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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연구22]
여호와는 구원이시다(이사야)
본서는 전반부(1~39장 /총39장)가 구약성경과 유사하게 죄에 대한 심판을, 후반부(40~66장 /27장)가 신약 성경과 유사하게 메시야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각각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성경 전체의 축소판’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또한 전체의 3/1 이상이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5복음’ 또는 ‘이사야 복음’ 등으로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제목: 이사야(히, 예솨야후 -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라는 뜻)
이는 본서의 중심인물 겸 저자의 이름을 따른 것으로 그 이름의 뜻이 본문 내용과도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저자: 이사야
본서의 저자는 이사야로, 신약의 여러 구절은 물론(본서의 내용은 신약성경에서 모두 21회나 골고루 인용되고 있는데 모두 이사야 한 사람을 그 저자로 보고 있음) 본서의 용어, 문체, 사상의 통일 성 등이 단일 저작설을 뒷받침하고 있으며, 유대전승과 초대교회 전통, 외경 집회서, 70인역, 탈무드 등 역시 본서의 단일 저작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기록연대: B.C. 739~680년경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주전 739년) 바로 직전부터 활동을 시작하여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를 거쳐 활동하다가 므낫세 통치 기간 중 순교하였습니다(주전 680년경). 따라서 본서는 이 기간 동안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한편, ‘심판’을 주제로 한 ‘전반부’(1~39장)는 이사야의 활동 초기의 젊은 시절에, 그리고 ‘구원’을 주제로 삼은 ‘후반부’(40~66장)는 그의 후반 여생의 노년기 동안에 기록된 듯합니다.
*기록목적: 기울어져 가는 유다 왕국의 장래를 바라보면서 유대 백성의 경성과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심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통해 당신의 언약을 반드시 이룰 것임을 일깨워 주기 위해, 또한 그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성취할 미래의 ‘메시야’를 대망토록 하기 위해.
*핵심단어: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본서에는 ‘구원’이란 단어가 무려 26회나 나오는데 (다른 선지서에는 모두 합해서 7회밖에 나오지 않음) 이는 본서가 얼마나 ‘구원’이란 주제에 밀착되어 있는지를 보여 주는 좋은 예일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사실은 ‘이사야’의 이름이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뜻을 지닌다는 것과 묘한 일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핵심구절: 53장 6절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핵심장: 제53장
본장은 시편 22편과 더불어 구약성경 중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심오하며 고상한 내용인 메시야 구속 사역의 예언을 다루고 있습니다.
*기록장소: 예루살렘
예언 대상과 활동 지역이 유다라는 점과 유다 상류층 인물을 면대한 것으로 보아 예루살렘으로 추정됩니다.
*당시의 국내외정세:
날로 쇠퇴하여 가던 앗수르가 디글랏벨레셀 즉위 때부터 영토 확장을 위하여 북수리아의 아르밧에 진을 치고 서진 정책을 계속 행동으로 옮기는 등 다시 그 세력을 급속히 회복해나가자, 다메섹의 르신과 이스라엘의 베가를 포함한 근동의 많은 왕들이 이러한 앗수르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동맹을 맺었으나 모두 앗수르에 점령당하고 맙니다. 이 무렵 남쪽에서는 제25왕조의 창시자 샤바코가 주전 715년 전애굽을 통일하고 전성기를 누렸으며 여타 동맹국들과 함께 반앗수르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한편, 이러한 와중에도 유다의 정가는 친앗수르파와 친애굽파 등으로 나뉘어 치열한 파당싸움에 열을 올렸으며, (히스기야를 제외한) 거의 모든 왕들 역시 여호와 하나님을 멀리하고 저마다 우상 숭배를 적극 장려하는 등 여호와 신앙이 극도로 타락했던 것입니다.
*내용전개:
1)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언(1~35장)
이사야는 자신의 조국 유다(1~12장)로부터 시작하여 바벨론, 앗수르, 블레셋, 모압, 수리아, 굿, 애굽, 에돔, 아라비아, 두로 등 주위의 열방에 이르기까지 정죄 받을 것을 예언합니다.
2)역사적 사건(36~39장)
주전 701년 유다가 앗수르의 포위공격을 면한 사실을 회상(왕하 20장)한 후, 앞으로 있을 바벨론 침공은 피할 수 없을 것임을 예언합니다(36,37장). 한편, 이 부분에는 히스기야 왕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신앙(38장)과 더불어 그의 어리석음으로 인한 파멸이 묘사되어 있습니다(39장).
3)하나님의 위로(40~66장)
이 부분부터는 이스라엘이 회복과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는 소망의 밝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모두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에 근거하고 있습니다(40~48장). 한편, 49~57장은 고난 받는 종으로 오실 메시야의 도래, 58~66장은 메시야를 믿을 때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점 등을 밝히고 있다.
*본서와 그리스도: 구약에는 메시야 초림에 대한 예언이 300회 이상이 등장하는데, 이 가운데 상당수가 본서에 편중되고 있으며, 이들 모두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지상 사역으로 모두 성취된 바 있습니다. 한편, 본서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예언도 많은데 이것 역시 장차 반드시 성취될 것임이 분명합니다(4:2; 11:2-6,10; 32:1-8; 49:7; 52:13; 59:20,21; 60:1-3; 61:2 등).
*특징:
1)본서는 구성면에서 다른 선지서들과 구성 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즉, 다른 선지서들이 선지자 자신의 소명에 대한 기사를 서두에 기록했던 데에 반해 본서의 경우 6장에 가서야 비로소 자신의 소명 기사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아마도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너무도 중차대한 문제였기 때문에 먼저 긴박한 문제부터 언급함으로써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2)본서의 저자인 선지자 이사야는 자신이 행한 여러 사역과 예언을 연대기순으로 배열하지 않고 자기 나름의 관점에 따라 중요도 순으로 배열했습니다. 예컨대 1~10장까지의 경우 시간 순으로 다시 배열한다면, 6장이 가장 빠르고 7~10장 그리고 1~5장순입니다. 다른 부분 역시 그 예언이 관계하는 시간 순으로 배열된 것이 아니며 각 상황에 따라 주어졌고, 또 복합적 성취라는 성경 예언의 독특한 관점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3)본서는 전체가 하나의 유기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욥기나 전도서 같은 책이 아니라 각 장별로 독립된 한 단위의 하나님의 신탁을 주제가 유사한 것끼리 이사야가 편집 정리한 것입니다. 예컨대 29장도 전체적으로 주위의 28, 29, 31장 등과 동일한 시대적 배경의 동일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나 특별한 논리적 연관이 없는 한 편의 독립 단위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4)본서의 예언들은 그 많은 부분이 이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곧 당면하게 될 현상에 대한 예언인 듯하면서도 미래의 메시야 시대에 이루어질 현상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5)이사야는 전체적으로 경고와 위로, 죄에 대한 비판 지적과 회개 권면을 통한 구원 약속을 번갈아 가며 제시하고 있습니다.
*개요:
제1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언(1:1~35:10)
1. 유다에 대한 예언(1:1~12:6)
1)심판(1장) -유다에 임할 심판
2)여호와의 날(2~4장)
-유다와 예루살렘의 죄악상으로 인한 공의의 심판 및 남은 자들의 회복
3)포도원의 비유(5장)
-포도원에 대한 하나님의 애정과 실망, 포도원으로 비유된 이스라엘의 구체적 죄악상과 심판, 이방인을 통해 나쁜 포도원을 심판하실 것임.
4)이사야의 소명(6장)
5)앗수르에 의한 이스라엘의 파멸(7:1~10:4)
-스알야숩의 표적(1차 표적)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아들 스알야숩을 통하여 유다가 결코 망하지 않을 것임을 전하게 함으로써 불안에 잠긴 유다 왕 아하스를 위로하고자 하셨습니다. 참고로, ‘스알야숩’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뜻입니다.
-임마누엘의 표적(2차 표적)
아하스가 스알야숩을 통한 계시에도 불구하고 그 계시를 확신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앗수르를 의지하려고 하자, 다시 한 번 하나님은 당신의 정하신 계획에 따라 강권적으로 다윗의 온 집, 즉 유다 백성 전체에게 놀라운 ‘처녀와 그 아들 임마누엘’에 대한 표적을 선포하셨습니다. 한편, 이 표적 속에는 ‘적의 연합 공격으로부터 믿는 자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함께 ‘죽음과 사망으로부터 믿는 자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구속사적 사실이 오묘하게 어우러져 이중적으로 내포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할살랄하스바스의 표적(3차 표적)
아하스가 1,2차 징조에도 확신을 하지 못하자 결국 하나님은 ‘결국 유다가 구태어 앗수르와 동맹을 맺지 않아도 그들이 북왕국 이스라엘과 수리아를 제거할 것이라는 내용’의 마지막 세 번째 징조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하스는 앗수르의 원조를 요청하여 끝내 유다를 종속 관계 속에 집어넣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참고로, ‘마할살랄하스하스바스’는 ‘노략이 속함’이란 뜻으로 실제로 이사야의 아들 ‘마할살랄하스바스’가 태어난 지 채 3년이 못 되어(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부를 줄 알기 전에) 사마리아는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메시야 탄생 예언(9:1~7)
예수께서 이 땅 위에 오시되 부자나 지식인, 학자, 종교인들이 밀집한 유대의 예루살렘에서 말씀 선포를 시작하지 않고 멸시 천대를 받은 천민들의 땅인 갈릴리에서 첫 사역을 시작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실제로 9:1,2에 열거된 여러 변방 지역과 갈릴리 지역은 이사야의 당시에는 물론 예수 당시에도 무식하고 천박하여 종교적으로도 버림 받은 자들이 살던 땅으로 천대의 대상이었습니다).
