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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품위 있게 마셔야 한다. 술의 개요 인류최초의 술은 봉밀주(蜂蜜酒)―벌꿀술―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것을 언제부터 마셨는지, 어떻게 만들어 마셨는지 등의 방법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과실이나 꿀 등이 자연 발효된 것을 발견하고 마셨을 것이라고 추측할 따름이다. 술은 과실주나 봉밀주(蜂蜜酒) 등과 같이 원료 자체에 당분이 충분히 포함되어 있어서, 그대로 방치해 두기만 해도 천연 발효의 힘으로 자연스레 알코올 발효가 일어나는 것과, 곡류나 감자류 등 녹말을 원료로 하는 술과 같이 천연효모와 결합하기 전에 점점 녹말이 분해되어 당분으로 변하면서 알코올 발효를 일으키는 것이 있다. 후자의 경우, 녹말의 당화효소로서 사용되는 것은 곡물의 씨앗과 곰팡이류가 일반적인데, 맥주의 맥아, 청주의 누룩이 이에 해당한다. 주류는 어떻게 정의되는가? 우리나라 주세법상 주류라 함은 주정과 알코올분이 1% 이상의 음료를 말한다. 단 약사법에 의한 의약품으로 6%미만의 것은 제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노래연습장에서 판매하는 1%미만의 맥주는 술이 아닌 일반음료수에 해당한다. 그리고 술의 종류에는 첫째, 주정 둘째, 발효주, 셋째 증류주가 있다. 술의 종류를 시대별로 다음과 같이 4개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민덕기 『와인 및 칵테일』5쪽) 첫째, 고대(8세기 이전)의 술로서 발효주(醱酵酒)이다. 봉밀주, 맥주, 와인의 순서대로 탄생하였다. 둘째, 중세(8~14세기)의 술로서 증류주라는 알코올이 강한 술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 예로 위스키와 보드카를 들 수 있다. 셋째, 근세(14~18세기)의 술로서 증류주(蒸溜酒)라는 영역의 강하고 다양한 술로서 브랜디, 진, 럼, 데킬라 등이 여기에 해당하는 술이다. 넷째, 18세기 이후 탄생된 술인데, 칵테일이라는 혼합주가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술은 발효주에서 증류주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알코올의 농도와 관계있는 것으로 보인다. 발효주의 경우 알코올 농도가 높아야 13도 내외이며 숙취가 오래간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도수가 높은 술을 만들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술에 멋과 맛을 동시에 추구하게 된 것이 칵테일이다. 칵테일은 기본이 되는 주재료와 부재료 두 가지 이상의 재료를 혼합하여 만든 술로 향기, 색깔, 맛의 조화를 이루어 만든 술이다. 칵테일은 부재료를 통하여 알코올 섭취로 인해 파괴되는 비타민, 단백질 등의 영향을 보충시켜주고 알코올 도수를 낮추므로 해서 장기에 부담을 줄어준다. 칵테일의 효과는 미각적(味覺的)으로 오미(五味)를 만들 수 있고, 아름다운 색깔로 시각적(視覺的) 효과를 주며, 다양한 부재료를 통해서 영양분을 공급한다. 이런 측면에서 칵테일은 맛, 향기, 색채를 갖춘 주(酒)의 예술품(藝術品)이다. 이런 술은 막걸리를 마시듯 해서는 격이 맞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품위 있게 마셔야 한다. 하지만 음주문화는 일정한 지역에 모여 사는 집단의 문화를 담고 있기 때문에 각각이 다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양으로 마시기 때문에 그것에 맞는 술이 개발되었다. 막걸리, 현재의 도수 낮은 소주가 대표적인 예이다. 음주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해프닝도 있다. 예로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조선 사신들이 중국 사람들과 술을 마시는 장면을 보고 기록한 내용이 있다. 중국의 술은 독하기 때문에 작은 잔에 따라 마셨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를 본 조선 사신들이 양이 차지 않아 큰 그릇에 부어 마셨다고 한다. 