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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산의 알기쉬운 주역 제23회>
제23회: 독재국가와 민주사회
산택손(41) 풍뢰익(42)
♣ 개요 :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는 아름다운 공동체
◆ 산택손山澤損(41) 풍뢰익風雷益(42)
산 아래 호수가 있는 것을 산택손山澤損이라 한다. 산은 남성, 호수는 여성의 상징이다. 그래서 위에 있는 남성이 아래 있는 약한 여성을 억압한다, 또는 착취한다는 뜻이 있다. 또는 독재자가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폭정을 산택손山澤損이라 한다.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와 백성을 착취하는 독재체제를 막고 평등하고 자유로운 민주 시민사회를 어떻게 건설하느냐는 물음이 산택손과 풍뢰익이다.
손損 괘를 보면 아랫것을 빼앗아 위로 올려놓은 모습이다. 즉 지천☷☰태 괘에서 아래 양(구삼九三)을 하나 빼앗아 맨 위(상구上九)에 올려놓으면 산택☶☱ 손이 된다. 산 같은 독재자가 나타나서 자유롭고 태평한 평화의 시대를 깨뜨리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풍뢰익風雷益 괘는 천지비天地否라는 암울한 시대가 변하여 위에 있던 구사의 양이 맨 아래로 내려가 백성을 섬기는 모습이다. 즉 손괘와 반대로 위에 있던 것을 덜어서 아래로 보태주는 것이 풍뢰익이다. 그래서 손損괘는 독재를 말하는 것이라면, 익益괘는 민주주의다.
독재자는 결국 모두에게 손실을 입히고 망하게 된다. 고인 물이 썩어가듯 전체주의 독재는 부정부패와 분열의 모순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재자를 손損이라 한다. 이에 반하여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바탕으로 하는 민주사회는 모두에게 이익이 되니까 익益이라 한다. 지도자에 따라 민주시대가 되기도 하고 독재정치가 나오기도 한다. 그 변동의 원인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독재자의 출현을 막고 민주사회를 유지할 수 있을까?
인류가 문명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이런 물음을 지속하고 있다. 국가라는 집단 이념은 수렴되는 경향이 있는데 반면에 개인이라는 구성원의 자유와 권리는 다양하게 발산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다양성을 다수결의 원칙으로 국가이념으로 수렴할 때 이미 독재의 횡포가 내포되어 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 인민과 민중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얼마나 많은 독재자가 출현하고 있는가. 인간이란 무엇이며 국가란 무엇인가? 내가 있어서 국가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국가가 있어서 내가 있는 것인가? 이렇게 우리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서로 다름의 차이를 극복하고 함께 어울려 하나가 되어야 하는 과제와 마찬가지로 개인과 공동체가 서로 다른 방향과 다양성이 조화를 이루는 어울림의 과제를 안고 있다. 이런 난제를 해결하는 지혜는 무엇일까?
♣ 원문 해석
◆ 산택손山澤損(41). 덜어낼 손損이다. 진실한 성인이 나와야 행복하고 허물이 없어진다. 정직하게 가는 길이라야 한다. 가는 바가 있어 이롭다. 어떻게 해야 할까. 두 그릇이면 제사는 충분하다.
괘를 판단하는 말이다. 손은 아래를 줄여서 위에다 더하는 것이다. 그 길은 위로 올라가는 길이다. 욕심은 줄이고 진실은 늘리는 길이다. 그래서 진리를 깨닫게 되면 행복하게 되고 허물이 없어진다. 정신은 깨야 하고 정진은 계속해야 한다. 어찌할 것인가? 두 그릇이면 제사를 지낼 수 있다고 함은 두 그릇의 정성이 응하는 것도 때를 가져야 하고, 강한 것을 덜어내고 유약한 것을 보태는 것도 때를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줄이고 늘이고 채우고 비우는 것은 다 때에 따라서 가는 것이다.
괘상을 보며 말한다. 산 아래 연못이 있는 것을 손이라 하는데 독재정치의 상징이다. 군자는 이것을 보아 화를 징계하고 욕심을 막는다.
