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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즐겨먹는 술은 소주, 안주는 삼겹살!
그 삼겹살과 함께 소주한잔이면 하루의 스트레스가 확~ 날아가버린다는
애주가 친구들을 위해~~!!
전국의 소주들을 다 모아보았습니다.
천연대나무숯 알카리소주 설탕을빼고 핀란드산 순수과당을 사용한 참이슬후레쉬 19.5% (진로Hite소주) 서울
청정수로 만든 알카리 환원수 회전파동공법을 통한 알카리소주 처음처럼 19.5% (두산소주, 구 :경월) 강원,경기
초정리 천연암반수와 백토에서 여과시키고 아스파라긴을 함유한 시원한청풍 20%(충북소주)
숲속산소를 효과적으로 용존시킨 산소블렌딩시스템의 숲속에서맑을린 19.5%(선양) 대전
아스파라긴을 첨가하여 분자여과공법을 사용한 참스페셜 19.7%(금복주) 대구,경북
자일리톨을 첨가한 화이트소주 20%.좋은데이16.9%,더좋은데이19.9%(무학)마산 경남
음향진동숙성공법과 필수 아미노산을 첨가한 C1 20%, CU 16.9%(대선)부산
맥반석, 참숯여과, 아미노산첨가, 약 알카리소주 하이트 20%(하이트주조, 구 :보배) 전북
화산암반수를 사용하고 첨단 냉각공법으로 만든 한라산물순한소주 21%(한라산) 제주도
초순도 주정정제공정과 특허받은 숙성촉진공정으로 숙성미를 살리고
소주의 80%를 차지하는 물의 중요성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물좋기로 유명한 장성군
영천리의 방울샘 천연암반수를 사용하고 유기농 메이플시럽의 싱그러움을 듬뿍 담았으며,
또한 5단여과공법으로 뒷맛까지 깔끔한
여린잎처럼 순하고 부드러운 19.5도 메이플소주 잎새주 +ㅁ+ (보해양조) 전남
2%부족함을 느끼는 매니아 여러분들을 위한 쌀보리 곡물주정을 함유한 소주의참맛 22% 천년잎새.
◎ 우리나라 술의 종류와 역사
술의 기원이 인류사회에서 민족의 형성과 더불어 원시생활 시대이래자연발생적으로 출현하였던 을묘의 일종이라는 견해가 오늘날 지배적으로 대두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고삼국사기(古三國史記)>에서 밝혀지고 잇는 바와 같이 고구려를 세운 주몽 또는 동명성왕의 건국신화 가운데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웅심연(熊心淵)가에서 하백의 딸 세 자매를 취하려 할 때, 미리 술을 마련해 놓고 이것을 먹여 취하게 한 다음 수궁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세 처녀 중에서 큰딸 유화(柳花)와 인연을 맺어 주몽을 낳게 하였다는 설이 있고 보면 우리나라의 술의기원 또한 신화 속에서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다.
삼국 형성기에 이미 전래곡주(傳來穀酒)가 그 바탕을 이루어 예,부여,진한,마한 사회를 비롯하여 고구려에서 제천, 영고, 제귀신 동맹등 제행사(諸行事)에서 주야음주가무(晝夜飮酒歌舞)한 바 있었고 특히 고구려에서는 건국 초기(A.D.28년)에 지주(旨酒)를 만들어 한나라의 요동태수를 물리치는 등 주조기술이 뛰어나 중국인들 사이에 자청선 장양(自菁善藏釀)하는 나라로 주목을 받은 바도 있엇다.
이때에 이미 우리나라는 주국(酒麴)과 맥아(麥芽)로 술빚는 방법을 익히고 잇엇고, 이주국을 이용하여 곡주를 빚는 기술을 일본 응신 천황때에 백제의 인번등을 통하여 우리나라의 주조기술이 일본에 이전되엇던 까닭에 후세에 가서 주신으로 추앙을 받은 사례가 일본의 <고사기(古事記)>에서 확인되었다.
삼국시대 후기에는 백제의 주조기술이 중국과 대등할 정도로 발전을 보아 <주서(周書)>에는 주(酒) 예문화(醴文化:감주문화)가 중국과 대등하였다는 사실이 전해지고 있었고, 이에 따라 주국을 이용하여 청주/탁주가 빚어지고 또 맥아 또는 주국을 이용한 감주가 빚어지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이 시기에는 신라 청주를 비롯하여 고구려 청주가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의 고하주를 낳게 하였거나 당대의 문사들 사이에서 애상(愛賞)되고 있었다.