이 광경을 목격한 중국 사람들이 “논에 물을 대느냐?”고 비아냥거렸다는 것을 적고 있다. 이것이 음주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현상이다. 21세기는 국가의 벽이 허물어지고 있어 고유의 음주문화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음주문화가 국제화된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앞선 예처럼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하지 않으려면 국제적인 음주문화도 익혀야 할 것이다. 아무튼 술은 알코올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한 음용이 아니라 중독성이 있다. 그러므로 양보다는 맛과 멋, 풍류 등이 어우러져야 음주문화의 격이 높아질 것이다. 술, 천상의 음식 현대는 주도가 무너진 사회라고 한다. 그것은 바쁘게 살아오면서 정신문화를 확립하는데 소홀히 한 점도 영향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신학기가 되면 대학 신입생들이 환영회를 한다면서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셔 사망사고가 일어나는 보도를 접하곤 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음주문화를 확립해 가야 할 것이다. 술은 잘 마시면 분명 천상의 음식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술을 마시면 머릿속의 신―생각―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정―감정―으로 발한다.” 그래서 김진섭은 주찬에서 “용사(容赦)치 못할 적까지를 우리는 우리의 끓는 가슴에 굳이 안으려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술의 순기능 중에서 순기능을 이야기 한 것이다. 적당하게 취했을 때는 정말 찰나의 깨달음인 묘계(妙契)가 나온다. 이것을 질서(疾書)해야 시가 되기도 하고, 그림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나온 것은 일상의 현실에서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그래서 술을 천상(天上)의 음식(飮食)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물고기는 물과 싸우지 않고, 주객은 술과 싸우지 않는다』는 책의 저자 김승호 씨와 주담(酒談)을 나눈 연극배우 이영란 씨가 소개한 김승호 씨의 술에 관한 이야기를 옮겨본다. 술이란 천상의 음식으로 신선들만이 마시던 것인데, 다른 동물과 달리 신의 형상을 빌어 만들어진 만물의 영장인 사람을 귀히 여겨 하늘에서 술을 내려 인간들도 마시게 된 것이다. 즉 술이란 곧 하늘의 뜻이라고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술을 마실 때는 정중하고 소중하게 마셔야한다. 술을 마심에 있어서 술은 천(天)이요 잔은 지(地), 또한 술은 양이요 잔은 음이다. 술을 따르는 사람은 두 손으로 정중하게 하늘의 뜻을 내리는 것이고, 받는 사람은 두 손으로 잔을 잡아 소중히 하늘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술을 따르고 받는 것은 천지의 합일이요, 음영의 조화이다. 술이 몸 안에 들어와 생기는 발함은 하늘에서 비가 내려 대지를 적셔 만물이 생성하는 이치와 같다. 즉 양이 아래로 내려와 다시 위로 향하는 방향성을 창출한다는 의미가 있으니 윗사람은 아랫사람의 말을 듣고 이해해 주며 아랫사람은 그런 윗사람을 신뢰하고 공경하는 현장이다. 즉 술자리는 메말랐던 상호간의 관계를 촉촉이 적셔 새로운 싹이 돋고 열매를 맺는 신선하고 풍요로운 자리여야 한다는 것이다. 주역을 연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술과 술잔을 음양론으로 풀어가고 있다. 맞지 않는 이론이 어디 있겠는가? 술이 가지는 역기능이 많으므로 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가지는 화력을 제어할 수 있는 기능들이 있어야 할 것이다. 