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중문화, 그 금기와 위반에 관한 추억담
― 『쇼쇼쇼 ― 김추자, 선데이서울 게다가 긴급조치』 ―
1
이제 대중문화는 비주류 저급문화의 때를 벗어버린 듯하다. 심지어 그것은 대중들의 의식과 감각을 지배할 뿐 아니라, 그것에 무관심한 자들을 타자로 구성하고 배제시키면서 그 영역을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 무난하고도 외롭지 않게 사회적 삶을 영위하려면 적어도 노래방에서 신곡 한 곡 정도는 따라 부를 수 있어야 하고, 유행하는 드라마 한두 편 정도는 섭렵해야 한다. 연예인들을 딴따라로 취급하다간 그들에게 고소당하기도 전에 네티즌들의 돌팔매를 받게 될 지도 모른다. 그들은 딴따라가 아니라, 대중문화의 선도자들이며 대중문화라는 신종교의 교주들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불거진 연예인 X파일 사건은 연예인들의 사적 공간을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이 명실 공히 대한민국의 공인임을 천명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던가. 대중들이 대중문화를 즐기고 그것과 노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놀아나고 있는 형국이 2000년대 대중문화 판의 지배적인 분위기라고 혀를 끌끌 찬다면 나의 세대의식을 의심받게 될라나.
대중들이 문화의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놀아나는 존재라고 표현한 것은 대중과 대중문화의 관계가 동상이몽의 관계에 놓여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대중은 대중문화가 던져주는 이미지에 탐닉하는 반면, 대중문화는 대중들의 돈에 관심한다. 주체로서의 대중이 사라진 자리는 객체 (소비자)로서의 대중들, 즉 숫자로서의 대중들로 채워진다. 역사적으로 대중문화가 자본주의와 공생관계를 유지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대중문화가 상업문화의 경계선 위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현상을 그대로 묵과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이성욱의 『쇼쇼쇼 ― 김추자, 선데이서울 게다가 긴급조치』라는 대중문화 비평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은밀하게 공유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대중문화 고유의 본질적인 의미와 가치를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쇼쇼쇼 ― 김추자, 선데이서울 게다가 긴급조치』에서 저자는 60년대로부터 작고하기 직전, 즉 2002년까지 전개된 한국 대중문화의 지형도를 그리고 있지만, 표제에 ‘긴급조치’라는 어휘를 통해 논의의 초점을 어느 정도 암시하고 있듯이, 결국 이 책은 박정희 군사정부 시기의 대중문화 현상에 대해 집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소위 말하는 ‘운동권’의 문화운동에 대해 다루고 있을 것이라고 상상해선 곤란하다. 표제를 다시 보라. ‘긴급조치’ 시대에 ‘김추자’와 ‘선데이서울’이 ‘쇼’를 한다지 않은가. 진지하게 말하자면, 이 책은 대중의 다양한 욕망이 억압, 금지, 규율되던 시기에 어떻게 대중문화가 대중의 탈주와 일탈에의 욕망을 충족시켰는가에 관심한다. 금기와 그것을 위반하고자 하는 욕망이 대중문화를 추동해 온 핵심적 요소라고 볼 때, 대중문화의 생산자와 수용자가 이러한 두 요소를 공유하지 않는 한 대중문화는 그것의 본질적 의미를 상실하고 그것의 외피를 둘러 쓴 상업문화에 그 이름을 빌려줄 수도 있는 것이다.
2.
이 책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나의 문화 요람기>, <한국 대중문화 100년의 계보학>, <근대 공간의 감각과 풍경>, <그때 그 시절>이라는 네 개의 장으로 묶여져 있다. 먼저, <희미한 ―>은 작가 이성욱이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다양한 놀이 공간 속에서 흥분과 호기심에 달떠서 몰두했던 다양한 오락(?) 활동을 기록한 회고담으로서 자칭 ‘문화요람기’에 해당한다. 그는 침침한 삼류극장과 촌스런 고고장을 경험하고, 변소 안의 은밀한 낙서와 선정적인 잡지나 책자 속의 내용을 흥분 속에서 읽어 내리고,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대중가요를 따라 부르면서 자신이 60년대와 70년대의 대중문화를 몸으로 기억하게 되었음을 밝힌다. 실로 그는 놀라운 기억력을 통해 당대의 영화와 가요의 제목은 물론 영화인과 가수들의 이름까지도 거의 빠짐없이 재구한다.
