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姜夔의 음악을 듣는다. 사곡詞曲이다. 송나라 때 사詞에다가 곡을 붙인 것이다. 곡은 고박古樸하고 청일淸逸하다. 예술가곡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가곡이라 하면 슈베르트를 비롯한 19세기 이후의 서양가곡을 연상한다. 물론 우리에게도 조선시대의 아름다운 가곡이 있지만 사람들은 그런 음악이 있었는지조차 잘 모른다. 하물며 이웃나라 중국에서 그것도 천년 전에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가 불려졌다는 사실은 아마도 금시초문일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우리의 역사와 동양의 예술사에 대해 등한시해왔다.
수년 전 강기의 가곡을 비롯하여 중국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음악 작품을 발견하게 된 것은 순전히 양인리우의 <중국고대음악사>라는 책 덕분이다. 이 책을 받아든 순간 나는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무심코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옛 중국의 음악을 채보한 악보가 눈에 보였다. 그것도 소식蘇軾의 <염노교念奴橋>다. 염노교는 사패詞牌의 이름이요 그 가사들 중의 하나가 바로 소식의 '대강동거大江東去'로 시작하는 <적벽회고赤壁懷古>다. 책을 다 읽은 후에 급히 중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딸에게 부탁을 하였다. <중국고대음악사>에 나오는 곡들을 음반가게에 가서 찾아보라고. 그러나 중국 역시 우리처럼 일반 가게에서는 중국의 고대음악 음반을 팔지 않았다. 물론 현재 널리 불려지고 있는 경극 음반은 많았지만 말이다. 후에 어렵사리 구한 것이 바로 <중국고전음악흔상中國古典音樂欣賞>이었다. 모두 여섯 개의 시디로 된 전집이었다. 중국에서 먼저 들은 딸도 놀랐고 급히 보내라고 독촉하여 이를 받아들은 나도 그 음악의 선율에 충격을 받았다.
잊혀진 세계. 망각 속에 묻혀져 있었던 새로운 세계였다. 새로운 세계라고 하지만 우리의 몸 안에 자리잡고 있는 어떤 오래된 유전자의 본 모습을 발견하였을 뿐이다. 오도되고 잘못된 교육으로 인하여 완전히 도외시되었던 새로운 경계였다. 새롭다고 이야기 하지만 실은 우리의 선조先祖들이 늘 듣고 접하였던 세계였고 우리도 이미 반드시 익숙해져 있었어야만 할 그런 아름다운 경계였다. 이토록 아름다운 경계를 다시 찾을 수 있도록 직접적인 계기를 만들어준 이 방대한 책의 저자인 양인리우에게 무한한 존경을 표시하며 동시에 유려한 문체로 번역을 한 이창숙李昌淑 교수에게도 깊은 고마움을 느낀다.
사실 생각해보면 어려서부터 우리가 보고 듣고 익숙해진 음악은 대개가 서양 음악이라 할 수 있다. 서양의 고전음악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일 정도로 무수한 천재들이 명멸하고 그들이 일궈놓은 아름다운 작품 세계는 우리의 일상을 얼마나 아름답게 만들고 있는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쉬움과 허전함이 내 마음 깊이 자리잡고 있었기에 차츰 우리의 국악을 찾기 시작하였고 그리하여 우리 음악이 정말 대단한 경지에 자리잡고 있음을 서서히 자각할 수 있었다. 수재천이나 영산회상의 가락은 바로 천상의 선율이 아니고 무엇인가. 나아가 조선 가곡의 유장함은 복잡하고 머리만 아픈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한줄기 청량제가 아니던가. 하규일河圭一의(1867-1937) 가곡을 듣노라면 우리는 절로 무릎을 치게된다. 이야말로 바로 살아있는 가락이 아닌가. 서양음악처럼 곡에 대한 구구절절한 해설도 필요없다. 그저 듣기만 하여도 감흥이 새록새록 솟아나는 것이다.
