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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4명이 공장가는 길에 점심으로 장어덮밥 정식을 먹었다.
깔끔한 식당에 장어덮밥은 우리나라 뚝배기 비슷한 그릇에 밥을 넣고 밥 위에 장어 찜을 덮었다. 또 장어와 회로 초밥을 만들어 정갈 나게 만들어 우리 입맛에 맞게 우리나라 일식집에 온 것 같이 잘 먹었다.
일본사람들은 장어구이를 좋아하고 일본에서는 장어요리가 비싸다는데 우리한테 신경을 쓴 것 같다.
오후에 나고야 공장에 가서는 공장 생산과장이 공장을 직접 안내하고 공정과정과 이칠오를 확인시켜주었다.
회의실에서는 공장장이 공장 브리핑에 참여를 하고 나는 Tipping load의 미흡한 명기를 지적하니 기술 과장이 설명을 하여준다.
공장은 훌 가동을 하고 적재장에는 생산된 크로라 크레인이 꽉 차서 있다.
일본은 아베 노믹스 정책으로 경제는 엔화 절하로 지금 수출 물량을 대느라고 정신이 없다.
지금 주문 오더를 하면 제일 빨라야 6개월 이후에나 가능 하다.
우리나라는 IMF 환란 이후 생산되던 크레인을 중단하여 지금은 크레인 생산이 전무하다.
삼성중공업이 볼보에 넘어가며 볼보에서는 포크레인만 생산을 하고 크레인 생산 라인은 없애 버렸다.
우리나라의 정치가 경제 발목잡기로 경제가 뒷걸을 치는 것을 보면 일본이 부럽기만 하다.
지금 일본은 20년 침체기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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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접견실에서 간부들과 같이 환영 기념사진을 찍고 공장을 나와 나고야 중심지로 같다.
우리 4명은 나고야 시 중심가의 제일 큰 게 전문 식당으로 갔다.
게를 가지고 할 수 있는 각가지 요리가 나온다.
게가 우리나라에서 선호하는 킹크랩이 아니다.
일본의 전통주 사께와 게 요리를 마음 놓고 먹으니 내가 졸부가 된 느낌이다.
나 같은 서민은 일본의 고급 요릿집에서 마음 놓고 요리를 시켜먹는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다.
식당에서 게를 가지고 개발한 게장 게젓 게 과자 등 여러 가지를 부수적으로 판다.
동경 본점 매니저가 계산하고 게젓도 덤으로 사 준다.
일행은 4명이 같이 붙어 다니는 것이다.
서울의 무역 회사 부장이나 스미토모 본사 일본 직원이나 둘 다 우리 부부를 안내하는 것이다.
나고야 메리어트 호텔 스위트룸을 잡어주니 일반 객실과는 달리 소모품이 여러 가지가 있다.
화장실에도 화장용품이 여러 가지로 많은데 알지를 못해서 쓰지를 못한다.
아침 식사도 스위트룸 손님용 식당이 별도로 있다.
일반 서민이 고급손님 대접을 받으니 잠방이에 넥타이 맨 것같이 어색한 것이 익숙하지가 않다.
서울의 부장이나 일본 스미토모 아시아 팀장이나 같은 호텔을 쓰지 않고 각자 다른 방을 택한다.
일본 스미토모 초청이라 모든 부담을 스미토모에서 하는 줄 알았더니 호텔을 우리 부부 것만 부담을 하고 서울 무역부장은 자기가 부담하는 것 같다.
얼떨결에 상류층 대우를 받고 하룻밤이 지났다.
나고야 메리어트 호텔은 나고야 역위에 세워진 52층 건물로 36층에 호텔 라운지가 있고 라운지 이하는 백화점이나 마트 상점 사무실이다.
36층 이상이 호텔이라 호텔방에서 시내를 보면 조망이 관망대 같이 넓게 보인다.
아침 식사 후에 백화점에서 아이쇼핑을 하고 역 앞 네거리에서 인증샾을 찍으니 점심이 되었다.
