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르 시랑스 얘기를 하자면 끝이 없다. 손님은 신을 벗고 들어왔는데 손님이 ‘이실직고’하면 대야에 물을 담아 씻게 했다. 자주 대야물을 쓴 것은 김민기와 양병집. 둘은 명동을 걸을 때도, CBS 라디오에 출연할 때도 맨발이었다. 당시 이동원은 고은 선생과 가까웠던 모양이다. 그는 ‘빈센트’를 자주 불렀고 고은 선생은 르 시랑스를 불당 같다고 했다. 군에서 휴가 나온 까까머리 병사들도 있었고 일본항공의 스튜어디스들도 단골이었다.
‘어니언스’가 오는 날이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아가씨가 있었다. 까만 머리, 까만 눈. 조용하고 자그마했다. ‘편지’에 나오는 “말없이 건네주고 달아난 차가운 손”의 바로 그 여자였다. 어느 날이었다. 입구 구석에서 임창제가 “어떻게 하면 좋아요” 하며 작은 체구의 내게 쓰러질 듯 기대었다. 울고 있었다. “딴따라가 싫대요.” 그날 밤 TBC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도 그는 울먹이며 노래를 잇지 못했다.
그들의 두 번째 앨범 녹음 때는 나도 스튜디오에 같이 있었다. 가수들이 최종 녹음할 때는 스튜디오에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것이 상례인데 마장동 이청 기사에게 사전에 양해를 구했다. 안건마씨의 편곡으로 그때로서는 드물게 피아노를 사용한 반주곡에 그들의 노래를 입히는 과정이었다. 아직 ‘짜깁기(음악의 어떤 부분을 수정해 끼워 넣는 작업)’가 안 될 때라 중간에서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불러야 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이에 내가 섰다. 두 사람은 그날 나를 보며 노래했다. 구절구절 나의 반응을 확인하며.
르 시랑스에서 거의 매일 듣던 곡이라 별로 어렵지 않은 작업이었다. 이 음반에서 여러 곡이 크게 히트했다. ‘사랑의 진실’ ‘작은새’ ‘편지’ ‘잊으리라’ ‘외길’ ‘초저녁별’. 요즘도 간혹 ‘편지’를 듣게 되는데 예전과는 감흥이 다르다. 달아났던 그녀가 결국은 돌아왔기 때문이다.
1972년 1월 중순, 예총회장 이해랑 선생의 분부라며 길옥윤 선배가 내게 하나의 과제를 주었다. 돌아오는 3·1절 시민회관 축전에 통기타 가수들을 등장시키라는 것이었다. 일간스포츠 정홍택 기자가 기획을 맡고 라이온스 호텔에 방을 잡아 준비 사무실로 썼다. 김민기, 임문일, 송창식, 윤형주, 투코리안스, 방의경 등 핵심부대가 모여들었다. 저녁때가 됐다. 모두들 자장면 먹으러 가자며 자리를 뜨는데 김민기는 속이 안 좋다며 남아 있겠다고 했다. “그럼 우리 갔다 오는 동안에 다같이 부를 곡 가사라도 생각해봐” 하고 나갔다. 돌아오니 김민기가 머뭇머뭇 종잇장 하나를 내게 건넸다. 가사는 그 자리에서 송창식에게 넘겨졌고 삼 일 만에 곡이 완성됐다. 민족선열을 기리는 자리에서, ‘천재냐 광기냐’의 시대를 맞은 이 땅의 젊은이들이 부를 노래였다.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 누구의 머리 위에 이글거리나 / 피맺힌 투쟁의 흐름 속에 / 고귀한 순결함을 얻은 우리 위에…’(‘내 나라 내 겨레’ 中)
참새를 태운 잠수함’을 몰고
1977년에 구자흥씨의 아우 구자형(방송 작가, 음반기획자)군이 나를 찾아왔다. 1975년부터 대학로 성베다교회에서 워크숍 겸 라이브 스테이지를 계속해왔는데 장소를 옮겨 명동성당 카톨릭여학생관에서 ‘참새를 태운 잠수함’이라는 이름으로 젊은이들의 모임을 매주 갖는다는 것이었다. 모임을 이끄는 MC를 맡아달라고 했다.