우리 음악을 더 자세히 알고자 그동안 책을 많이 찾아 보았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장사훈張師勛(1916-1991)의 <한국음악개론>과 <한국음악사> 두 권이었다. 장사훈과 쌍벽을 이루는 이혜구의 <한국음악서설>과 더불어 귀중한 책들이다. 근래 들어 전인평의 <새로운 한국음악사>도 나오고 송방송의 <고려음악사연구>, 백대웅의 <한국전통음악분석론> 등도 있으나 전문적인 서적들이다. 일반인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강동렬의 <국악이야기>, 전인평의 <국악감상>, 신대철의 <우리음악 그 맛과 소리깔> 등도 출간되었다. 하지만 전문적이면서도 일반대중이 접하기에 크게 무리가 없고 또 우리의 음악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안내서는 장사훈의 책들을 따라가지 못한다. 정병욱의 <한국의 판소리>, 판소리학회가 엮은 <판소리의 세계> 등도 있지만 이 역시 우리 국악의 일부분만 취급하고 있다. 또 동양음악의 전반적 모습을 조감하기 위한 것으로 전인평이 지은 <아시아음악연구>, 송방송의 <동양음악개론> 등이 있지만 너무 간략하여 문자 그대로 각 나라의 음악을 기초적으로 소개하는 데 그치고 있다. 무엇보다 장사훈의 책들은 우리 음악에 대한 기본상식을 갖추게 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의 책을 읽고서 새삼스럽게 조선가곡을 다시 찾았고 나아가 조선말의 명창 하규일의 유음遺音 음반도 구하여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고대음악은 역사가 대단히 오래되고 그 폭도 넓어서 모름지기 한 권의 음악사나 개론을 쓰기 위해선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고 또 음악이론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일제 강점기에 조선 아악부에서 공부를 하고 실제로 악기를 연주하였으며 나중에 양악도 섭렵하여 고대문헌과 고대악보를 능숙하게 읽을 수 있었던 장사훈 선생이야말로 그 일의 적임자라 할 수 있다. 그가 채보한 조선가곡 덕분에 우리의 가곡이 완전히 망실되지 않고 지금껏 보존되고 또 불려질 수 있으니 장사훈 선생의 공적은 아무리 높게 평가를 해줘도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책을 읽어가면서 느낀 점은 역시 우리 음악이 이웃나라인 중국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아왔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들의 음악에 대해선 우리가 아는 바도 연구한 바도 전혀 없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세종이 박연으로 하여금 아악을 정비하게 했다는데 당시의 중국음악에 대해서라면 우리는 아는 바가 전혀 없다. 우리의 아악이라는 것이 일찍이 고려 예종 때 (1116년) 북송의 음악과 악기를 일습으로 전수 받아 시작되었다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송나라 음악의 모습이 어떠하였는지는 어디에도 기술되지 않았다. 우리의 문화가 동아시아 문화권의 하나로서 중국과 역사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었음이 틀림없지만 정작 나부터가 중국음악은 들어본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패왕별희나 홍콩영화에 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막연히 저런 것이 중국음악일지도 모른다는 억측만 하였을 뿐이다.
그동안 중국음악에 대한 소개를 한 책자는 여러 권이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책들은 중국음악의 미학적, 철학적 면만을 취급하는 것들이었다. 우리의 병폐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러한 부분은 음악을 음악으로 취급하지 않고 정치사상 또는 철학사상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특히 중국의 제자백가가 나타났던 선진시대 그리고 위진魏晉시대 현학과 관련하여 기껏해야 완적이나 혜강의 악론을 언급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여기현의 <중국고대악론>이다. 미학과 철학으로 접근하는 악론만 있지 음악 자체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없는 그런 책이었기에 실망감을 금할 수가 없었다. 중국의 희곡을 알아보기 위하여 구한 책으로는 김정규의 <중국희곡총론>이 있지만 이 책 또한 음악은 접어두고 주로 희곡의 문학적 면만 서술하고 있었다. 마치 우리 학자들이 향가나 고려가요 그리고 조선의 가사나 가곡을 논하면서 그것의 문학적 의미만 분석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만일 우리가 서양의 오페라를 논하면서 가사의 문학적 의미와 극의 요소만 이야기하고 있다면 아마 삼척동자도 웃을 일일 것이다. 본말이 전도되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런 면에서 양인리우의 <중국고대음악사>는 획기적이다. 이 책은 선진시대부터 명청明淸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동안 중국의 음악과 그 음악이 지니는 형식, 가사의 소개와 그 문학적 의미, 그것의 미학적 요소는 물론 그 시대의 모습을 기술하고 무엇보다 음악 본연의 모습을 기술하고 설명하는 데에 중점을 둔다. 악기 소개와 악보 소개 그리고 곡명 해설, 작곡가에 대한 설명, 작품의 형식과 구조, 나아가 음악 이론까지도 망라한 실로 백과사전적인 음악 사료집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현재 상권만 번역되었는데 상권은 송나라까지의 음악사를 다룬다. 분량이 큰 책으로 무려 681쪽이나 된다. 옮긴이 이창숙은 인제대학교(2005년 현재 서울대) 중문과 교수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는 옮긴이가 이 책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겪었을 엄청난 어려움을 충분히 짐작해볼 수가 있다. 전문적인 음악 이론이나 중국 고대의 음악용어 그리고 악기와 악보 해설은 물론 어려운 한문 원전을 모두 옮겨내야만 하는 고역을 치렀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의 번역솜씨는 근래 보기 드물 정도로 우수하고 빼어나다. 원전과 대비해 보더라도 정확하면서도 이해하기 좋게 우리말을 선택하고 나열한 그의 문장력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예를 들어 굴원屈原의 <이소離騷>는 번역하기가 무척 어려운 것으로 판단되는데도 매우 깔끔하게 번역이 되어 있다. 물론 곽말약의 현대한어 번역을 참고하였다 하더라도 그의 우리말 옮기기 수준은 가히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읽는이의 편의를 위하여 많은 역주가 삽입되어 있는데 이 역시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근래에 나온 번역서들 가운데 가장 우수한 번역 중의 하나로 내가 이창숙 교수의 <중국고대음악사>를 꼽는 이유이다.
지금 <중국고대음악사>의 하권 번역이 마무리 단계인 모양이다. 내년 초에 하권이 발간될 예정이라는데 영광스럽게도 이선생의 호의로 하권의 번역 초고를 읽을 기회를 얻었다. 하권은 원나라 이후 명청시대까지의 음악사로 우리가 궁금해하던 중국의 근대음악에 대한 자세한 안내가 실려있으며 무엇보다 중국이 자랑하는 희곡의 역사와 그 발전 과정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경극이 어떠한 역사적 경로를 따라 발전해온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옮긴이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2005년 현재 아직 하권이 나오지 않고 있다. 출간이 여러 사정으로 지연되고 있어 유감이다.)