점심에 메리트 호텔에 있는 소고기 철판구이 집으로 4명이 같다.
철판구이를 우리나라 같이 불길을 내며 요란하게 하지 않고 차분히 철판에다 소고기를 구워낸다.
나는 웰던으로 시켰다.
우리가 물어보면 한국 무역부장이 일본말이나 영어로 통역을 하고 일본 직원이 영어나 일어로 대답을 하는 식이다.
점심 식사 후에 4명이 나고야에서 2시간 이상 기차로 달려 게로 온천에 도착하였다.
우리 부부를 위하여 특별히 온천 여행을 시켜주는 것이다.
90년대 초에 일본에 와서 신간센 고속 열차를 탔는데 객실마다 자막이 나오고 단편 뉴스가 자막으로 흐르는 것을 보고 기차에서도 뉴스를 볼 수 있다는 것에 감동을 하였다.
일본 열차는 지금도 그때와 별 차이 없이 스크린에 자막이 나온다.
한국에서는 지금 기차에서 스크린 뉴스는 물론 버스에서도 모니터가 있어 영화까지 볼 수 있으니 한국은 전에 비해 눈부시게 발전을 한 것이다.
게로 역에 내려 천황도 다녀갔다는 수명관 온천호텔에 자리를 잡았다.
게로는 첩첩산중에 온천이 나와 계곡에 온천 호텔로 성업 중이다.
수명관 호텔에서 제일 좋은 VIP 룸을 우리 부부에게 배정해 주었다.
다다미 방인데 매우 크고 옆에는 응접실 겸 식사도 할 수 있는 방을 미닫이로 구분하였다.
호텔 안내 팜프렛에 우리가 묵은 방이 제일 앞에 VIP 룸으로 나와 있는 것을 보니 호텔에서도 자랑하는 방인 것 같다.
베란다가 안과 밖에 둘이 있으며 콘도같이 식당도 있고 세면실 화장실 욕실이 구분되어 별도로 있다.
우리 집보다도 큰 호텔방에 들어오니 기분이 상승되어 우리가 정말 대접을 받는 구나하는 느낌이 든다.
방 청소는 퇴실 하거나 하룻밤을 자면 호텔에서 하기 마련인데 여기에서는 우리가 밖에 나갔다 오면 들어와서 정리하고 간 흔적이 보인다.
미안해서 나갈 때 옷도 막 벗어 놓을 수가 없다.
후론트를 지나갈 때면 직원들이 일본 특유의 미소와 상냥함으로 우리를 대한다.
접견실에 우리 부부가 앉아 있는데도 호텔 직원이 유독 우리 부부에게 아는 체를 하며 인사를 한다.
나중에서야 직원들이 우리가 VIP 실에 있다는 것을 알고 신경 쓴다는 것을 감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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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욕을 하고 호텔안의 대중식당이 아니라 접대용 식당으로 저녁을 하러 갔다.
우리 일행 4명이 다시 모여 일본식 코스 요리로 저녁을 하였다.
깔끔하게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기교를 다 부려 정갈하게 조금씩 나오는 요리는 배가 불러도 계속 젓가락이 간다.
시간도 여유롭겠다, 흥취도 나겠다, 일본 술 사께로 반주를 해 가며 원하는 만큼 담소를 해 가며 저녁식사를 하였다.
대화는 한국말 일본말 영어를 뒤섞으며 재주껏 의사 표현을 하는 것이다.
접대하는 웨이트레스는 기모노를 입은 노인 여자인데 눈치껏 음식을 나르며 일본말로 말하는데 상냥한 미소를 잃지 않는다.
속마음은 어떨지 몰라도 이들의 상냥함과 미소는 우리도 배워야 할 점이다.
온천에서의 하룻밤을 추억에 남게 보내고 게로 역으로 향하는데 호텔직원이 모두 나와 호텔 앞에서 배웅을 한다.
