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첫째날(월요일)
새벽 3시반, 집사람을 깨웠다. 국토종주를 위해 부산까지 태워주는 운전기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첫차를 탄다고 해도 한나절이 소요되기 때문에 그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다. 잔차(자전거의 애칭)를 자동차에 태우고 부산을 향했다. 낙동강 하구둑(을숙도)에 도착하여, 운전기사를 보내고 이제 자유로운 나만의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지난 일년간 노회 일로 힘들었다. 어려움을 당한 교회를 돕고자 한 것이 정치적인 문제에 휘말려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 이제 모든 것이 마무리 되었다. 그래서 이번 한주간은 자전거와 함께 휴가를 떠나고 싶었다.
5시 50분, 하구둑을 출발하여 낙동강 자전거길을 따라 달린다. 하구가 만든 풍만한 물결이 풍만한 마음을 만들어준다. 조금 더 밟으니 아름드리 벚나무들이 터널을 만들어 주고, 구포를 지나 둑길을 내려가니 대구의 신천의 조경이 초라하게 느껴질 만큼 규모가 큰 화명생태공원이 펼쳐져 있었다. 물금 물문화관을 지나면 강 위에 자전거 고가도로가 나온다. 강물 위의 쿵닥거리는 데크길은 라이딩(자전거 타기)의 묘미를 더하여 준다. 삼랑진까지 아름답고 평탄한 길이 이어져 있다. 우리 반석의 가족들과 달리고 싶은 구간이다.
삼랑진에서 남지읍까지는 비교적 평탄하다. 낙동강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달렸다. 자전거는 참 묘하다. 자전거를 타면서 보는 풍경은 자동차에서 차창으로 보는 풍경과는 다르다. 살아있는 자연이 내게로 달려온다. 자전거를 타면 풍경이 내 몸속으로 빨려 들어온다. 살아있는 풍경들이다.
남지체육공원을 지나 논길 사이를 달리자 첫 번째 고개(영아지고개)를 만나게 되었다. 금방 올라갈 것 같은 산길이었는데, 올라갈수록 길게 느껴지는 고개다. 저기가 정상인가 하고 가면 저만치 정상이 보이기를 몇 번 반복했다. 창녕군과 의령군을 잇는 박진교를 건너자 연이어 큰 고개를 두 개(박진고개, 진동고개)나 넘어야 했다. 원래가 땀이 많은 터라 아스팔트의 복사열로 온몸이 땀범벅이 된다. 32도라는 기상대의 예보가 의심스럽다.
합천보를 지나서 다람재 고개를 만났다. 앞에서 넘은 세 고개보다는 낮은 고개였지만 체력이 소진된 터라 굉장히 힘들었다. 그러나 오르막을 오르다 지친 몸은 내리막에서 회복이 된다. 오르막을 오르며 젖었던 몸이 내리막의 부딪히는 바람으로 상쾌하다.
자전거를 타면 단순해진다. 머릿속에 있던 잡념들이 페달을 밟을수록 사라져간다. 세게 페달링 할수록 허벅지는 터질 것 같이 아프고, 팔과 목이 뻐근하고, 엉덩이가 아픈데도 설명할 수 없는 편안함이 있다.
자전거의 엔진은 나 자신이다. 자동차 엔진보다는 출력이 약하긴 하지만 자동차 엔진이 갈 수 없는 모든 길을 간다. 이번 라이딩은 장거리 여행이다. 그래서 평소보다 천천히 20km/h 정도로 설렁설렁 나아갔다. 작전의 성공인지 많이 지치진 않았다.
오후 8시, 현풍에 들어왔다. 오늘은 여기서 엔진을 세워야겠다. 더 이상은 무리라는 신호가 곳곳에서 들어온다. 자동차 엔진에 연료가 필요하듯이 자전거 엔진도 연료가 필요하다. 연료주입을 위해 현풍에서 유명한 곰탕집을 찾았다. 작은 기도가 나왔다. 이걸 먹고 힘이 났으면 좋겠다고. 모텔에 들어왔다. 초저녁이다. 피곤하긴 해도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지체들의 마음에 오늘의 자전거 여행의 흔적을 남기고 자야할 것같다.
