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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1호-1906년 6월 세워진 사제관. |
올해는 온수리교회 설립 111주년을 맞는 해다.
온수리교회는 강화읍교회에 이어 강화도에는 두 번째로 세워진 대한성공회 교회다.
온수리교회는 교회 개척뿐 아니라 의료선교와 교육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일제시대 당시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다.
또 복음전파와 교회 설립에도 최선을 다했다.
초지교회, 넙성리교회, 삼흥리교회, 내리교회, 흥왕리교회가 온수리교회를 통해 설립됐다.
현재는 지역아동센터와 푸드마켓을 통해 지역과 함께하며 초기 선교정신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강화는 지형이 남북으로 길쭉한 완두형이다.
동서가 16km, 남북이 28km로 우리나라에서 5번째로 큰 섬이다.
지리상으로 백두산과 한라산의 중간 지점으로 서울로 통하는 한강 수구(水口)를 가로질러 있어 외환(外患)이 일어나면 강화가 먼저 그 화를 당하게 되었다.
국방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지역으로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어 민족수탈의 비극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온수리는 강화 최남단인 길상면의 면 소재지다.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三郞城)과 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건립된 전등사(傳燈寺)가 온수리 남쪽 정족산에 위치하고 있고, 주변은 낮은 산지와 구릉과 바다를 메운 넓은 간척지가 펼쳐져 있다.
또 온수리는 일제 식민통치 때부터 있어온 5일장이 열리고 있다.
강화 남부 교육의 중심지로 길상초등학교, 강남중학교, 강남 종합고등학교의 소재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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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세워진 한옥 성당 내부 |
성공회의 전래와 의료·교육선교
성공회의 한국 선교는 1890년 고요한(Charles John Corfe) 주교로부터 시작됐다.
이후 입국한 왕란도(Leonard Ottley Warner) 신부가 1893년 7월부터 강화 갑곶이를 중심으로 소외된 고아들과 거지들을 기르며 교리와 신앙의 뿌리를 심어준다.
1898년 온수리를 중심으로 강화 남부 선교가 시작됐다.
1897년 외과의사이자 선교사인 로스가 강화 남부 온수리 난저골에 진료소(약국)를 설치하고 이 지역에 진료사업과 동시에 선교사업을 활발히 전개한다.
이 의료사업의 하나로 선교사들은 1898년 난저골[卵子谷]이라고 불리던 길상면 온수리에 집 한 채를 구입해 진료소와 기도처를 세워 의교선교사업을 헌신적으로 추진했다.
9개월간 여러 마을의 242가정을 돌아보면서 3,528명의 환자를 진료하고 수술을 요하는 환자는 서울로 이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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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하점면 다운리 옛 성당터에 세워져 있던 단아덕 주교 비석을 현재의 교회 옆으로 옮겨왔다. |
로스 선교사의 의료선교 활동에 힘입어 온수리에는 신자들 자체의 힘으로 성당을 건축하고자 하는 의욕이 고취되었다.
1906년 온수리교회는 온수리 주민의 땅 기증과 성도들의 특별헌금을 모아 27칸의 성당을 완공했다. 이 건물은 수리를 거쳐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단아하고 아담한 한옥 양식이 보존된 한국형 교회건축양식이라는 점이 높이 평가돼 1997년 7월 14일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15호로 지정받았다가 2003년 11월 18일에는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52호로 지정받았다.
선교를 담당하는 성직자의 거처인 사제관도 선교 당시의 소박하고 순수한 토착미를 지닌 곳이라는 점이 인정돼 2002년 2월 4일에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41호로 지정되었다.
온수리교회는 의료선교에 이어 학원선교도 펼쳐나갔다.
1906년 진명학교를 세웠다.
진명학교는 강화지역에서 실시한 대한성공회 교육사업 10개소 중에서 유일하게 길상공립보통학교(현재 길상초등학교)로 발전 개편되어 지금도 남아 있다.
또 온수리에 매주 한 번씩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수녀들이 여성입문자 교육을 실시했다.
