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박해가 끝난 뒤 로베르(김보록) 신부는 1882년부터 경상도 전역과 충청도 · 경기도 · 강원도 일부 · 전라도 일부 지방을 순회 전교했습니다. 이때 43개 교우촌을 방문한 로베르 신부는 경상도 신자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경상도의 신자들은 대체로 믿음과 신앙심이 좋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선교사를 접해본 적이 별로 없는 이들은 우리 성교회의 진리에 대해 매우 무지한 편입니다. 그러나 예비신자들은 제법 많습니다. 외교인들은 복음을 듣자마자 즉시 친지와 이웃들에게 전합니다. 간혹 이들이 곤경에 처하는 경우도 생기겠지만 자기의 신앙에 대해 굳건한 태도를 취할 것입니다. 도저히 자기의 신앙을 고수하기 어려워질 때는 이사를 가서 다른 공소에 정착할 것입니다.
경상도 신자들의 무지를 조금이라도 개선하려면 실제적인 방법을 써야 합니다. 그것은 도의 중심지에, 말하자면 대구시에 선교사를 한 명 배치하는 것입니다. 경상도 신자들은 자기들이 버림받고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사실 일 년에 한 번 선교사가 그들을 방문하여 살펴보고는 여름을 보내려고 상당히 먼 곳으로 떠나기 때문에 신자들이 조언이나 권고가 필요할 때에도 의논할 대상이 없으니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1883-1884년 사목보고서).
로베르 신부는 경상도 지방의 신자들에 대해서 믿음과 신앙은 강하지만 교리와 심성이 약해서 문제라고 결론지으면서 그 이유를 사제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885년 후반(12월경) 로베르 신부는 대구 근교 신나무골의 이이전 안드레아 집에 정착했습니다. 로베르 신부는 이곳에서 사목을 시작함으로써 신나무골은 대구 계산주교좌성당의 시발점이 되었고, 영남 신앙의 교두보가 되었습니다.
축지법을 쓰는 한티 신자들
신나무골에서 새벽미사를 봉헌할 때의 일입니다. 로베르 신부와 신나무골 신자들은 주일 새벽미사를 봉헌하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24.5킬로미터나 떨어진 한티에 사는 신자들이 미사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한티에서 신나무골까지 오려면 산을 넘고 골짜기를 지나야 하는 아주 먼 길이었습니다.
- 한티성지에는 교우촌과 공소를 재현해 놓았다.
한티에 사는 신자들이 열심한 것은 알았지만, 미사에 오려고 사나운 짐승들이 있는 산길을 밤중에 걸어오기가 쉽지 않았을 것인데 그 길을 주님을 만나려고 달려온 것입니다. 그리고 미사가 끝나면 그 길을 따라 다시 한티로 돌아갔습니다. 이 일이 반복되자 새벽미사 때 얼굴을 보이고 사라지는 한티 신자들에 대해 이런 소문이 났습니다.
- 신나무골성지에 재현해 놓은 사제관 모습. 로베르(김보록) 신부의 흉상이 있다.
“한티 신자들은 신나무골을 오갈 때 축지법을 쓴다. 축지법을 쓰지 않고서 어떻게 그 먼 길을 걸어 새벽미사에 번번이 올 수 있겠나. 또 미사를 마치고 아침밥을 먹으로 곧바로 사라지는 것을 보면 축지법을 쓰는 것이 분명하다.” 이후 신나무골에서 한티까지의 길은 축지법을 사용하여 오가는 길로 소문이 났습니다.
한티 신자들은 무명 순교자들의 후손이었습니다. 1868년경 봄 포졸과 가산산성을 지키던 군사들이 한티에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한티 신자들 가운데 배교하는 이는 놓아주고, 신앙을 지키겠다는 이들은 그 자리에서 죽였으며, 도망가는 사람은 쫓아가서 죽였습니다.