통일신라시대로 내려오면 곡주류의 여러 주품들이 개발되기 시작하엿고 상류사회에서는 청주류가 성행되고 있었으며 술은 간장, 된장, 젓갈등과 함께 기본 폐백음식으로 이용되고 있엇을 뿐 아니라 그밖에 고등발효식품들과 함께 양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고려시대로 내려오면 전래의 곡주류 양조법은 그 정착차원을 넘어서 전기(前期)중에 청주류, 탁주류, 중양주류, 재주류(막걸리), 감주류등의 전통적인 주류의 양조기술은 더욱 심화되었고, 과실류등을 혼양하는 혼양주조법이 새로 개발됨과 동시에 약재를 혼양한 약용혼양주조법도 아울러 자리를 잡고 있었고, 재제주류(再製酒類)에 속하는 자주류(煮酒類) 양조기술 또한 정착을 보고 있다. 주국(酒麴)의 종류도 다양화되고 전래의 소맥국(小麥麴) 위주에서 미국(米麴)이 병행되고 있었으며, 미국을 이용한 특별한 술로는 이화주(梨花酒)가 정착되고 있었다.
곡주양조법을 바탕으로 하는 양조기술이 고급화됨에 따라 주조사상 주목할 일은 조선조까지 전해지고 있었던 유명주품의 명칭이 고려조에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고급 청주류로 황금주(黃金酒), 벽향주, 삼해주(三亥酒), 유하주(流霞酒),춘주(春酒), 녹파주(綠波酒), 구하주(九霞酒)등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의 청주의 대표로 알려져 왔던 방문주(方文酒:일명 백하주(百霞酒))가 이때에 이미 자리잡고 있었고, 조정에서는 특급 청주류인 청법주(淸法酒)와 선온주가 보편화되고 있었다.
또한 삼중양조법을 바탕으로 한 삼해주, 춘주 등의 개발은 양조기술의 고도화에 따른 소산물의 하나였다. 탁주류 가운데서도 우리나라 고유의 특급탁주로 내외에 알려졌던 이화주(梨花酒)도 이때에 정착을 본 것이며, 혼탁주류에 속하는 부의주, 녹의주 또한 고려조에서부터 그맥이 이어진 것이었다. 양용혼양주로 이름난 계주(桂酒), 두주(杜酒), 초주(椒酒), 초백주(椒栢酒), 창포주(菖蒲酒), 애주(艾酒)등이 또한 이때에 자리잡은 술들이고 과실 및 화엽입주법(花葉入酒法)을 바탕으로 한 혼양주로는 국화주(菊花酒), 죽엽주(竹葉酒), 백자주(栢子酒), 송주(松酒), 오가피주(五加皮酒)를 비롯하여 포도주가 있었다. 그 밖에도 중탕법을 새로 도입하여 재제주류인 자주류(煮酒類) 또한 고려조에서 비롯된 것들의 하나이다.
고려시대가 마침 곡주양주문화의 성숙기를 맞이하였던 것은 국내적으론 양조기술의 축적의 결과라 할 수 있었겠지만 또 하나의 중요원인으로 분석되고 있는 것은 국내적으로 안정세가 유지되고 있었던 반면에 국력의 신장과 더불어 대외적인 교섭이 활발해진 것도 그 원인으로 찾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고려시대 전기중에 유입된 외래주만 보더라도 북방계민족으로부터는 중산주(中山酒)를 비롯한 행인자법주(杏仁煮法酒), 계향어주(桂香御酒) 등 유명 청주 및 약용 자주가 유입되고 있었고, 멀리 남만사회로부터는 화주(花酒)란 과실주문화가 흘러오고 있었다.
이와같이 대외주의 접촉이 활발해지는 가운데 고려조 후기로 접어들면 이와같은 움직임은 더욱 확산되어 몽고와의 접촉을 통하여 마유주문화를 접수하였고, 중국 원나라를 거쳐 멀리 서역사회의 포도주문화를 수용하기에 이르렀으며, 중국으로부터는 계속 특급 청주류인 상존주(上尊酒), 백주(白酒)등이 유입되고 있었다.
이와같은 움직임 속에서 우리나라 주류사상 중요한계기가 되었던 것은 증류주문화가유입되었다는 사실이다.