‘참새를 태운 잠수함’의 주요 멤버는 강인원, 남궁옥분, 전인권, 명혜원, 이종만, 유성찬, 유한그루, 곽성삼, 한동헌(서울대 경제학과, 서울대 통기타 동아리인 메아리의 대표이자 후일 ‘노래를찾는사람들’의 리더), 박용범(현 조선대 교수) 등이었다. 이홍열도 그때 멤버였고 고교생 개그맨 지망생들도 이 무대에 섰다. 대개 촛불을 켜놓고 진행했고 한때는 함석헌 선생을 초빙해 ‘노자강의’를 듣기도 했다. 내가 참여해서는 박동진 선생을 모시기도 했다.
전인권은 당시 아직 득음(得音)이 안 돼 주로 듣기만 하는 멤버였다. 강인원은 현재 음대 교수이고 남궁옥분은 지금도 공연에 바쁜 몸이다. 모두들 소박한 심성의 젊은이들이었다. 카톨릭여학생회관이라 수녀님들도 적지 않았고 분위기가 늘 숙연해 청개구리집이나 르 시랑스와는 달리 심성을 수양하는 곳 같은 느낌도 있었다. 한동헌이 이끄는 ‘노찾사’가 나중에 사회의 그늘진 곳, 마음이 아픈 사람들과 뜻을 같이하고 쟁의 현장에까지 나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노찾사의 계보에서 일반에 알려진 가수로는 ‘솔아솔아’를 부른 안치환이 있고 그 다음이 윤도현이다.
1977년 제1회 MBC 대학가요제가 열렸다. 서울대 농대 그룹 ‘샌드 페블스’가 대상을 타고 서울공대 트리오가 ‘젊은 연인’들로 동상을 탔다. 한국 스튜디오에서 연습한 팀이었다.
1978년 한국스튜디오를 폐쇄했다. 김도향과 윤형주가 따로 나가 기획사를 차렸고 서로 경쟁할 처지가 아니어서 광고음악에서 아주 손을 떼었다. 나는 다시 비프로 김영훈 사장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분은 나를 받아줬다. 내가 별로 도움을 주지도 못하면서 신세를 진 사람이 김영훈 사장이다.
“저렇게 노래를 잘할 수 있나!”
시간을 의식하며 나의 얘기를 적는 것보다 현장을 따라 공간감각을 더듬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한강, 여의도광장, 파랑새극장, 시청 앞 광장,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일산 아파트 단지 안 벤치와 나무. 남이섬 울창한 숲과 넓은 잔디, 아침에 물가에서 바라본 물안개….
먼저 ‘국풍81’ 때의 여의도광장. 대학생들의 노래 콘테스트가 열렸다. 따가운 햇살 아래서의 공연과 심사였다. 크고 거창한 무대. 그 앞의 넓은 공간. 전체 무대가 한눈에 보일 정도의 자리에 반원 형태로 배치된 약 10석의 심사위원석. 뒤쪽으로 조금 떨어져 맨바닥에 앉은 관객들과 시민. 공연이 다 끝났으니 서둘러 심사를 해야 했다. 이봉조 악단장이 저만치서 벌떡 일어나 반대쪽 끝에 앉은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백천아, 누가 제일 낫노?”
이봉조씨는 나보다 서너 살 위다. 사람 많은 곳에서 유독 “백천아”를 연발했다. 고등학교 동창생말고는 아무도 나를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심사원 모두가 나를 향했다. 물어왔으니 나의 생각을 대답해야 한다.
“서울대 그룹도 좋고 혼자 기타 치면서 노래한 친구도 좋은데…. 솔로 한 친구가 더 좋은 거 같아. 혼자서 그만큼 했으니까.”
“그럼 그렇게 해야지. 그렇게 하자.”
경상도 사나이 이봉조의 결정이 전원의 결정이 됐다. 이용이 대상을 받았다.