동악 이안눌의 술 이야기를 보면 이런 것들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축제와 술 옛날부터 잔치를 평가하는 기준에는 꼭 그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이 올라야 한다. “호남지방 잔치에는 반드시 홍어가 올라야 한다.”는 것이 좋은 예이다. 또 잔치에 지역에 관계없이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필수 음식이 술이다. 만약 잔치 집에 술이 부족하면, 다른 음식을 아무리 잘 차려도 돌아서서 그 잔치에 대해서 흠을 잡게 된다. 잔치의 개념과 비슷한 축제가 지역마다 열리고 있다. 각 지방자치단체가 그 지방 고유의 축제(祝祭)를 개발하여 수입은 물론이고 그 지역을 알리고 있다. 예로 부산의 자갈치축제와 불꽃축제, 진주의 개천예술제, 청산도의 슬로우 축제 등 수없이 많다. 이런 축제에 꼭 장터가 만들어지고 아울러 그 지역 대표주를 판매하는 코너도 마련되어 찾는 객들의 목을 축이게 한다. 이것이 우리 축제문화의 한 단면이다. 조선시대에도 이런 축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 중 가장 큰 축제가 “다리밟기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정월대보름날 수표교를 비롯한 청계천 등 다리 12개를 밟으면 열 두 달의 액을 면할 수 있으며, 특히 여인들은 1년간 다리에 병이 생기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매년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각자 자기 나이대로 다리를 밟는 행사를 고려(高麗)시대부터 전통 풍속을 이어받아 행해지고 있었다. 부녀자들이 떼를 지어 답교(踏橋)하니 무뢰한까지 몰려들어 한데 어울렸다. 이에 남녀의 풍기가 문란해지자 한때 답교를 금지시켰다. 그런데 선조(宣祖) 때에는 답교 풍속이 계속되었던 것 같다. 답교가 답교로 끝난 것이 아니라 술도 마셨던 모양인데 이날은 통금도 해제되는 날이라 모두 술이 과했던 모양이다. 술이 취해 소실을 맞은 이야기를 보면서 술과 축제를 생각해 보자. 정월대보름 다리밟기에 갓 장가든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이 어울렸다가 술에 취해 수표교 부근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런데 새벽이 되어 깨어보니 자기 신방(新房)이 아니었다. 이안눌은 정신이 번쩍 들어 옆의 신부를 깨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눈을 뜬 신부도 “에그머니,아니~ 당신은 누구세요?”라며 이안눌 못지않게 놀라는 것이었다. 이 신부도 신혼 사흘밖에 되지 않았는데 밤늦도록 신랑이 들어오지 않자 하인들이 찾아 나섰다가 만취해서 쓰러진 이안눌을 신랑으로 알고 업어다가 신방에 재운 것이다. 이안눌은 당황하며 신부를 바라봤다. “본의 아니게 실수를 저질렀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나는 제 팔자소관이자 연분인가 합니다. 여자로 태어나서 마땅히 죽어야 할 일이나 늙은 부모의 무남독녀로 자라 어쩔 수도 없으니 소녀를 소실로 허락해 주신다면 이만한 다행이 없겠습니다.” “나 역시 고의로 저지른 과오가 아니고, 새댁 또한 화냥끼로 한 잘못이 아니니 소실로 맞이한들 상관이 있겠소. 그러나 엄친 슬하에 아직 과거에 오르지도 못한 주제에 어떻게 두 여인을 거느릴 수 있겠소?” 결국 신부의 간청에 못이긴 이안눌은 부랴부랴 신부와 같이 그 집을 몰래 빠져나와 그 길로 신부를 이모 집에 의탁(依託)시키고 과거에 합격하기까지는 서로 만나지 않기로 약속했다. 한편 신부 집에서는 갑자기 신부가 온데간데없는지라 영문을 몰라 전후를 살핀 끝에 진상이 드러났다. 이에 신부 집에서는 주의를 의식해 신부가 변사한 양 서둘러 장사를 치르고 수심의 나날을 보냈다. 이 이야기는 서울시 중구자치신문 제37호 7면(2003년3월24일자)에 소개된 것이다. 일이 꼬여도 귀가 차게 꼬인 것이다. 미욱한 하인들의 실수로 하마터면 줄초상이 날 뻔했다. 술이 원수라더니… 원수일까? 반면 답교놀이에서 열심히 놀다 외박한 진짜 신랑은 얼마나 황당했을까. 