나고야에서 동경본사 아시아 팀장을 보내고 인천 국제공항 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에서 장비 취득세 5천, 부가세 1억3천 또 들어가야 할 돈이 얼마인가 계산 하니 머리가 복잡해 진다.
나는 이런 접대를 언제 또 받아 볼 수 있을까 하고 또 한번 망연히 기대 해 본다.
우리 부부가 같이 간 바람에 집사람에게 이번 여행으로 점수를 좀 딴 것 같다.
* 라오스여행
봄에 집사람과 동남아의 오지 라오스를 갔다 왔다.
전체 여행한 국가가 이번 여행으로 65개국이 됐다.
라오스
라오스는 바다가 없는 동남아의 내륙국이다.
동서로는 베트남과 태국에 둘러싸여있고 남으로는 캄보디아 북으로는 중국과 미얀마에 둘러싸여있는 사회주의 국가다.
경제적으로는 태국과 베트남에 의존해있으며 문화적으로는 태국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으며 캄보디아의 크메르 문화가 깊이 잔재하고 있다.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던 남지나에서 비엥티앙이 호지명 공산주의자에 의하여 함락되면서 프랑스의 통치는 막을 내리고 독립을 하게 되었다.
라오스의 수도 비엥티앙은 태국의 시골 도시 같은 느낌이 든다.
내가 중학교시절 동아일보 카툰에 프랑스군이 보트에 타고 보트가 반으로 부서지는 그림에 비엥티앙 함락 이라고 적은 제목이 생각이 나서 어느 때고 꼭 비엥티앙을 방문하여 역사의 흔적을 보고 싶었다.
호지명이 베트남의 영웅이라 비엥티앙도 베트남에 있는 항구로 알았는데 내륙의 라오스 수도다.
라오스의 관광은 개발된 지 얼마 안 되어 여행객이 별로 없을 줄 알았더니 라오스의 여행객은 동양인은 거의 한국인이 독차지 하고 있다.
유럽인은 동양의 오지 라오스의 방비엥이 배낭족의 동경의 대상이란다.
작년가을 꽃보다 청춘이라는 젊은이들의 라오스 여행기가 방영되면서 한국 관광객이 폭증한 모양이다.
수도 비엥티앙과 휴양의 도시 방비엥을 보는 여행이다.
비엥티앙 거리를 가면 태국에 온 느낌이 들고 특색이 있는 볼거리가 눈에 안 띤다.
아직 선진국의 때가 안 묻어 사람들은 소박하고 순진하다.
공산품이 없으며 농산물은 싸다.
산의 흙은 황토색이다 못해 빨갛다.
한국에서 보지 못하던 까만 생강이 많다.
방비엥은 휴양 도시답게 메콩강 상류의 일급수에서 카약을 하고 나무와 나무를 연결하여 와이어를 타고 가는 짚라인 등 관광에서 레저로 바뀌니 색다른 맛이 난다.
꽃보다 청춘에 나오는 블루라군은 조그만 냇물로 막상 와보면 그림같이 멋있지는 않다.
귀국 비행기에서 일어난 일이다.
라오스에서 출발하여 인천공항 상공까지는 잘 왔다.
인천공항에 안개가 끼었다고 상공을 30분 선회하더니 김포공항으로 가서 내린단다.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승객들이 내리려고 일어섰는데 모두 다시 앉으란다. 한 30분 기다리니 김포공항에 법무부 입출국 공무원이 없어서 다시 인천공항으로 가야 된단다.
비행기 이착륙이 사고가 제일 많이 나는 것인데 왜 탑승객을 내려주지 않고 회항하는지 알 수가 없다.
다시 김포공항에서 이륙을 하여 인천공항에 가니 다행히 안개는 걷치어 착륙을 할 수는 있었다.
밤 비행기를 타고 와서 아침 8시에 도착이 김포공항을 갔다 오는 바람에 12시가 다 되어 비행기에서 내리게 되었다.