가정에서 미신타파운동을 실천하고, 어린이 교육, 가정관리 등 여성교육 전반과 신앙 교육을 담당했다.
1908년에는 ‘성모마리아여학교’라는 이름의 야간여학교를 개교해 한문, 지리, 산수, 재봉 및 가사를 가르쳤다.
김영선 신부는 1909년에는 넙성리에 신명학원을 세웠고, 1928년에는 온수리에 신명유치원을 설립했다.
1932년 원아 11명이 수료한 이래 7년간 80여 명이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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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실 주교와 온수리 서당 위원들―1931년. |
초기 교회의 성장
1903년 길강준 신부가 처음 영세성사를 베풀었다. 당시 입문자는 넙성리 서성강 부부와 덕성리 임정실, 초지 김수옥, 온수리에서는 최영기, 김영선, 김영지, 조상린 등으로 온수리교회 초기 건축에 참여한 이들이다.
첫 영세성사(세례)를 받은 성인 남녀 23명은 즉시 영세자 회의를 열고 교회위원회를 구성했다.
1908년 11월 8일 추수감사절에는 일본인들의 미사 방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15명이 참예했다.
교세는 꾸준히 성장해 1918년에는 영성체자 수가 904명이 되었다.
성탄절에는 마을 전체의 축제가 벌어졌다.
학생들의 연극 공연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넓은 교회 마당을 메운 지역주민들 덕분에 야외공연을 했다.
1916년 6월 11일에는 온수리교회가 운영하던 진명학교가 대운동회를 열었다.
각 기관장들과 유지들이 참여하고 주민들이 한 데 모여 한 지역의 교육과 문화를 선도하는 구심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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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복원된 종루의 모습. |
1923년 9월 23일 온수리 지역 출신 김영선(요한) 전도사가 부제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1924년 9월 21일 온수리 성당에서 사제 성직을 받아 한인으로 7번째 사제가 되었다.
1952년 퇴임할 때까지 30년을 반(半)자급사제로서 온수리교회를 담당했다.
생활비 중 대부분을 직접 벌어서 사역해야 했다. 김영선 신부는 엄격한 신앙을 가르쳤는데 미사 중에 조그만 잡담이나 기침 소리가 나도 미사를 중지하고 밖으로 내보내거나 철저히 시정한 후에야 미사를 다시 진행할 정도였다.
김영선 신부는 지역사회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신자 중 가난한 자가 산에서 몰래 나무를 하다가 잡히는 날이면 어김없이 김영선 신부가 방면하게 해주었다.
김영선 신부가 시무하는 동안 안팎으로 어려운 때 온수리교회는 안정과 발전을 누릴 수 있었다.
당시 신자회장이었던 김경수 회장은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교회 묘지와 강남중학교 부지를 봉헌해 교회 발전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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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수리희망터 공부방. |
독립운동에 참여한 교회
선교 초기에는 교회기를 성당에 매달아 주일이나 대축일을 알리는 데 사용했다.
이 교회기는 을사보호조약과 한일합방으로 인해 이 지역에서 조선의병과 일본군 사이에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질 때 조선의병에게 여러 가지 상황을 전달하는 신호로 사용되어졌다.
3·1독립만세운동 당시 일제는 강화에서 일어난 3·1만세시위운동에 대해 철저한 조사를 진행하고, 그 연루자 42명을 체포한 뒤 혹독한 고문과 갖은 악행을 다한 후에 석방했는데 이때 온수리교회 신자 신태윤과 신태의가 옥고를 치렀다. 김여수는 1944년 2월 항일운동을 하던 보성전문학교 학생 안학순에게 학생반대 결의문을 발송한 것이 발각되어 연행, 1945년 2월 25일 여섯 달 후면 맞이할 해방을 보지 못한 채 대전형무소에 미결로 수감된 채 22세의 젊은 나이로 옥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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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수리희망터 푸드마켓. |
새 성전건축과 발전
1996년 홍영선 신부가 부임하면서 교회는 새로운 건물을 짓게 된다.