한편,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야의 명칭을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등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에브라임, 즉 북왕국 이스라엘에 임할 심판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도구로 삼아 교만하고 패역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임.
6)하나님에 의한 앗수르의 파멸(10:5~12:6)
-앗수르의 파멸(10:5~12:6)
교만하고 패역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쓰임 받았던 앗수르가 이제는 자기들의 교만한 죄로 인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버림받을 것이 예언되고 있습니다. 한편, 이러한 와중에서도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여호와께 돌아와 하나님을 다시 의뢰할 것 역시 예언되어 있습니다.
-메시야 왕국 예언(11장), 성도의 감사(12장)
2. 열방에 대한 예언(13:1~23:18)
1)바벨론(13:1~14:23)
바벨론은 당시에는 아직까지 별로 흥왕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장차) 주전 612년 나보폴라살 왕이 매대(Media)와 동맹하여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파하면서부터 신바벨론 제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이후 이스라엘을 괴롭히는데 늘 앞장서게 됩니다(왕하24:1~7; 대하36:5~10).
2)앗수르(14:24~27)
이사야가 이 예언을 선포하던 당시는 바벨론의 세력보다 앗수르의 세력이 더 강대했습니다(왕하 18:14~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앗수르에 관한 예언이 바벨론보다 뒤로 이루어진 것은 역사의 진전에 따라 당신의 전우주적 주권을 밝히기 위해서이며, 당신의 백성으로 하여금 환난 중에 큰 위로를 받게 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한편, 앗수르의 멸망에 관한 예언의 성취는 본서 37:21~38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3)블레셋(14:28~32)
유다와 적대관계에 있던 블레셋은 주전 701년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침략을 받았으며, 주전 609~608년에는 애굽 왕 느고의 침입을 당하기도 했습니다(렘47:1). 그러다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치세 때 침입을 받아 유다의 함락과 거의 같은 시기에 통치자들과 주민들이 국외로 추방되는 등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대로 영원한 종말을 맞고 말았던 것입니다.
4)모압(15~16장)
5)다메섹과 사마리아(17장)
이는 다메섹을 수도로 한 ‘수리아’와 이들과 연합하여 형제 나라 남왕국 유다를 침공한 북왕국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으로 이들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이 예언되고 있습니다. 한편, 본장 전반부엔 수리아와 북이스라엘의 멸망이, 후반부엔 이 두 나라를 치는 도구로 쓰인 앗수르(앗시리아)마저 마침내 멸망할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6)에디오피아(구스/18장)
당시 유다는 아하스가 죽고 히스가야가 즉위하여 개혁을 단행하고 있었고, 앗수르의 산헤립은 북왕국 이스라엘과 수리아를 정복한 후 1차로 유다를 침공한데에 이어서 2차 침략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애굽 전역을 통치하고 있던 구스(에디오피타)는 만약 유다가 훼파된다면 그 다음 차례는 자신들이라는 것을 불 보듯이 잘 알고 있었으므로 군대를 소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국의 군대를 소집하는 것은 물론 주변 왕국들에게도 사절을 보내어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30:1~5). 이런 상황에서 이사야는 이제 잠시 후 그들의 염려와는 달리 하나님께서 앗수르 군대를 멸해 주실 것이므로(주전 701년경, 왕하19:35-37) 그들은 전쟁으로 인한 큰 손상을 입지 않게 되는 것을 그들이 목격하고 나면 그들이 크게 깨우쳐 하나님이 도우시는 유다에 예물을 바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이 상황은 실제로 대하 32:23에서 성취되었음).
7)애굽(19~20장) - 애굽의 급속한 쇠퇴
애굽은 역사적으로 유다인들이 어려움을 받을 때마다 내려가서 의지하는 피난처 구실을 했던 나라입니다. 이로 인해 일부 유다인들의 마음에는 은근히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애굽의 우상들과 그 번영을 더 신뢰하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애굽의 정치적 쇠퇴 및 경제적 몰락, 정신적 퇴보, 그리하여 결국 앗수르의 침입 때 민족성이 완전히 파괴될 것을 예언하게 하셨던 것입니다(나3:8).
8)해변광야, 즉 바벨론(21:1~10)
주전 612년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훼파하면서 전성기를 맞았던 신바벨론 제국은 주전 539년에 바사의 고레스 왕과 메대 왕 다리오의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되고 맙니다. 그렇게 강력했던 앗수를 무찌르고 남메소보다미아의 전역을 지배하기까지 했던 바벨론이 순식간에 훼파된다는 이사야의 예언은 이사야 당시의 유다인들에게는 너무나 황당한 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9)두마, 즉 에돔(21:11,12)
10)아라비아(21:13~17)
11)예루살렘의 멸망(22장) -유다에 대한 이방인의 침공
유다인들은 끝내 하나님의 종들이 외치는 회개의 권유를 듣지 않다가 이방인들에게 수치와 멸망을 당하게 되는데 이는 끝까지 주님을 거부하다가 훗날 영원한 심판대 앞에서 수치를 받고 지옥불 속에 던져질 악인들의 운명을 잘 예표 하는 듯합니다.
12)두로(23장)
두로는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절시키지 못한 가나안 족속의 후예들로 국제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들은 지중해 연안에 많은 식민지를 두고 있었으며, 원양 항해술과 공예술에 있어서 매우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다윗과 솔로몬 시대 이후 이스라엘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에 많은 악영향을 끼쳐왔던 것은 물론 온갖 음모와 교만, 갖은 타락과 술수가 횡행했던 곳으로 이사야를 포함한 많은 선지자들이 두로의 멸망을 예언한 바 있습니다(렘25:22; 겔26:3; 욜3:4~8; 암1:9,10).
3. 여호와의 날에 대한 예언(24:1~27:13)
1)심판의 날(24:1~23)
2)새 왕국의 승리(25:1~27:13)
-구원받은 성도들이 새로운 왕국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 사업을 찬양하게 될 것(25장)과 이와 같은 성도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부르게 될 찬양(26장), 어둠의 세력에 대한 심판(27:2~6), 곁길로 빠진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견책(27:7~11), 흩어진 백성들을 모두 한데 모으실 것에 대한 약속(27:12-13) 등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4. 심판과 축복에 대한 예언(28:1~35:10)
1)에브라임에 임할 화(28장)
-심판의 예언, 심판의 원인이 된 종교 지도자 및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이 모든 일을 당할 선택된 백성에게 ‘농부의 비유’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 등.
2)아리엘(예루살렘)에 임할 화(29장)
-하나님의 선민 유다가 원수로부터 침략을 당하여 피폐하게 되나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으로 살아나게 될 것(29:1~8), 이어서 유다가 더욱 심한 책망을 받아야 할 필연적 원인인 신앙의 타락 지적(29:9~16). 끝으로 신약의 메시야 시대, 즉 복음이 확산될 시대에 대한 미래의 비전 제시 순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참고로, ‘아리엘’은 제단 아래로 떨어진 제물의 피가 모여 불타도록 만든 제단의 화상 부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장은 당시 가증스런 제사장들의 형식적인 예배(1:10~20)를 일삼는 유다가 불에 타 아리엘처럼 될 것을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3)애굽의 동맹국들에 임할 화(30~31장)
-유다가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원인이 된 애굽과의 동맹 체결과 그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끝내 당신의 백성들을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으시며 돌이키는 자에게 다시금 영원한 구원을 주실 것에 대한 약속 등이 그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4)도래할 메시야 시대(32:1~20)
-다가올 앗수르 등을 통한 심판의 경고(9~14절)와 함께 영원한 메시야 나라의 임재(1~8절, 9~14절)를 거듭 강조함으로써 유다 백성들에게 올바른 삶의 길을 따를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5)앗수르에 임할 화(33장)
-이는 1차적으로 앗수르의 예루살렘 함락 위협과 그로부터의 회복을 이야기한 것이나 궁극적으로는 성도들이 이 땅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할 것에 대한 상징입니다.
6)열방들에 임할 화(34장) -에돔으로 대표된 모든 원수들의 멸망
7)메시야 왕국의 영광(35장)
-장차 도래하게 될 메시야 왕국의 영광과 종말론적 새 나라의 환희.
제2부 역사적인 사건(36:1~39:8)
1. 앗수르로부터 구원받은 히스기야(36:1~37:38)
-앗수르의 교만과 도전, 그리고 파멸
2. 질병으로부터 구원받은 히스기야(38:1~22)
3. 히스기야의 죄(39:1~8)
제3부 위로의 예언(40:1~66:24) -포로 이후에 되어질 일들에 대한 예언
1. 이스라엘의 구속(40:1~48:22)
1)이스라엘 회복의 약속(40:1~11)
-하나님께서 바벨론 포로생활(죄악 세상의 고통)에서 구원해 주실 것을 약속 선포하며 준비를 촉구함.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1,2절)
2)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40:12~31)
-누구와도, 어떤 나라와도, 어떤 우상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
3)이스라엘의 구원자 하나님(41장)
-하나님은 ‘이미 주어진 유다의 구원 약속을’ 열방 앞에서도 다시 공증하시되 고레스 왕의 등장까지 제시함으로 더욱 구체화시키고 있습니다. “누가 동방에서 사람을 일깨워서 공의로 그를 불러 자기 발 앞에 이르게 하였으냐 열국을 그의 앞에 넘겨주며 그가 왕들을 다스리게 하되 그들이 그의 칼에 티끌 같게, 그의 활에 불리는 초개같게 하매 그가 그들을 쫓아가서 그의 발로 가보지 못한 길을 안전하게 지났나니.”(41:2,3).