다음 날 집에 와 보니 마누라 장례식이 치러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 일화를 보면, 조선 중기의 정월대보름 다리밟기 놀이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해방의 시간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날은 한양성 사람들의 밤을 구속하던 밤 10시 통금 시간도 없었다고 하니 축제치고는 대단한 축제였던 셈이다. 이 일화의 주인공인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이 누구인가? 조선의 ‘이태백’이라 불렸으며 예조판서, 홍문관·예문관 대제학 등 높은 벼슬에 올랐던 분이다. 또 노후에 ‘동악시단’을 꾸미고 당대의 문장인 권필, 윤근수, 이호민 등과 시를 읊으며 지냈는데 “사람들이 그의 모습을 보고 신선 같다”며 부러워했다고 전한다. 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일화가 전해지는 데 그중 하나가 두보의 시를 평생에 걸쳐 삼천 번 읽었다고 한다. 그 탓인지 그의 시에는 두보의 영향이 짙게 배어있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이다. 동악 이안눌은 부산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이듬해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시를 지어 남겼다. 그것이 ‘사월 십오일’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 동래의 상황을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 해운대에 유람 갔다가 ‘등해운대(登海雲臺)’라는 시를 지었다. 石臺千尺勢凌雲 구름속 치솟는 듯 아스라이 臺는 높고 下瞰扶桑絶點氛 굽어보는 동녁바다 티 없이 맑고 맑다 海色連天碧無際 바다와 하늘빛은 가없이 푸른데, 白鷗飛去背斜曛 훨훨 나는 갈매기 등 넘어 타는 노을. 이 ‘등해운대(登海雲臺)’의 시비(詩碑)가 현재 해운대 바닷가에 있다. 뿐만 아니라 범어사에도 들려 주지스님인 혜정장로(惠晶長老)와 차를 나누기도 하였다. 그리고 범어사의 풍광을 내산록(萊山錄)에 20제 25수의 시를 남겼다. 어느 날 두 분이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다 혜정장로가 말하기를 “이런 풍경을 시로 지어 바위에 새기면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시를 한 수 짓지요”라고 제의하자, 동악은 “예, 그렇게 하지요”라고 답하고 지은 시가 ‘청룡암시’이다. 이 시가 범어사 경내 암벽(岩壁)에 각자(刻字)되어 전하고 있다. 동악은 시작(詩作)에 주력하여 문집에 4,379수라는 방대한 양의 시를 남겼다. “뜻을 얻으면 경제일세(經濟一世)하고, 뜻을 잃으면 은둔한거(隱遁閑居)한다”는 의지를 가지고 살았다. 동악은 권필과 함께 정철을 찾아가 배운 적이 있다. 권필은 ‘궁류시(宮柳詩)’를 지어 조정을 풍자, 비방하였다가 광해군의 분노를 사 해남으로 귀양 가다가 동대문 밖에서 행인들이 동정으로 주는 술을 폭음하고는 이튿날 44세로 죽었다. 정철이 조선의 주신(酒神)이었으니 이들도 술은 좀 마실 줄 알았던 것 같다. 그러나 마시다가 죽을 만큼 마셔서는 안 될 것이다. 동악이 정철에게 배운 인연 때문이었을까? 정철(鄭澈)의『사미인곡(思美人曲)』을 듣고 지은 절구(絶句) ‘문가(聞歌)’가 특히 애창되었다고 한다. 江頭誰唱美人辭 누구 강 언덕에서 미인곡을 노래하는가? 正是孤舟月落時 바로 외로운 배에 달이 지려는 때에. 惆悵戀君無限意 슬프도다! 임 그리는 마음 끝이 없는 줄 世間唯有女郞知 세상에서 오직 여인네만 알고 있으리! 그의 문학에 관한 재능은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서울 중구문화원에 의하면 그가 살던 곳에 ‘동악선생시단(東岳先生詩壇)’이라는 표시석이 있었다고 한다. 판돈령부사를 지낸 이안눌의 현손인 이주진이 동악의 시문학과 조상의 집터를 기념하기 위하여 암벽에 해서(諧書)로 ‘동악선생시단’이라고 여섯 글자를 각자(刻字)해 놓은 것이 최근까지 이안눌이 살았던 동국대학교 북문 가까운 암벽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각자는 1985년에 동국대학교에서 학교건물을 지으면서 암벽을 헐어내는 바람에 없어졌다가 다시 자연석에 새겨 놓았다고 하니 그의 시(詩)는 살아있는 것이다. 