졸린 눈을 비비고 집에 와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 장비수입 고생
장비 렌탈을 하기 위하여 크로라 크레인 275톤(SCX2800-2)을 일본에서 수입하여 5개월 동안 세워 놓으며 생고생을 하고 몸만 축내고 경비만 쏟아 넣는 호된 신고식을 하였다.
수입장비 275 고전
장비를 일본에서 수입하기로 하고 장비 확인하러 집사람과 5월에 일본에 초청되어 갔다 온 것이 즐거움의 마지막인 것 같다.
6월 말일에 275톤 크로라 크레인이 평택 항에 입항하여 7월 1일 하역을 하고 평택항 보세구역에 보관을 하였다.
작업현장에 장비를 투입하려고 하니 입항 예정일인 6월 25일이 지나 예약된 공사현장이 내 장비를 기다리지 못하고 다른 장비를 투입하였다.
7월 초에 여기저기 이야기 하다 다른 업체가 투입되고 시간은 흘러 한달이 되니 평택항 보관료가 천만 원이나 되어 일단 주기장을 선택하여 주기장으로 운반하였다.
한 달 전 장비 감정사가 평택 항에서 이동하여 장비조립을 하여야 감정을 한다고 한다.
운반비만 추레라가 15대가 필요한데 현장으로 투입하면 될 것을 쓸데없이 운반비만 이중으로 들어가게 만든다고 반대 하였는데 일자리는 못 잡고 평택 항에 보관료만 내고 주기장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장비 이동하는데 30톤 추레라가 15대나 되니 이동하여 하차 하는 데만 하루 종일 걸린다.
땡볕에 작업을 하려니 장난이 아니다.
감정사가 감정을 하여 은행에서 유산스 결재를 하는데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 엔화가 하루에 15엔씩 오른다.
중국발 경제 악재에다가 미국발 금리인상이 예상되며 910원하던 엔화가 순식간에 970원이 되어 급하게 결제를 하였다.
은행과 나의 예상치보다 70엥 차이가 나니 장비가 일화 134,000,000엔이라 약 1억원 이라는 환차손이 생겨 가슴앓이가 생겼다.
해상 운송료 5천 취득세외 5천 부가세 1억3천등 현금 동원이 만만치 않다.
장비는 서 있고 돈은 계속 나가고 나의 감정이 서서히 날카로워 지기 시작하였다.
평택 고덕단지에 삼성전자 공장을 신축하는데 한 2년 공사를 수주했다는 업체와 잘 협의가 되었다.
9월에 장비투입하기로 했는데 오사장이 치고 들어왔다.
수주업체는 미안하다며 10월에 내 장비를 꼭 투입하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이때서부터 울화가 슬슬 치밀어 오기 시작하였다.
275톤 장비가 한국에 많이 수입되어 과잉 상태라 사용료가 계속 하향되며 그래도 놀고 있는 장비가 많다.
처음에 계약했던 150톤을 수입했으면 놀지는 않고 계속 일을 할 순 있었다.
장기 안목으로 보아 275톤을 수입했더니 초반부터 말썽이다.
동종업체에 여기저기 전화를 해 본다.
통영에 1년 기사 없이 가라고 하여 새 장비라 우리 기사를 보내야 된다고 안가고 3개월짜리 가라고 하는데 2년짜리에 미련이 있어 캔슬하고 투입 시기가 언제가 될지 예측도 못하고 마냥 기다리는 형국이다.
기다리다 지처 이제 1개월도 좋으니 공사현장이 나오면 움직이려고 결심을 하니 아무데도 나타나지 않는다.
결국은 사무실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만 보내고 있다.
감나무 밑에서 입 벌기고 연시 떨어지기 기다리는 꼴이니 얼마나 측은 하고 가소로운가.
고덕 삼성의 투입시기가 현장사정에 의하여 예측할 수 없으니 1개월 반이라도 다른 곳에서 일을 하고 삼성현장에 투입하겠다고 계약서를 쓰고 나오는데 4개월짜리 창원을 가서 겨울을 나라고 하는 것을 과감히 물리쳤다.