4)하나님의 종 메시야(42장)
-하나님의 종 메시야의 소개(1~9절) 및 메시야의 구원 잔치의 승리와 기쁨(10~17절), 그럼에도 끝내 회개하지 않는 자를 향한 하나님의 탄식(18~25절) 등이 그 주된 내용입니다.
한편, 42장 1~9절은 유명한 이사야의 종의 노래 네 편 중 첫 번째로서(49:1~6; 50:4-9; 52:13~53:12) 예수님을 묘사한 것이며,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메시야의 신적 권위, 겸손한 품성, 사랑, 통치 등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42:1~4)
5)구원의 약속(43~44장)
6)고레스를 통하여 받는 위로(45장)
- ‘그의 기름 받음을 받은 고레스’(1절): 통상적으로 기름 부음을 받게 되는 사람은 제사장, 왕, 선지자, 그리고 메시야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이방 나라 페르시아 왕인 고레스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칭호를 일컬어지고 있는 것은 후일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의 권세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장차 메시야께서 자기 백성을 죄로부터 해방시키게 될 것을 예표 하기 때문입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에1:1,2)
7)바벨론 파멸로 인하여 받는 위로(46~48장)
-46장은 바벨론 우상들의 멸망을, 47장은 바벨론 왕국 자체의 멸망을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바벨론은 거의 신바벨론(주전 7세기 말 ~ 주전 539년) 제국입니다. 이 당시의 바벨론은 부요와 호와의 상징이었으며, (역사가 헤로도투스가 ‘바벨론은 환락가였고 윤락가였으며 근친상간이 자연스럽게 자행되던 곳이었다’ 라고 말한 바 있을 정도로) 온갖 독신과 우상 숭배가 횡행하던 악마의 도시로 유명했습니다(계17:15~18).
그리고 48장에 이르러서는 끝내 회개하지 않는 유다를 향한 마지막 경고로 끝맺고 있습니다.
2. 이스라엘의 구속자(49:1~57:21)
40~48장이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한 고레스의 임무를 예고하고 있는 것이라면, 49~57장은 하나님의 종, 즉 메시야의 임무에 관하여 다룬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레스가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의 속박상태에서 구원하는 임무를 맡았다면, 메시야이신 종 곧 그리스도는 인류를 죄악의 속박상태에서 구원하는 임무를 지니셨는데 그런 점에서, 고레스는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1)메시야의 임무(49장)
-본장은 ‘메시야로서의 종의 임무’를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어 종종 ‘종의 노래’라고 불리는데 이는 종 자신이 부른다는 점에서 42:1~9의 종의 노래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여기서 종이 ‘이스라엘’로 지칭되는 까닭(3절)은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그들의 대표자가 되어 죄를 대속해야 하기 때문입니다(야곱이 그 옛날 족장 시대에 선택받은 혈통의 족장이었던 것처럼 여기 이스라엘의 동격으로 쓰인 종 역시 새 이스라엘, 즉 새로 구원받은 모든 종의 통수권자가 된다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라 할 수 있음).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네 속에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49:3)
2)메시야의 순종(50장)
-50장 4~9절은 이사야의 ‘종의 노래’ 중 세 번째 노래입니다. 제1,2 노래가 주로 ‘종의 소명과 영광, 승리와 왕국 설립’ 등에 관한 것이라면, 제3,4 노래는 주로 ‘종의 고난’에 관한 것인데 여기서의 종의 고난은 물론 장차 우리를 위해 짊어지실 예수님의 고난을 가리킵니다. 한편, 제 3 노래가 종의 고난과 그 극복과 승리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짧게 서술한 반면 제 4 노래는 그 종의 고난의 동기, 목적, 그 참상, 결과 등을 보다 정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 하였느니라”(6,7절)
3)메시야의 권고(51:1~52:12)
-사실 이사야가 예언을 선포하던 당시의 유다는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의 패망 그리고 점차 다가오는 대제국 침략자들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깊은 패배의식과 퇴폐적인 생활에 젖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이미 하나님의 구원을 믿고 있으나 워낙 현실의 고통이 심하여 그 믿음이 연약해진 자들에게 구원이 속히 이를 것에 대한 약속을, 또한 아직 구원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해 보지 않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무조건적 구원의 의지를 선포하여 회개를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4)메시야의 자기 비하와 수난, 승귀(52:13~53:12)
-이 부분은 그 유명한 이사야의 종의 노래 제 4번으로서 ‘고난 받는 종의 노래’입니다. 각 구절마다 특별한 주석이 필요 없을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의 비천했던 일생과 특히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장면 그리고 수난을 통한 우리의 속죄와 주님의 승리하는 성경 최대의 클라이맥스 사건과 직결되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4~6절)
5)메시야의 언약(54장)
-그리스도의 고난과 승귀를 예언하고 있는 이사야는 그 관점을 바꾸어 고통 받던 이스라엘의 해방과 번영을 노래합니다.
6)메시야의 초청(55:1~56:8)
-지금까지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할 커다란 복을 설명해온 이사야는 여기서 백성들에게 그 복에 참여하자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비록 세상 끝 날에 임할 복이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동참하려는 의지와 결단이 없으면 결코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호라 너의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55:1)
한편, 56:1~8은 이방인들 역시 신약적인 관점 나아가 종말론적 관점에서 전 이방인의 천국 동참을 의미하는 대목입니다.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56:3,5-7)
7)메시야의 책망(56:9~57:21)
-이사야는 여기서 이스라엘 지도자의 타락상(56:9-12) 및 전이스라엘 공동체의 영적 타락을 여인의 성적타락에 비유하여 지적하면서(57:1-13) 위로의 약속을 전하고 있습니다(모든 회개하는 자들을 위한 확실한 구원 약속/57:14-21).
3. 이스라엘의 영광스런 미래(58:1~66:24)
이 부분은 주로 이스라엘의 미래를 주제로 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이스라엘의 미래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평화의 나라 내지는 영광의 나라로 변모된다는 것입니다.
1)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금식(58장)
2)이스라엘의 죄(59장) -백성들 간의 횡행하던 불의를 고발함.
3)새 왕국에서 누릴 영광(60장)
-지금까지 심판과 경고, 약속과 위로가 뒤엉켜 진행되어 오던 이사야서는 60-66장에 이르러 인류 역사의 최종적 국면, 즉 종말에 있어서의 진리와 서랑과 성도의 최종적 승리를 노래합니다. 즉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로부터의 해방을 노래한 이 부분의 시들은 참 성도들이 누리는 종말론적 최후의 영광을 상징한 것입니다.
한편, 60장은 시온에 빛이 나타날 것임, 시온의 풍요와 기쁨, 재건된 시온을 향한 영원한 보호의 약속, 현재와 비교된 미래 시온의 영광, 시온의 영광이 영원할 것임 등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4)메시야의 소명(61장)
-예수님께서는 본장의 내용을 자신에게 적용(눅4:17-21), 당신 자신과 관련된 것임을 명시하셨습니다(이 부분은 문자적으로는 하나님께로부터 권세와 임무를 위임받은 이사야의 소명에 대한 서술이지만, 궁극적으로 메시야의 소명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음).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61:1,2)
5)예루살렘의 미래(62장)
-60장에서 묘사하였던 영원한 도성 시온의 모습을 여기에서 거듭 묘사하고 있습니다. 60, 61, 62장 등 세 장을 종합해보면 60장이 새 시온의 영광스런 모습에 대한 묘사라면, 61장은 그 새 시온의 영광이 도래하는 과정, 즉 메시야의 등장과 이스라엘과 이방의 회개를 노래한 것이라 볼 수 있고 62장은 새 시온의 영광을 예언하는 일면으로 그 새 시온의 도래가 완전히 이르기까지 성도가 어떠한 자세로 무슨 일을 해야 할지를 언급함으로써 60, 61장을 종합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6)하나님의 심판(63:1~6)과 남은 자들의 기도(63:7~64:12)
7)남은 자들을 위한 여호와의 응답(65장)
8)영광스러운 역사의 절정(66장)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사야 6장 8절)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내야 좋을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려고 할까? 그래서 내가 대답하였다. ‘주님 제가 가겠습니다. 저를 보내주소서’”(현대인의 성경, 사6:8)
우리가 하나님의 존전 앞으로 나아갈수록, 소명을 발견하고자 하면 할수록 듣게 되는 음성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이사야에게 들려졌던 하나님의 음성 말입니다. 그 음성이 여러분의 귓가에 뚜렷하게 들려지십니까?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 갈고’
우리가 조금만 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인다면, 머지않아 우리는 그분의 ‘고민 아닌 고민’을 들게 될 것입니다. 이는 비단 이사야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음성은 구속사가 시작된 이래로 줄곧 수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져왔습니다. 이 음성은 어김없이 그들에게 소명에로의 헌신과 결단을 촉구했고 그들 역시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생을 남김없이 드렸습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가 대답할 차례입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은 처음부터 누구를 선택했는지 또 누구를 보내야 좋을지 다 알고 계십니다. 예레미야의 소명기사에서 우리는 이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렘1:5)
다 아시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왜 이처럼 자문하고 있는 것일까요? 마치 누구를 보내야 좋을지, 누가 가야할지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것도 이사야 앞에서.... 그 이유란 무엇일까요? 정말 몰라서일까요? 아닙니다. 아마도 부름 받은 자들로 하여금 그 사명에 자발적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직접 하신 말씀은 아니지만, 분명히 그 말씀은 다른 사람이 아닌 이사야에게 던져지는 것이었습니다.
