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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 길 스케치(3)
여느 때보다 조금 일찍(6시 반) 출발했다.
염천에 42km 이상 걷는 것이 무리인 줄 알면서도 포르투 길 마지막 강행계획이다.
당초에는 10일 예정이었으나 이미 1일 단축되었는데 다시 하루를 줄이려는 것이다.
그러면 숙소에서 로저와 재회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어서.
딱 만나야 할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만 어제 있었던 암묵적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아직 밝기 전에 순례자 교회(Santuario da Peregrina), 산 프란시스코 수도원(Con-
vento de San Francisco), 레알 거리(Rua Real)를 지나 부르고 다리(Puente de
O Burgo)를 건넜다.
'오래된 다리'라는 뜻의 폰테베드라 지명을 낳게 한 로마시대의 다리다.
폰테베드라의 한가로운 교외로 나간 카미노는 철로 밑을 통과한 후 잠시나마 갓길도
없는 매우 위험한 차로를 따라간다.
짧지만 지금껏 걸어온 차로 가운데 가장 위험한 구간이다.
이베리아 반도인들의 운전 버릇이 우악스러운데다 출근시간이라 더욱 두려웠다.
이런 길이 어찌 카미노란 말인가?
애초의 사도 야고보의 길에 철로와 차로가 있었겠는가.
야고보의 길이야 말로 기차와 자동차라는 문명의 절대 피해자가 된 것이다.
이것이 길의 운명이다.
카미노는 산타 마리아 데 알바교회(Santa Maria de Alba)가 있는 산 카에타노(San
Caetano)를 지난다.
로마시대 길(Via Romana XlX), P.K.58.738km(카미노) 등의 표석과 사도 야고보의
포르투 길 안내판이 연달아 숲속으로 길 안내를 한다.
숲길은 철도건널목을 지나 이어지고 지자체 바로(Barro)의 햄릿마을 산 아마로(San
Amaro)에서 알베르게 안내표지판을 만난다.
포르텔라(San Mamede da Portela)의 지자체 알베르게다.
어제 배낭을 메고 대학을 방문했더라면 어제의 일정이 여기까지 연장되었을 것이다.
산티아고가 50km 미만으로 다가왔다.
동에서 서로 가는 갈리시아 지방의 163km 프랑스 길은 오 세브레이로에서 산티아고
까지 대부분이 산악과 고원지대다.
이에 반해 투이에서 산티아고까지 남에서 북으로 가는 115km 갈리시아 포르투 길은
대성양에 인접한 평야지로 나있다.
따라서, 해발 235m 코르네도 산이 최고봉이며 대부분은 해발 50m 미만의 평지다.
당연히 속도감 있게 진행된다.
카미노는 숨어서 흐르는 라마스 강(rio Lamas)가의 경작지들과 포도원 마을을 지나
N-550도로로 진출하여 아그라 강(rio Agra)을 건넌다.
이후에는 칼다스 데 레이스 한하고 포도밭과 도로를 지그재그한다.
도로를 버리고 잠시 걷는 포도밭의 끝은 다시 도로다.
'ㄷ'자 형 순례를 반복한다.
그 때마다 사기당하는 느낌이면서도 혹시나...
끝내 역시나로 귀결되는 짓궂은 길이다.
오죽이나 도로를 벗어나고 싶으면 이러는 것일까.
그보다 너른 포도밭들을 도로가 절단냄으로서 카미노도 여러 토막이 된 것 아닐까.
유사한 운명의 우리 옛길들과 비교해 보며 나온 추론이다.
그러니까, 지름길을 선호하는 프랑스 길의 지혜로운 방그라데시 부부와 일부 한국의
젊은이에게는 참으로 바보스런 짓일 것이다.
다시 길을 생각한다
우미아 강(rio Umia)과 베르마냐 강(rio Bermana) 사이에 위치한 칼다스 데 레이스
(Caldas de Reis)는 인구 10.000명쯤 되는 폰테베드라 주의 작은 지자체다.
2010년에 문을 연 지자체 알베르게에 들러 스탬프만 받고 지체없이 떠났다.
오늘의 목적지 파드론이 아직 19km나 남았으니까.
고가도로가 포도밭과 숲이 우거진 베르마냐 강 계곡 위로 지나간다.
그 밑을 지나갈 때 빨간 소형 승용차 한대가 떠들며 비포장 시골길을 누비고 다녔다.
지붕에 단 스피커를 통해 애타게 호소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소리였다.
길 따라 돌고 돌다가 내 앞으로 온 차가 선거용 인물 포스터로 도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표를 달라고 애걸하는 중인 듯 했다.