이것이 마지막 실수인 것 같다.
10월이 다가고 11월 초에 투입하기로 한 약속이 연기 됐다고 한다.
수주업체에 불만을 토로 하니 그럼 다른데 가도 좋다고 한다.
처음부터 그런 줄 알았으면 이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당하고 보니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수입하고 4개월간 기다리다 닭 쫓던 개식으로 하늘만 쳐다본다,
더구나 창원 4개월짜리 작업은 다른 장비가 투입 됐다는 소리를 듣고는 나의 명줄이 끊어지는 기분이다.
장비 수입하고부터 일이 꼬여 부아가 나기 시작한 것이 갈수록 풀리지 않아 울화가 쌓이기 시작하였다.
울화를 참고 참아 쌓인 것이 10월 말로 터져 봇물 터지듯 한번에 몰아닥치니 온 몸에 맥이 확 풀린다.
맥이 풀리니 몸이 척 늘어지고 흐느적거리며 몸의 이곳저곳에서 이상 징후가 막 나타난다.
멀쩡하던 오른쪽 가슴에 담이 온다, 머리로 올라가던 신경에 통증이 온다, 눈으로 가던 신경도 통증이 온다, 멀쩡한 이가 흔들린다, 잇몸이 붓고 아프다, 팔 다리에 힘이 없고 다리가 떨린다, 찬바람을 별안간 쏘이니 온몸이 떨린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증이 나타난다.
잠잘 때는 장비가 들어 갈수 있었는데 못간일, 이렇게 하면 될 수 있었는데 못한 일등 상상을 하며 잠을 설친다.
최종적으로 이 사업을 접어야 하나 하고 고민도 하였다.
설친 몸으로 나오면 하루 종일 정신이 멍해지고, 새벽 일찍 일어나면 못 들어간 일을 또 상상하고, 내 자신의 순발력과 결단력이 부족한 것을 자책도 해 본다.
잠이 안와 뒤척이며 책을 보면 흥미도 없다.
몸을 축내기 위하여 별의별 징후가 다 나타난다.
순식간에 나타난 이런 징후를 그 누구도 고칠 수는 없다.
단지 내가 결심하고 내 정신력으로 고처야 된다.
내가 내 자신을 못 고친다면 우리 집안에 큰 문제가 생긴다.
큰아들은 캐나다에서 자리 잡고 오순도순 살아가고 작은 아들은 수원에서 남부럽지 않게 자리 잡고 있다.
집사람은 친구들을 만나고 주민쎈타에 가서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부모가 자식한테 불안을 안겨 주어서는 안 된다.
내가 우리 집안의 행복을 깰 수는 없다.
사업을 망치고 건강을 해쳤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하여 먼저 내 자신의 건강을 추슬러야 한다.
친구들이 그 나이에 무슨 장비를 사느냐고 핀잔을 주며 그 돈 가지고 집에서 조용히 먹고 살 으라는 조언도 뿌리치고 결심하여 수입한 장비인데 그냥 주저앉을 수는 없다.
집안의 평화를 위하여 건강도 찾고 사업도 진행하여야 한다.
먼저 청계산 등산을 했다. 온 몸에 맥이 없고 다리가 후들거리지만 아직 다리의 근육은 있어 등산을 마칠 수가 있었다.
운동을 하여 몸의 중심을 잡는 것이 최고로 생각한다.
친구와 술을 먹으며 안주를 충분히 먹는다.
술을 먹으면 술기운에 잠도 충분히 잘 수가 있다.
나는 술을 먹으면 위가 약해 다음날 배가 아프기도 했는데 집사람이 아침마다 해독주스를 만들어 주어 계속 먹은 것이 효과가 있는지 술을 먹어도 배는 괜찮다.
사무실에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책상도 정리하지 않고 늘어놓은 대로 있다.
전화는 똑같은 데를 또 해봐야 똑같은 말이라 할 필요도 못 느낀다.
사무실에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나를 아는 사람도 현재의 상황을 알아 도움도 되지 않고 미안하여 전화도 자재한다고 한다.