*사명자들이 보여야 할 두 가지 반응
이런 부르심 앞에서 사명자들은 다음의 두 가지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첫째, 자신이 극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사6:5) 이는 마치 밝은 빛 가운데로 나아갈수록 내게 뭍은 점과 얼룩이 더 잘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부르심에 반응하게 됩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주님의 음성 앞에서 결단하게 됩니다. ‘주님 내가 여기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라고 고백했던 이사야처럼 말입니다(사6:8).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존전 앞에 나아가길 힘쓰고 있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께 날마다 가까이 가고 있습니까?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런 반응을 보이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왜 저입니까?’, ‘제 주변에는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더 있지 않습니까! 그들을 보내소서.’ 라면서 항변하기도 합니다. 모세처럼 말입니다.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출4:13) 그러나 그것은 주님이 기다리고 있는 대답이 아닙니다.
아마도 우리들 대부분은 분문과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마음과 귀가 열린다면, 날마다 우리를 부르시는 그 간절한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앞에 과제를 부여함으로써 우리를 부르십니다. 지금 우리에게 무엇인가 행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이 곧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위기가 곧 기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앞에 과제를 부여하심으로써 우리를 부르신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리더십이 부재한 시대, 진정한 리더십이 사라진 혼란 속에서 자신의 소명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당시 유다를 부국강병하게 하였던 ‘웃시야’라는 큰 인물이 말년에 불운한 최후를 맞이했고 그 결과 유다는 엄청난 혼란과 시급을 다투는 문제들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와 같은 모든 문제들 속에서 이사야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사6:1)
웃시야 왕의 사후, 불안했던 정국을 놓고 근심에 쌓인 채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던 이사야! 하나님은 그런 그에게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시대는 바로 그를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떤 문제들 앞에 직면해 있습니까? 이사야처럼 기도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힘써 구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무엇인가 행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이 곧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학교 교육의 부재, 청소년 탈선문제가 당신에게 심각한 고민거리로 다가옵니까? 그리고 무엇인가 그것에 대하여 어떠한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그 분야로 부르시는 중입니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사 25장 1~12절)
* 폭풍 중의 피난처, 폭양 중의 그늘 되신 하나님!
이사야는 주를 높이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1절)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께서 우리를 위해 심히 놀라운 일을 행하시되,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행하시며, 또한 성실과 진실로 그리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1절 하)
이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보호하시되 강하고 포악한 원수들을 벌하심으로써 그리하실 것입니다. “마른 땅에 폭양을 제함 같이 주께서 이방인의 소란을 그치게 하시며 폭양을 구름으로 가림 같이 포학한 자의 노래를 낮추시리이다.”(5절) 주께서는 무엇을 그치게 하실 것입니까? 이방인의 소란입니다. 또한 어떤 것들을 낮추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포학한 자의 노래입니다. 마치 폭양을 구름으로 가림같이 말말입니다.
사실 (본문에서) 포학한 자의 기세는 무엇과도 같다고 했습니까? 성벽을 치는 폭풍우와 같습니다. “주는 포학자의 기세가 성벽을 치는 폭풍과 같을 때에...”(4절) 또한 마른 땅에 작렬하는 폭양과도 같습니다(4,5절). 우리는 어떻습니까? 마치 뭐든 다 부서뜨리고 집어삼킬 것만 같은 세찬 폭풍우 속에,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릴 듯한 이글거리는 폭양 속에 지금 처해 있습니까? 그렇더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렇더라도 낙담하거나 자포자기하지 마십시오. 왜 입니까? 우리 주님께서 나의 피난처와 요새, 그리고 그늘이 되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빈궁한 자의 요새이시며 환난 당한 가난한 자의 요새이시며 폭풍 중의 피난처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 되셨사오니.”(4절 하)
* 최후 승리하기까지 오직 십자가만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오직 주의 십자가만 사랑하며, 빛난 면류관을 받기까지 오직 주의 십자가만 붙들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찬송가 150장) 어떠한 상황과 처지에 놓여 있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최후 승리하기까지 오직 십자가만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6:14) 또한 영광스럽고 빛난 면류관을 받기까지 오직 주의 험한 십자가만 붙들고 나아가고 있습니까?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또한 우리는 ‘영생에 대한 소망’과 더불어 모든 눈물과 수치를 닦아 주시고 씻어주실 그 날, 즉 마지막 날만을 고대하며 ‘지금 여기에서의 삶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합니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8절)
우리는 어떻습니까?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5:13) 또한 모든 얼굴에서 그 눈물을 닦아주시고 씻겨주실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나아가고 있습니까?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계21:4)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사 26장 1~21절)
* 그 날에 이 노래를 부르게 되리라
“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시리로다 너희는 문을 열고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게 할지어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사26:1~4절)
본문은 그 날이 되면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게 되리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어떤 노래를 의미합니까?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시리라는 내용을 가진 노래입니다. 어떤 승리 말입니까? (1차적으로는) 바벨론의 멸망과 이로 인한 바벨론 포로의 회복입니다. 그러나 이는 궁극적으로는 온갖 불의와 죄악으로 물든 이 세상에 대한 심판과 더불어 택한 백성들의 구원을, ‘이 노래’(1절) 역시 죄악으로 물든 세상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부르게 될 찬양을 각각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사26:3,4)
한편, 여기서 하나님은 어떤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켜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심지(心志)가 견고한 자’(3절) 즉, 신앙의 확신과 의지가 굳은 사람입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3절) 이러한 자는 무엇으로 지켜주신다고 하셨습니까? 평강에 평강으로, 즉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켜주실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 즉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하나님의 평강이 (마치 파수꾼이 성을 지키듯)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7)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그 심지, 즉 마음에 품은 의지가 견고하십니까?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고 더욱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십시오(고전15:58). 주를 신뢰하되 영원히 그리 하시는 자들이 되십시오.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3,4절)
*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사26:9)
여기서 ‘밤’은 무엇을 상징합니다. 이 세상 역사의 암울하고 혼미한 때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지금 생에 있어서 가장 어둡고 암울한 밤을 지새우고 있습니까? 혹 지금 가장 혹독하고 매서운 겨울을 나고 있습니까? 그렇더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또한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그분께 간절히 구하되, 중심으로 사모하십시오(9절).
*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
“여호와여 주의 손이 높이 들릴지라도 그들이 보지 아니하오나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을 보면 부끄러워 할 것이라 불이 주의 대적을 사르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평강을 베푸시오리니 주께서 우리의 모든 일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심이니이다.”(사26:11,12)
결국, 바벨론의 멸망과 이로 인한 바벨론 포로의 회복, 온갖 불의와 죄악으로 물든 이 세상에 대한 심판과 택한 백성들의 구원 등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동인은 무엇입니까? 바로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입니다(11절).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9:7) 이것만큼 확실한 것이 또 어디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이와 같은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이 당신의 이름을 위해, 또한 우리를 위하여 이 모든 것을 이루시며 성취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보면서 이에 합당한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고 있습니까?(11절) 또한 우리를 위하여 친히 평강을 베푸시며, 우리의 모든 일들 역시 우리를 위해 능히 이루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고 있습니까? “여호와여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평강을 베푸시오리니 주께서 우리의 모든 일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심이니이다.”(사26:11,12)
*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사26:19)
17절에 이르러, 선지자 이사야는 바벨론에 포로로 갈 유다인들은 산고의 고통을 겪는 여인처럼 고통을 당하나 결국 아무 것도 낳지 못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호와여 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산고를 겪으며 부르짖음 같이 우리가 주 앞에서 그와 같으니이다 우리가 잉태하고 산고를 당하였을지라도 바람을 낳은 것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출산하지 못하였나이다.”(17,18절) 즉 그들의 힘으로는 원수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스스로의 해방을 가져올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내용입니까? 인간의 능력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또 죄로부터의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슥4:6 중) 결국 무엇으로만 가능합니다. 오직 성령, 오직 백성을 위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으로만 가능합니다.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4:6하)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9:7 하)
한편, 이와 같은 하나님의 열심은 ‘회복과 부활의 계시’(19절)를 통해 더욱 확증되고 있습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사26:19) 이는 먼저 에스겔 37장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는 환상’과 같이 바벨론 포로 생활로 다 죽은 것 같은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 이후 구속사의 큰 축을 감당하게 될 것을 말하는 동시에 문자 그대로 훗날 죽은 자들이 다시 살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본문 19절 그리고 에스겔 37장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는 환상을 통해 없는 것을 있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 단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며 도무지 바랄 수 없는 중에도 기적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그 하나님만을 붙들고 믿음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37:12~14)
등 뒤에서 도우시는 주님 (이사야 30장 18절~22절)
*묻지 않고 행하는 것은 죄입니다.