프랑스 길에서도 포스터를 더러 보았는데 포르투갈에서 넘어온 투이 부터 현수막을
비롯해 선거용 벽보가 부쩍 많이 눈에 띄었지만 유세 차량을 보기는 처음이다.
그도 지쳤는지 잠시 쉬려 하는 듯 해서 말을 걸었다.
대강 알아들은 것을 종합하면,
오는 5월 22일이 지방선거일이란다.
17개 지방정부 중 13개에서 의회 의원을 선출하고 8천여 지자체에서 단체장 및 의회
의원을 뽑는다는 것.
벽보와 플래카드 만이 선거가 있음을 알릴 뿐 잠잠했는데 투표일이 임박한 시점이기
때문인가 유세시기가 법으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인가.
10일 전에 현장을 누비고 다니는 차량을 만난 것.
홀로 운전하며 호소하고 다니는 그는 기초단체 의원에 출마한 본인이란다.
더 물어볼 능력이 없어 포기했는데 운동원도 없이 고군분투하는 그는 가난해서 일까
제도 때문인가.
한데, 스페인은 우리나라와 달리 공영제가 아닌가.
우리나라도 예전(공영제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벽보의 규격이 제각각이고 한꺼번에
두세장씩 붙기도 했으니.
그나저나 그분은 당선되었을까.
숲길로 접어들어 마주친 중년 여인이 사람이 그리웠던지 의외로 먼저 인사를 했다.
봉주르(bonjour)!
국적을 묻지 않아도 프랑스 여인임을 바로 알 수 있다.
그들은 사도 야고보 길에서 만국공용 인사말로 통하는 '부엔 카미노(buen camino)'
대신 철저하게 자기나라 인사말 봉주르'를 쓴다.
산티아고에서 오는 중이며 가능하면 파티마까지 가려 한다는 이 여인도 물론 그랬다.
프랑스 길과 달리 인적이 드물고 호젓한 숲길을 여인 혼자 걷는 것이 무섭지 않은가.
말이 통하지 않지만 어렵사리 물었는데 그녀의 대답은 단호히 No.
하느님과 사도 야고보의 가호 신앙과 순례길 신뢰가 그녀를 자신만만하게 하는 듯.
최근에 제주 올래길에서 한 여인의 피살 사건이 발생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인데, 길을 만들고 운영하는 회사가 내놓은 대책은 혼자 걷지 말고
낮 일정한 시간 외에는(아침 9시 이전과 저녁 6시이후에는?) 걷지 말라는 것.
통행금지 시간에 다름 아니지 않은가.
스페인의 순례길에서 영감을 얻고 벤치마킹 했다고 들었는데 사실이 아닌가 보다
그곳에 통금시간이 있다는 말 들어본 적 없고, 5개의 루트 2.000km를 걷는 동안 밤길
걷지 말라고 주의 받아본 적 없으니까.
직립동물에게는 두 발(다리)로 걷는 것이 당연하면서도 그것만이 최선의 행복이다.
왜냐하면 그것 없이는 그 어떤 행복도 온전하지 못하니까.
그러니까, 너나없이 걸으려 하는 것은 가장 바람직한 현상이다.
이왕에 걸으려면 의미있는 길을 걷는 것이 금상첨화다.
많은 사람이 먼 이베리아 반도의 길을 걸으려 가고 있다.
그 길의 의미에 매료되어 거금과 귀한 시간을 바치는 것 아닌가.
길의 의미란 인위적 조작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터무니 없는 전설을 결부시킨다 해서 의미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유구한 세월을 통해서 축적된 역사가 없는 길은 생명력이 없는 길이다.
우리에게는 귀한 자산이 되는 수많은 길이 묻혀 있다.
제주도에도 옛 제주로가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비바람 맞고 이슬과 서리, 눈도 맞고 햇볕에 바래고 달빛에 물들며
생성된 길들이다.
역사가 있고 신화가 있으며 우리 조상의 애환이 서려있는 길들이다.
한데, 어느날 마치 조립식 집 짓듯, 콘크리트 양생하듯 길들을 만들고 그럴싸한 이름
으로 견강부회하며 호객을 시작했다.
그 정도의 길이라면 팔도에 지천인데도 바가지를 써가며 모여들었다.
마치 그 길을 걷지 않으면 소외당하기라도 할 듯이.
이 경도현상에 운영자들은 쾌재만 불렀지 음험한 덫에 대한 대비는 하지 않았다.
사후약방문으로 내놓은 것이 잠정폐쇄, 통행금지 시간 설정이다.
정체성이 애매한 제주인(제주로를 걸으며 현장에서 확인했다)의 한계인가 한국인의
강한 경도현상이 문제인가.
롤 모델의 의미
농촌의 조류(鳥類)와의 전쟁 방식은 신통하게도 한반도와 이베리아 반도가 같다.
