 두 사람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한 사람은 특위 부위원장 김상돈이었고, 또 한 사람은 검찰총장이며 특위 검찰청장인 권승렬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전 국도신문 기자 이학송입니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이학송은 김상돈 앞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그때 세 기자가 우르르 뛰어 들어왔다. 그들은 제각기 신분을 밝혔다.
"아무 할 말이 없소. 경찰이 특위를 습격한 것이고, 여러분이 목격한 그대로요."
김상돈은 중얼거리듯 말하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특위 부위원장으로서 한 말씀 해주십시오. 이건 중대한 위법사건이고, 폭력사태입니다."
어느 기자가 격한 어조로 말했다.
"공식발언은 위원장께서 할 것이고, 일개 경찰이 검찰총장에게 총을 겨누고 위협하여 총을 탈취하는 판이니 이건 위법 정도가 아니고 무법천지요."
김상돈의 얼굴은 비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검찰총장님께서 한 말씀 해주시지요."
"낸들 무슨 할 말이 있겠소.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이야 당신네들도 잘 알고 있을 테니, 목격한 대로 쓰도록 하시오."
"앞으로 특위 활동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거기에 대해서도 공식적인 발표가 있을 것이오."
김상돈의 말이었다.
"그들은 어느 경찰서 소속이었습니까?"
"중부경찰서요."
권승렬이 대답했다.
"지휘는 누가 했습니까?"
"서장 윤기병이오."
"그럼, 그 사람들도 중부서로 잡아갔겠구만.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이학송이 다급하게 자리를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