그 당시 유다 백성들은 앗수르의 침략을 두려워한 나머지 하나님이 아닌 이집트의 그늘에 피하려하고 파라오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다가 결국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심판과 경고와 심판을 듣게 되었습니다.
“...패역한 자식들은 화있을진저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영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죄에 죄를 더했도다. 그들이 바로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바로의 세력이 너희의 수치가 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함이 너희의 수욕이 될 것이라.”(사30:1~3)
어째서 유다 백성이 수치를 당하게 되며 수욕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무슨 이유로 그러한 경고의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까? 우리는 다음의 말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며’, ‘~하나 나의 영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하였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도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께 묻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되 하나님께 묻지 않고 행하면 죄가 됩니다. 우리가 어떤 계획을 세우되 믿음을 따라 하지 않으면 다 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14:23)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지금 이 일에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고 있습니까? 아니면 묻지도 않은 채 스스로 자단하고 있습니까? 혹 마음에 이미 결정을 내려놓은 채 형식적으로 주께 승인을 구하지 있지는 않습니까? 어떤 일을 하든지 믿음을 따라 행합시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며 성령의 말미암아 합시다.
*그러나 주님은 심판과 함께 축복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온에 거주하며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백성아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가 네게 부르짖는 소리로 말미암아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그가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사30:18~19)
본문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이 늘 심판에 있지 아니하고 구원에 있음을 새삼스레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무엇 때문에 그리하십니까?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하시며 긍휼을 베푸시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마다, 눈물 골짜기를 지날 때마다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도중에 낙심하고 자포자기해야겠습니까? 아니면 끝까지 하나님을 기다려야겠습니까? 본문은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다리십시오. 끝까지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머지않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한량없는 은혜를,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얻게 될 것입니다.
*고난의 떡과 고난의 물속에서도 기다려야 합니다.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20절 상) 기다려야 합니다. 여기서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다음의 구절들을 통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말하기를 왕의 말씀이 이 놈을 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이라 하였다 하라.”(왕상22:27;대하18:26)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은 문자적으로 ‘부족한 떡과 물’ 또는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소량의 떡과 물’을 의미하며 고난의 생활에서 오는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겨우 겨우 버티고 있다 해도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할 수 있을 정도로 가난하다 하더라도, 겨우 굶지 않을 정도의 적은 소유로 산다 해도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등 뒤에서 도우시는 주님을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나의 등 뒤에서’(최용덕 작사, 작곡)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주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편안히 길을 갈 때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 내미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때때로 뒤돌아보면 여전히 계신 주 /잔잔한 미소로 바라보시며 나를 재촉하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내 너를 도우리 /내 너를 도우리
최용덕 님이 이 곡을 쓰면서 다음과 같은 사연을 덧붙였습니다. “여제까지만 해도 그토록 성령 충만한 믿음의 사람이었던 내가 오늘은 주님을 부인하고 배반한 배신자가 되어 자신에 대한 깊은 좌절감으로 엎드러져 있었습니다. 이젠 이런 가증스런 위선자에게서 주님께서도 떠나셨으리라는 생각에 더욱 절망하고 있던 1984년 9월 어느 날 새벽, 하나님께선 등 뒤에서 나를 밀고 계시는 주님의 환상과 함께 이 노래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환난을 떡 먹듯 고난을 물마시듯 당하더라도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더 이상 지난날과 같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다시는 숨지 않으시고 우리 앞에 나타나 직접 가르쳐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어떻게 이끄시는지,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우리가 삶 속에서 직접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20절).
또 설령 우리가 정도에서 벗어나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 치우치려하면, 곁길로 벗어나가려고 하면, 항상 주께서 우리 뒤에서 우리에게 옳은 길을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말입니다. “이쪽이 옳은 길이다 그러니 이 길로만 나아가라.” 이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복된 인생을 말합니다. 성령이 스승 되셔서 진리를 가르치시고 거룩한 뜻을 깨달아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찬송가 453장/통합 506장 예수 더 알기 원하네).
우리가 한참 인생의 길을 가다보면 종종 이 세상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양 옆을 둘러봐도 그리고 앞을 내다보아도 나 혼자 뿐입니다. 나와 평생 함께 하시겠다던 그 주님은 좀처럼 보이질 않습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정말 나 혼자 이 세상에 홀로 고아와 같이 버려진 것일까요? 아직 속단하기에는 너무 이른 것 같습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저것은 분명 곁길로 빠지는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등 뒤는 내가 책임질 테니 너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곧장 앞만 보고 달려가라’ 그분은 여전히 내 뒤에서 말없이 나와 동행하고 계셨습니다. 설령 우리가 그분의 존재를 망각하고 있는 그 순간조차도 말입니다. 아무리 앞으로 내다봐도 좌우를 부지런히 살핀다 해도 여러분 혼자뿐인 것처럼 느껴지십니까? 잠시 뒤를 돌아보십시오. 그러면 여전히 나와 함께 동행중이신 주님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분은 왜 우리 뒤에서 우리와 동행하실까요? ‘사각지대’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어느 위치에 섬으로써 사물이 눈으로 보이지 아니하게 되는 각도 또는 어느 위치에서 거울이 사물을 비출 수 없는 각도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운전을 할 때는 운전자는 사각지대에 늘 신경을 써야 합니다. 물론 보행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보행자의 사각지대는 주로 어디일까요? 등 뒷일 것입니다. 앞이나 좌우는 조금만 신경 쓰면 우리의 시야가 확보될 수 있지만 등 뒤는 어렵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전신을 갑주로 무장했습니다. 머리에 쓰는 투구로부터 흉배, 허리띠, 방패와 검, 신발까지 완전 무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단 한곳 무장 안 된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어디일까요? 바로 등입니다. 무슨 이유로 그리했을까요? 군인이 전장에서 적에게 등을 보인다는 것은 곧 자살행위이자 사형감이 된다는 점을 각인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바로 우리 등 뒤에 바짝 붙어서 동행하십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물론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바로 이런 의미일 것입니다.
“등 뒤는 내가 맡을 테니 걱정 말고 넌 앞만 보고 열심히 나아가렴. 자꾸 뒤쪽을 신경 쓰느라 시간 낭비하지 말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열심히 달려가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할 정로로 곧장 나아가렴.”
등 뒤에서 우리를 늘 도우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시험(사 39:1~8; 왕하 20:12~19)
* 바벨론 방백들이 그 땅에서 나타난 이적을 물어오다
“그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 히스기야에게 글과 예물을 보낸지라.”(사39:1)
본문에는 (왕하 20:12와 마찬가지로) 바벨론 왕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 그에게 글과 예물을 보냈다고 나와 있지만, 대하 32:31에 의하면 바벨론 왕은 히스기야의 질병의 치유와 함께 이적의 발생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마침내 히스기야에게 사절단에게 보냈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방백들이 히스기야에게 사신을 보내어 그 땅에서 나타난 이적을 물을 때에...”(대하32:31)
어떤 이적 말입니까? 아하스의 해시계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가 뒤로 물러갔던 사건입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이하스의 해시계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십도 뒤로 물러가게 하셨더라.”(왕하20:11) 물론 이는 (히스기야의 요청대로) 하나님께서 히스기야가 불치병에서 낫게 되어 삼일 만에 다시 여호와의 성전에 나아가게 될 징조로 주어진 것이지만 말입니다.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낫게 하시고 삼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게 하실 무슨 징표가 있나이까 하니 이사야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실 일에 대하여 여호와께로부터 왕에게 한 징표가 임하리이다 해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갈 것이니이까 혹 십도를 물러갈 것이니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가기는 쉬우니 그리할 것이 아니라 십도가 뒤로 물러갈 것이니이다 하니라.”(왕하20:8~10)
이는 분명 당시로서는 (질병의 치유와 함께) 큰 화젯거리임이 분명합니다. 남유다에서 비교적 ‘원방’에 위치하고 있었던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의 귀에까지 들어갔을 정도이면 말입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히스기야와의 군사동맹을 맺고자 했던 구실에 불과했습니다. 왜입니까? 당시 바벨론은 앗수르의 지배를 받는 속국 중 하나로 앗수르로부터 독립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앗수르 왕 살만에셀 5세(B.C.727~722)가 죽자 므로닥발라단이 세력을 규합, 왕이 되어 앗수르 왕 사르곤 2세(B.C 722~705)와 대립, 독립을 향한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해 그림자의 이적을 목도하게 된 것입니다(이 이적은 결코 국지적으로 발생했던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결국 이 이적에 남유다의 왕 히스기야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자연스레 그의 질병으로부터 치유와 이적을 듣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므로닥발라단은 히스기야의 치유에 대한 축하와 해 그림자의 이적에 대한 탐문을 구실로 사전달을 보내 그와의 군사동맹을 끌어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잠시 그를 떠나시다.
