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장 어수룩하게 다스리면
기정(其政)이 민민(悶悶)하면, 기민(其民)이 순순(淳淳)하고, 기정(其政)이 찰찰(察察)하면, 기민(其民)이 결결(缺缺)이니라。화혜(禍兮)여 복소의(福所倚)요, 복혜(福兮)여 화소복(禍所伏)이니 숙지기극(孰知其極)이리요? 기무정야(其無正耶)로다。정복위기(正復爲奇)하고, 선복위요(善復爲妖)하니, 인지미야(人之迷也)여, 기일(其日)이 고구의(固久矣)로다。시이(是以)로 성인(聖人)은 방이불할(方而不割)하고, 렴이불귀(廉而不劌)하고, 직이불사(直而不肆)하고, 광이불요(光而不燿)니라.
민(悶)/번민할 민, 어둡다 순(淳)/순박할 순 찰(察)/살필 찰, 조사하다 결(缺)/이그러 질 결, 모자라다 의(倚)/의지할 의, 치우치다 복(伏)/엎드릴 복, 숨다 숙(孰)/누구 숙 극(極)/다할 극 야(耶)/어조사 야, 사(邪) 기(奇)/기이할 기, 삐뚤어지다 요(妖)/아리따울 요, 요망하다 고(固)/굳을 고, 단단하다 방(方)/모 방, 반듯하다 할(割)/나눌 할, 쪼개다 염(廉)/청렴할 염(렴) 귀(劌)/상처입힐 귀 사(肆)/방자할 사 요(耀)/빛날 요
그 다스림이 어리숙하면 백성들이 순박하고 그 다스림이 꼼꼼하면 백성들이 이지러진다. 화여! 복이 너에게 의지하는구나. 복이여! 화가 네 속에 엎드려 있구나. 누가 그 끝을 알리요? 바름도 그름도 따로 없구나. 바름은 다시 삐뚤어짐이 되고, 착함은 다시 요망함이 되니 사람의 미혹됨이여! 참으로 단단하고 오래되었구나. 이로써 성인은 반듯하되 나누지 않고, 청렴하되 상처를 입히지 않고, 곧되 방자하지 않고, 빛나되 빛을 드러내지 않는다.
요즘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이 민간인과 청치인들에 대한 불법사찰로 홍역을 치루고 있다.
이 사건을 수사한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은 2010. 8. 11, 민간인 김종익 씨를 사찰한 이인규 전 지원관과 김모 전 공직윤리지원관실 점검1팀장을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속하고 점검1팀 팀원 원모씨를 불구속 기소했다. 또 총리실이 수사의뢰한 4명 가운데 이모 전 조사관에 대해서는 민간인 불법사찰에 직접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돼 무혐의로 불기소 처분했다. 검찰이 이번 사건을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단독 범행으로 결론을 내고, 검찰수사의 핵심이었던 이른바 '윗선 보고' 의혹 규명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민주당 등 야권은 ‘몸통은 빠진 꼬리만 자른 수사'라며 국정조사와 특검을 촉구했다.
수사결과가 발표되자 한나라당 일부에서도 거센 비난이 쏟아졌다. 국가정보원 등으로부터 부인과 자신까지 사찰을 당한 것으로 알려진 정두언 최고위원은 "검찰이 이번 사건의 실체를 밝히지 않고 있는 것은 출세에 눈이 먼 일부 검찰 간부들 때문"이라며 검찰이 사건을 적당히 덮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의원은 "공직윤리지원관실이 2천여명을 사찰했다는 의혹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검찰이 의도적으로 몸통을 수사하지 않고 있다", "지원관실의 컴퓨터 하드디스크 파기는 범죄를 숨기기 위해 국가기관의 공문서를 없앤 국기문란행위로 이인규 등 몇몇 개인 차원에서 이뤄질 수 있는 아니다. 누가 그랬는지, 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분명하게 밝혀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 사건은 이 정부가 나라를 지나치게 꼼꼼히 다스리려고 한 결과 중 하나라고 보여진다. MB정부가 들어서면서 이 강토와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들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 법절차를 무시하고 밀어붙이기 행정과 불법 사찰, 규제가 난무하고 있다. 이번 민간인불법사찰 건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비난이 높다. 하지만 여전히 이 정부와 검찰은 모르쇠로 무능과 뻔뻔함을 드러내고 있다.