다리밟기 축제에 나갔다. 술이 너무 많이 취해 본의 아니게 소실을 얻게 된 동악의 가정사는 알 수 없고, 다만 동악은 이 사건으로 인해 평생 술을 건전하게 마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축제와 술, 그리고 잔치와 술”은 불가분의 관계인 것 같다. 내가 1977년 진주에 근무 할 때 ‘개천예술제’ 행사 중 하나인 유등축제에 학생들과 참여한 적이 있었다. 이때 본 ‘개천예술제’에서도 제일 많이 팔린 것이 아마 술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이 마시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현재는 축제가 체험위주로 바뀌면서 가족단위로 참가하기 때문에 옛날과 같은 그런 분위기는 많이 개선된 것 같다. 술과 풍류 조선시대 관리들의 술 마시는 대표적인 관행으로 봄에 교서관에서는 복숭아꽃 나무 아래에서 마시는 ‘홍도음(紅桃飮)’이 있고, 초여름에 예문관에서는 장미꽃 향을 맡으며 마시는 ‘장미음(薔薇飮)’이 있고, 한여름 성균관에서는 푸른 소나무 그늘에서 마셨던 ‘벽송음(碧松飮)’이라는 술자리가 있었다. 이들은 술안주로 오르는 물고기는 용, 닭은 봉이라고 부르고, 탁주는 현자, 청주는 성인이라고 부르면서 즐겼다. 이 현자(賢者)와 성인(聖人)은 이백의 월하독작(月下獨酌)에 등장하는 시어(詩語)들이다. 선비들의 음주가 좀은 유별나긴 하지만 현대와 완연하게 다른 음주문화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현대인들도 배낭에 술과 안주를 챙기고 산과 들을 찾아 소풍하면서 이렇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할 여유와 방법이다. 술을 마시는 문화는 예전과 현재는 많이 다르다. 왜 이렇게 변했을까? 아니 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산업사회가 가져온 결과이겠지만, 그것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 즉 새로운 음주문화를 만들지 못한 점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생활에 따라서 그들이 만들어내는 문화는 같을 수가 없다. 음주문화 역시 옛날과 고도로 발달한 정보화 사회에서의 음주문화는 당연히 같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옛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음주문화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선해야 될 것이 선인들의 음주문화를 먼저 알아야 한다. 선인들의 대표적인 음주문화가 음풍농월한 풍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사례를 만나기 전에 풍류가 무엇인지 학자들의 정의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풍류(風流)’의 사전적 의미는 먼저, 멋스럽고 풍치가 있는 일 또는 그렇게 노는 일이라 풀이하고 있으며 둘째, 대풍류, 줄풍류 따위의 관악 합주나 소편성의 관현악을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다. 또 이희승의(1982년 著) 국어대사전에는 첫째, 속된 일을 떠나서 풍치가 있고 멋들어지게 노는 일이라 했으며, 둘째는 운치(韻致)스러운 일 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풍류’는 시도 짓고, 노래도 하고, 술도 마시고, 춤도 추는 놀이를 일컫는 말로 나타난다. 이동영은 ‘풍류(風流)’라는 자의적 의미는 ‘바람이 흐르는 것’이다. 바람은 부는 것(blow)이고 물은 흐르는 것(flow)이기 때문에, 풍류라는 단어 속에는 ‘자유’, ‘자연스러움’, ‘변화’, ‘움직임’, ‘아름다움’ 등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이동영,『퇴계학보』, 1992, 41~42쪽) 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그리고 신은경 교수는 그의 저서『풍류』에서 “풍류는 노는 것이되,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어떤 현상이나 사물에 접하여 走馬看山 식으로 겉 외양만 훑고 지나가는 놀이가 아닌, 그 현상의 깊은 내면 혹은 본질까지 구극(究極)해 들어가 그 진수를 접하고자 하는 자세에 입각한 놀이(75쪽)”,이며 또 “어떤 일이건 간에 우주의 삼라만상의 본질을 드러내는 모든 현상에 몰입하여 자기를 잊어버리는 이른바 ‘망아(忘我)’, ‘몰아(沒我)’의 경지에 이르러 그 현상 내지는 사물의 본질과 하나가 되는 상태에 이르는 것(76쪽)” 이라고 풍류를 정의하였다. 