이 글은 책에 대한 비평이 아니다. 얕은 지식밖에 없는 사람이 감히 이런 대저작을 두고 무어라고 논위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일 것이다. 그저 이 책을 읽고 느꼈던 점만 몇 가지 기술해본다.
1. 설창說唱 음악의 유래와 발전
東漢 설창용
"오늘날 중국에는 이야기를 강창講唱하는 데 쓰는 가곡이 수백가지나 있으며 이를 설창음악이라 한다. 설창은 때로 설서說書라고도 한다. 설서라는 말은 <묵자墨子>의 경주편耕柱篇에서 보인다: '담론을 잘하는 사람은 담론하고 책 해설을 잘 하는 사람은 책을 해설한다' <한서 예문지>에 '소설오십가小說五十家'를 수록하고 '소설가 유파는 패관에서 나왔으니 거리와 골목에서 이야기하며 길에서 듣고 말하는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대의 소설은 설說하는 것이다. 이른바 소설은 오늘날 설창대본과 다름이 없다. 위에 인용한 <한서 예문지>의 말은 고대소설과 정사正史의 차이를 지적한다. 이 말은 후대 설서와 역사의 구분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이런 설서 또는 소설 속의 창의 유무는 단언할 수 없다. 다만 늦어도 기원전 3세기가 되면 노래할 수 있는 대본을 남긴다. 그때의 작품 가운데 설창 음악의 원조를 볼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순자荀子(활동한 시기는 대략 BC286년부터 BC238년 사이)>의 성상편이다. 성상편에서는 통치자의 어리석음을 폭로하고 태도를 바꾸어 개명한 정치를 펴라고 요구한다. 내용은 이야기가 아닌 도리이다. 형식상 상相이라는 타악기로 절주를 치며 노래하는 시편으로서 오늘날의 쾌판快板 또는 연화락蓮花落 등 설창음악과 거의 차이가 없다." (96쪽)
<중국고대음악사>의 책 표지를 보면 사천성에서 발굴한 한대漢代의 설창용이 있다. 지난 중국여행 때 박물관에서 이를 보고 그 아름다움에 놀라 한참이나 응시하였던 기억이 난다. 미술조각품으로도 걸작이지만 그 소재도 노래를 부르며 춤추는 한 늙은이의 모습이다. 이를 봐도 한나라 때 이미 설창이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설창은 송나라 때 이르러 고자사와 제궁조諸宮調로 복잡하게 발전한다. 그 유명한 장택단張擇端의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는 송나라 수도였던 변량(개봉)의 갖가지 풍물을 그린 것인데 거기에도 거리에서 설창을 연출하는 장면이 보인다. 훗날 제궁조는 더 발전하여 원나라 잡극의 원조를 이루며 이는 다시 명청시대에 북곡北曲과 남희南戱로 양분되어 있다가 곤곡崑曲으로 통합되고 현재의 경극京劇으로 맥을 잇는다. 송대 이전부터 발전되어 오던 연극적인 요소와 백희百戱 등이 결합하여 급기야는 종합예술로 발전하는 것이다. 실로 바그너의 악극개념보다 더 풍부하고 광대한 예술장르라 할 수 있다.
東漢 擊鼓설창용 - 중국북경역사박물관
여기서 의문점이 하나 생긴다. 우리의 판소리는 흔히 영정조英正祖 시대에 발생하여 발전된 우리만의 독창적 음악장르라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이가 창을 하는 사람과 북을 반주하는 사람으로만 이루어진 극히 단순하고 기초적인 설창 형태임에 틀림없다면 이 역시 중국의 영향을 뒤늦게 받고 우리 수준에 맞게 적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이러한 설창음악이 그야말로 어떠한 문화배경에서도 탄생할 수 있는 기초적 예술형식이었기에 우리나라에서 자생한 것일까? 혹은 신재효의 여섯 마당의 내용이 앞서 이야기한 소설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면 이 또한 중국의 설창이나 제궁조와 동일한 예술형식으로 볼 수 있을까? 나아가 중국에서는 설창이 그처럼 복잡한 고도의 예술로 발전하고 또 시대에 따라 무수한 변이를 겪었는데 반하여 우리는 왜 그러한 커다란 변화 하나 없이 지난 수백년간 같은 모습만을 유지하고 있는가? 우리의 예술성이 부족해서 그럴까? 아니면 시대적인 어떤 속박이 있었던 걸까? 어쨌거나 현대 대중들의 외면을 받고 있는 우리의 판소리는 중국음악의 발전과 그 이유를 분석하고 배워야 할 것이다.
2. 악기
고대의 중국은 세계적 제국이고 중심이었다. 그런 힘을 바탕으로 중국은 여러 나라로부터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고 흡수하였다. 음악도 예외가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수나라와 당나라 때 십부악十部樂을 편성하였는데 그 중에 고구려악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신라악, 백제악, 왜악도 함께 고려되었으나 자격미달로 판정되었고 고구려 음악만이 정규음악으로 채택되었다. 이는 고구려가 강성하다는 점도 있었겠지만 음악 자체의 우수성으로 인한 결과였을 것이다. 당시의 고구려 음악이 어떠했는지는 구체적으로 남아있는 자료가 없지만 당나라 때 기록을 보면 최소한 고구려 악기들의 이름을 알 수가 있다. 가령 생, 소, 적, 의취적, 대필률 소필률 도피릴률, 패, 추쟁 탄쟁, 와공후 수공후, 비파, 오현비파, 요고, 제고, 첨고 등이 있다. 이러한 악기들이 과연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앞으로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우리 음악의 근원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 하겠다.