이용을 MBC ‘가요콘서트’에서 15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 날은 그가 주인공이다. 그는 여러 곡을 불러야 했다. 그런데 연습중 유난히 눈을 깜빡거렸다. 멈추게 하고 싶었다.
“이용씨! 노래하면서 자신이 낸 소리의 빛깔도 안 봐요? 눈은 왜 그렇게 깜빡거려요?”
바로 며칠 전 그의 삼촌 이종덕(전 세종문화회관장, 전 예술의전당 관장)씨가 내게 부탁한 것이 있었다.
“조카 좀 잘 봐줘. 미국서 돌아왔는데 힘든가봐.”
“가수가 깜빡거리면 듣는 사람이 정신없어요. 깜빡거리지 마세요. 그리고 자기가 낸 소리가 어떻게 듣는 사람의 마음에서 걸러지고 다시 눈을 통해 밖으로 나오는지 살핀 다음 소리를 내봐요. 그렇게 하면 눈 깜빡거림이 없어질 겁니다.”
그는 그날 깜빡이지 않았다. 관객들은 열광했다. 프로그램 게시판에 소감들이 올라왔다. 모두 칭찬 일색이었다.
“감동적이었습니다. 내가 이용씨의 가슴속에 들어가 내내 같이 노래한 것 같은 흥분을 느꼈습니다.”
나도 그렇게 느꼈다. 저렇게 노래를 잘하는 친구가 있나.
전인권이 찾은 ‘무난한 소리’
‘들국화’의 전인권은 한동안 나를 전속 사회자로 삼았다. 대학로 파랑새극장, 신촌 그레이스백화점 공연장,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지하극장. 그는 나에게 MC로서 누릴 수 있는 무한자유를 주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얘기하고 싶을 때는 아무 때라도 끼여들고, 노래를 중간에 중지시켜도 좋고, 연주중 무대를 돌아다녀도 좋았다.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지하극장에서 ‘대학신입생 환영 봄축제’를 40일 동안 열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날 나의 심사는 삐딱했다. 나는 전인권을 추켜올리는 데 지쳐 있었다. 추키지 않아도 충분히 훌륭한 그를 그날도 오프닝 멘트에서부터 틀에 박힌 말로 추켜세우고 싶지 않았다. 무대에 올라 첫 멘트를 했다.
“오늘 따라 좋은 소리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너무 찬란하고 강하고 영웅적인 소리는 스타가 내는 소리이지 마음에 스며드는 소리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면서 소리를 내면 그 앞에 앉은 사람은 무엇입니까.”
바로 옆에서 나를 보고 있던 전인권의 볼에 경련 같은 것이 스쳤다.
“좋은 소리는 어쩌면 무난한 소리가 아닐까요. 흠 잡을 데 없는 편안한 소리. 듣는 사람을 결코 위압하지 않는 소리. 자기 소리보다 남의 소리를 더 소중하게 받들면서 내는 무난한 소리.”
전인권의 콘서트에는 마니아들이 상당수 있었다. 그날 내가 ‘딴소리’를 한 것은 전인권의 또 다른 소리를 들어보자는 것이었다. 그는 놀라운 사람이었다. 늘 그룹의 앞장을 서던 그가 그날은 그룹의 소리를 떠받치는 역할로 변신했다. 사운드가 확 달라졌다. 새로운 투명감이 소리 속에 끼여들면서 우리 모두의 귀가 전인권의 소리를 감싸기 시작했다. 커튼 옆에서 무대를 보고 있는데 천장의 라이트와 바닥의 라이트로 비춰지는 미립자 먼지들이 소리에 취한 탓일까, 마치 요정들이 춤추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럴 수가…!
그날의 기타(김광석), 베이스(민재현), 드럼, 그리고 전인권 네 사람이 어울려 내는 소리는 천상의 음악이었다. 소리에는 밝음도 아니고 어둠도 아닌 또 하나의 유체(流體) 같은, 차원이 다른 공간이 있었다. ‘무난한 소리’에 대한 전인권적 해석이 새 감동을 엮어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