◆ 손이유부損而有孚하니 원길元吉하고 무구无咎하다. 가정可貞이니 이유유왕利有攸往이니라. 갈지용曷之用 이궤가용향二簋可用享
단왈彖曰 손損은 손하익상損下益上이니 기도상행其道上行이니라. 손이유부損而有孚하면 원길무구元吉无咎하며 가정可貞이니 이유유왕利有攸往이니라.
갈지용曷之用 이궤二簋 가용향可用享이니 이궤응二簋應이 유시有時요 손강익유損剛益柔이 유시有時이니 손익영허損益盈虛는 여시해행與時偕行이니라
상왈象曰 산하유택山下有澤이 손損이니 군자이君子以하여 징분질욕懲忿窒欲하니라.
♣ 내용 풀이 : 진리를 깨닫는 길
아랫것을 착취하여 위에다 보탠다는 의미의 산택손山澤損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군주가 백성을 착취한다는 독재가 된다. 한편 개인의 실존에 적용하여 덜어낸다는 손損의 뜻을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노자 48장을 보면 위학일익爲學日益이요 위도爲道는 일손日損이라는 말이 나온다. 즉 노자가 말하길 학문의 길은 날마다 쌓아가는 것이지만 수도의 길은 날마다 덜어낸다는 말이다. 무엇을 쌓고 무엇을 덜어내는가? 학문과 지식을 쌓는 것은 학자의 길이요 욕심과 거짓 자아를 덜어내는 것은 도인의 길이다. 그래서 수도의 길을 증도손생增道損生이라 한다.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덜어낸다는 말이다. 공자로 말하면 살신성인殺身成仁이다. 자기를 바쳐서 인仁을 이룬다는 뜻이다.
역사를 보면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고 착취하는 독재자가 나와서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때도 있고, 이런 독재를 바로잡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바쳐 정의와 평화를 이루자는 깬 사람들이 나오는 때도 있다. 백성의 것을 빼앗아 권력자에게 바치는 독재정치를 바로잡으려면 자기를 덜어내는 깬 사람, 즉 성인이 나와야 하고 또 백성들도 깨어서 바르게 되어야 한다. 이렇게 손괘를 볼 때 이중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자기 자신을 덜어낸다는 실존적 의미와 백성을 착취한다는 정치적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덜어내서 무아가 된다는 것은 곧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즉 본문에서 말하는 유부有孚와 가정可貞이다. 진실을 가져야 한다는 유부有孚는 달리 말하여 깨달은 선생을 만나야 한다는 뜻이다. 또 올바른 길을 가야 한다는 가정可貞이란 자기가 깨닫기까지 계속 정진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선생님을 찾아야 하고 선생님을 만나서 진리를 깨닫기까지 줄곧 노력을 그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결국 이유유왕利有攸往이다. 뜻하는 바를 이루어 진리를 깨닫게 된다.
성경에서는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다고 한다. 거룩해진다는 말은 진리를 깨닫는다는 말이나 같은 것이다. 선생님을 통해 말씀을 배우고 배운 말씀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깊은 묵상과 돈독한 믿음과 실천이 필요하다. 이런 믿음과 실천의 길을 기도라 하는데 이것을 의식儀式으로 정하여 실천하는 것이 제사요 예배다. 제사가 현대적 의식으로 발전한 것이 예배이다.
제사를 지낼 때 무엇을 가지고 지내나? 제사 지낼 때 여러 가지를 차려 놓고 지내는데 여기서는 이궤二簋, 두 그릇이면 된다고 했다. 제사를 올릴 때 두 가지면 충분하다는 말이다. 두 가지는 무엇인가?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이다. 즉 몸으로 정성을 다하고 마음으로 진실을 다하여 자기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몸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라 한다. 유교는 몸과 마음 두 가지를 말하는데 기독교는 셋으로 말한다. 한마디로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떻게 진리를 깨닫는가? 욕심은 줄이고 정신은 늘리는 것이 요령인데 그것을 중용에서 유정유일惟精惟一이라 한다. 유정유일惟精惟一이 진리를 깨닫는 방법이다. 정신을 일깨워 계속 정진해야 마침내 사람다운 사람이 된다. 공자도 15에 지우학志于學이요 30에 입立이요 40에 불혹不惑, 50에 지천명知天命, 60에 이순耳順, 70에 불유구不踰矩라 했다. 10년씩 계속 정진하여 올라간다. 이렇게 구도의 길은 올라가는 것이다. 기도상행其道上行이다. 그 길은 올라가는 길이다. 오랫동안 계속해서 정진하며 올라가야 무엇이건 되지 갑자기 되는 일은 없다. 아는 것은 순식간에 알아챌 수도 있지만, 예술가나 전문가가 된다든지 무엇이 되는 것, 그 되는 일은 많은 시간이 걸린다. 특히 사람다운 인격이 되는 것은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돈오점수頓悟漸修라 한다. 깨닫는 것은 하루 아침에 될 수 있지만 아름답고 깨끗한 사람, 성인이 되는 것은 일생을 노력하며 수행을 해야 한다.