포졸과 군사들이 물러가고 난 뒤 살아남은 신자들이 한티에 돌아와 보니 동네는 불타 없어지고 온 산 곳곳에서 시신이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시신이 너무 많이 썩어 옮길 수 없었으므로 죽은 자리에 그대로 매장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이때 죽은 신자들 가운데는 밭에 묻힌 이도 있고, 산등성이에 묻힌 이도 있습니다.
당시 공소회장의 아들로 열한 살이던 영학과 영구 형제는 그 와중에 뒷산에 숨어있다가 살아남았습니다. 살아남은 이들을 중심으로 순교자들이 죽은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마을을 재건했습니다.
“순교자들이 살던 마을은 하느님을 증언하다 돌아가신 분들의 피가 서린 거룩한 곳이므로 우리 같은 죄인이 밟을 수 없습니다. 순교자들이 살던 곳보다 바람이 심하고 춥더라도 살아남은 우리 죄인들은 이곳에 마을을 만들어 살아야 합니다.”
신나무골에서 한티까지
- 산불로 산 전체가 탔지만 십자가는 남았다.
대구대교구 평신도 단체들이 1967년 9월 29일 신나무골에서 한티까지 이틀 동안 도보 성지순례를 시작하면서부터 성지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1983년 성지개발 사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하면서 이곳에 살고 있던 이들의 후손이나 친척을 통해 순교자들의 묘 37기를 확인했습니다.
대구대교구의 순교자들이 살던 한티와 대구 지역 최초의 사제관이 있던 신나무골은 예전부터 신자들이 왕래를 했습니다. 이 길은 미사를 봉헌하려고, 신부님을 만나려고 다니던 길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잊혀진 이 길이 다시 개발되기 시작했습니다. 도로가 나고 마을이 생기는 바람에 신앙선조들이 다니는 길과는 약간 달라졌지만 가능한 한 그 길을 복원하려고 했습니다. 산길이 사라지고 차가 다니던 길이 생긴 지역은 차가 뜸한 길을 찾았고, 선배 신앙인들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길을 찾으려 애를 썼습니다.
이 길은 두 단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신나무골에서 동명성당까지, 그리고 동명성당에서 한티까지입니다. 하지만 신나무골에서 동명성당까지의 아름다운 길은 안타깝게도 몇 년 전에 일어난 산불로 산 전체가 타버리는 바람에 쉴 수 있는 그늘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다른 곳은 다 타버렸는데 십자가 길을 시작하는 지점에 세워둔 십자가 주위의 나무만 살아있는 것을 보면 하나의 기적을 보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 동명성당에서 한티까지의 길은 한적한 도로를 걷는 기분, 잘 볼 수 없는 계단식 논, 향토문화재인 가산산성, 시냇물이 흐르는 산길을 맛볼 수 있는 아름다운 신앙의 길입니다.
<승용차> 1. 경부 고속도로 금호 분기점에서 중앙 고속도로(칠곡, 춘천 방면)를 이용하십시오. 구마 고속도로나 올림픽 고속도로를 이용하시는 분도 대구 시내로 들어가지 마시고 금호 분기점까지 고속도로를 이용하십시오. 경부 고속도로 부산 방면에서 오시는 분은 북대구 IC에서 내리시어 안동, 칠곡 방면(5번 국도)이라는 표지판을 따라 오셔도 됩니다. 2. 칠곡 IC에서 내리시어, 톨게이트 통과 후 두 개의 네거리를 직진하십시오. 3. 세 번째 네거리(동아 백화점 앞 네거리)에서 좌회전하시면 5번 국도에 진입하게 됩니다. 4. 5번 국도를 따라 약 6km쯤 달리시면 동명 네거리에 도달합니다. 5. 동명 네거리에서 우회전하여(팔공산 순환도로) 약 5km 가량 오신 후 좌회전 하십시오(세 번째 신호등, 부계 · 제2석굴암 방향, 두 번째 신호등은 점멸 신호입니다). 6. 좌회전 후 700m 쯤 오시어 좌측 모퉁이에 현대정유 주유소를 두고 부계(제2석굴암) 방면으로 길을 따라 계속 올라 오십시오. 7. 약 6km가량 한티 고개 정상 방향(청소년 야영장 방면)으로 올라오시면, 우측에 한티 순교성지 안내석이 보입니다. 8. 성지 내에 들어오시면 우측 아래에 주차장이 있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해 주십시오.
