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가수 설운도(43). 그 스물다섯의 초상화는 서글펐다. 「가수 설운도」는 어느새 세인들의 뇌리에서 떠나고 있었다. 1983년의 大히트곡 「잃어버린 30년」도, 「KBS 10大 가수상 수상」도 이미 그 약발이 사라지고 없었다. 인기를 먹고사는 가수가 인기를 먹을 수가 없을 때는 이미 가수가 아니었다. 그건 바로 落花(낙화)였다.
인기는 무지개였다. 설운도는, 따악 죽고 싶었다. 한동안 빗발치던 출연 요청도, 하루 아침에 칼같이 끊어졌다. 밤업소에서의 환대도 어느새 홀대로 바뀌어져 있었다. 그러나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다. 싸구려 대접을 받으며 일단 밤무대를 뛰었다. 밤업소들은 『가수 설운도는 이미 한물 갔다』고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당시는 「가수 현철의 시대」였다. 설운도의 인기하락에는 「현철의 상대적 浮上(부상)」도 한몫했다. 여기다 매니저 안태섭의 외국行은 결정타를 날렸다.「가수활동의 방향타」를 잃어버린 것이다. 상의할 데도, 조언을 구할 데도 없었다. 끈 떨어진 연이었다.
『앞이 안 보였다. 뭔가 돌파구를 마련하고 싶었다. 연말, 일본 고베로 갔다. 그곳엔, 친지가 「블루 스카이」란 술집을 하고 있었다』 고베에선 그래도 아직 가수 설운도의 그림자가 완전히 지워지진 않았다. 블루 스카이에선 설운도의 사진을 입구에다 내걸었다. 그런대로 설운도의 노래는, 인기가 있었다. 수입도 짭짤했다. 그러나, 설운도는 착잡했다. 고베는 유배지였다. 臥薪嘗膽(와신상담)했다. 밤에는 노랠 하고 낮에는 눈에 불을 켜고 「엔카」 「일본가수」 등의 분석에 매달렸다. 트로트와 엔카의 장단점을 캐보려 했다.
『블루 스카이에서 노랠 하며 객석의 반응을 냉정하게 보려 했다. 나쁘지 않았다. 가수 설운도의 불씨는 아직 남아 있다는 판단을 했다. 돈 벌자고 일본에 온 게 아니었다. 「다시 날자, 날자!」를 다짐했다. 그동안 벌써 9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1985년 귀국. 「흙에 살리라」의 작곡가 김정일을 찾았다. 그에게서 「마음이 울적해서」라는 곡을 받았다. 그리고 김상길 작사, 작곡의 「나침반」도 받았다.
나쁜 일은 한꺼번에 온다. 좋은 일도 한꺼번에 온다. 두 곡은 히트였다. 뿐만 아니었다. 혼혈가수 오세근이 KBS 노래자랑에서 「원점」을 부른 게 계기가 돼 「원점」도 히트 대열에 가세한다.
『원점은 일본 가기 전에 낸, 나의 음반에 숨어 있던 곡이었다. 지금 원점은 나의 대표곡쯤으로 알려져 있다』
「원점」은 가수 설운도의 꺼져가는 불씨를 살렸다.
<사랑했던 그 사람을 말없이 돌려 보내고/원점으로 돌아서는 이 마음 그대는 몰라/수많은 사연들을 네온불에 묻어 놓고/무작정 사랑을 사랑을 넘어버린/나는 나는 정말 바보야>
여세를 몰아 MBC 10大 가수에 선정되고 「KBS 가요대상」과 일간스포츠 「영상음반 대상」을 수상한 것이다. 1985년은 「가수 설운도의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