자기를 바치는 제사에서 두 가지면 족하다. 몸의 욕심은 줄이고 마음의 생각과 지혜는 늘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선생님을 가져야 한다. 학생과 선생님이 함께 노력해 가면 마침내 형통하게 된다. 두 마음이 응하여 마침내 하나가 된다. 그런데 이것은 한꺼번에 되지 않는다. 시간이 걸린다. 일정한 때를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때를 가져야 한다는 말은 춘하추동이라는 4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말이다. 춘하추동의 때를 거쳐야 무엇이 완성이지 때를 갖지 않고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때에 맞춘다고 시중時中이라 한다. 때를 맞춘다는 것은 춘하추동에 맞추어 발전한다는 말이다. 선생님과 함께 춘하추동에 따라 계속 발전해 가면 학생은 선생님의 사랑으로 생명을 얻게 된다.
사계절의 때를 여기서 손익영허損益盈虛라 했다. 손損은 껍데기를 벗는 봄이고 익益은 잎이 무성한 여름, 영盈은 열매가 알찬 가을이요 허虛는 텅 빈 겨울이다. 겨울은 텅 비어서 무아無我가 되는 때다. 가을은 꽉 차 있는 때다. 여름은 차차 무성하게 되는 때다. 봄은 싹이 트는 때다. 이런 4단계의 때에 맞추어서 때와 함께 가야 한다. 유교에서는 이런 과정을 인의예지仁義禮智라 한다. 이렇게 인의예지로 가야지 갑자기 되는 게 아니다. 춘하추동의 시중을 거쳐 성인成仁, 즉 사람이 되자는 것이 여시해행與時偕行이다.
괘상의 뜻을 풀어본다.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독재의 모습이 산택손인데 나라의 지도자는 이런 손괘를 보고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징분질욕懲忿窒欲이다. 분노하는 마음을 고치고 욕심을 막아야 한다. 즉 권세욕을 막고 물욕을 버려야 한다. 권세욕과 물욕으로 가득한 사람이 독재자다. 그런 독재자가 나타나지 않도록 징분질욕懲忿窒欲해야 한다. 그래서 권력욕과 물욕이 없는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고 산처럼 높아지려는 권세욕과 아랫것을 빼앗아 산처럼 쌓아두려는 물욕을 가진 사람이 권력을 잡으면 독재자가 된다. 백성들은 이런 독재자가 나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야 한다.
♣ 원문 해석
◆ 풍뢰익風雷益(42). 익은 민주정치다. 가는 바가 있어서 이롭다. 큰 강물을 건너가니 이롭다.
괘를 판단하여 말한다. 익益은 위를 덜어서 아래에 보태는 것이니 백성들의 기쁨이 끝이 없다.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니 그 도가 크게 빛나게 된다. 가는 바가 있어서 이롭다 함은 중정中正이 되어 경사慶事가 있다는 말이다. 큰 강을 건너감이 이롭다. 배를 타면 마침내 강을 건너가게 된다. 참된 민주적 철인정치가 되면 모두가 기쁨으로 활동하고 겸손하게 섬긴다. 그래서 날마다 발전하여 나아감에 끝이 없다. 하늘은 베풀고 땅은 생육하니 그 풍성함이 끝이 없다. 무릇 익益이라는 민주정치의 길은 언제나 때와 함께 가는 것이다.