우선 위의 기록을 보더라도 삼국시대부터 중국과의 음악교류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아가 고려예종 1114년에는 송의 신악기가 대량으로 도입되었다 한다. 이때의 악기로는 철방향鐵方響, 石방향, 비파, 오현, 쌍현, 쟁, 공후, 필율, 적, 지 , 소, 포생匏笙, 훈壎, 대고大鼓, 장고, 박판 등이 있다. 여기서 신라시대 이후의 당비파와 고구려시대의 공후와는 앞의 동명악기들이 어떻게 다른 지도 궁금하다. 특히 궁정음악의 헌가軒架 악기의 구성을 보면 중국의 영향을 받아 악기가 똑같이 편성되어 있다. 악기들 가운데 일현금, 삼현금, 오현금, 칠현금, 구현금이 보이는데 이들은 현재의 어떤 악기를 지칭하는 것인지도 의문이다.
현재 우리 국악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악기인 해금의 경우를 보자. 중앙대 전인평 교수는 해금의 원조가 인도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도 고대음악에서 나타나는 ravanhatha가 그 기원이라는 것이다. 일리는 있지만 시기적으로 너무 멀다. 성현의 <악학궤범>에 나오는 설명처럼 중국 흥안령 일대의 해족奚族이 쓰던 악기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비교적 설득력이 있고 중국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문제는 우리의 해금이 元나라 때 전해져 지금까지도 그 원형을 거의 변치 않고 내려오는 반면 중국에서는 해금 종류가 너무 혼란스러울 정도로 다양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해금은 중국의 호금胡琴과 유사하다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일치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중국에서는 이호二胡, 고호高胡, 중호中胡, 판호板胡, 경호京胡 등 오늘날에도 서로 다른 종류의 다양한 해금이 사용되고 있다. 그들의 악기의 다양성에 놀랄 뿐이다. 비록 간단한 두 줄의 찰현악기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악기개량을 통한 음역과 발전된 연주기법은 실로 서양의 현악기들 이상의 음악효과를 내고 있다. 전래민속음악도 많지만 근대의 무수한 작곡가들에 의해 해금을 위한 독주곡도 상당수 창작되어 지금도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점은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할 대목이다.
아쟁牙箏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아쟁은 칠현금이며 찰현악기다. 고려사 악지樂志의 당악기唐樂器조에서 그 이름이 보인다하니 분명 당나라의 칠현악기인 알쟁軋箏과 어떤 연관이 있을 것이다. 중국의 일부 지방에서는 지금도 우리의 아쟁과 흡사한 악기가 연주되고 있다는데 이에 대해서도 더 조사해보아야 할 것이다.
거문고와 가야금의 경우는 어떠할까. 거문고는 6현금 탄주악기다. 중국의 고금은 이와 비슷한 칠현금의 탄주악기지만 거문고가 지니고 있는 괘가 없다. 흔히 거문고를 고구려 이후의 우리만의 독창적인 악기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지만 최근에 전인평이 인도의 영향을 언급한 바 있다. 가야금의 경우는 중국의 古箏과 무척 가까운 악기라 여겨지며 일본의 고도(琴)는 아마도 우리의 가야금이 건너가 발전된 것이 아닌가 싶다. 삼국사기 제32권에 나오는 악지의 다음과 같은 기록은 우리의 흥미를 일으킨다.
"현금玄琴(거문고)은 중국 악부의 금琴을 모방하여 만들었다. …가야금 역시 중국 악부의 쟁箏을 본떠서 만들었다. …삼죽三竹(대금/중금/소금)은 당적唐笛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삼국사기 이병도역 176-178쪽)
마지막으로 비파琵琶의 경우를 보자. 우리에게는 당唐비파와 향鄕비파가 있다. 모두 사현금이지만 향비파와는 달리 당비파는 현재의 중국 비파들처럼 곡경曲頸이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비파는 중국의 고대음악이나 현대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악기중의 하나이고 따라서 걸출한 비파독주곡도 많이 전해져 내려온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경우는 비파연주의 전통이 단절되었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비파는 음악을 하는 사람들의 기초악기로서 거문고와 쌍벽을 이루었고 조선말엽까지도 자주 연주되었다고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20세기 들어서 우리는 악기 하나를 잃어버렸다. 오늘날 국립국악원에 비치되어있는 옛 악기를 보면 우리의 전통문화 전승의 자세가 어떠하였는가라는 생각에 부끄러움으로 옷깃을 저미게 된다.