“히스기야가 사자들로 말미암아 기뻐하여 그들에게 보물 창고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에 있는 것을 다 보여 주었으니 히스기야가 궁중의 소유와 전 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는지라.”(사39:2)
히스기야는 자신의 치병과 이적을 물어오는 바벨론 사절단에 대해 어떠한 반응을 보였습니까? 매우 기뻐하면서 그들에게 보물 창고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에 있는 것과 궁중의 소유와 전 국내의 소유를 다 보여주었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역대하의 기자의 언급처럼) 마음이 교만하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므로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고 또 이적을 보이셨으나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리게 되었더니.”(대하32:24,25)
왜 자신의 모든 소유를 바벨론 사절단에게 보여준 것일까요? 치병 사건 직후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에게 엄청난 부와 영광을 더하셨는데 그만 교만한 마음이 불쑥 생겨져 나와 이 모든 부와 영광이 자신의 힘으로 이룩된 것 인양 여겼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가 부와 영광이 지극한지라 이에 은금과 보석과 향품과 방패와 온갖 보배로운 그릇들을 위하여 창고를 세우며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산물을 위하여 창고를 세우며 온갖 짐승의 외양간을 세우며 양 떼의 우리를 갖추며 양 떼와 많은 소 떼를 위하여 성읍 등을 세웠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재산을 심히 많이 주셨음이며 이 히스기야가 또 기혼의 윗샘물을 막아 그 아래로부터 다윗 성 서쪽으로 곧게 끌어들였으니 히스기야가 그의 모든 일에 형통하였더라.”(대하32:27~30)
사실 히스기야는 그 땅에서 나타난 이적을 물어온 바벨론의 사자들에게 보물이 아닌 해 시계를 보여주었어야 했습니다. 왜 입니까? 이 해 시계야말로 (그 그림자를 거꾸로 돌리시면서 까지) 자기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증표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해시계 앞에 서서 자신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고 또한 전도해야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보물들을 자랑함으로써 도둑에게 자신의 보석을 내보인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또 네게서 태어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사39:6,7) 우리는 어떻습니까? 무엇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아니면 이 땅에 쌓아둔 보물입니까?
한편, 역대하 32장 31절 말미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시고 그의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셨더라.” 무슨 말씀입니까? 사실 바벨론 방백들이 히스기야에게 사신을 보내어 그 땅에서 나타난 이적을 물을 때에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잠시 그를 떠나 있으셨다는 말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시험하기 위합니다. 그가 언제 어느 때에든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또한 자랑하고 있는 가를 알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언제 어느 때에든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을 경외하며 또한 사랑하고 있습니까?
오직 여호와만 앙망하라(사 40:1~31)
*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사막에서 하나님의 대로를 준비하라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1,2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라고 말씀하십니다(1절). 왜 입니까?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바벨론 포로생활, 궁극적으로는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2절). 그러면서 무엇을 예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여호와의 길, 우리 하나님의 대로입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우리 하나님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3절)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입니까? 모든 골짜기마다 돋우고, 산과 언덕들은 낮추며, 고르지 아니한 곳을 평탄하게 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되게 함으로써 입니다(4절).
후일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쳤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되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마3:1~3)
그렇다면, 여기서 ‘모든 골짜기마다 돋우고, 산과 언덕들은 낮추며, 고르지 아니한 곳을 평탄하게 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되게 한다’(4절)는 것은 마3:1~3로 미루어 보건대 무엇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회개와 자복, 그리고 이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마3:2,6,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마3:8)
이는 다른 복음서를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막1:2~4) /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곧게 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눅3:3~5)
우리는 어떻습니까?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고 있습니까? 회개와 자복과 함께 이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 가운데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말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사40:5)
*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하시는 여호와만을 앙망하라
“너는 알지 못하느냐 듣지 못하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28,29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빠른 경주자라고 해서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라고 해서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30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전9:11)
결국 어떤 사람이 피곤치 않으며 곤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결국 어떤 사람이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않으며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오직 여호와, 즉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하시는 그 여호와 하나님만을 앙망하고 바라보는 자입니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29,31절). 왜 입니까?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피곤하거나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28절)
한편, 오직 여호와만을 앙망하는 자는 무엇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십니까? ‘새 힘’입니다. 그런데 이 새 힘은 마치 무엇이 날개 치며 올라감 같다고 설명되고 있습니까? 독수리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31절) 이는 시편의 어느 말씀을 연상하게 합니까? “...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103:5) 이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의 영혼은 새롭고 강해져서 독수리와 같이 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라고 말하며 원망의 말들만 늘어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27절) 원망의 말들을 늘어놓는 대신 오직 여호와만을 앙망하고 바라보십시오.
새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이사야 43장 18~21절)
우리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18절) 우리를 지으신 이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사32:1). 이전 일을 더 이상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무엇 때문입니까? 이전 일과 옛날 일과 비교도 안 되는 새 일을 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입니다. 나에게, 우리 가정에, 우리 공동체에 새로운 일을 행하실 주님을 찬양합시다. 그리고 그 분 앞에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내어맡깁시다.
* 새 일을 행하실 하나님을 기억하세요.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사43:19~20)
본문은 1차적으로 출애굽 사건을 통해 구원해내신 이가 이제는 바벨론 포로생활로부터 구원해 내실 것을 말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든 믿는 자들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하실 새롭고 놀라운 일을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한 ‘새 일’을 행하시길 원합니다. 이전 일과 지난 일들과는 감히 비교도 안 되는 새로운 일을 말입니다.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19하~21절)
그 일이란 한 복음성가처럼 우리의 삶 속에 새 일을 행하시겠다는 말입니다. ‘광야에 길을 만드시고 날 인도하시네, 사막에 강 만드신 것 보라. 하늘과 땅 변해도 주의 말씀 영원히 내 삶속에 새 일을 행하리.’ 그렇다면 이 새 일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을 의미할까요?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새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3:9,19)
어떤 새 일을 행하십니까? 먼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즉 새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이전 것은 다 지나가게 하십니다. 지저분하고 땀에 흠뻑 젖은 옷을 훌훌 벗어버리듯,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모두 벗어버리게 하십니다.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옛 습관)을 벗어버리게 하실 것입니다(엡4:22).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이전 것에 미련을 두지 말아야겠습니다. 옛 습관 등에 더 이상 집착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십시오. 새 것이 되십시오.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고후5:17), 성령으로 살 때(갈5:25), 말씀과 더불어 살고자 할 때 가능합니다. 이처럼 새 사람이 될 때라야 새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둘째, ‘새로운 목적’(비전)을 갖게 하십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21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어떤 새 일을 행하십니까? 이전까지는 자기 욕망, 자기 성공, 자기 출세를 위해 몸 받쳐 살아왔지만,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세전부터 전에 예비해두신 하나님의 선한 일, 즉 비전을 위해 살게 하십니다. 이전까지 자기만을 위해 살고 자기 밖에 모르고 살아왔지만, 이제부터는 ‘나’라는 좁디좁은 울타리를 넘어서서 하나님과 내 이웃을 위해 살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새로운 목적(비전)을 발견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나 한 사람 잘 먹고 잘 살아보겠다고 학교에서, 직장에서 아등바등하고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 안에서 위대한 꿈을 품고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들을 이루어나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셋째, 새 노래를 부르게 하십니다.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시149:1)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계14:3)
마지막으로, 또 어떤 새 일을 행하신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을 찬양하되 ‘새 노래’로 찬양하게 하십니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이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날마다 신곡으로 노래하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새 노래’란 무엇을 뜻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영혼이 부르는 노래를 의미합니다. ‘노래’가 아닌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에게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 노래는 이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 외에는 배울 수도 부를 수도 없는 것으로써, 믿는 성도라면 날마다 마땅히 이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새 노래로 찬양하기를 힘쓰는 저와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12:2) 주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412장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처럼, 내 영혼의 그윽이 깊은데서 울려 퍼지는 그 맑은 가락과 하늘 곡조, 즉 내 영혼의 노래로 하나님 앞에 매일 올려드리길 바랍니다. 찬양은 목으로만 부르는 게 아닌 내 영혼 저 깊은 곳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노래와 함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나도 모른 사이에 하루 종일 어떤 찬양을 흥얼거린 적이 있습니까? 찬양 한두 곡으로 몇 시간째 주님을 찬양해본 적이 있습니까? 찬양을 할 때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마음의 뜨거움과 감동을 느낀 적은 없습니까? 그런 경우들이 바로 새 노래로 찬양하는 경우들일 것입니다.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 (이사야 45:15)
*고난 속에 하나님이 없다구요?
당장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데도, 즉시 하나님의 오른손이 필요한데도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모르겠습니까? 힘을 내세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스스로 숨어계시는 하나님’을 한번 묵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역전, 역전의 하나님, 반전의 하나님을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모래 위의 발자국
어떤 한 사람이 주님과 함께 모래 위를 걸어갔답니다. 그런데 그가 주님께 따집니다. “주님, 평안한 때는 모래 위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찍혀 있는데, 왜 곤고한 날에는 한 사람의 것만 있는 것입니까?” “어디에 가셨던 거죠?” 그러자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내가 널 업고 걸어갔기 때문이란다.”
종종 믿음의 선배들은 이런 의문에 빠지곤 했습니다. 평안한 때엔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 같지만, 정말 도움이 절실한 순간에는 좀처럼 함께 하심을 느낄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주님 어디에 계십니까?”, “왜 숨으시나이까?” 라고 한 결 같이 말했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시10:1)
왜 하나님은 환난 날에 숨으시는 것일까요?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난엔 관심이 없으셔서 인가요? 아니면 우리의 고난을 해결할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일까요? 여러분은 왜 하나님께서 환난 날에 숨으신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숨으신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고난의 때에, 환난 때에 그분의 일련의 행동을 뭐라 딱히 표현할 말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편의상 ‘숨으신다.’고 표현하기로 합시다.