괘상을 보며 말한다. 바람과 우레를 익益이라 하니 백성의 바람과 하늘의 우레가 일치하는 민주정치의 상징이다. 군자는 이를 본받아서 선을 보면 옮겨가고 과오나 과실이 있으면 바로 고친다.
◆ 익益은 이유유왕利有攸往이요 이섭대천利涉大川이니라.
단왈彖曰 익益은 손상익하損上益下이니 민열무강民說无疆하니라. 자상하하自上下下하니 기도대광其道大光이요 이유유왕利有攸往이니 중정유경中正有慶이니라.
이섭대천利涉大川이니 목도내행木道乃行이니라. 익益은 동이손動而巽이니 일진무강日進无疆이요 천시지생天施地生이니 기익무방其益无方이며 범익지도凡益之道이니 여시해행與時偕行이니라.
상왈象曰 풍뢰익風雷益이니 군자이君子以로써 견선즉천見善則遷하며 유과즉개有過則改하니라.
♣ 내용 풀이 : 과학과 종교의 상생
풍뢰익風雷益은 맏딸(풍風)과 맏아들(뢰雷)인데 말하자면 어른이요 철든 사람이다. 철든 어른은 위에 있는 것을 가져다 아래에 베풀어준다. 왕이 창고를 풀어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사랑이다. 이렇게 왕이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왕과 백성 모두에게 이익이다. 옛날의 왕도정치의 이상은 이제 민주정치로 변화되었다. 권력을 승계하던 왕조에서 이제는 시민의 권력을 위임받은 사람이 법과 제도에 따라 민주복지사회를 이루어 간다. 이런 민주사회는 계속 발전한다. 왜냐면 백성들이 모두 좋아하기 때문이다. 민주정치를 막을 사람은 없다. 민주사회의 지도자는 백성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즉 국민의 복지와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위에서 내려오는 햇빛처럼 만물을 살려주는 이런 정치가 민주정치요 복지국가의 이상이다. 그러면 백성들이 얼마나 기뻐하겠는가.
가는 것이 이롭다고 하는데 어디까지 가는가? 중정中正이다. 산을 오를 때 맨 꼭대기에 올라간 것을 중정中正이라고 한다. 중中이란 한 가운데로 치우치거나 의지하는 것이 없으며 모자람이나 지나침도 없다는 뜻이요, 정正은 올바르며 정직하게 본래의 자리에 올라가서 주인이 된다는 뜻이다. 맨 꼭대기가 중中이요 거기에 가서 정직하게 앉아서 올바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정正이다. 맨 꼭대기에 가서 앉은 것, 이것을 독좌대웅봉獨坐大雄峯이라 한다. 중정中正이란 이처럼 온 천하의 한가운데, 똑바로 앉아서 바르게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통령으로서 좌우에 치우침이 없고, 또 무엇이나 올바르게 해나가는 것이 중정이다. 그래서 중정中正이란 다른 말로 빛과 힘을 가진 존재, 즉 정직의 힘과 사랑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온 백성의 중심을 잡은 자리에서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각자의 몫을 갖도록 정의를 구현해야 한다. 그래야 백성들이 기쁘고 행복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목적하는 바는 중정中正이라는 이상세계다. 그런데 그 목적지에 이르려면 험난한 강을 건너야 한다. 그래서 험한 강물을 건너가기 위해 꼭 필요한 수단이 목도木道라는 것이다. 목도木道란 무엇일까? 요즘으로 말하면 과학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바라는 이상세계가 무엇인지를 구하는 일이 종교요 그 목적지에 이르는 길을 찾는 것은 과학의 일이다. 따라서 종교의 내용은 한마디로 사랑의 세계요 과학의 내용은 지식이요 지혜라 하겠다.