3. 악보와 작품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악보는 고금 악보인 <갈석조유란보碣石調幽蘭譜>이다. 6세기 구명丘明(494-590)이 전수하였다는 당나라 때의 수초본手抄本이 전해진다.(252쪽) 우리는 이 음악을 지금도 들을 수가 있다. <중국고대음악사>를 읽으면 중국에는 오래 전부터 많은 수의 악보가 전해지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공척보工尺譜로 쓰여진 송나라 강기의 백석사곡白石詞曲이 그 일례이며 원元, 명明, 청淸대의 음악들이 엄청 많은 분량으로 전수되어옴을 알 수 있다. 청나라 건륭乾隆 때 만들어진 구궁九宮대성악보에는 무려 사천곡이 넘는 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악보기재 형식은 문자보文字譜, 감자보減字譜, 공척보工尺譜 등이며 중국의 젊은이들은 아직도 그들의 공척보에 따라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는 조선 세종 때부터 악보가 전해진다. 중국과는 그나마 비교할 수가 없지만 이와 관련된 기록이 세종이나 세조의 실록에 보이며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 <현금동문유기>(광해군) 등 많은 악보가 전해진다. 중국의 감자보가 쓰이기도 했지만 세종이 창안한 정간井間보는 비교적 창의성이 돋보이는 기보법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고대악보의 재생이다. 기록으로만 남아 있다면 음악은 죽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점에서 양인리우가 일찍이 백석도인의 사곡詞曲 17수를 비롯한 무수한 고대의 악곡들을 살려내어 오늘날 우리가 그의 음악을 들으며 감동할 수 있게 해준 공은 그야말로 지대하다. <중국고대음악사>에서는 이러한 실례를 도처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중국에서는 그들의 전통음악이 오늘날까지 대를 이으며 현재의 음으로 전수된 것도 많지만 근대의 일부 선각자들의 노력으로 과거의 음악이 그대로 되살아난 경우도 많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어떠한가. 현존하는 음악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조차 벅찬 형편이니 안타까울 뿐이다. 심지어는 <현금동문류기玄琴東文類記>는 구체적 작곡자가 명기된 무수한 악보를 집대성한 것인데도 우리는 아직 그 음악을 들을 수가 없다.
4. 작곡가
일반적으로 동양음악에서는 작곡자를 명기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의 전통음악을 들으며 우리는 그것의 작곡가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저 옛부터 전래되는 음악이려니 혹은 기층의 민중세력이 만들어낸 음악이려니 짐작할 뿐이다. 이는 서양음악과 비교해봤을 때 중대한 취약점이 될 수 있다. 서양에서는 작곡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그 음악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쉽게 유추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중국은 예외다. 백아白牙와 종자기種子期 고사에 의한 <유수流水(1)>, 위진시대의 완적이 지었다는 <주광酒狂>, 환이桓伊의 <매화삼농梅花三弄>, 채염蔡琰의 <호가십팔박胡茄十八拍> 등은 중국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에 속하며 서양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송대의 강기는 스스로가 시인이며 작곡가여서 일종의 개인 작곡집이 전해져 내려오기도 하는데 이는 벌써 900년전의 일이다. 또한 곽면郭沔은 <소상수운瀟湘水雲>의 작가이며 그의 일생에 대해선 간략하게나마 문헌의 기록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나아가 원대의 관한경關漢卿, 왕실보王實甫, 마치원馬致遠 등은 얼마나 위대한 작곡가들인가. 명대에는 곤곡昆曲을 집대성한 위량보가 있으며 탕현조湯顯祖(1550-1616)의 사몽四夢, 특히 모란정환혼기는 불후의 걸작이다.(2) 그리고 청대의 홍승洪昇(1645-1704)이 지은 <장생전長生殿>도 뛰어난 작품이라 하는데 조만간 들어볼 기회를 가졌으면 한다. 결국 몇 사람만 주마간산 격으로 짚었지만 역시 중국에는 무수한 천재작곡가들이 기라성처럼 불을 밝히고 있음이 틀림없다. 20세기 이후에도 양인리우가 발굴한 아병阿炳은 천재 작곡가라 불릴만 하며 우리는 지금도 그의 작품인 <이천영월二泉永月>이나 <용선龍船> 등을 즐기며 감상하고 있다.
5. 문인과 음악
동양에서 문인과 음악이 관련된 역사는 유구하다. 첫손에 꼽을 이는 단연 공자이다. <논어論語>에는 얼마나 많은 음악 이야기가 나오는가. 그가 편찬한 <시경詩經>은 시 모음집이지만 본래는 춘추시대 여러 나라에서 민간인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들을 수집한 것에 불과하다. 한대漢代의 '악부樂府' 또한 민간의 노래를 채취하던 기관이었으며 그 노래말 모음집이 바로 송宋대에 편찬된 <악부시집樂府詩集>이다. 동한東漢 말기의 채옹蔡邕(133-192)은 문인이며 서예가로도 이름이 높지만 동시에 <금조琴調>라는 책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딸인 채염蔡琰도 <호가십팔박胡茄十八拍>이라는 시와 곡을 지어 그 이름을 후대에 전한다. 위진魏晉시대의 그 유명한 완적도 <주광>을 지었으며, 혜강은 <성무애락론>이라는 악론을 저술하고 죽을 때도 <광릉산廣陵散>을 연주하였다. <중국고대음악사>를 일부 읽어보자.