풍류는 바람이 불고 물이 흐르는 것이므로 일단 막히면 안 된다. 그러므로 자유스러움이 우선되어야 한다. 다음은 그것과 화(化)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대상과 하나 되는 경지로 망아(忘我)이다. 그러니 제대로 풍류를 즐긴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런 의미를 생각하면서 어떤 삶을 산 사람들이 과연 풍류를 즐긴 사람이라고 하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고려의 문장가 백운 이규보는 유난히 봄날에 대한 시를 많이 남겼다. 그중 어느 봄날, 술에 취해 지은 ‘취가행(醉歌行)’이라는 시가 있다. 주필(走筆)이라고 하였다. 필시 술이 거나하게 취한 그가 단숨에 써내려갔을 것이다. “하늘이 내게 술 못 마시게 할 것이라면/ 아예 꽃과 버들 피어나게 하질 말아야지/ 꽃버들이 아리따운 이때 어이 안 마시리/ 봄은 나를 저버릴망정 나는 그리 못하리/ 잔 들고 봄 즐기니 봄 또한 좋아라/ 취하여 손을 휘두르며 동풍(東風)에 춤추네/ 꽃 또한 웃는 얼굴로 아양 떨고/ 버들 또한 찌푸린 눈썹 펴는구나.”라고 읊었으며, 그는 또 봄날의 여러 가지 느낌을 읊은 ‘춘일잡언(春日雜言)’ 둘째 연에서 “꽃은 나를 향해 붉은 마음 바치는 듯/ 버들은 누굴 맞기에 청안(靑眼)을 들었는가?”라고 노래했으니 봄은 꽃으로만 오는 것이 아닌 것이다. 백안(白眼)이란 업신여기거나 냉대하여 눈을 흘겨보는 것이요, 청안이란 좋은 마음으로 남을 보는 눈이니 반갑게 맞이하는 것이다. 물오른 버드나무 가지가 흩날리는 것이 마치 반가운 손짓이라도 하는 양 느꼈던 것이다(이지누,『한강을 걷다』, 경향신문인터넷판, 2007-04-06). 이런 봄 속에 영혼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것이 시이고 술이다. 조선의 이정보도 풍류를 즐긴 사람 중에 한 분이다. “꽃 피면 달 생각하고 달 밝으면 술 생각하고/ 꽃 피자 달 밝자 술 얻으면 벗 생각하네/ 언제면 꽃 아래 벗 데리고 완월장취(玩月長醉) 하려나.”고 읊었으니 술과 짝했던 것은 꽃이고 달이고 벗이다. 이들과 함께하는 것 자체가 풍류이다. 도연명은 “가을 국화 빛이 곱기도 하여[秋菊有佳色]/ 이슬 젖은 꽃잎을 따서[裛露掇其英]/ 수심 잊는 술에 띄워 마시네[汎此忘憂物]/ 속세 버린 심정 더욱 깊어라[遠我遺世情](하략)”라고 읊었는데, 이것은 음주시 <7>에 있는 시구(詩句)절들이다. 국화를 따서 술잔에다 띄워 마신다고 하였는데 이런 풍류는 문인들이 즐겨했던 것으로 보인다. 반악(潘岳, 247~300)이라는 시인도 추국부(秋菊賦)에서 “맑은 술에 꽃잎을 띄운다[汎流英於淸醴(범류영어청예)]”라고 하였으니 말이다. 이와 같이 술에 꽃송이나 국화꽃을 띄워서 마시는 풍류는 한대(漢代)부터 있었다고 한다. 이보다 더 정확하게 풍류적인 삶을 산 사람이 맹호연이었던 것 같다. 이것은 대시인 이백이 그의 시 ‘증맹호연(贈孟浩然)’에서 밝혀놓았다. 吾愛孟夫子 나는 맹부자를 좋아하노니, 風流天下聞 그의 풍류는 천하에 알려졌다네. 紅顔棄軒冕 젊어서는 벼슬을 버리고, 白首臥松雲 이제 흰머리가 되어 송운 속에 누웠도다. 醉月頻中聖 달에 취해 자주 술을 마시고, 迷花不事君 꽃에 혹해 임금을 섬기지 않았네. 高山安可仰 그 높은 산을 어찌 우러러 보리오, 徒此揖淸芬 다만 여기서 그 맑은 향기에 절할 뿐이로다. 이백이 맹호연을 좋아하는 이유를 그의 풍류 때문이라고 했다. 3구부터 풍류가 구체적으로 나온다. 벼슬에 마음을 두지 않는 것이 첫째이고, 자연을 벗 삼아 자유분방한 삶의 태도가 두 번째이다. 전체적으로 진대(晋代)의 풍류상을 이어받은듯하면서도 담백청아(淡白淸雅)한 기풍을 보인다는 점에서 호화로운 석승의 풍류―석승의 별장 금곡원에 손님들을 초대하여 실컷 마시고 시를 짓지 못하면 세말의 술의 마시게 했다는 고사에서 그의 풍류가 유래(필자 주)―와도 구분되고 도가(道家) 기품의 죽림칠현(竹林七賢)과도 구분(신은경 저,『풍류』, 보고사, 28쪽)되니 맹호연의 풍류를 이백이 좋아했던 것이다. 