✱둘째날(화요일)
몇 해 전에 신재가 호주에서 알바해서 배낭여행을 하고 남은 돈으로 자전거를 사주었는데, 그것이 자전거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열심히 탔다. 혼자서, 때로는 집사람과, 때로는 목사님들과 달렸다. 라이딩은 은혜였다. 내게 있어서 자전거 안장은 특별한 처소가 되었다. 육체적인 운동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운동의 자리였다. 답답할 때 혼자 밤이 맟도록 자전거를 타기도 했다. 페달을 밟으며 명상에 잠기기도 하고 기도하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이제 자전거는 나의 유일한 취미활동이 되었다.
모텔에서 나와 현풍기사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했는데 오천 원을 주고 먹기엔 죄송할 만큼 푸짐했다. 박석진교를 건너 달성보에 이르렀다. 달성보는 종종 왔던 곳이다. 그래서 인지 정감이 간다. 달성보의 교각마다 만들어진 전망대는 배의 고물을 본떠 만든 것이라고 한다. 달성보에서 화원유원지(사문진교)는 자전거 도로의 상태가 좋다. 노면도 좋고 주변의 야생초와 야생화가 한 폭의 그림이다.
나는 풀꽃을 좋아한다. 우아한 장미, 특별함이 있는 춘란, 깜찍한 튜울립 같은 화려한 꽃은 아름답긴 하지만 인공적인 냄새가 많다. 그러나 작은 풀꽃들이 한데 어우러져 피워있는 모습은 자연스럽고 평화롭다. 얼핏 보면 풀꽃은 잡초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너무나 예쁘다. 보면 볼수록 사랑스럽다. 풀꽃은 밟히기 일쑤다. 그러나 연약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매년 그 자리에서 꽃을 피운다. 우리교회는 깨끗하고 예쁜 풀꽃으로 아름답게 피어있는 주님의 정원이라는 생각을 자주한다. 달성보에서 화원유원지 사이의 길은 청량감을 준다. 집사람에게 화원유원지에서 잠시 만나자고 했는데 퇴짜를 맞았다. 어제 입었던 옷가지며 짐들을 보내려고 했는데 ‘시간낭비’라고 일축했다. 신재가 자주 말하는 대로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이 충만하다. 특이한 풀꽃이다.
강정보에 이르자 일기예보대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강정보는 밤에 자주 달려오는 곳이다. 방수 점퍼를 걸치고 가방을 비닐로 쌌다. 빗방울이 커진다. 강정보를 떠나 매운탕 가게들을 지나 작은 오르막이 있는 산을 넘으면 강변으로 자전거를 인도한다. 키작은 관목들과 버들과 풀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고불거리는 강변길이 아름답다. 성주대교를 지나면 산들이 강가로 바짝 붙는다. 이곳을 지날 때마다 그림 같은 풍광에 감탄을 하게 된다. 왜관이 다가온다.
왜관에서 일찍 점심식사를 했다. 자전거길 옆에 음식을 잘하는 기사식당이 있기 때문이다. 남구미대교를 건너면 구미공단이다. 아름드리 벚나무가 늘어서 있다. 도개를 지날 때 그곳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이 소식을 듣고 빵과 요구르트, 자두를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위로의 마음을 받고 연료를 보충하고 구미보로 나아갔다.
구미보에 이르렀을 때는 굵은 소나기로 바뀌었다. 결국 거기에서 한 시간 가량 빗속에 갇혀버렸다. 마침 그곳은 나의 고향이기도 하다. 어릴 적 추억들은 신선한 피로회복제가 된다. 중학교 1학년 때 대구로 전학을 와서 자취생활을 했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향이다. 고향의 냄새가 주위에 깔려 있었다. 비가 가늘어지는 걸 보고 서둘러 나아갔다. 빗속을 달렸다. 낙단보를 지나 상주에 이르렀다. 상주는 어릴 적 내가 좋아했던 여학생이 살고 있는 곳이라 상주는 언제나 아름다운 도시다.