"서한西漢 초기 악부樂府에서 문학가 수십 명이 민간 곡조에 바탕하여 전문적으로 가사를 쓴 사실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들은 전문 작사가라고 할 수 있다. 조조曹操가 상화가相和歌 <보출하문행步出夏文行>의 곡조에 쓴 가사는 남북조 시대 불무拂舞에 쓰여 <갈석편碣石篇>이라 불린다. 조조처럼 가창을 위해 시를 쓴 시인은 많다. 그들은 취미 작사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취미 작사자는 수당 시대에도 매우 많았다. 이백, 원진, 백거이, 이하李賀, 이익李益 등의 시를 사람들이 노래하였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송나라 때는 사詞가 시의 한 양식으로 발전하는데 이 역시 노래를 뜻한다. 소동파의 사패詞牌인 <염노교念奴橋>는 지금도 그 음악을 들을 수가 있다. 유영柳永, 주방언周邦彦, 이청조李淸照, 신기질辛棄疾(1140-1207) 등이 이름을 남겼으며 특히 유영과 주방언은 직접 작사와 작곡을 하였다. 무엇보다 남송의 강기姜夔(1155-1221)와 장염張炎(1248-?)은 더불어 유명한데 강기의 <백석도인가곡집白石道人歌曲集>은 세계 음악사에서도 최고봉의 예술적 아름다움을 구가한다. 당시의 문인인 양만리楊萬里(1126-1206), 범성대范成大(1126-93) 등도 음악에 조예가 깊었으며 위대한 성리학자인 주희朱熹 역시 음악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원대元代에 들어서면 문학과 음악의 역사는 기록이 거의 일치할 정도다. 원대 문학의 주를 이루는 것이 잡극雜劇이라는 희곡과 산곡散曲이라면 이 문학장르는 문학이기 전에 이미 음악이다. 음악이 먼저인 것이다. 관한경, 왕실보, 마치원 등이야말로 현대의 미국의 안드류 웨버가 아닌가. <중국고대음악사>의 제28장을 일부 인용한다.
"명청의 문인들 가운데 민가와 소곡에서 영양을 흡수하여 민간의 형식을 채용하고 민간의 어휘를 운용하여 시와 사를 지은 자가 많다. 명나라 때 김란, 유효조, 조남성, 풍몽룡, 정섭, 서대춘, 초자용, 대전덕, 황준헌 등이 있다."
대부분이 낯선 인물들이다. 이중에 정섭鄭燮(1693-1765)이 눈에 띄는데 양주팔괴楊州八怪의 한 사람이다. 이 책에서는 또한 서위徐謂의 남사서록南詞敍錄을 자주 인용하는 것이 보인다. 서위는 명말의 위대한 화가이고 서예가이며 동시에 <사성원>이라는 잡극까지도 지은 사람이다. 한마디로 시詩, 서書, 문文, 화畵, 악樂에 능했으니 대단한 천재가 아닐 수 없다. 결론적으로 음악과 문은 길이 하나임에 틀림없다.
우리의 경우는 어떠한가. 신라의 향가나 고려의 고려가요 역시 문학이기 전에 노래였음이 틀림없다.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시詩, 주酒, 금琴을 좋아하여 스스로를 삼혹호三酷好 선생先生이라 불렀고, 여말麗末의 이제현李齊賢(1287-1367)은 당시에 민간에서 유행하던 노래를 한문으로 번역하여 그의 <익제난고益齋亂藁>에 11수를 실었는데 이 가운데 <처용가>, <서경별곡>, <정과정> 등이 오늘날에도 전해진다. 전해내려오는 악보는 없어도 조선조의 대표적인 아악 가운데 하나인 <수제천壽齊天>이 <정과정>에서 발전된 것임을 감안한다면 고려시대의 악곡 역시 대단히 풍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누구보다도 세종대왕과 세조를 꼽을 수 있다. 마치 북송의 마지막 황제 휘종徽宗이 스스로 고금연주를 즐겼던 것에 비할까. 세종은 정간보井間譜라는 기보법까지 창안했다. 맹사성(1359-1438)은 음률에 밝았으며 우리 국악사에 있어 제일 중요한 악서인 <악학궤범>의 저자 성현成俔(1439-1504) 역시 저명한 문인이었다.
고려 이래 숱한 문인들이 즐겨 지었던 시조 또한 노래에 그 연원이 있음이 틀림없다. 음악과의 관련이 어느 정도인지는 구체적으로 연구된 학술서적을 접할 수 없어서 비록 아는 바는 없지만, 조선후기의 김천택이 엮은 <청구영언靑丘永言>이나 김수장의 <해동가요海東歌謠>가 모두 시집이 아니고 가곡을 모은 책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조선조의 선비들도 음악을 항시 일상적으로 가까이 하였음이 틀림없다. 상기 책들 중에 퇴계선생이 <후정화後庭花>의 악폐를 비난하는 글이 실려 있는데 <후정화>라면 중국에서 당나라 이전부터 내려온 곡패曲牌이다. 이를 보면 퇴계 이황도 음악에 관심이 많았음을 알게 되며, 한편으로는 중국의 곡패가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전래되었는지도 궁금해진다. 시조와 가사 그리고 이들 문학이 음악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물론 중국의 사패詞牌와 우리의 가곡형식이 어떤 공통점이 있었고, 또 중국의 영향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연구되어야 한다. 우리의 음악사가들이 할 일이 무척 많음을 일깨워주는 대목이다.
6. 조선의 歌曲과 중국의 詞牌
노래가 먼저인가 아니면 가사가 먼저일까. 우리는 조선가곡을 듣고 그 형식에 접근할 때 이러한 의문점에 먼저 당혹해한다. 무엇보다 통상적으로 노래라 하면 마땅히 곡 하나에 가사 한 편이 아닌가. 그러나 조선 가곡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하규일이 전승한 가곡은 현재 남창 85곡과 여창 71곡 도합 156곡이다(3). 그러나 곡의 형식을 보면 우조羽調 삭대엽數大葉과 계면조界面調 삭대엽에 여러 곡이 들어 있는데 각 곡은 여러 '바탕'을 갖고 있다. 여기서 한 바탕은 시조 한 수다. 그렇다면 한 악곡에 무수한 가사들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단언을 할 수는 없다. 즉 일정한 악곡 수에 비하여 엄청난 시조편수를 감안한다면 자연히 의문이 없을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초삭대엽이라는 악곡형식은 여러 개의 바탕을 갖는데 그런 바탕의 전수곡이 도합 156곡이라 한다면 이는 즉 현존하는 가사가 모두 156개라는 주장이 될 수가 있다. 우리가 현재 조선 가곡이라고 하여 듣고 있는 음반들은 시원스레 이러한 의문을 풀어주지 않는다. 또한 이런 궁금증을 풀어주는 책자도 과문 탓인지 전혀 본 적이 없다. 무척 유감스러운 일이다.