이런 풍류는 지금이야 찾아볼 수 없다. 아니 그렇게 해서는 먹고 살지 못한다. 그래서 왁자지껄한 술집에서 빨리 마셔야 하고, 빨리 취해야 하니 폭탄주, 원자탄주가 등장한다. 이렇게 취하다보니 취중 고성에 정신이 없을 지경이니 풍류고 품위고 있을 턱이 없다. 하지만 마냥 고성(高聲) 가무(歌舞)만 할 것인가? 이제는 서서히 폭음하는 문화에서 즐기는 음주문화로 바뀌어야 한다. 이것은 취하는 결과를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과 결과를 동시에 추구하는 문화로 바뀌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런 즐기는 문화의 배경으로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삼천리(三千里) 금수강산(錦繡江山)이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자연은 계절에 따라 분명하게 변하기 때문에 이 변화가 연출하는 자연 앞에서 누구라도 자연을 멋스럽게 즐겨보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이렇게 자연 그 자체를 나름대로 독특하게 즐기는 것이『풍류(風流)』다. 어려울지 아니면 시간이 좀 걸릴지 모르지만 이런 음주분위기를 만들어가야 음주문화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될 수 있고, 그것들이 축적될 때 세상사는 맛이 생긴다. 술과 품위 동악선생은 젊은 날 이후 술을 어떻게 마셨을까? 기록을 찾지 못해 알 수 없지만 그의 시조 ‘천지로 장막 삼고’를 보면 품위 있고 격이 있게 마시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 시조에서 인생을 즐기는 풍류가 녹아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술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 천지(天地)로 장막(帳幕) 삼고 일월(日月)로 등촉(燈燭) 삼아 북해수(北海水) 휘어다가 주준(酒樽)에 대어두고 남극(南極)의 노인성(老人星) 대하여 늙을 뉘를 모르리라. 하늘과 땅, 해와 달을 장막과 등촉으로 삼을 만한 넓고 큰 도량이 나타나 있다. 북해에 대하여 남극으로 대구를 썼고, 술통을 앞에 놓고 늙어가는 것도 잊으며 살고 싶다는 염원을 담은 것 같기도 하고,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마르지 않는 술통을 앞에 놓고 사소한 일에 구애받고 싶지 않음을 노래한 것 같기도 한 것 같다. 공통점은 술과 인생이다. 술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면서 세월을 잊고 싶어하는 염원이 담은 것 같다. 이런 것을 보면 술과 늙어가는 인생에 대한 회한(悔恨)이 있었던 것 같다. 고금을 통해 풍류뿐만 아니라 가장 품위 있게 술을 마신 사람은 도연명(陶淵明, 365~427)과 이규보(李奎報)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이 분들은 모두 술로 인한 폐해가 없었으며 술과 시, 인생에 있어서 도(道)를 통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도연명의 경우 소동파가 이런 사실을 증언했다. 그의 음주시 <5>에 “採菊東籬下(채국동리하) 悠然見南山(유연견남산), 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꽃 따며 편안히 남산을 바라본다”와 <7>의 “嘯傲束軒下(소오속헌하) 聊復得此生(료부득차생)”, <11>의 “客養千金軀(객양천금구) 臨化消其寶(임화소기보) 천금이나 보배로 육신을 가꾸어도, 죽으면 함께 사라져 없어지느라”라는 구절에 대해 소동파(1036~1101)는 “도(道)를 터득한 경지의 시구”라고 격찬하였으며, 또 “客養千金軀(객양천금구) 臨化消其寶(임화소기보)”라는 구절에 대해서 양계초(1873~1929)는 7천권의 대장경에 맞먹는 명언이라고 했다(장기근 편저,『도연명』, 태종출판사, 1985, 155쪽) 이런 경지에 든 사람이 술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음주시(飮酒詩)를 보면 술을 천상의 음식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여러 수가 전하는 음주시 중 <7>에 망우물(忘憂物)―시름을 잊게 해주는 물건 즉 술―이라는 시어(詩語)가 나오는데 이것이 술의 별칭이 되었다. 