고려말엽에 유입된 증류주문화의 유입경로를 보면 아라기주문화가 몽고 또는 대식상인을 통하여 충렬왕 초기중에 유입하였고, 뒤이어 원나라와의 교섭이 활발해지는 동안 중국에서 창시된 소주문화가 흘러 들어왔다.
이들 증류주문화가 유입되자마자 곧바로 이 땅에 증류주문화가 개화되었고 증류주문화는 정착과 동시에 그뵤속도로 발전하여 증류법을 바탕으로 한 노주(露酒)가 탄생하였고, 이 증류법을 바탕으로 한 재제주류 또한 속속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개발된 것 중 일차증류주로는 노주와 함께 홍로(紅酒)가 있었고 고차증류주로 는 감홍로(甘紅露) 등이 있었다.마침내 고려사회에서는 전래의 양조곡주문화에 증류주문화를 추가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고려사회는 양대주류문화권을 완성함으로써 우리나라 전래의 주품들의 틀이 이때에 이루어져 그 틀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고려시대에 소주에 대한 기록이 분명치 않다는 것은 곧 이미 그 때에 외국의 술이 우리 나라에 도입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일설에 의하면 우리 나라의 소주는 징기스칸의 손자 홀필혈이 일본을 원정할 때 한반도에 진출하여 개성을 거쳐 그들이 병참기지로 삼았던 안동에서 다시 전진기지인 제주도로 건너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주라고 하면 개성->안동->제주의 것으로
그 내력을 헤아리는데, 결국 소주는 홀필혈의 할아버지인 징기스칸이 대정벌을 했을 때 아라비아에서 가지고 온 선물이라고 한다.
조선시대로 내려와서도 고려시대까지 마련되었던 주품들의 틀 그대로 이어지는 가운데 전기중에는 양조기술면에서 점차 고급화하는 경향이 뚜렷하여져 상류사회에서는 중양 주법을 존중하는 한편 양조원료에 있어서도 갱미(粳米) 위주에서 점미(粘米)로의 전환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때의 우량주로 손꼽던 주품으로는 삼해주를 비롯하여 백하주, 이화주, 백자주, 호도주(胡桃酒), 하향주, 청감주(淸甘酒), 자주(煮酒), 국화주등이 있었다.
특히 고려시대 말엽에 와서 정착되었던 증류주는 조선조에 들어서서 급속도로 파급되어 세종대를 중심으로 노주문화는 점차 국제화 단계로 발전하여 일본, 중국 등으로 소주의 수출과 함께 기술이전이 병행되고 잇었다.
조선조 후기로 접어들면서는 지방주의 전성기를 맞이하여 비전(秘傳)되고 있었던 지방주품들이 노춝되기 시작하였고, 이때의 유명주 대열데 등록되어 있었던 주품중에는 호산춘, 약산춘(藥山春 서울), 노산춘(魯山春 충청), 벽향주(碧香酒) 평안) 등을 손꼽을 수 있다.
특히 전기까지의 국제화 관계로 치닫고 있었던 증류주는 고급양조주의 술덧까지 소주로 전용되는 기현상을 빚어 서울 공덕동에 자리잡고 있었던 삼해주 술도가에서는 이들 삼해주를 모조리 소주로 고아 내는 술덧으로 애용하였다 하니 증류주에 대한 기호적 변화를 짐작할 만하다.
이와같이 조선조 후기에 증류법을 이용한 주류 개발의 전성기를 맞이함에 따라 우리나라 주류의 구성도 크게 변화되었고, 이때의 주품들을 유별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순일차증류소주로 점미로주(粘米露酒), 갱미로주(粳米露酒), 소맥(小麥)소주, 대맥(大麥)소주, 교맥(蕎麥)소주, 감자(甘蔗)소주, 면말(麵末)소주 등의 이름이 보이고 있다. 환소주류라 하여 고차증류한 주로는 감홍로(평양), 계당주(평양)가 유명하였다.각색(各色)소주류라 하여 착색물료를 곁들여 고아낸 소주류 가운데는 홍로(홍소주),황로, 갈로류(褐露類)들이 또한 유명주 개열에 끼여 있었다.
자주류라 하여 고려시대까지만 하여도 곡주양조류에 채소 등을 넣고 중탕하던 방법이 이때에 이르러 그 바탕이 소주로 전환되었고 이름난 것만 추려도 죽력고(竹瀝膏), 이강고(梨薑膏 전라,황해) 등이 있었다.