김갑수 회장이 8월에 교회 건축을 위해 길상면 온수리의 대지 2,016평을 봉헌한 것.
IMF를 겪으며 어려움도 있었지만 2004년 한자천 신부가 부임하면서 새성전을 완공하고 문화재성당을 복원하게 된다.
온수리교회는 1981년 이순덕 교우가 기증한 부동산을 성공회 성가수녀원에 다시 기증, 성공회 최초의 양로원 ‘성안나의 집’을 세웠다.
이뿐 아니라 온수리교회는 의료와 교육선교를 시작으로 설립된 교회의 사회선교 전통을 이어받아 2005년 희망터 개소식을 갖고 희망터 공부방과 푸드마켓을 시작했다.
지역의 어려운 이웃과 어르신을 섬기고, 자라나는 아이들을 돌보는 데 앞장서며, 지역민에게 교회를 개방하는 열린 교회를 지향하고 있다.
장학사업 통해 ‘제2의 고향운동’ 펼칠 터
한자천 신부
2004년 부임한 한자천 신부는 새성전 공사를 마무리하고, 1906년 지어진 한옥 성당 복원을 지휘하는 등 교회 안정에 기여하며 6년째 관할사제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온수리교회만의 특징이라면?
온수리교회는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이 전해지긴 했지만 자립정신이 강했다.
교회를 짓는 일 등을 선교사들의 후원이 아닌 자력으로 감당했다.
온수리교회는 이 지역의 주민들이 지역의 나무를 가지고 직접 손으로 지은 교회다.
좀 더 서민적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신앙 전통에 있어서 온수리교회는 개방적이다.
마을 행사 때도 교회가 장소를 제공하는 등 지역민들과 공존하는 교회다.
교회가 지역사회를 위해서 하는 일은.
푸드마켓과 지역아동센터다.
수요일 점심은 지역의 어르신과 어려운 이웃을 위해 무료급식을 제공한다.
마켓도 운영하는데 필요한 생필품을 직접 골라서 가져갈 수 있다.
물론 무료다.
희망터 공부방에서는 아이들을 돌본다.
공부와 문화 활동, 식사와 간식을 제공하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처음 선교할 때 가졌던 비전을 끝까지 유지해가자는 것이 교회의 생각이다.
교육 사업과 이웃을 위한 봉사가 우선이 돼야 한다.
첫째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일이다.
둘째는 희망터를 통해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고,
셋째는 장학사업이다.
교우님들이 봉헌해주시는 장학금을 기금으로 만들어서 이곳 교우들뿐 아니라 타지역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지급하고자 한다.
온수리가 고향인데 다른 곳에 나가 생활하는 분들 중에 어려운 분들을 위해 ‘제2의 고향운동’을 펴는 것.
그래서 준비하고 있는 것이 장학재단이다.
많은 사람들이 강화는 ‘성공회의 못자리’라고 이야기 한다.
신앙을 키워 내보내고나면 교세가 약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요즘은 반대 현상도 생기고 있다.
도시로 나간 가정에 문제가 생겨서 아이들이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 보내지고 키워지는 경우가 그것이다.
지역아동센터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온수리교회가 제2의 고향 역할을 하고자 한다.
지칠 때 쉴 수 있고 언제든지 그들의 아픔을 안아줄 수 있는 곳이 되자는 것이 ‘제2의 고향 운동’의 취지다.
기독교문화를 전하기 위해 신명유치원으로 사용되던 건물을 리모델링 중에 있다.
한쪽은 갤러리로, 또 한쪽은 교회 역사박물관으로 사용할 계획이다.
한국 교회에 하고 싶은 말은.
대한성공회 교단은 작지만 지역에서 작은 촛불의 역할을 하기 원한다.
교회 성장보다는 지역민들과 함께 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
많은 한국 교회들이 물량주의나 개교회주의로 흐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교회들이 이 땅에 하느님나라를 건설하는 데 앞장섰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