경천대는 낙동강 1천3백리 물길 중 가장 아름답다는 곳인데 지친 탓인지 오늘은 아름답지가 않다. 경천대 주변에는 급경사가 곳곳에 있어서 끌바(자전거 끌고 가기)를 이어갔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 그러나 빗길이라 내리막의 스릴을 즐길 수가 없다.
상풍교에 이르자 땅거미가 내려앉아 풍경은 없어지고 말았다. 비는 점점 거세진다. 전조등을 켰지만 빗물이 앞을 가려서 전방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안경을 벗으니 훨쑥 낫다. 비는 뚜껑(헬멧)을 뚫고 온 몸을 적신다. 옆에서 멧돼지가 튀어나올 것 같고, 낮에 보았던 독사가 다리를 물 것 같고, 이상한 물체가 튀어나올 것 같은 칠흑 같은 밤이다. 이럴 때 전조등이 고장나면 들판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 전조등을 하나 더 준비해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속도가 빨라졌다. 땀을 뻘뻘 흘리며 1시간 정도를 달리자 불빛이 들어왔다. 점촌의 불빛이었다. 밤10시, 문경온천까지 가려고 했었는데 오늘은 여기서 접기로 했다. 점촌의 밤은 현풍의 밤보다 짙게 느껴진다.
✱셋째날(수요일)
눈을 뜨자마자 서둘러 모텔을 나섰다. 비 온 후라 공기가 상쾌하다. 이제 새재 자전거길에 접어 들었다. 국토종주 자전거길은 낙동강, 남한강, 한강을 따라 만들어져 있다. 강은 국토종주의 안내자인 셈이다. 그런데 낙동강과 남한강 사이는 강이 끊어진다. 낙동강과 남한강을 잇는 길을 ‘새재 자전거길’이라고 한다. 상주에서 충주까지 약 100km다. 국도와 지방도, 그리고 논밭과 마을길을 달리는 구간이다.
이제 낙동강의 풍만한 물결을 볼 수가 없다. 대신에 영강이 자전거를 인도한다. 강폭이 좁고 물살이 빨라보인다. 들길을 지나자 작은 마을 안으로 들어간다. 국군체육부대 앞을 지나자 다시 영강이 따라 붙는다. 영강은 아침 햇살을 받아 물비늘이 찰랑거린다. 벌써 코스모스가 자전거길 옆에서 활짝 웃고 있다. 아름다운 풀꽃이다. 불정역을 지난다. 탄광도시 문경의 추억을 품고 있는 불정역은 채굴한 석탄을 수송하기 위한 간이역이었다. 지금은 문화재로 옛 모습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
불정역을 지나자 반가운 장소가 눈에 들어온다. ‘13월의 아침’ 간판이 서 있다. 7년 전 전교인수양회로 모였던 곳, 그냥 갈 수 없어 자전거에서 내려서 물놀이를 했던 물가로 내려갔다.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그때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푸쉬킨의 말은 옳았다.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이 되리니” 숙박업소들이 밀집한 문경온천을 지나 문경새재우체국에서 어제 빗물에 젖은 옷들을 택배로 부쳤다. 짐이 반으로 줄었다. 우체국 옆 기사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시장한 터라 공기밥 두 그릇도 아쉬웠다.
드디어 악명 높은 이화령을 만나게 되었다. 옛날에는 산적들과 산짐승의 피해가 많아 여러 사람이 함께 넘어갔다는 험한 고개다. 이화령의 오르막을 지그재그로 올라가는데 엔진에서 굉음이 울린다. 산중턱쯤에 한 대학생이 자전거를 어깨에 메고 내려온다. 빵꾸(펑크)가 났다고 한다. ‘끌바’해도 되건만 굳이 ‘멜바’(자전거 메고 가기)하는 걸 보니 자전거를 무척 아낀다. 내가 땀을 뻘뻘 흘리며 빵꾸를 떼워주자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이럴 땐 신분을 밝힌다. 아마 오늘의 일이 기억날 것이다. 멋있는 목사님이 빵꾸를 떼어줘서 이화령을 잘 내려왔다고. 열 번은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학생은 신나게 내리막을 내리꽂듯 내려간다.