*스스로 숨어계시는 하나님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사45:15)
이사야 선지자도 ‘숨으신다.’는 표현을 하나님께 쓰고 있네요. ‘숨으신다.’는 표현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하나님이 지금 당장은 행동하지 않으셔서 숨어 계신 것 같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셔서 당신을 밝히 드러내시고 구원해 주실 것을 강력히 확신하는 것일 겁니다. 마치 조선시대의 '암행어사 출두'같은 것을 연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은 하나님께서 아무런 행동도,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지금 당장은 숨어계시는 것 같지만, 그분은 언젠가 자신을 밝히, 조금도 숨김없이 드러내시고 우리를 '역전(반전)'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우리가 도리어 억울한 처지로 몰리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누명을 뒤집어 쓸 수도 있습니다. 정직과 성실로 일관한 우리가 오히려 세상의 그릇된 의도의 제물(?!)이 될 위기에 놓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끝장이 나버리면 안됩니다. 우리에겐 언제나 반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늘 역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전이 있기에 우린 용기를 매일 얻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반전은 ‘갈보리의 십자가’입니다. 사단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써 자신이 승자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너무도 무기력하게, 아무런 저항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여기가 끝인 줄만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무덤을 박차시고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단번에 기고만장하던 사단을 무장해제 시키고, 우리를 사단의 권세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이것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반전 중의 반전입니다.
반전의 묘미를 즐기십시오. 반전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주님과 함께 말입니다. 하나님, 우리의 구원자 되신 하나님은 진실로 '스스로' 숨어계시는 하나님입니다.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말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기가 막힌 순간에 돌연히 일어나실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한 편의 반전 드라마를 연출하실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주인공인 그런 드라마를 말입니다.
하나님은 숨어 계시되 ‘스스로’ 그러하십니다. 목적이 있는 '숨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환난 날에 숨어계신 것 같다고 해서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번엔 또 어떤 반전(역전) 드라마를 준비하고 계실지 기대해 보십시오. 그리고 기다리는 동안에 옳은 일을 행하십시오. 눈앞에 있는 환난에 동요하지 마시고, 흔들리지 마시고, 주께서 하라고 하신 그 옳은 일에 전진하십시오. 그것이 극적인 반전드라마를 돕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줄기차게 하나님께서 '반전의 명수'이심을, 그리고 믿음의 선진들은 그러한 반전 속에서 살아왔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의 생을 잘 드려다 보십시오. 두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그 대열에 여러분도 기꺼이 합류하십시오.
*안 보시는 것 같으나 다 보고 계십니다.
지금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은 숨어 계신 것 같으나 지금 이 시간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지금도 우리를 지켜보시고 계신다는 말에서, 우리는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처지와 형편을 모조리 그 분이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역전의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리고 잠잠히 그분의 도우심을 기다립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121:5-8)
네가 나의 종이 되어...(사 49: 1~26)
*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이스라엘을 일으키며 열방들을 돌아오게 하리라.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6절)
본문 속 ‘나의 종’은 결국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후일 시므온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을 찬송했던 그 찬송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눅2:30~32)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으로 무엇을 보게 됩니까? 주의 구원입니다(30절). 그런데 이 구원의 성격에 대해 무엇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까?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으로 이방을 비추는 빛이자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말입니다(31,32절).
오늘 본문의 내용처럼 말입니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6절) 즉, 주의 종(예수 그리스도)을 통해 후일 야곱의 지파들이 일어나며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돌아오게 되는 것은 물론, 땅 끝까지 이르는 많은 이방과 열방이 그 구원의 빛 가운데로 나아오게 될 것입니다(이방의 빛, 이방을 비추는 빛).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백성들에게 미움을 받으며 관원들에게 종이 되심으로써(7절), (시므온이 말한 바)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심으로써(눅2:34)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신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에게...”(7절)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눅2:34)
*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시고 고난당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다.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은즉 그의 고난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13절)
선지자 이사야는 하늘과 땅, 산 즉, 온 우주만물에게 노래하고 기뻐하되 즐거이 노래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왜 입니까?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으며, 그의 고난당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13절). 어떤 위로 말입니까? 바벨론의 함락(24~26절)을 통한 이스라엘의 해방과 귀환, 회복입니다.
“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 하리라 그들이 길에서 먹겠고 모든 헐벗은 산에도 그들의 풀밭이 있을 것 인즉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 내가 나의 모든 산을 길로 삼고 나의 대로를 돋우리니 어떤 사람은 먼 곳에서, 어떤 사람은 북쪽과 서쪽에서, 어떤 사람은 시님 땅에서 오리라.”(9~12절)
선지자 이사야를 이 때를 가리켜 무엇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은혜의 때와 구원의 날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8절 상) 후일 사도 바울은 이 구절을 인용, 지금이야말로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을 수 있는 날임을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1,2)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이야말로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임을 믿고 날마다 주께로 나아오길 힘쓰고 있습니까?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심하고 회의하고 있습니까?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14절)
이렇게 말하면서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그러나 그분이 정말 우리를 버리시며 우리를 잊으실 분입니까? 아닙니다. 여기 그분의 대답을 한 번 들어보십시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15절)
그러면서 하나님은 우리를 직접 자신의 손바닥에 새겼고, 우리의 성벽 역시 항상 그분의 목전 앞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16절) 여기서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는 구절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는 숱한 원수들의 침략으로 무너지고 부서져있는 성벽의 비참한 상태를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임이 분명합니다. 결국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어려운 생활의 실상을 익히 잘 알고 있으며 다 기억하고 계시다는 말일 것입니다.
따라서 그분은 다음과 같이 약속하십니다.
“네 자녀들은 빨리 걸으며 너를 헐며 너를 황폐하게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그들이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반드시 그 모든 무리를 장식처럼 몸에 차며 그것을 띠기를 신부처럼 할 것이라.”(17,18절)
그 결과 황폐하고 적막하던 곳, 파멸된 땅들이 어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까? “이는 네 황폐하고 적막한 곳들과 네 파멸을 당하였던 땅이 이제는 주민이 많아 좁게 될 것이며 너를 삼겼던 자들이 멀리 떠날 것이니라.”(19절)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엄청난 구원 약속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으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고 말한 채 계속 회의와 절망 가운데 엎드려 있지는 않습니까?
영적 파도타기 (이사야51:15)
*파도타기
새들백교회 릭 워렌 목사님의 저서 <새들백교회이야기>을 읽다보면 서문에 ‘파도타기’에 관한 재미있는 글을 접하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은 영적 파도타기라는 주제를 통해 여러 가지 것들을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서핑이란 어떤 스포츠입니까? 길쭉한 널 판지를 이용하여 밀려오는 파도 위에 올라가 그 파도의 흐름을 타는 것입니다. 미국의 많은 학교들은 파도타기를 체육 과목에 포함시키고 있는데 지원자들은 그곳에서 어떤 장비를 구입해야 하며, 그 장비들의 올바른 사용법은 무엇인지, 파도타기를 할 수 있는 파도의 종류를 식별하는 법이며, 파도 위에 서서 가능한 한 오래 탈 수 있는 기술, 무엇보다도 중요한 기술인 나가자빠지지 않고 파도에서 내려오는 법 등 파도타기에 대한 모든 것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결코 배울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아무리 유능하고 노련한 '파도타기' 선수라 할지라도 이것만큼은 도무지 가르쳐 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가르치고자 해도 그것을 도무지 가르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일까요?
*‘파도를 일으키는 법’은 수업불가
그것은 바로 '파도를 일으키는 법'입니다. 파도타기란 '이미 일고 있는 파도'를 잘 타는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파도를 일으키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이 파도를 만드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분이 일으키고 있는 파도를 잘 타다가 내려오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바다를 휘저어서 그 물결을 뒤흔들게 하는 자’(사51:15)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야말로 바다의 파도들을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또한 영적인 파도들을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지금까지 그분은 시대와 민족을 걸쳐서 끊임없이 영적인 파도들을 일으켜 오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대의 영웅들이란 한 결 같이 그 시대의 파도를 잘 탔던 사람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믿음의 선진들 역시 한 결 같이 하나님께서 각 시대마다 일으키신 그 파도들을 잘 탔던 사람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들은 단지 그 파도들을 적시에 잘 올라탔던 것뿐입니다. 동시대의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그 파도들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그 때에 그들은 자신들이 타야할 파도들을 보고 뛰어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미처 보지 못한 좋은 파도를 깨닫고 최선을 다해 그 파도들을 타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될 수 있을지도 모르나 우리는 그 파도들을 일으키셨던 분이 오직 한 분,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파도들을 일으키시면서 동시에 그 시대의 파도타기 선수들을 찾아내고 준비시키는 일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에 의해 발굴된 이들은 자신들의 시대의 '영적 각성과 부흥, 재건 등'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부흥'이란 하나님께서 각 시대에 일으키시는 파도들을 잘 탔던 것의 결과인 것뿐입니다. 영적 각성의 주역들은 자신들의 시대에서 자신들이 타야할 그 좋은 파도들을 먼저 발견했고, 그 발견한 좋은 파도들을 적시에 잘 탔던 것입니다.