“기정(其政)이 민민(悶悶)하면, 기민(其民)이 순순(淳淳)하고, 기정(其政)이 찰찰(察察)하면, 기민(其民)이 결결(缺缺)이라”는 노자할아버지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 다스림이 어리숙하면 백성들이 순박하고 그 다스림이 꼼꼼하면 백성들이 이지러진다”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무었인가?. 한나라를 경영하는 국가 지도자가 대범하게 국가의 대사를 바르게 끌어가야 하는데 전념해야지 사소한 일에까지 일일이 간섭하고 챙긴다면 그것이야 말로 여기서 말하는 찰찰(察察)인 것이다. 그러니 민민(悶悶)하다는 것은 백성들이 그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제 할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모습을 형상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노자 17장에 “태상(太上)은 하지유지(下知有之)하고, 기차(其次)는 친이예지(親而譽之)하고, 기차(其次)는 외지(畏之)하고, 기차(其次)는 모지(侮之)니라”람 말이 있다. 이 말은 ‘백성을 다스리는 지도자로는 백성들이 그가 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인 지도자가 최상이고, 백성들이 가까이 여겨 받드는 지도자가 그 다음이다.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지도자는 그 다음이며, 백성들이 경멸하면 최하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이다.
기정(其政)을 민민(悶悶)하여 기민(其民)이 순순(淳淳)하게 하는 지도자는 위에서 열거한 지도자 중 백성들이 하지유지(下知有之)하거나 적어도 친이예지(親而譽之)하는 지도자를 말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렇다면 기정(其政)이 찰찰(察察)하여 기민(其民)을 결결(缺缺)하게 만드는 지도자란 백성이 외지(畏之)하거나 모지(侮之)하는 지도자일 밖에!
태상(太上)을 왜 하지유지(下知有之)라 하는가? 세상이 태평성대(太平聖代)요, 생활은 넉넉하여 근심이 없으니 구태여 다스리는 자가 누군지 백성들은 관심조차 갖지 않는다. 지도자도 시시콜콜 세상사에 관여하지 않는다. 세상이 저절로 질서 잡혀 돌아가기 때문이다. 혹 조금 삐꺽거리고 어긋난다고 할지라도 무리하게 억지로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다툼이나 시비가 일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 구절을 읽어보자. 화혜(禍兮)여 복소의(福所倚)요, 복혜(福兮)여 화소복(禍所伏)이니 숙지기극(孰知其極)이리요? 기무정야(其無正耶)로다. 화(禍)여! 복(福)이 너에게 의지하는구나. 복(福)이여! 화(禍)가 네 속에 엎드려 있구나. 누가 그 끝을 알리요? 바름도 그름도 따로 없구나.
화와 복은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화와 복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붙어 다닌다. 화복상수(禍福相隨), 화복상전(禍福相轉)인 것이다. 화와 복은 서로 붙어 다니며, 힘이 다하면 그 자리를 바꾸게 된다. 복은 화속에 엎드려 있고 화는 복에 기대고 있으니 어느 한쪽을 잡았다는 것은 다른 한쪽마저 잡은 것이 된다. 둘 중 어느 한쪽만 취하고 다른 쪽은 버릴 수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중 한편인 복만 구한다. 복의 끝이 어딘 줄도 모르고 복과 화가 전혀 다른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에 대해 노자 할아버지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신다. 바름과 그름이 따로 없는 것처럼 화와 복이 따로 없다는 것이다.