사무실에서 시간 보내는 것은 인터넷 카드게임이나 스파이더를 하고 또 하고 중독이 들린 사람같이 한다.
인터넷 바둑도 열심히 둔다. 중독성 있는 인터넷 바둑도 공짜만 하지 내기 바둑은 안하는 것이 다행이다.
아무리 건강에 신경을 쓰고 조심을 해야 한다고 하나 원천적인 장비 투입이 안 되니 마음만 건강을 조심하는 것이지 신체는 보이지 않게 약골이 되어가고 있다.
먹기도 잘 먹고 친구도 만나 술도 먹고 잠도 잘 자도 몸은 어데 인지 모르게 병들어 쇠약해가고 있었다.
11월 말일이 되니 몸이 한계점에 왔다.
이때를 버티지 못하면 육체고 사업이고 모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것 같다.
다행이 이때에 전에 이야기 하는 곳에서 장비 투입 요청이 왔다.
2년은 아니지만 다른 곳에서 1개월 반을 하고 추이를 보잔다.
참을성에 한계가 온 나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 승낙을 하였다.
동업계 후배에게 내가 불평등 계약으로 지금 장비를 투입하게 되었다고 말하니 후배가 일주일쯤 후에 투입할 곳이 있는데 지금 확정된 것은 아니란다.
여태껏 기다리던 김에 일주일만 더 기다려 보면 어떠냐고 물어 더 이상 기다릴 수는 없다고 하였다.
확정되지도 않은 일을 일주일 후에 안 된다고 하면 나는 더 이상 헤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지금 몸 상태로는 하루도 버팅길 힘이 없이 고갈되어 불평등 계약이라고 가타부타 따질 상황이 아니다.
IMF 환란때 집이 다 날라갈 뻔 한 상황에서도 내 몸의 건강은 유지됐었다.
옆의 친구가 IMF 환란으로 고민하다 우울증으로 병원 가서 약을 먹는 것을 보았다.
다 같이 IMF 환란을 겪는 나는 참으면 되지 우울증 까지 생기나 하고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내가 이번에 그 친구보다 더 혹독한 정신적 육체적 시련을 격고 있는 것이다.
수입할 때 땡볕에서 장비 이동을 하였는데 5개월이 지나 눈 오는 겨울에 장비를 평택 KTX 환풍구 공사에 투입하게 되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여태껏 좋던 날씨가 장비 이동을 한다고 하니 비바람에 눈보라까지 친다.
악천후에 주기장에서 추레라에 다 실으니 밤이 되었다.
다음날 아침에 환풍구 공사현장에 도착하니 눈이 5Cm는 쌓였다.
장비조립을 하는데 쉬운 일이 아니다.
대기하고 있는 추레일러를 한대한대 순서대로 하차 조립을 하며 점심이 되니 오후에 하차하는 추레일러는 불만이 많다.
장비 조립하는데 새 장비라고 수입상에서 조립 팀이 세 명이 오고 현장에서 4명 50톤 하이드로 기사 등 여러 명이 붙어도 눈이 계속 내리니 위험하다고 다음날 마저 조립하자고 헤어졌다.
나는 3일 동안 쫓아다니며 조립을 도왔지만 체력이 쓰러질 정도는 아니다.
장비를 투입하고 나니 마음이 가라안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진다.
더불어 체력도 눈에 띠게 회복세가 빠르다.
발을 뻗고 자게 되니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 같다.
한 일주일 지나니 완전치는 않지만 친구들 만나서 술 한 잔 하는데 는 지장이 없다.
거울을 보니 얼굴 양 볼이 조금 들어간 기분이고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다.
악착같이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평형을 유지하며 욕심 없이 장비 렌탈 사업을 하려다 된탕 혼나고 있다.
가을에 외국 여행이나 갔다 오려다 수입 장비 때문에 혼이 빠져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남의 사정도 모르고 고등학교 동창들은 내년에 나보고 회장을 하란다.