재제주류 역시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곡주양조에 혼용하였던 사례가 이때에 와서는 노주(露酒)로 뒤바뀌었고, 그 가운데서 알려졌던 주품으로는 장미로(薔薇露), 매화로, 감귤로, 이로(梨露), 박하로(薄荷露), 감국로(甘菊露), 생강로(生薑露), 산사로(山査露), 인삼로 등이 있었으며 각색(色) 각향(香)이 어우러진 주품들을 선조들은 만끽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유명 풍미물료가 총동원되는, 이를테면 서구사회의 재제주류를 무색케 하는 지혜를 우리 선조들은 간직하고 있었다.
합주(合酒) 또는 혼용주류라 하여 양조용수 대신으로소주를 이용하였던 주품 가운데는 과하주(過夏酒)와 송순주(松筍酒)가 유명하였으며 특히 과하주의 고장으로 서울이 알려져 있기도 하였다.
이와같이 조선조 후기까지에 발전을 보았던 증류주를 바탕으로 한 주품들이 오늘날에는 어찌되었는지 궁금하거니와 증류주의 음용(飮用)이 성행되었던 조선조에서는 이를뒷받침하듯 색다른 일화도 적지 않게 전해지고 있었고, 그 가운데는 고추가 유입된 직후에 소주맛만도 강렬한 터에 한때 소주에다 고춧가루를 타서 마시는 버릇이 성행되었고 이로 인하여 죽거나 병을 앓게 된 사람도 상당히 있었다는 사실이 전해지고 있다.
이 때문에 그의 대응방법으로 본초학 분야에서는 소주독을 다루는 처방과 함께 술에 취하지 않는 방법, 또한 술을 빨리 깨게 하는 처방들이 나타났음은 물론이거니와 소주의 음용법이 등장하게 되었다.
소주를 한잔 마시고 냉수를 한잔 마시는 방법, 또 소주에 얼음을 넣거나 꿀을 타서 마시는 등 오늘날의 서구사회의 칵테일 방식을 무색케 하는 처방이 가사서에서 속출하였다.
그뿐 아니라 정다산(丁茶山) 같은 사람은 전국의 소주고리(古里)를 모조리 거두어들이 기를 조정에 청하였고, 이익 같은 분은 큰 소주도가에서 소비하는 양곡만도 일년의 비용이 수천 두에 달하고 있고 이것은 빈호 10년의 양식에 해당한다 하여 한탄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전라, 황해의 이강고와 같은 자주류는 고종 19년 2월에 있었던 한미통산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미국을 대표한 전권대사(슈펠트)와 청국사신이 합석한 만찬의 자리에서 우리나라 쪽에서 내놓은 음식으로 전복, 백자(栢子), 구기자차, 약반(藥飯), 조악(助岳), 정과(正果), 원소병(圓小餠), 다식등과 함께 동참되고 이로 인하여 우리나라 음식물에 매혹당했던 일들은 이강고와 같은 전통주가 있었고, 또한 자랑할줄 아는 주체의식이 있었던 사건이 아닌가 한다.
이와같이 증류주류가 성행되는 가운데서도 한말까지 증류주류와 함께 양조곡주류의 뿌리는 계속 이어졌고 서민사회에서는 상대(上代) 이래 전승을 거듭하였^던 속성 재주(막걸리)가 보편화되고 있었지만, 한말에 이르러 개항과 함께 강대국과의 통상협정이 체결되면서 우리나라에는 새로운 외래주의 물결이 물밀듯이 상륙하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유입된 외래주를 간추려 보아도 중국계로는 홍여주(紅與酒)를 비롯하여 재제주류에 속하는 매혼로(梅魂露), 사국공(史國公), 오가피(五加皮), 이화백(梨花白), 죽엽청(竹葉靑), 포도춘(葡萄春) 등이 주종이고, 일본주로는 왜백주(倭白酒), 왜례주(倭禮酒) 등이 있었고, 독일계로는 적포도주, 앵주(櫻酒) 등이고, 서반아계의 셰리(SHERRY), 불란서로는 샴페인 등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한말사회는 마치 다국적주가 공존하기 시작하는 때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변화 속에서도 전래주는 그 맥을 이어왔지만, 주조기술의 국제화를 예견하던지 조선조 말기 서유규, 이규경, 최한기 등은 중국계의 유명주를 집중적으로 분석, 주국의 개선 양조기술의 개량 등 우리나라 전통주의 나아갈 바를 암시적으로 제시하는 등의 노력이 끊임없이 한말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출처 : 진로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