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누스 황제 개선문과 네로 황제)
우린 콜로세움을 나와서 포르로마노로
향하였다. 그곳 초입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선문이 있다. 이
개선문은 포르로마노가 생긴 역사로 볼 때 가장 늦게 들어선 서기 315년에 지어진 개선문이다. 그 년대라 하면 로마로서는 최후의 노력을 경주하던
때라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닌 때이다. 이 개선문은 로마제국 최후의 걸작 건축물로 손꼽는 데 특이한 점이 많다. 개선문은 4세기에 건조된
것이지만 본체와 장식이 모두 그 이전에 만들어진 것을 가져다 붙인 패치워크(PATCH WORK)로 이루어졌다. 손쉽고 안이하게 만들어진
건축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를테면 개선문 정면과 뒷면의 맨 위층에 늘어서 있는
것은 다키아 포로들의 군상이다. 다키아는 트라야누스황제( 서기 98년대)가 정복하였으니 필시 그의 것에서 떼어온 것이다. 이와 같이 그
개선문에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서기 117년)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서기 161년)의 것이 박혀있다. 그렇지만 이것저것 갖다가 붙인 것이
오늘날 유명한데는 어쨌든 문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문 양쪽에 팔라티노 언덕과 첼리오 언덕이 다가와 있고 앞쪽엔 콜로세움이 배치되어 있으니
건축물의 균형과 조화에서도 더할 것이 없는 위치다. 나는 어느 면 패치워크를 한 것이 결과적으론 외려 잘된 것이 아닌가 싶다.
2세기와 4세기 부조를 그나마 같이 본다는 것이
천만다행이다 싶다. 실제 트라야누스나 하드리아누스의 작품들을 떼어온 것으로 추정되는 문들은 남아 있지를 않다. 그런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또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로마시대엔 승전보를 올리면 개선행진을 했다. 하얀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에 눈이 파란 게르만 기사를 앞세우고 그 뒤에
황제가 올라타 개선의 팡파레를 울렸다. 다키아 같은 북방을 이겼을 땐 플라미니아라는 북에서 로마로 향한 가도를 이용하고 저 멀리 동방을
징벌하였을 땐 아피아가도로 통하여 포르로마노에 입성을 하였다. 로마시민의 환호 속에 그날은 검투사 경기도 행하여지고 황제는 유피테르 신전에
올라 제를 올리는 것이 통례였다.
그런 로마이니 개선을 하는 황제를 기념하는
청동기마상이 없을 리 없다. 그러한데 22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기마상 중 현재 남은 것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마상밖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이 청동기마상은 르네상스시절 교황의 신임이 두터운 미켈란젤로가 카피톨리노 언덕을 재활성화 하기위하여 로마도심 남쪽 끝에 어느 교회
광장에 방치된 것을 옮겨다 놓았다고 한다. 4세기 말 기독교도들이 이교의 성소인 신전과 미술품들을 마구 파괴했을 때 다른 기마상들은 모두
녹여서 다른 것으로 전용을 하였는데 이 황제의 것은 기독교를 공인한 최초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로 잘못 알았기 때문 유일하게 남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한 연유로 이 콘스탄티누스 문 또한 오랜 세월
아무 탈 없이 지켜진 것이 아니겠는가 싶다. 변천하는 시대 속에 인물들은 후세에 들어 달리 대접받고 달리 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로마의 황제들은
죽고 나서 원로원에서 신격화 시키는 경우도 있었지만 정반대로 기록 말살 형 이란 선고를 받은 황제들도 있다. 그런 황제들은 집권 시 이룩한 모든
문서가 지워지고 건축물 이름도 떼어지고 만다. 대표적인 황제가 네로황제다. 폭군으로 알려진 황제이지만 나는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문 네로 황제는
반대급부 적으로 후세에 상대적으로 조금은 심하게 비하된 억울한 점이 있다고 본다.
네로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양자이다. 클라우디우스는
몸이 불구였다는데 그의 어머니 안토니아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아우구스쿠스의 누나인 옥타비아 사이에 태어난 딸이니 공화정 말기에 벌어진
권력투쟁의 두 주역 가운데 안토니우스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겐 외조부가 되고 아우구스투스는 외조모의 남동생이 되는 셈이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손잡고 아우구스투스한테 패하여 죽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아들 딸 들을 가족으로 키워서 결혼까지 시켜준다. 클라우디우스는
도버해협을 건너 브리타니아(지금의 영국) 원정을 하여 대승하였으며 국영우편제도를 개설 하고 노예해방 제도 법을 만들고 오스티아 가도 끝에
클라우디우스 항을 짓는 등 통치가 상당히 훌륭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이지만 23세의 메살리나란 젊은 황후는 잘
다스리지 못하였던 모양이다. 그녀는 허영심과 물욕만이 아니라 성욕 또한 대단하였다고 한다. 문란한 생활 끝에 그녀는 결국 그의 비서관으로부터
살해된다. 현대 이탈리아 말로 ‘메살리나’라 하면 성욕을 억제하지 못하고 아무하고나 자는 여자의 대명사로 쓰이는 것은 바로 이 연유이다. 이후
클라우디우스는 아그리파나란 황후를 맞이한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인 도미티우스를 양자로 삼도록 클라우디우스에게 설득을 한다. 그가 바로 네로
황제다. 그의 어머니 아그리파나는 야심이 많은 황후였다. 버섯요리를 좋아하는 클라우디우스는 서기 54년 독버섯을 먹고 죽고 마는데 그의 죽음은
독살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어쨌거나 네로는 그가 죽자마자 증여 금을 약속하여
