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獄苦 치른 손병희가 영양식으로 먹던 이것?
[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문명적 滋養'우유, 1910년대부터 조선인에도 서서히 보급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입력 2024.10.05. 06:00업데이트 2024.10.05.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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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신문엔 분유 광고가 자주 실렸다. 아이를 건강하게 키우는 영양분 많은 분유라는 내용이 많았다. 사진은 조선일보 1926년6월21일자에 실린 일본 분유 '라구도겐' 광고
1920년 12월 천도교 지도자 의암 손병희의 병세를 소개하는 기사가 났다. 3.1운동 지도자 33인 중 하나로 투옥된 손병희는 건강이 악화돼 병보석으로 석방됐다. 주치의는 ‘근일의 용태는 보석되던 당시에 비하여 조금 낫다고 할 수있다’면서 ‘언어도 자유로하여 전일보다는 매우 완전하다’(‘孫의암의 병상’, 조선일보 1920년12월29일)고 전했다. 주치의가 전한 짤막한 소식 중 눈길을 끄는 것은 ‘식사는 우유와 기타 서양품을 먹는다’는 언급이다. 환자나 노약자가 기력을 되찾기 위해 우유를 자양제삼아 먹었다는 얘기다.
조선인은 원래 우유를 마시는 관습이 없었다. 소는 노동력과 고기, 가죽을 활용했을 뿐, 우유를 생산, 판매하는 낙농업 자체가 없었다. 19세기 후반 서양인과 일본인이 들어오면서 분유나 연유가 수입됐지만 생우유 공급은 인천, 부산 등 일본인 거류지를 중심으로 시도됐을 뿐이다.
경성의 우유 생산 판매를 주도한 것도 일본인이었다. 1900년 12월 미후네 시카타로, 1902년 5월 히라야마 마사키치가 ‘착유업’(搾乳業)을 시작했고, 미 농상공부 기사였던 프랑스인 쇼트도 1902년 프랑스에서 젖소 11마리를 수입, 선교사 등 외국인에게 판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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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에게 좋은 영양분을 갖고 있다며 홍보한 수리표 우유 광고. 조선일보 1931년 12월16일자.
◇황성신문에 실린 生우유판매 광고
‘생(生)에 주의하는 자는 불가불 음용할 것은 세인이 기소공지(其所共知·모두 아는 바)오. 본사 축장을 고조광활한 남대문외 도동(桃洞)에 복지(卜地)하야 우사를 건축하되 그 광활함과 환기며 오물배제 등 설비가 모두 문명적 신식이오.’
1907년 9월21일 황성신문에 광고가 났다. 한국축산주식회사 이름으로 낸 우유 판매 광고였다. 경성 남대문 밖 도동(桃洞:지금의 동자동, 후암동 일대)에 목축장을 마련한 이 회사는 ‘세계에 유명한 서양종우중(西洋種牛中)에 건장한 유우(乳牛)를 극택(極澤)하야 20여두를 수입,사육하고 매일 수요대로 착취하야 신선한 우유를 발매’한다고 알렸다. ‘궁궐 어용품’이라는 문구까지 눈에 띄게 달아 선전에 활용했다.
◇궁내부 御用品 선전
‘로열 마케팅’까지 펼친 이 회사는 1906년 7월 일본 효고현의 축산가인 반토 구니하치, 하라 요시오, 고에즈카 쇼타가 경성에 설립, 그해 9월 5일 착유업을 시작했다. 당시 경성엔 일본인이 운영하는 착유소 4곳이 이미 영업중이었다.
한국축산주식회사는 ‘증기기계와 여과기를 완비하야 그 우유를 정제하고 각기 전문적 학문과 이력을 가진 기사가 담책시험을 경(經)한 연후에 매일 조석 양차식(兩次式) 응수분전(應需分傳)하오니 그 제품이 신선하고 순전함이 시정에서 파는 양철통연유며 타처에서 착취발매하는 우유라도 그 효험이 크게 다르니 개명신사는 유병무병을 물론하고 이 우유를 애용하심을 복망(伏望)함’이라고 소개했다. 최신 위생 설비와 전문가를 갖추고 우유를 생산, 공급하고 있다는 선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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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내부에 납품하는 우유라고 선전한 조선축산주식회사 광고. 황성신문 1907년11월9일자
◇칼슘 풍부한 우유, 건장한 체격 만들어
1910년대 들어 우유보급은 서서히 진행됐다. ‘조선 사람은 본래 우유를 즐겨하지 아니하야 장위의 자양과 신체의 건강에 대하여 한가지 유감함이 적지 않더니 점점 위생의 필요함을 감각하고 헤아려서 인생의 가장 긴요한 자양품을 먹지 아니하면 불가하다 하고, 작년 동기부터 비상히 우유 먹는 사람이 많아져서 우유발전상 보급에 다대한 이익이 적지 않음으로 일선인(日鮮人) 우유판매업의 좋은 결과를 얻는 중이라더라.’(우유를 많이 먹어, 매일신보 1913년1월21일)
우유를 마셔야한다는 계몽적 기사도 종종 실렸다. ‘일상 우유를 마시는 민족은 대개 체격이 장대한 사실은 학리상과 실지상에 증명되는 바이다.’(‘우유와 체격의 관계’, 조선일보 1923년1월11일) 건장한 신체를 가꾸려면 ‘체격의 대소는 즉 골격의 대소니 골격을 형성하는 것은 주로 ‘칼슘’이오, 이 칼슘은 식물(食物) 중 우유에 최다한 소이이다.우유는 타 식물(食物)과 달라 매일 삼합씩 음용하면 오인 신체에 필요한 분량의 칼슘을 공급하는 것이다.’ 뼈대를 형성하는 칼슘이 우유에 풍부하기 때문에 우유 섭취를 장려하는 내용이었다.
◇치열한 분유 마케팅
1920년대 신문에는 분유 선전이 자주 나온다. ‘모리나가’ ‘명치제과’ ‘수리표’ 등 일본, 미국에서 생산된 수입품이 시장을 장악한 가운데 ‘라쿠도겐’이라는 일본 이누이우(乾卯)식료품주식회사 제품이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펼쳤다. 원래 한방생약을 다루던 이누이우 상점으로 출발한 이 회사는 1921년 식료품부를 독립, ‘라쿠도겐’분유를 개발, 판매했다. ‘허약자에게 우유보다 나은 영양료, 유아를 위하여는 이상적 모유대용품’(라구도겐) ‘모유의 대용, 우유보다 우량’(구라기소)처럼 유아나 노약자를 겨냥했다.
◇1938년 서울우유 전신, 경성우유동업조합 결성
조선총독부는 1930년대 우유에서 결핵균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착유업자들이 공동으로 생산·판매를 맡도록 이끌었다. 1938년7월 경성을 중심으로 고양, 시흥, 양주 등의 착유업자 21명을 중심으로 경성우유동업조합을 결성했다. 앞서 1907년 한국축산주식회사 설립 주역인 고에즈카 쇼타가 조합장을 맡았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에 따른 전시동원체제 수립과 궤를 함께 한다. 총독부는 우유처리장 건설에 보조금 1만3000엔을 지급하는 등, 우유 생산을 늘려 만주나 중국 관내로 유제품을 공급하는 기지로 활용했다. 광복후인 1945년9월 경성우유동업조합은 서울우유동업조합으로 이름을 바꿨고 1962년 서울우유협동조합으로 모습을 바꿔 현재까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