이화령 꼭대기는 반대쪽 충청도 바람이 불어와서 시원했다. 그리고 전망도 시원했다. 내려가는 길은 스릴 만점이었다. 올라올 때 그렇게 길고 길었던 고개가 내려갈 때는 짧게만 느껴진다. 그리고 소조령을 만났다. 이화령을 넘은 엔진은 소조령도 가뿐이 넘었다. 가파른 고개 하나를 넘을 때마다 밀려드는 성취감은 청정연료였다. 소조령 너머엔 수안보가 있었다.
수안보에서 콩국수를 먹었다. 식당 아주머니가 문경 사투리를 한다. 김경희 권사님 스타일이다. 고집스러우면서도 인정이 많아 보인다. 나는 모든 인류를 우리교회 성도들을 샘플로 나눌 수가 있다. 한 눈에 그렇게 구분된다. 조금 전 편의점에서 계산대 앞에 서 있는 여자, 김춘희 집사님을 닮았다. 무슨 말을 해도 시험 들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켜가는 여자. 칠곡보 뒤뜰에서 환한 얼굴로 자전거길을 묻던 남자는 이창호 집사님을 닮았다. 이화령 휴게소의 여주인은 몸은 뚱뚱한데 웃는 모습이 장수연 자매를 닮았다. 나는 늘 이런 식이다. 내 생각은 반석교회의 범위를 벗어날 수가 없다.
수안보부터 새재 자전거길의 종점인 탄금대까지는 좀 서둘렀다. 탄금대는 호수 같은 강이다. 신라 진흥왕 때 3대 악성 중 하나인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충주에 산다면 매일 찾고 싶은 곳이다. 탄금대에서 목행교 방향으로 가는 자전거길을 타지 않고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중앙탑공원 방향의 국도를 탔다. 조정지댐에서 다시 국토종주 자전거길과 만난다. 조정지댐에서 양평까지는 자전거길 노면상태가 불량하다. 쇼바가 없고 로드타이어(폭이 좁고 매끈한 타이어)가 장착된 내 자전거는 완충장치가 없어서 점점 엉덩이가 불편해온다.
한가로이 흐르는 남한강을 따라 페달을 밟아간다. 강천섬이 기다리고 있었다. 강천섬은 지쳐가는 여행자를 위로해 준다. 넓은 잔디광장을 따라 큰 은행나무가 길 양옆으로 줄지어 서 있다. 자전거를 타는 것이 아니라 물속에서 헤엄을 치는 듯한 기분이었다. 페달을 밟는 것이 아니라 저어가는 것 같았다. 나무며, 산이며, 강이며 죽어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최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찬양을 불렀다. 그분이 지금 나와 함께 이 길을 가고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어느 여행가의 말이 생각난다. 청년 때부터 50여 개 국을 여행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우리나라를 많이 다니지를 않았는데, 나이가 들어서 우리나라 곳곳을 다니며 그가 깊이 후회하며 깨달은 것이 우리나라만큼 아름다운 곳이 없단다. 그래서 틈만 나면 우리나라 시골 곳곳을 누비며 다닌다고 한다. 그렇다. 더 이상의 아름다움을 어디에서 찾으리오. 나도 지혜로운 여행가가 되어 자전거와 함께 우리나라 산천을 노래하리라.
강천섬을 뒤로 하고 30분쯤 달리자 강천보가 눈에 들어온다. 강천보에 오르는 길은 경사가 너무 급해서 도저히 자전거를 탈 수가 없다. 국토종주 자전거길에서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없는 유일한 길인 것 같다. 자전거는 나의 말없는 동반자이자 동역자다. 자전거가 나를 싣고 가지만 나는 페달링을 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자전거를 싣고 가야 할 때도 있다. 바퀴가 올라갈 수 없는 곳에서는 ‘끌바’, ‘멜바’, ‘들바’를 한다. 그래서 자동차가 못가는 길도 간다.