다음이 도연명의 음주시 <7>이다. 秋菊有佳色 가을 국화 빛이 곱기도 하여 裛露掇其英 이슬 젖은 꽃잎을 따서 汎此忘憂物 수심 잊는 술에 띄워 마시네 遠我遺世情 속세 버린 심정 더욱 깊어라 一觴雖獨進 술잔 하나로 홀로 마시다 쉬하니 杯盡壺自傾 빈 술 단지와 더불어 쓰러지누나 日入群動息 해도 지고 만물이 쉴 무렵에 歸鳥趨林鳴 숲을 향해 울며 돌아오는 새 嘯傲束軒下 동쪽 창 아래에 후련한 휘파람 聊復得此生 새삼 참 삶을 되찾은 듯하여라 술에 도를 통한 사람이 지은 시어가 술의 별칭 망우물(忘憂物)이 되어 후인들이 사용하고 있으니 술이라고 하는 것 보다 아름답지 않은가? 또 산사(山寺)에서 이르는 반야탕(般若湯) 또는 곡차(穀茶)라고 부르는 것도 기막힌 멋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가난한 선비는 맹물을 끓인 백탕(白湯)을 마시고도 취하는 여유를 즐길 줄 알았으니 술을 진정 멋으로 혹은 품위 있게 마신 것이다. 술에 관한 일화를 남긴 많은 선인들처럼 술을 마실 수 있으면 좋겠지만, 고도의 산업사회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왕에 마시는 술이라면 보다 멋있고, 맛있게 그리고 품위 있게 마시는 것도 중요할 것 같다. 현실적으로 가장 멋지게 술을 마시는 방법은 술에 관련해서 통용되는 관습(慣習)과 문화(文化)를 잘 이해해고 지키는 것이다. 예로 국제적 행사나 외국의 귀빈을 접대하거나, 혹여 자리를 같이하는 경우에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주법(酒法)을 지키는 것이 문화국민으로서 기본적인 자세일 것이다. 이것은 와인을 한 잔 마시는데 소주 마시듯이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와인은 와인 주법으로 마셔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른들과 마실 때, 친구들과 마실 때, 그리고 동료와 마실 때 등 통상적인 주법(酒法)에 맞게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법이란 규범의 체계일 뿐만 아니라 행위의 체계로 만인이 불편함, 불쾌감 없이 살 수 있도록 체계화 한 것이다. 그래서 다소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이 제약을 감수할 때 남에게 불편함, 불쾌감을 주지 않는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법으로 제약하는 것보다 스스로 배려하는 것이다. 되샛과의 겨울 철새인 되새는 수 만 마리가 동시에 날아 군무(群舞)를 펼쳐도 부딪쳐 떨어지는 놈이 한 마리도 없다고 한다. 이것이 무엇인가? 바로 이웃을 배려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남을 배려하는 마음들이 충만할 때 선진음주문화는 자연스럽게 형성될 것이다. 이것이 어디 음주만 그러할까? 마시고 먹는 다는 행위가 모두 비슷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어떻게 먹고 마시는가에 따라 느끼는 행복감 즉 삶의 질은 많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관습 내지는 보편화된 주법(酒法)을 지키면서 여기에 배려와 풍류(風流)를 더해 마실 수 있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일 것이다. 이런 습관이 몸에 익숙하여 생활화 되어야 할 것이다. 채근담(菜根譚) 한 구절을 읽으며 글을 마친다. “꽃은 반만 피었을 때 보고[花看半開(화간반개)]/ 술은 적당하게 취하도록 마시면[酒飮微醉(주음미취)]/ 그 가운데 아름다운 멋이 있다[此中大有佳趣(차중대유가취)].” 2011년 11월 27일 토요일을 반납한 조주(造酒)연수를 마치고 [참고] 장기근 편저,『도연명』, 태종출판사, 1985, 신은경 저, 『풍류』, 보고사, 2006. 이동영,『퇴계학보』, 1992. 민덕기,『와인 및 칵테일』, 부산광역시교육연수원, 2011. 이지누,『한강을 걷다』, 경향신문 인터넷판, 2007-04-06 이외수 외 저 『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