* 영천 방면에서 오시는 분은 신령 - 부계 - 제2석굴암 - 한티 고개(한티 휴게소) - 한티 성지로 오셔도 됩니다. * 공항에서 오시는 분은 파계사 방면으로 난 길을 따라 오실 수도 있습니다(약도참조). * 안동 방면에서 오시는 분은 다부 IC에서 내리시어 오시면 더 가깝습니다.
한티 순교성지에는 모두 37기의 묘가 있다. 순교자 묘의 대부분인 33기는 무명 순교자의 묘이다. 신원이 밝혀진 순교자의 묘는 다음의 4기이다.
조 가롤로와 그의 가족(부인 최 바르바라와 누이동생 조아기)
조 가롤로는 상주의 구두실이 고향으로 그의 집안은 1839년 이래 정권을 장악했던 풍양 조씨로, 그들은 1839년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하는 기해박해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으므로 문중이 얼마나 천주교인을 미워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조 가롤로가 천주교를 믿었으므로 그는 문중으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 친척들이 집을 불살라 버렸고 정든 고향에서도 살지 못하고 쫓겨나게 되었다. 그래서 조 가롤로와 그의 가족들은 3년 동안 충청도 황간과 상촌 등지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칠곡 한티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는 움막을 짓고 그 속에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며 숯을 굽기 시작하였다. 그 후 한티로 피난 오는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주일이면 신자들과 함께 자기 집에서 열심히 기도하며 신앙 생활에 충실하던 그는 신자들을 지도하는 회장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한티 부락에 열심한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출처 : 한티 성지 홈페이지]
서익순(徐翼淳, 1831-1868년) 요한과 서태순(徐泰淳) 베드로(1833-1866년)
서익순 요한과 서태순 베드로 형제는 증조부 서광수(徐光修, 1715-1786년) 대(代)부터 하느님을 믿어온 신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충청도 청풍에서 살다가 박해를 피해 강원도를 거쳐 문경새재를 넘어 1857년 상주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2년간 살다가 1859년 장조카 서상돈(徐相燉, 1850-1913) 아우구스티노가 살고 있는 대구로 왔다. 1866년 경상도에서 전교하던 리델(Ridel) 신부가 판공성사를 주기 위해 대구에 와서 박해에 관한 소식을 전하자 신자들은 흩어져 피난을 갔다. 서태순은 문경 한실 교우촌으로, 그의 형 서익순과 서상돈 가족은 칠곡 한티로 피난을 갔다.
서태순과 부인 김 데레사는 1866년 겨울 병인박해 때 붙잡혀 문경 아문을 거쳐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었다. 조카 서상돈이 장사를 하기 위해 오가면서 서태순의 옥바라지를 했는데, 한 번은 서태순이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피고름이 묻은 바닥에 깔아 놓은 가마니를 뜯어먹고 있는 참혹한 광경을 보았다. 그 후 서상돈은 큰 지주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쌀밥을 먹지 않고 보리밥을 먹었다고 한다. 서태순 베드로는 1866년 12월 18/19일에 34세의 나이로 상주 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해 순교했다. 그의 유해는 부인과 그의 형 서익순 그리고 보부상으로 감옥을 드나들며 옥바라지를 했던 조카 서상돈에 의해 칠곡 한티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한편 서익순은 1867년 병인박해가 잠잠해지자 한티에서 함께 피난하고 있었던 한 교우와 함께 대구의 집으로 돌아가던 중 서울 포졸들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절두산에서 백지사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리고 그의 시신은 한강에 던져졌다고 전해진다. [출처 : 한티 성지 홈페이지,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
첫댓글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시간내서 꼭! 가봐야겠네요^^
한번 가보세요 좋은 것이 많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