생존을 위해서는 부득이 익조(益鳥)와 해조(害鳥) 사이를 끊임 없이 왕래할 수 밖에
없는 저들에게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일 것이다.
위장물들이 서있는 작은 밭을 지나고 N-550도로 건너편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안에 너른 식당이 있는 카라세도(Carracedo)의 카페 에스페론(Esperon)이다.
여간해서는 더위를 타지 않을 뿐 아니라 물도 마시지 않는 체질인데도 콜라 생각이
날 만큼 무더위가 극성을 부리고 있기 때문에 잠시 휴식도 취할 겸.
간밤에 준비한 보카디오 하나가 아침과 점심을 책임지기에는 역부족인 듯도 하고.
조금 전에 나를 앞질러 갔던 40대 스페인 자전거 부부가 쉬고 있다가 알은 체하며 내
나이를 물어왔다.
77살이라는 말을 듣고 놀란 주인 부부가 다가왔다.
한국에는 나보다 더 건강한 노인들이 많다고 했더니 비결이 뭐냔다.
안다르, 무초 안다(andar, mucho anda/걷기, 많이 걷는 것)
내 표현이 옳던 그러던 그들은 이해했으며 부인이 66세 영감을 다그치는 듯 했다.
걷기를 싫어하는 영감에게 저 할아버지처럼 많이 걸으라고.
오라 , 이 늙은이를 롤 모델(role model)로 삼으려는 사람이 여기에도 있구나.
산과 길에서, 국내와 국외에서 부와 권력, 명예와 철저하게 무관한 영감을 롤 모델로
삼으려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사는 의미는 충분히 있는 것이리라.
콜라 1캔을 시켰을 뿐인데 부인은 쿠키를 담은 접시까지 들고 왔다.
건강한 한국노인에 대한 경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사진을 찍으려 했더니 늙어도 여자의 본능인가.
66세 부인은 매무새를 고치고 포즈를 취했으니까.
골목 입구에서 로마시대 길 표석과 사도 야고보의 길 표지들이 함께 길 안내를 한다.
시기적으로 보면 야고보의 길이 고대 로마때의 길을 따른 것이다.
마을 중앙의 산타 마리냐 교회(Iglesia Santa Marina)를 지난 카미노는 지방도로를
따라 해발160m 코르티냐스(Cortinas)를 넘은 후 N-550도로를 다시 건넌다.
얼마 후 지방도로에 편승해 A-9고속도로 위를 가로지른다.
A-9, N-550,지방도 등 복잡하게 엉킨 세 도로가 카미노를 현기증나게 하는 지점이다.
카페 파르달(Cafe Pardal) 앞에서 잠시 방심하여 도로를 따르다가 산티아고 32.410
km 지점에서 숲길로 된 카미노를 찾았다.(도로는 자전거 순례길)
울창한 숲으로 덮힌 발가 강(rio Valga) 물소리를 따라가는 2km 숲길은 일품길이다.
발가 다리(Puente Valga)를 건너 숲을 빠져나오면 산 미겔 데 발가(San Miguel de
Valga) 마을이다.
숲길과 시골길을 따라서 지자체 폰테세쿠레스(Pontesecures)의 작은 마을 몇개를
지나면 산 훌리안(San Xulian)의 전망대(Punto da Vista)가 나온다.
폰테세쿠레스 산업지구와 우야 강(rio Ulla) 지류인 사르 강(rio Sar) 둑 따라 들어선
파드론 시내와 함께 멋진 폰테세쿠레스 항구가 눈을 즐겁게 한다.
파드론과 산티아고는 난형난제?
12세기의 로마네스크 양식인 산 훌리안 교회(Iglesia de San Xulian)를 지나 우야 강
을 건너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거느린 아 코루냐(A Coruna) 주 땅이다.
아 코루냐 주에는 동쪽 멜리데 부터 약57km의 프랑스 길과 서쪽 피스테라-묵시아 길,
지금 걷고 있는 남쪽의 포르투 길 외에도 3개의 루트가 더 있다.
2.5km 남은 파드론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는데 왼쪽 사르 강의 강태공이 내 서재 벽에
걸린 그림의 글을 생각하게 했다.
萬事無心一釣竿 三公不換此江山(만사무심일조간 삼공불환차강산)
나는 낚시를 해본 적이 없지만 강태공의 무심한 분위기에는 공감한다.
삼공과도 바꾸지 않을 무심한 강산이 어찌 강태공 만의 것이냐.
산 타고 길 걸을 때 나의 강산이야 말로 삼정승보다 더한 어느 누구와도,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이니까.
사르 강 다리 건너 파드론의 지자체 알베르게에 도착함으로서 42km일정을 마쳤다.