근위대의 지지를 얻어내고 원로원도 권한 부여를 하여 황제가 된다. 그의 나이 이제 17세이니 그의 뒤를 봐주는 것은 그의 어머니였을 것이
분명하다. 네로의 집권초기 5년은 선정이었다고 역사가들은 평한다. 네로는 아우구스투스 정치로 돌아갈 것이며 원로원권리를 존중하고 황제는
사법집행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다. 바로 그의 뒤엔 세네카라고 하는 로마를 대표하는 철학자인 그의 스승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네카의 이론
‘관용’을 따라 황제 네로가 정치를 시작한 것임엔 틀림이 없다. 그런
그는 코르불로란 장군을 적절히 잘 기용하여 동방 강국 파르티아와의 외교 강화로 그 지역에 50년이란 긴 평화를 이루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일일이 간섭하는 그의 어머니 아그리파나를
살해하고 그이 아내도 암살하고 훗날 황제를 암살하려는 음모라 하여 그의 스승도 죽게 한다. 그는 가수로 데뷔하여 노래를 즐겼다. 폼페이우스
극장은 노래하는 황제를 보러 초만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리스 여행에서 자작곡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한 네로는 개선식을 한다. 전통에 따라 네
필의 백마가 끄는 전차를 탔지만 그리스 식으로 월계관을 쓰고 그는 로마의 최고신이 있는 카피톨리노 언덕에 올라 유피테르 신에게 감사드리는
대신 포르로마노에 들어서자 바로 왼쪽으로 구부러져 팔라티노 언덕에 아폴로 신에게 달려갔다고 한다. 아폴로신은 예술의 수호신이다. 그런 그는
로마 올림픽을 개최하여 시들해진 그의 인기를 만회하려 무던히도 애썼다.
그런 그의 행실에 불만이 많은 것은 당연 전방에 주둔한
군단이었을 것이다. 전방시찰은 한 번도 행하지 않은 네로황제다. 그들이 궐기를 하자 로마시민들이 식량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것을 계기로
그에게 등을 돌리고 원로원도 그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한다. 결국 그는 버림받은 황제로 자살을 하고 만다. 그런 네로는 후세에 이르러 가장 이름이
많이 알려진 황제이다. 마치 로마황제의 대표자처럼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로마제국 시대엔 그렇지 않았다. 이는 아마도 로마가 멸망하고 세계의
주인공이 기독교도로 바뀌고 정착한 평가가 아닐까 싶다.
서기 64년의 기독교 박해사건이 네로를 로마역사상
최고로 유명인으로 만든 것이란 생각이다. 어릴 적 보았던 쿼바디스란 영화가 바로 그런 관점으로 네로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네로의 기독교도
박해라는 것은 이념적인 정책의 것이 아니다. 로마에 대화재가 나자 시민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황제로선 원성을 잠재울 필요가 있었다. 그러한 때
지하 동굴에서 촛불예배를 보는 기독교인들을 방화죄로 뒤집어 쒸운 것이다. 당시 유대인 사회는 당시 포파이아 황후라는 보호자를 갖고 있었다.
체포는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밝히면 고문하여 다른 사람들을 고발하도록 하느 식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때 순교한 사람이 3백 명이라고 한다.
그들은 지금의 바티칸이 자리한 경기장에서 처형되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 자리는 칼리쿨라 황제가 자신의 대전차경기 연습장으로 지었다는 곳이 아닌가 싶다. 들개 떼에 물려 죽게 하던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던지 산 채로 불을 붙여 죽이던지 잔혹하게 처형을 하였다고 한다. 역사기록을 한 당대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이렇게 말했다.“ 이들이 더
무거운 죄를 지었다고 해도 처형방식의 잔혹함은 그것을 보는 시민들의 동정심으로 가득 채웠다. 시민들은 알고 있었다. 기독교도라고 불리는 그들에게
그토록 잔혹한 운명을 내린 것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 한 사람의 잔인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임을.”
네로는 악명으로 세계에 이름 드높인 사람 중 하나이다.
기독교인들을 그야말로 잔혹하게 처형하였다. 하지만 이를 계획된 정책적인 박해로 보기는 어렵다. 실제 기독교 박해는 서기 300년대에 들어서
공식화 된다. 기독교도 까지도 현제로 평하는 황제 시대에 기독교 박해가 그렇다면 없었을까. 하다못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때도 리옹의 기독교도
사회를 탄압했었다. 어느 면 네로가 로마에 한정지어 박해를 하였듯 그들도 탄압 이유가 사회질서 확립이라는 목적으로 지역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실제 박해가 제국 전역에 미치게 된 것은 서기202년 셉티미우스 세루스 황제이다.
그런데도 기독교도들은 네로를 반그리스도의 괴수쯤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극악한 잔혹함으로서 성스러운 종교를 극명하게 표출하고자 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네로의 잔인함으로 기독교는 더욱
드높은 성스럽고 거룩한 종교로 인식되어졌다. 그 당시 잔혹을 목격한 로마시미들이 동정심을 그렇게 갖기 시작하였듯이. 그런 점에서 못내 억울하다
하는 말을 네로 황제는 무덤에서 할지도 모른다. 실제 그가 죽자 그의 무덤엔 꽃이 늘 있었다고 한다. 그 시대 네로 황제는 치적을 쌓은
역대 어느 황제 못지않은 인기를 갖고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변천하는 시대 속에 인물들은 후세에 들어 달리 대접받고 달리 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그가 그러하고 콘스탄티누스가 그러하듯이. 역사란 또 바로 그러한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