미국 실용주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1842-1910)에 따르면 종교는 삶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고, 과학은 인간의 현실적 문제들을 해결하여 우리 사회를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보다 나은 삶의 수단을 제공하는 과학, 그리고 삶의 의미와 목적을 제시하는 종교, 이 둘은 상호 보완적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는 과학의 목적이요, 과학은 종교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현대의 종교와 과학은 서로 보완하고 통합되는 방향으로 가기보다는 각자 독립적으로 진행되어 과학과 종교가 모두 제 길을 벗어나고 있는 것 같다. 즉 과학은 인간의 삶의 의미와 목적의 방향성을 고려하지 않고 무한 질주하고 있으며, 종교는 과학을 무시하고 독단이나 망상 또는 공론에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특히 인공지능, 생명공학, 유전공학, 핵물리학, 우주과학 등 첨단 과학들이 인류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지 충분한 철학적 종교적 고려와 검토 없이 그저 자본과 권력의 욕망에 이끌려 진행될 때 인류가 미처 예상치 못한 참담한 비극을 초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이 탑재된 킬러로봇 등이 우리 주변에 횡행하는 시대가 온다면 얼마나 끔찍하고 공포스러울까.
이런 의미에서 종교인들이 과제는 무엇보다 첨단 과학기술을 이해하고 그들의 움직임과 위험성을 경고하여 방향을 바로 잡는 예언자적 역할이 아닐까. 그런데 그 첨단 과학기술을 이용하려는 자본과 권력의 거대한 집단의 욕망과 힘을 누가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맹목적 과학만능주의로 인하여 지구환경과 생태계 파괴에 이어 인간성 파괴로까지 나아가지 않을지 염려스럽다. 과학과 종교가 하나가 되어 인류를 행복으로 이끄는 이상세계, 그것을 무엇이라 할까. 일단 민주적 철인정치라 해본다.
풍뢰익風雷益 괘卦에서 바람 풍風을 종교, 번개와 우레의 뢰雷를 과학이라 하여 과학과 종교가 하나 되는 민주적 철인정치를 익益이라 본다. 인간의 활동과 생활을 위해 필요한 것은 힘을 얻는 과학적 지혜와 아울러 종교적 헌신과 겸손함으로 섬기는 진실한 사랑이다. 민주적 철인정치는 종교의 사랑과 과학의 지혜로 날마다 발전하게 될 것이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날마다 새롭게 발전하는 기쁨이 있어야 행복한 세상이다. 하늘은 위에서 햇빛도 내려주고 비도 내려주어 사랑을 베푼다. 이것은 종교의 역할이다. 그리고 땅에서는 생물들을 자꾸 내놓는다. 과학은 인류에게 꼭 필요한 새로운 기술을 자꾸 내놓는다. 그래서 그 종교적 사랑과 과학적 지혜의 풍성함이 끝이 없다. 이처럼 땅과 하늘이 만물을 살려주듯 과학과 종교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돕고 서로 살려주는 것이 민주적 철인정치다.
그 길은 때에 따라서 시민이 주인으로 깨어나 시민의 권리를 주장하는 때도 있고, 시민의 판단을 존중하고 시민의 뜻에 따라 선택하는 때도 있고, 또는 모든 시민의 삶과 생명을 위해서 활동하는 때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민이 깨어야 한다. 즉 깨어난 시민들의 민주정치가 민주적 철인정치라는 것이다. 이런 민주적 철인정치는 때를 따라서 민권이나 민주 또는 민생이 강조되는 것이다.
바람과 우레가 익益이다. 바람은 종교적 사랑이요 우레는 과학적 지혜이다. 군자는 이를 본받아 선을 향해서 옮겨가고 허물을 고쳐야 한다. 종교의 역할은 인간이 선善의 이데아라는 이상을 향하여 옮겨가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기술은 세상에서 불편하고 부족한 점이 있으면 찾아 고치는 활동이다. 종교는 전체의 뜻을 보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고 과학은 개별적 구체적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발밑의 땅을 살펴본다. 그래서 종교는 수렴적이고 통합적인데 과학은 분석적이요 발산적 경향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종교와 과학의 두 눈을 가지고 현실을 고쳐서 이상을 향해 올라가는 사람이 깨어난 민주적 시민이라 하겠다.
깬 시민이 되려면 나무를 보는 과학과 숲을 보는 종교라는 두 가지 눈을 떠야 한다. 과학의 눈을 뜨지 못한 종교인이나 종교의 눈을 뜨지 못한 과학자나 모두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두 눈을 뜨고 사는 시민들이 필요하다. 그렇게 깨어난 시민들이 모인 민주적 철인정치라야 인간의 현실을 이상으로 바꾸는 지혜를 얻게 되고 또한 그 지혜를 가지고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나라 공동체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 엔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