수요일은 중요한 약속이 있는 날이다. 다행히 자전거는 7시쯤 여주에 당도했다. 찬양 속에 거하시는 주님, 말씀으로 내게 권면하시는 주님, 그분은 한결같다. 그분이 있기에 살아갈 이유가 있고, 살아갈 힘이 있고, 살아갈 행복이 있다.
여주시청 인근의 한 모텔에 여장을 풀었다. 사흘을 달렸다. 이틀은 혼자여서 좋았다. 그러나 사흘째 밤은 혼자라는 게 아쉽다. “길을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옛말이 가슴에 부딪혀 온다. ‘피곤하다’고, ‘힘들다’고 말할 사람이 없다. 모텔을 나와 남한강변을 걷다가 여주시장을 걸었다. 대구는 시장이 해가 지면 문을 닫는데 이곳 시장은 동성로처럼 밤10시인데 사람들이 붐빈다. 떠돌이처럼 시장을 맴돌았다.
✱넷째날(목요일)
푹~ 자야지 하는 마음과는 달리 몸은 일찍 일어난다. 다섯 시간 이상은 잘 수가 없다. 어제 오후에는 왼쪽 종아리가 결려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자고나니 괜찮다. 이제 남은 거리는 대략 145km. 5시 40분 모텔을 나섰다. 한 시간 남짓 엔진 워밍업을 위해 샤방샤방(천천히 주위 풍경을 감상하며 느긋하게 나아감) 저었다. 예열을 마칠 즈음에 여주보가 나왔다.
오토캠핑장을 지난다. 평탄한 길을 달리다보니 이포보가 나온다. 이포보는 새알모양의 거대한 조형물이 7개나 올려져 있다. 이포보는 아름답다. 양평의 강은 폭이 넓고 깨끗하다. 그래서 별장이 많다. 예쁜 전원주택들이 눈에 들어온다. 자전거길도 아름답다. 반석 식구들과 달리고 싶은 구간이다. 국토종주를 하면서 줄곧 교우들과 국토종주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그래서 국토종주 자전거길 주변의 식당과 숙박시설의 정보를 모았다. 목표점을 향해서 함께 협력하며 나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양평미술관 뒤편으로 돌아가면 자전거길이 나온다. 여기서부터는 노면상태가 굉장히 좋다. 그리고 자전거길이 점점 복잡하다. 떼를 지어 달리는 라이더들이 많다. 그리고 좀 더 나아가니 특별한 자전거길을 만난다. 옛 중앙선 철로를 걷어내고 자전거길을 만든 곳이다. 기차가 달리던 9개의 터널을 통과한다. 터널 안은 냉장고다. 온 몸의 열기를 식혀준다. 터널 중간에서 좀 쉬고 싶었지만 따라붙는 자전거들로 인하여 밀려서 벗어나곤 한다.
양수리 두물머리에서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난다. 이제부터는 남한강 자전거길이 아니라 합쳐진 한강 자전거길이다. 팔당대교에 이르러서는 두 갈래길에서 잠시 갈등을 했다. 팔당대교를 건너지 않고 그냥 뚝섬 쪽으로 가기로 했다. 팔당대교 아래의 쉼터에서 잠시 쉬었다. 편의점에서 시원한 콜라를 사서 한숨에 마셨다. 벤취마다 라이더들로 만석이다.
옆에 앉아 있던 라이더가 내 자전거를 가리키며 얼마짜리냐고 묻는다. 그 질문 뒤에 무슨 말이 나올 것은 뻔하지만 “38만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자기들의 자전거 자랑을 한다. 내 자전거의 15배 정도 되는 가격이다. 문득 질그릇에 담긴 보화가 생각났다. 그릇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의 동반자인 자전거를 격려하며 다시 길을 떠난다.
한강 좌안은 탄 적이 있어서 이번에는 우안을 타기로 한 것이다. 좌안보다는 잘 정비되지는 않았지만 직선코스여서 시간을 많이 절약해주는 것 같다. 서울이 보인다. 강남스타일의 복장을 한 사람들이 휙휙 추월해서 지나간다. 나는 이제 고단 기어를 밟을 수가 없다. 충주까지만 해도 16단(내 자전거의 최고단)을 놓고 달렸는데 이제 10단을 놓고 달린다.