내 생각에 조선의 가곡형식은 중국의 사패 영향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 예를 들어 당나라 때의 사패詞牌인 <보살만菩薩蠻>은 이백의 사詞를 비롯하여 송나라 때 무수한 문인들이 새로운 사를 지어 붙였다. 곡은 분명 하나일 것이다. 아니면 중국답게 보살만이라는 곡패도 시대를 따라 여러 곡으로 변천하였을 수도 있다. 우리의 조선 가곡도 이런 형식을 답습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7. 악곡과 가사의 변천
서양음악의 경우 어떤 특정한 작품은 반드시 한 사람의 작곡가와 하나의 악곡을 가진다. 예를 들어 Mozart의 K622는 클라리넷 협주곡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다시 이 곡을 손대지 않는다. 물론 특정 선율이 마음에 들었다면 그 주제를 바탕으로 변주곡을 만들 수는 있는데 이러한 경우에도 분명히 그 원전을 밝힌다. 예를 들어 Brahms의 Haydn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 56a는 유명하다. 그것이 전부다.
동양음악의 경우 특히 중국음악에 있어서 그 연원을 정확히 밝힌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강기의 사곡 같은 경우는 본인이 지은 사와 악보가 그대로 전해지기 때문에 악곡의 본모습이 그대로 유지되어 있다. 그러나 고금곡 <유수流水>를 보자. 자료에 의하면 이미 춘추시대 진나라의 백아가 지은 곡이라 한다. 그러나 당나라 때 이미 <고산高山>과 <유수流水>라는 두 곡으로 변화 발전했으며, 나아가 "역대 예인들의 끊임없는 예술적 가공을 거쳐 서로 다른 변체가 여럿 나타났다. 예를 들면 천파川派의 <유수>는 <천문각금보天聞閣琴譜>가 대표적이며, 청나라 때 사천四川 예인들의 가공과 개편을 통해 완성되었다. 여기에서 창조된 치솟는 파도와 놀란 마음의 음악적 형상은 사천예인들이 몸소 체험한 그 지역의 흐르는 물의 반영이다" (음악사 하권 제28장)
古琴
九소環佩琴· 伏羲式· 唐代 요녕성 박물관 소장
명나라 주권朱權이 1426년에 편찬한 <신기비보神奇秘譜>는 고대음악을 집대성한 악보다. 책에 실려 있는 곡들은 모두가 주권이 살았던 당시로부터 수백 년 또는 그 이상으로 오래된 것들인데, 과연 신기비보에 실려 있는 악보가 원래의 모습을 明대까지 유지해 왔던 것인지는 분명히 의문이라 할 수 있다. 왕유王維의 시를 바탕으로 한 금곡 <양관삼첩陽關三疊>도 소위 당나라 때 악곡이 틀림없다 하지만 벌써 곡 자체에 이미 무수한 변이곡들이 있지 않은가. 내가 지니고 있는 CD만 해도 서로 다른 곡들이 몇 개씩 있다. 다만 주제곡이 되는 선율만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어서 하나의 틀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청대의 가곡인 <봉황대상억취소鳳凰臺上憶吹簫>는 굉장히 아름다운 곡이다. 송나라 사인詞人인 이청조의 가사를 근거로 한 곡으로 청나라 때 왕적정이라는 사람이 작곡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억취소>라면 이미 송나라 때 유전되어온 사패의 하나가 아닌가. 참고로 이 사패는 고려때 기록에도 보인다. 그렇다면 왕적정은 가사만 빌려오고 순수하게 새로운 곡을 창작하였을까 아니면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곡을 시대의 정서에 맞게 다시 다듬었을까.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중국의 곡들은 가곡이나 잡극 그리고 곤곡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거치면서 무수한 가감을 거친다. 청나라 홍승의 <장생전>에는 송나라 때의 창唱 한 곡을 그대로 인용한 부분도 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중국의 경우 한 작품은 그대로 멈추어 있질 못한다. 민중이 원하는 대로 그리고 시대가 요구하는 대로 작품에 변화가 온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의 주제가 어떤 커다란 틀의 미적 이미지나 미감을 그대로 유지한 채 오늘날에도 생생하게 살아서 움직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중국음악의 문화 배경은 실로 위대하다. 우리도 과거로부터 전승되어온 작품들을 지금의 구미에 맞게 그리고 본래의 아름다움을 살리며 재현하거나 변화를 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필요하다면 가사도 바꾸고 현대의 서양 악기도 일부 도입하며 수정을 가한다면 어떨까. 그저 명맥을 유지하겠다고 옛 모습을 그대로 고수하는 것이 어쩌면 작품의 보존가능성을 더 어렵게 하는 것은 아닐까.