그러나 이 장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놀라운 기억력이나 그 기억력에 의해 실체가 드러난 대중문화의 내용이 아니라, 그가 자연스럽게 대중문화 속에 내재된 금기와 위반의 긴장적 갈등 관계를 체화하였다는 사실이다. “완전 성인영화” 혹은 “미성년자 절대불가” (28쪽)라는 광고 카피가 그의 욕망을 부풀리고 추동하여 그로 하여금 금지된 극장 공간을 찾도록 하지 않았던가. 이와 같은 위반에의 욕망은 김추자에 대한 작가의 열광과도 무관하지 않다. “선정적인 것을 넘어 살 떨리는 전율”(46)을 느끼게 했던 김추자의 섹시한 발음과 스펙터클한 율동들. 작가는 김추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이미자, 하춘화, 조미미, 김상희, 정훈희 등” “그런 평균율 속에 김추자는 단연 별경이었고 한국 대중음악의 새로운 대륙을 열어가는 탐사대였다.”(48) 그리고 “김추자의 존재의의는 평준화, 일반화, 관습화되어 있던, 그래서 무척이나 지루하고 단순편벽했던 우리 대중가요사의 무의식적 습관을 일거에 뒤흔들 놓고 충격을 가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49). 작가는 김추자를 통해 아마도 대중문화가 금지된 것, 규율된 것, 금지와 규율을 내면화한 관습 등을 흔들고 위반하며, 그것에 저항할 때, 그것이 대중들을 유혹하며 그들의 자유로운 탈주의 욕망을 만족시켜 줄 수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두 번째 장, <한국 대중문화 100년의 계보학>은 우선 한국 대중문화를 강박하였던 개념들로서 근대 이미지(개항 이후부터 식민지시기까지의 근대문화), 반공(50년대의 분단문화), 검열(60-70년대의 퇴폐문화), 계급(80년대의 민중문화), 소비(90년대의 거품문화)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이러한 강박 관념들은 우리 사회가 직면한 특수한 사회적 · 정치적 · 문화적 상황에서 비롯된 것으로 대중문화를 일정한 방향으로 규율하는 억압 장치에 다름 아니다. 다음으로 작가는 열한 가지의 토픽 아래 한국 대중문화의 계보를 정리한다. 여성의 진출과 영화, 이산의 경험과 대중음악 속의 고향과 향수, 미국 대중문화, 클럽문화, 반공, 테크놀로지, 이국취향, 대중문화로서의 스포츠, 신세대의 탄생, 청년문화, 21세기의 대중문화 등이 그것이다. 특히 이 중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 청년문화의 등장에 대한 지적이다. 뚜아에무아, 이장희, 트윈폴리오, 한대수 등의 뮤지션들의 등장과 함께 “대중문화의 지형에 생기와 긴장, 탄생의 기운”이 약동하였다”(179)는 것이다. 그리고 청년문화는 단지 “청바지, 생맥주, 통기타”(180)와 같은 이미지로 단순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 청년들의 심리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정체 모를 억압감을 적절히 환기”(181)시켰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밝힌다. 고우영, 최인호, 이장희, 신중현의 출몰은 이러한 청년문화를 다채롭게 전개시켜나간 선구자들이기도 하다.
셋째 장, <근대공간의 감각과 풍경>에서는 작가의 시선에 포착된 개화기의 경성, 미아리, 카바레, 경마장, 신사동이라는 특징적인 공간을 다루고 있다. 이 장의 서두에서 이성욱은 소설가 박태원이 경성 거리를 배회하는 만보객 구보를 통해 도시성의 모티브를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보들레르와는 달리 근대성이나 도시성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어서 이성욱은 근대성의 “모순적 긴장과 갈등”(197)을 보여주는 특징적인 공간들을 탐색하면서 이들 공간이 지닌 긍정성과 부정성을 동시에 껴안고자 한다. 이 중에서 미아리에 대한 서술은 꽤 흥미롭다. “50년대 말에서 70년대 말까지 도시미화라는 강력한 멸균소독 정책”(212)으로 새롭게 형성된 주변부적 공간, 미아리는 이제 “주술과 전근대의 딱지를 이마에 붙이고 있는 점술가촌, 욕망과 탈근대의 브랜드를 광나게 닦고 있는 돈암동, 그리고 그 위에 음습하게 비껴 숨어있는 텍사스촌. 미아리는 이처럼 서로 다른 집객 요인과 테마와 시간대가 서로 웅웅거리면서 뒤섞여 있는 서울 특유의 잡종 문화가 대표적으로 번성하는 지대인 것이다.”(216) 이성욱은 전근대와 탈근대, 빛과 어둠이 혼재하는 미아리에 대해, 그곳에 번성하는 잡종문화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그곳은 “우리 사회의 주름진 표정, 이를 테면 이중성이 만나면서 만들어내는 그 주름의 골을 여실하게 피력해주는 지대이기 때문이다.” (214)