* 혁진 전회사 재입사
혁진 전 회사 재입사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큰아들 혁진이가 회사를 또 옮기게 되었다.
봄에서부터 회사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여름까지 회사자체를 없애던지 아니면 더 확장하던지 결정을 한다고 했다.
이 회사는 미국 라스베가스에 본점을 두고 토론토에 있는 캐나다의 회사를 인수하여 라스베가스 게임을 제작해 왔다.
캐나다에 있던 회사는 라스베가스에 납품하는 게임 부분을 미국회사에 넘기고 다른 부문으로 영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캐나다에 있는 회사를 인수한 미국회사가 인수한 캐나다 회사를 또 정리하려는 것이다.
게임에 대한 노하우를 빼먹을 대로 다 빼먹었다는 소리다.
법적인 수당이나 처우는 정당하게 처리하는 모양인데 직원을 흔들어 놓고 직장을 빼앗는 행위는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악폐다.
우리나라같이 노조가 있어 머리띠 두르고 그악같이 싸우지는 않는 모양이다.
결국은 여름에 회사를 페쇠하고 수당을 지급하고 끝났다.
다행히 먼저 있던 회사에서 대다수의 인원을 재고용하였다.
혁진이도 재고용되어 연봉이 상승되지는 못하고 전과 같이 받게 된 모양이다.
서울 있는 우리로서는 자식이 실업자 되지 않은 것만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
* 혁범 아들 돌
혁범이가 아들을 낳고 바로 1년 후에 있을 돌잔치 식당을 예약하였다.
손자 순우는 돌잔치에 울지도 안고 붓을 집고 박수까지 쳤다.
손자 순우 돌
작은아들 혁범이가 결혼한 지 2년 만에 아들을 낳아 12월 20일 돌잔치를 하였다.
첫 아들이라고 돌잔치 장소를 1년 전에 엘 타워 디오디아로 예약을 하였다.
돌잔치 장소 예약을 보통 2, 3개월 전에 해도 충분한데 1년 전에 하는 것을 보고 첫애라고 무척 신경을 쓰는 모양이라고 생각 하였다.
애가 낳자마자 돌잔치 예약을 한다는 것을 우리상식으로는 생각도 못할 일이다.
돌에는 흰무리 떡이나 만들어 돌리면 되었는데 세태가 변하여 환갑잔치는 없어지고 그 대신에 돌잔치가 거창하게 치러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부부도 손자 돌잔치에 한복을 차려입고 결혼식 입장하듯 주빈으로 메인테이블에 앉았다.
식당도 돌잔치 전문이라 돌 복에서부터 돌상의 액세서리, 돌잡이 용품 등이 모두 갖추어져 있고 사회자도 경험이 충분하여 능수 능란 헤게 진행한다.
손님도 친구들이 고만 고만한 꼬맹이들을 끌고 여러 명이 참석하여 돌잔치의 새로운 풍속도가 펼쳐졌다.
손자 손우의 영상이 끝나고 돌잡이 하러 엄마 품에 안겨 앞으로 나갈 때다.
사회자가 손님에게 축하 박수를 치라고 하니 모두 박수를 치는데 돌쟁이 손우도 같이 박수를 치니 손님 모두가 웃는다.
돌쟁이가 박수를 친다는 것을 예상도 못했고 박수도 감정은 박수같이 친다.
박수도 바로 끝이지 않고 나가면서 돌상에 앉을 때 까지 계속치니 분위기가 순식간에 부드러워 졌고 웃음의 꽃이 피었다.
붓을 잡았으니 학문 쪽으로 정진한다는 의미인데 애비같이 IQ가 높아 일생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없기를 기원할 뿐이다.
화기가 찬 가운데 돌잔치가 계속되는데 돌쟁이가 울지도 않고 끝까지 잘 참아주어 다행스럽고 고마웠다.
논현동 새집에서 잉태되어 수원의 새로 산 집에서 태어났으니 일생동안 축복의 나날이 계속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