인간사(人間事) 새옹지마(塞翁之馬)란 말이 있다. 복인 것 같은데 화요, 화인 것 같은데 복이고 복인 것 같은데 화란 말이다. 새옹지마(塞翁之馬)에 얽힌 옛이야기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중국 국경 근처에 늙은이가 살고 있었는데, 그가 기르던 말이 국경을 넘어 오랑캐 족이 사는 곳으로 넘어가 버렸다. 동네 사람들이 이를 보고 위로하자 늙은이는 '이게 복을 가져 올지 모른다'면서 낙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몇 달 후 이 말이 또 다른 말 한 마리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에 동네 사람들이 축하를 하자 늙은이가 '이게 화를 가져올지 모른다'며 기뻐하지 않았다. 그런데 집에 있던 아들이 이 말을 타고 놀다가 말에서 떨어져 그만 다리가 부러져 장애인이 되고 말았다. 이에 동네 사람들이 위로를 하자 늙은이는 '이게 복을 가져 올지 모른다'면서 낙심하지 않았다. 세월이 지나 변방의 오랑캐와 전쟁이 나서 젊은이를 강제 징집하게 되었는데 이 늙은이의 아들은 장애인이라 전쟁에 나가지 않고 같이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이치로 보니 노자 할아버지의 눈에는 “정복위기(正復爲奇)하고, 선복위요(善復爲妖)하니, 인지미야(人之迷也)여, 기일(其日)이 고구의(固久矣)”라는 것이 훤히 보일밖에. “바름은 다시 삐뚤어짐이 되고, 착함은 다시 요망함이 되니 사람의 미혹됨이여! 참으로 단단하고 오래되었구나!”란 탄식이 심금을 울린다. 사람이 미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은 선과 악, 화와 복이라는 이분법적 관념의 틀 안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그 틀을 벗어나지 않는 한 그 단단하고 오래된 미혹의 껍질을 깰 수 없다. 노자 할아버지는 바름도 그름도 따로 없는데[其無正耶]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은 사람들이 그 끝을 알지 못하기 때문[孰知其極]이라고 본다. 도(道)의 자리에서 보면 그것이 서로 다르지 아니한 것을 쉽게 알 수 있는데, 인간들은 미망(迷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바름은 삐뚤어짐이 되고, 착함은 다시 요망함이 되는 이치를 깨우쳐야 한다.
이 이치를 깨치고 나면 ‘반듯하되 나누지 않고, 청렴하되 상처를 입히지 않고, 곧되 방자하지 않고, 빛나되 빛을 드러내지 않는[聖人, 方而不割, 廉而不劌, 直而不肆, 光而不燿]’성인의 삶을 본받을 수 있다. 성인은 자신은 어디 하나 구겨진데 없이 반듯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반듯함으로 남을 가르거나 쪼개지 않는다. 자신의 잣대로 상대를 판단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렴이불귀(廉而不劌)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깨끗하다고 해서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인은 모든 더러움까지 포용하는 깨끗함을 지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고, 직이불사(直而不肆)하고, 광이불요(光而不燿)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곧되 방자하지 않고, 빛나되 빛을 드러내지 않는 삶이 성인의 삶인 것이다.
이제 다시 한 번 “기정(其政)이 민민(悶悶)하면, 기민(其民)이 순순(淳淳)하고, 기정(其政)이 찰찰(察察)하면, 기민(其民)이 결결(缺缺)”이라는 첫 구절을 생각해 보자. 과연 태평성세를 끌어갈 지도자의 덕목은 무엇인가? 옳고 그름이 따로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면 도의 자리에 서려고 하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드러난 현상이 아닌 보이지 않는 근원을 꿰뚫어 볼 수 있을 때, 자기의 고집과 이해관계를 떠나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공권력을 남용하여 민간인을 사찰하고 자신의 정적들을 사찰하는 웃지 못 할 일들이 더 이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