그러나 늦게 도착한 나를 위해 비워둘 하단 침대가 있겠는가.
젊은 관리여인은 늙은이에 대해 전적으로 무관심했으며 오히려 3곳을 방문해 세요를
받아오기를 권했다.
사도 야고보와의 관계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못하지 않은 파드론(Padron)의
특별한 순례증서를 원한다면...
여기 사람들은 사도 야고보가 이베리아 반도에서 최초로 선교를 시작한 곳이 이 지역
이리아 플라비아(Iria Flavia)라고 믿는단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와의 관계는 파드론과 산티아고가 난형난제라는것.
야고보의 두 제자(Theodore와 Athanasius?)는 예루살렘에서 처형된 사도 야고보의
시신을 돌배에 태워 예루살렘에서 이곳 이리아로 옮겨온다.
그들은 돌배를 한 페드론(pedron/스페인어로 큰 돌이라는 뜻)에 묶어두었는데 이로
인해 보통명사 페드론은 고유명사 지명(Padron)으로 바뀌게 된다.
두 제자는 사도 야고보의 시신을 콤포스텔라에 묻은 후 이리아 플라비아에 남아 선교
활동을 계속했는데 당시의 이리아 플라비아가 지금의 파드론이란다.
그리고 당시의 페드론이 지금의 파드론 산티아교 교회 안에 있단다.
관리인이 방문하라는 산티아고 교회(Igrexa de Santiago)는 사르 강 도로변에 있다.
사제는 제단 아래에 있는 꽃병처럼 생긴 돌의 움푹한 곳에 헌금을 권했다.
이 돌이 진품 페드론이라며 설명하했지만 내가 얼마나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제단 아래에 페드론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옛 페드론 위에 교회를 세웠다는 것이 이치에
맞겠는데 그렇다면 예전에는 교회가 들어선 곳까지 사르 강이었을 것이다.
다리 건너편 사르 강 남쪽 강가에 복제품 페드론이 서있단다.
1km이상 북쪽에 있는 또 한 곳 산타 마리아 교회(Igrexa de Santa Maria de Iria Fla
via)에서는 진행중인 미사에 참여한 후 세요를 받았으나 남은1곳은 끝내 찾지 못했다.
세요를 받을 수 없는 성터에 오르게 한 것이다.
관리인은 미리 만들어 놓은 증서를 내게 준 후 바로 퇴근했고 다른 순례자들은 증서의
유모 조차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에 궁금거리가 하나 생긴 것이다.
지금까지 걸어온 포르투 길로는 부족하며 파드론 시내 3곳을 방문해야 자격이 주어진
다면 이 3곳에 답이 있는 것이다.
답은 의외로 쉽게 나왔다.
산티아고 교회에는 페드론이 있고, 산타 마리아 교회는 사도 야고보가 이베리아 반도
에서 최초로 선교를 시작한 곳이다(이리아 플라비아)
마지막 높은 곳은 파드론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이쯤 돼야 파드론 시와 시의회가 주는 순례증서를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리라.
로저와의 재회는 이뤄지지 못했다.
간밤에 같은 알베르게에서 함께 묵었다는 핀란드 처녀 민나(Minna)가 알려주었다.
그는 아마 산티아고까지 갔을 것이라고.
민나는 어두컴컴한 데서도 킴 어른이시죠?(Senior Kim?)하며 내게 인사했다.
로저로부터 나에 대해 자상하게 들어서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단다.
하긴, 카미노에서 수염 많은 동양 늙은이가 나 외에 또 있을라구?
내일 낮에 산티아고의 오브라도이레 광장을 기대해 보기로 하고 상단 침대의 배낭을
끌어내리는데 하단의 젊은이가 어디로 가려 하느냐고 물어왔다.
몸이 무거워서 2 층 오르내리기를 포기하고 식당으로 가려 한 것인데 청년은 자기와
바꾸자고 고마운 제의를 해왔다.
자기는 젊으니까 문제되지 않는다며.
많은 일이 벌어진 하루, 포르투 길의 마지막 밤을 안식으로 장식하게 되었다.<계 속>
첫댓글 김선배님을 제주 올레 길 자문위원장으로 추천 합니다.
글쎄요. 길을 만들어 놓고 일이 생기니 시간을 제한하고 조심하라고. 글구 여기저기 말들 하면서 CCTV를 설치하라는 둥. 요즈음 성폭행/성추행 관련 행위가 왜 이렇게 빈번하게 매스컴을 타는지 사회학자나 범죄학자께서 분석을 해 보시고 알려 주셨으면... 다른 요소나 영향으로 인한 것은 아닌지? 카페지기님. 오늘 새벽 출발 하셨겠네요. 날씨가 엄청 무덥습니다. 이번 나들이 2주간, 무탈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