마지막 장, <그때 그 시절>은 금기, 문화예술 공간, 추억의 소리들, 복고, TV 드라마 전원일기, 조용필, 다방, 청년문화와 신세대 문화, 틴에이저 영화의 맥락 등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다양한 토픽과 관점에서 서술되고 있기 때문에 어떤 통일적인 주제를 발견하기 어렵다. 그러나 바로 이 장에서 그는 이 책 전체를 관류한다고도 할 수 있는, 그가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관점’을 노출한다. 그것은 바로 금기와 위반의 역학관계다. 이성욱에 따르면, “금기의 존재는 동시에 위반의 욕망을 항상 동반”하며(251), “일종의 지배이데올로기의 응결물”로서의 “금기는 지배와 저항이 날카롭게 대면하고 있는 긴장의 국면이며 파국의 예비공간”(252-253)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금기가 배제와 삭제의 논리라면 저항과 위반은 확장의 논리”이기 때문에, “문화적 금기의 철거 작업은 바로 인간성 확장의 문제와 직결”(253)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대중문화는 이러한 금기와 위반의 긴장적 역학 관계에 의해 추동되기 때문에, 금기가 어떤 성질의 것이냐에 따라 그에 대한 위반의 방향도 달라질 수 있다. 이것은 정치적 금기에 의해 억압되었던 70-80년대의 대중문화와 문화적 금기에 의해 강압되는 90년대의 대중문화가 다른 질감과 색채를 드러낼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결과적으로 이성욱은 대중문화가 금기라는 지배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위반을 욕망하는 것이고, 그 위반에의 욕망 자체가 대중문화를 이끌어가는 힘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3.
이성욱의 『쇼쇼쇼 ― 김추자, 선데이서울 게다가 긴급조치』는 일종의 대중문화의 정치학을 지향하는 듯하다. 비록 작가의 사적인 기억과 체험에 의존한 듯한 문체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그가 대중문화를 지배이데올로기로서의 금기와 그것에 대한 위반의 욕망 사이의 긴장관계로 다루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어떤 통일적이고도 뚜렷한 목소리를 발견하기 어려우며, 그의 관심과 애정이 다소 과거의 문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김추자와 조용필이 위대한 대중문화의 기수였다면, 현재의 대중문화가 어떠한 점에서 김추자적인 부분을 결여하고 있는가. 그러한 결핍 현상은 어디에서 기인하며, 대중문화가 과연 어떠한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명확하게 지적하지 않고 있다. 60년대로부터 90년대로 이어지는 대중문화의 진행방향을 통시적으로 살펴보고 있는 부분에서조차 그것은 일관된 줄기를 형성하지 못한다. 바로 이 때문에 이 책이 매우 흥미롭고 다양하게 구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부분을 제외하고는 최종적으로는 밋밋하다는 느낌을 지워내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부분적으로 발견되는 모호함, 밋밋함, 통일성의 결여는 두 가지 사실에서 기인한다고 여겨진다. 첫째는 이 책이 작가가 작고한 이후에 그의 유작을 묶어낸 것이라는 점과, 둘째는 근대성과 금기/욕망을 중심으로 글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보들레르처럼 그 모순적인 성격을 동시에 껴안으려 했다는 점에 있다.
일정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대중문화 서적으로서 이 책이 가진 미덕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이 책이 객관적인 시선을 거부하고 매우 주관적이고도 사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바로 이 때문에 이성욱은 다른 비평가들이 거론하지 않았던 선데이서울을, 삼류 극장의 변소를, 김일의 사기 레슬링을, 김추자의 섹시함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그는 유혹적인 놀이문화, 그것이 대중문화가 거대한 산업 자본에 의해 지배되기 이전에 간직하고 있었던 그 무엇, 즉 대중문화의 '맨얼굴'임을 암시한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성욱이 우리가 보지 못하는 미아리, 신사동, 카바레라는 공간에 은폐되어 있는 욕망과 그것의 문화적 의미를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이성욱의 대중문화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2005년 현재의 문화를 진단하자면, 그것은 60,70년대의 정치적 금기나 90년대의 문화적 금기처럼 어떤 구체적인 금기와 직면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처럼 대중들에게 뚜렷하게 감각되거나 체험될 수 있는 금기가 부재하는 자리에 부풀어 끓어오르는 욕망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것은 금기를 위반하기 위한 욕망이라기보다는 이미 충족된 욕망보다 더 큰 욕망을 지향하는 욕망이다. 그리고 보다 과장적으로 말하자면, 그 욕망을 추동하기 위해 오히려 금기를 인위적으로 생산해내는 것은 아닐까 의심해본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대의 대중문화는 과거의 그것처럼 사회적·정치적·문화적 의미에서의 위반과 저항과 일탈의 정신을 가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아마도 그것이 탈주의 자유를 더 이상 지향하지 않기 때문에, 상업문화의 유사품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