8. 중국과 우리나라의 사료에 동시에 나오는 곡들
삼국시대와 고려를 거치며 우리는 중국의 당악을 도입한다. 따라서 숱한 중국의 악곡들이 우리 사료에도 보인다. 가령 <풍입송風入松>(원대 관한경의 작품에 이 곡이 나온다), <수룡음水龍吟>, 송나라 유영의 작품이라는 <하운봉>, 그리고 앞서 언급한 <억취소>는 고려사 악지에 나온다. <낙양춘洛陽春>과 <보허자>는 아직까지도 내려오는 당악唐樂(당나라 음악이라기보다 중국음악이라는 뜻)으로 우리 아악의 일부를 이룬다. 또한 <악학궤범>에는 당나라의 대곡인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이나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물론 음탕한 음악의 사례로 말이다. 송나라 강기가 <예상우의곡>의 일부를 채취하여 작곡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풍입송><의 경우는 여말 조선초에 모든 지식인들이 미칠 정도로 좋아하였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지금은 들을 수가 없어 유감이다. 혹시나 중국 쪽을 연구하면 어떤 악보가 발견될지도 모르겠다.
양인리우의 음악사에는 실로 엄청난 분량의 악곡제목들이 등장한다. 아마 우리 음악사가들이 미처 접해보지 못했던 곡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동명의 악곡들이 우리 사료에도 있다면 마땅히 중국과 연관하여 연구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우리의 음악학자들이 필히 참고로 해야 할 것이다.
9. 그밖에 느낀 점들
<중국고대음악사>는 중국의 궁중음악은 크게 다루지 않는다. 물론 궁정연악에 대한 자세한 안내가 있지만 그래도 민간음악에 비해서는 그 분량이 훨씬 적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이와 정반대다. 즉 아악에 대한 설명이 대부분이다. 어떤 이유에서일까. 보건대 중국은 그만큼 음악적 영역이 광대하여 궁중아악이라는 한계가 있는 분야보다는 역시 민간인들이 즐기고 전수해온 음악이 더 많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또한 예술적 가치만 따져본다면 궁정연악은 별 볼일이 없는 게 사실이다. 실제로 청나라 때의 연악을 들어보면 민간음악에 비해 흥미와 재미를 거의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이런 점 역시 중국의 문화가 보여주는 한 특성이고 우리가 앞으로 비교연구해야 할 과제라 생각한다.
그밖에 옮긴이도 지적하였지만 양인리우의 문장에는 자주 계급에 대한 언급과 그 의미를 되새기는 점이 두드러진다. 당시의 사회주의 가치관의 기준으로 서술한 곳이 도처에 눈에 띈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보자.
"반동 통치계급은 정치적 힘을 이용하여 여론은 통제하고 역사를 왜곡하며, 문화의 도구를 이용하여 장기간 반동선전을 진행하였다. <철관도> 같은 나쁜 연극은 반동선전의 산물이자 또 반동 선전의 도구로서 과거 사회에서 일으킨 반동작용은 확실히 작지 않다. 이 작품이 오랜 동안 널리 유행한 사실은 광대한 군중이 오랜 동안 통치계급의 반동 선전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설명한다. 걸출한 민간예인들이 이 작품을 연창하고 예술성 높은 음악작품을 창조한 사실은 예술가들도 그 영향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음을 설명한다. 이러한 복잡한 환경에서 내용은 반동적이지만 예술성을 띤 작품이 쉽게 창조되었다. 모택동 동지는 말하였다. '내용이 반동적인 작품일수록 또 예술성을 많이 띤 작품일수록 인민에 대한 해독은 더욱 크므로 더욱 배척해야 한다' 이 가르침을 우리는 영원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28장)
하다못해 저자는 강기를 설명하면서도 그를 계급사회의 못된 병폐적 산물로 폄하하였다. 언뜻 웃음이 나온다. 그런데 과연 웃을 수가 있을까. 그렇게 못된 작품들이라면 그가 그처럼 일생을 바쳐 악보를 재생하여 놓았을까. 전혀 아니다. 굳이 따져보자면 양인리우는 태생이 부르주아다. 상류계급 출신으로 당시로선 가능한 모든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역시 음악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여유’에서 비롯되는 것이 틀림없는데 어떻게 양인리우 같은 사람이 계급을 운위하며 책을 쓸 수 있었을까. 이 책을 읽으며 우리는 그가 살아온 시대 특히 음악사를 저술한 50년대 이후의 중국의 현실을 도외시하면 안될 것이다. 그 역시 한편으론 비극의 시대를 살다 간 사람이었던 것이다. 마치 러시아의 쇼스타코비치가 공산당국의 요청으로 많은 악곡들을 작곡하였듯이 말이다.
<보족補足>
(1) 이 곡은 근대에 사천성의 천파川派 장공산張孔山이 완성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기록에 의하면 이미 춘추시대에 비롯된 것이며 당나라 때 고금곡으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즉 시대를 거치며 무수한 변이를 거쳤음을 알 수 있는데 장공산의 <유수>는 그러한 변이의 하나라 할 것이다.
(2) 이 글을 쓰고 나서 몇 달 뒤에 모란정의 DVD 음반을 입수하였다. 그것은 충격 이상이었다. 그 지극한 아름다움에 눈물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일년 이상을 매일 듣다시피 할 정도로 아름답고 깊이가 대단한 작품이다. 한 시대의 모든 문화가 집대성되어 있다. 시문학, 무용, 음악 그리고 그 배경을 이루고 있는 건축, 회화 등이 총망라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