'기적'이나 '신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특정한 개인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정한 개인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가서 '기적', '신유' 등의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할 때 단지 그 때 그곳에서 특정한 개인들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유'를 행하시고자 할 때, 단지 그 때 그 곳에서 특정한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파도를 만드시면, 우리는 단지 그 파도를 타는 것뿐입니다.
우리의 비전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시대에 일으켜 보내시는 그 파도들을 잘 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해변 가에만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자꾸만 우리의 등을 떠미십니다. 자꾸만 파도가 일고 있는 바다로 내 모시는 것입니다. 잔잔한 해변 가로 끊임없이 '파도들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타야 할 그 파도를 이미 알고 계십니다. 언제 그 파도가 주어질 것인 가에 대해서도 분명히 알고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파도를 탈 준비가 되어 있느냐 입니다.
* 파도를 식별하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 파도타기를 잘 하기 위해서는 파도를 식별하는 능력을 키워야 하는 것, 기술과 균형을 골고루 갖추는 것, 스러져 가는 파도에서 내려오는 것 등을 배워야 합니다.
먼저 해야 할 일은 마치 능숙한 파도타기 선수들처럼, 파도를 식별하는 능력을 길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파도타기를 잘 하기 위한 필수조건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파도타기 기술을 습득했다고 하더라도 좋은 파도를 만나지 못하면, 제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파도를 먼저 잘 찾아내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책임은 파도를 만들어내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파도를 만들어 내려고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많은 사람들을 주변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파도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시대에 일으키고 있는 그 파도들을 식별해내는 것입니다. 수많은 파도들 중에서 파도타기에 가장 적합한 파도를 골라내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서핑보드를 가지고 바다로 뛰어든다 해도, 그 날에 파도가 일지 않으며 물속에 빠져들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안목을 키우세요. 보다 멀리, 보다 넓게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역사의 흐름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세계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를 파악하되 그 속에서 진행 중인 하나님의 섭리를 알아야만 제대로 된 우리의 사명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역사의 흐름'이 아니라 '그 속에서 도도히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들'을 발견할 때, 우리는 우리 시대의 비전과 국가의 비전과 사회의 비전, 공동체의 비전, 교회의 비전, 가정의 비전, 개인의 비전, 개인의 비전 등을 찾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잇사갈 자손 중에서 시세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우두머리가 이백 명이니 그들은 그 모든 형제를 통솔하는 자이며.”(대상12:32)
여기서 '시세를'(히, 비나 -라이팀)은 '분별력' 이란 뜻의 '빈'과 '시대'란 뜻의 '이팀'이 합쳐 '시대에 대한 분별력' 이란 뜻이 된 것으로 잇사갈 200명의 지도자들은 사울 왕의 통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장차 다윗을 왕으로 세우실 것을 예견하고 그에게로 나아왔던 것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각 시대마다 이런 분별력이 있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눅12:54-56)
또한 주님은 누가복음에서 천기는 구별하되 '시대'를 분변하지 못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자기 시대를 분변하지 못하고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훼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대에 대한 분별력을 가지십시오. '시대에 대한 분별력'이야말로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는 데 꼭 필요한 단서일 것입니다. 우리의 소명은 결코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하나님의 사역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분별력과 안목을 키워야만 좋은 파도를 식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안목이란 하루아침에 형성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많은 시간과 노력과 인내 들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는 늘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그것에 민감한 생활이 전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 기술과 균형을 골고루 갖추어야 합니다.
파도타기란 좋은 장비만 갖추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가능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파도를 찾아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장비들을 갖추는 것도 꼭 필요하지만, 그것과 함께 여러 가지 기술을 잘 갖출 수 있어야 합니다. 파도타기는 쉬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어렵고 뛰어난 기술과 균형감각을 필요로 합니다. 영적인 파도를 타도를 타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정이나 심지어는 헌신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영적 통찰력, 인내, 믿음, 기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균형감각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단순히 열정이나 헌신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흔히 생각하기 쉬운데, 기술적인 측면도 소홀히 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대부분 영적인(?) 사람들이 제일 소홀히 생각하기 쉬운 부분이 있다면 바로 '기술적인 면'일 것입니다.
또 균형감각이 있어야만 합니다. 파도타기를 하면서 균형감각을 잠시라도 잃어버리게 되면 그 즉시 파도에 파묻혀 버립니다. 나가자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금세기의 다른 어떤 시기보다도 좋은 파도들이 밀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회나 개인들이 필요한 기술들이나 균형감각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부흥과 성장 등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영적파도들을 놓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눈앞에 힘차게 밀려오는 있는 저 파도들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파도 위에 과감히 우리 자신의 몸을 던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비록 자주 자주 넘어진다 해도 쉽게 낙심하지 마세요.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한 때에만 파도타기를 할 사람이 아니라, 우리의 전 인생을 통하여 파도타기에 임하여야 할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스러져 가는 파도에서 내려오는 법도 배워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하라고 명하시는 것을 느낄 때마다 스러져가는 파도에서 내려오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스러져가는 파도가 아쉬워서 더 좋은 파도들을 놓쳐서는 안 되니까요. 밀려오는 파도 위에 오르는 법만큼이나 스러져가는 파도에서 내려오는 법을 배우는 것도 종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평생 한 개의 파도만 타는 것이 아니라 많은 파도들을 타야만 하니까요. 그러므로 올라야 할 때와 내려와야 할 때를 잘 구분해야 합니다.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전3:6하)
하나님은 우리가 파도타기에 익숙해질수록 더 많은 파도들을 보내주십니다. 그러나 많은 파도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결코 달갑지만은 않은 일일 것입니다. 매번 물속에 넘어져서 물을 먹게 될 테니까요. 반면에 준비된 사람에게는 곧 기회가 많아지는 셈입니다. 우리가 준비되고 익숙해질수록 하나님께서는 안심하고 더 많이 더 좋은 파도를 보내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파도타기를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파도를 보내주십니다. 그 곳이 낙도 오지이든지, 도시 빈민촌이든지, 미전도 종족이든지....
하나님은 파도타기 선수들을 우리 시대 속에서 두루 찾고 계십니다. 당신이 그 차례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Are you ready?
쫓겨난 자들을 모으시는 주(사 56:1~12)
* 누구라도 예외가 될 순 없습니다.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3절)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의 구원에 있어서 어떤 이들 역시 동일한 원리의 적용을 받게 될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까? 이방인과 고자입니다(3절).
사실, 고자를 위시한 불구자는 죄의 결과에 대한 상징을 몸에 지닌 자로 간주되어 하나님의 제사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이스라엘 회중의 반열에서도 제외되어 있었습니다.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신23:1)
암몬과 모압 사람으로 대변되는 이방인들 역시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이구요(신23:3). 물론 에돔과 애굽 사람은 삼대 후 자손부터 (개종을 전제로) 총회에 들어오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말입니다(신23:7,8).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신23:3)
그런데 이런 이방인들과 불구자들마저 하나님의 동일한 구원 약속 아래로 편입되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3절) 사실, 이방인들은 영적으로 볼 때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라는 점에서(엡2:12) 불구자나 다름없었습니다.
결국 이 같은 사람들마저 동일한 구원의 약속 아래로 편입되었다는 점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해준다고 할 수 있습니까? 구원에 있어서는 그 누구라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단, 어떤 사람에 한해서 말입니까?
* 주의 언약을 굳게 잡는 자라면....
“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4,6절)
어떤 불구자에 한해서 말입니까? 하나님의 안식일을 지키며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선택하며 그분의 언약을 굳게 잡는 불구자들입니다. “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4절) 또한 어떤 이방인에 한해서 말입니까?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분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분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들입니다.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6절)
한편,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에게 무엇을 약속하셨습니까? 아들이나 딸보다 더 나은 기념물과 영원한 이름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이 이름은 이는 단순한 이름이 아닌 법적 지위로서 그가 합당하게 총회에 끼일 수 있는 자격을 의미).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5절)
또한 그들을 하나님의 성산, 즉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컫는 성전으로 데려다가, 그곳에서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기꺼이 받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만민을 위하여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7절)
결국 이 일들은 언제 구체적으로 성취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 사역들을 통해서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막11:15~17) 생각해 보면 이 때의 이 사건, 즉 예수님의 성전정화는 단순히 성전을 깨끗하게 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오래전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보여주셨던) ‘전 이방인의 천국 동참’이라는 하나님의 비전을 재천명 하신 것임이 분명합니다.
* 왜냐하면 주님은 쫓겨난 자들을 모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시는 주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미 모은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8절)
이 말씀은 신약성경의 어느 말씀을 연상하게 합니까?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10:16) 특히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라는 구절은 ‘이미 모은 백성 외에’(사56:8)와 함께 하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과 이방인 모두에게 미치는 복된 소식임을 다시 한 번 증거하고 있습니다.
한편, 주님은 ‘쫓겨난 자들을 모으시는 주’, 즉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려는 분으로써(눅19:10) 지금도 당신의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내기까지 찾고 또 찾고 계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우리는 어떻습니까? 쫓겨난 자들을 모으시는 분, 이미 모은 백성 외에 또 모아 하나님께 속하게 하시려는 분, 아직도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을 찾고 또 찾으시는 그분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고 있습니까? 삶으로 반응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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