맞바람이 제법 세게 불어온다. 온 종일 맞바람이다. 맞바람은 부산에서 출발한 것을 자주 후회하게 했다. 자전거를 탈 때 가장 큰 변수는 바람이다. 뒷바람(순풍)을 ‘착한 바람’이라고 하고, 맞바람(역풍)을 ‘나쁜 바람’이라고 한다. 바람과 싸워선 안 된다. 맞바람의 기세에 따라 나를 적응시켜야 한다. 바람과 타협해야 한다. 엔진에 과부하가 걸리지 않도록 15km/h, 12km/h, 심하면 5km/h까지도 타협해서 페달링해야 한다. 바람을 뚫고 나아가려고 하면 십 리도 못가서 발병이 난다. 엔진과열로 퍼지고 만다. 서울은 이방인의 입성이 반갑지 않는 듯 맞바람이 거세다. 천천히 서울 시내에 들어간다.
뚝섬을 지나 잠수교를 건넜다. 서울은 괴물이다. 이 거대한 도시가 질서 있게 굴러가는 것이 신기하다. 선과 악이 뒤섞어 있지만 원활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 인간의 능력도 대단하다. 난 서울을 보면 항상 하나님이 만드실 최종사회를 상상하게 된다. 새 예루살렘을 상상해 본다. 하나님이 만드신 완전한 사회,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된 사회, 그 사회를 위해서 오늘을 살고 있는 것이다.
한강에는 사람들로 붐빈다. 산책하는 사람, 라이딩하는 사람, 인라인스케이트하는 사람, 윈드서핑하는 사람, 서울은 특별하다. 맞바람을 달래며 페달을 밟다보니 왼쪽으로 낯익은 건물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63빌딩, 국회의사당이다. 아라한강갑문의 판개목 쉼터에서 잠시 쉬다가 아라서해갑문을 향해서 움직였다. 서해의 바닷바람이 거세다. 이제 남은 구간은 20km다. 잘 정비된 자전거길이다. 그러나 노면상태는 낡아져서 인지 고르지가 않다. 엉덩이를 힘들게 한다. 목표달성을 앞두고 있지만 마음은 벌써 대구를 향하고 있다.
5시15분, 드디어 인천 서해갑문에 도착했다. 640km 국토종주가 끝이 났다. 자전거와 하나 되어 3박4일을 보냈다. 페달을 밟을 때마다 두 바퀴는 성실하게 나를 싣고 달렸다. 그러나 주님은 자전거보다도 더 가까이에서 동반자가 되어 주셨다. 함께 라이딩하셨다. 내가 라이더가 되면 주님도 라이더가 된다. 내가 설교자가 되면 주님도 설교자가 된다. 지금은 편안한 내 방이 그리워진다. 내 방에서 주님도 나와 함께 안식하시고 싶은 듯하다.
저만치 나와 자전거를 인천종합터미널로 태워줄 반가운 목사님이 기다리고 있다.
첫댓글 생동감 있게 표현해주셔서 제가 다녀온 거같습니다~ 목사님의 가슴속에 있는 주님과 지체들이 보이네요~감사합니다~
생생한 묘사에 저도 함께 공짜로 3박 4일의 국토 순례를 마쳤습니다. 역시 우리 반석 교회는 주님 안에서 하나로 함께 건축되어 가네요. 무심하고, 무뚝뚝한 반석 교회 성도들을 대신해서 목사님 여행에 요구르트도 대접해 주시고, 차도 태워 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 여행에는 우리 성도들이 길목에서 닥터 윌을 대접해 드리며, 응원하도록 하겠습니다.
‘검색 공개’, ‘SNS 허용’으로 되어 있어서 하루만에 방문객이 많았네요. ‘국토종주자전거여행’에 관심이 많은가 봅니다. 통합나눔터에는 신천지에 대한 비판의 글도 있고 사적인 내용의 글도 있어서 차단했습니다. ‘닥터 윌’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목사님 자전거종주 제가 다녀온거 같습니다 ㅋㅋ
다음에 기회가 되면 청년들과도 한번 다녀오시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