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걷는다. 콧노래를 흥얼대며, 보리피리를 불며.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보리 잎이 물결 친다. 잔잔한 녹색 파도다.
고창. 참으로 색깔과 향기가 가득한 고을이다. 봄이 오면 그대 가슴에 붉은 피를 물들이는 선운사 동백으로 시작해 청보리 물결 치는 학원농장과 분홍 철쭉이 만발한 모양성이 기다리고 있다.
봄바람 살랑대는 연두색 5월. 봄 중에서도 이때가 가장 예쁘다. 먼저 학원농장을 찾는다. 서해안고속도로 고창나들목으로 나와 15번 지방도로를 타고 무장면 소재지로 간 뒤 무장오거리에서 좌회전해 조금만 가면 학원농장이다.
입구에서부터 바람결을 타고 청보리의 풋풋한 풀내음이 실려 온다. 야트막한 구릉과 구릉을 따라 녹색의 향연은 시작된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 본다. 지그재그로 만들어놓은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콧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진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뉘 부르는 소리 있어 발을 멈춘다/옛 생각이 외로워/휘파람 불면/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청보리 밭에 가장 어울리는 노래다.
보리밭은 광활하다. 대부분의 농장은 좁은 농지인 반면 학원농장은 17만평이나 된다. 주변의 보리밭까지 합하면 30만평이 족히 넘는다. 상상해 보시라. 이 넓은 땅에 온통 청보리가 넘실대는 풍경을. 누구라도 이맘때 이곳에 서면 시인이 되고 사진작가가 된다. 이른 아침이나 해질 무렵에 방문하면 더더욱.
학원농장은 국무총리를 지낸 진의종씨의 아들 진영호씨가 1992년부터 개간한 땅으로 봄에는 보리, 가을에는 메밀을 심는 농장이다. 가을에 씨를 뿌린 보리는 4월이면 이삭을 내고 6월 초순이면 황금빛으로 변신한다. 추수는 초여름이면 끝난다. 청보리가 가장 예쁠 때는 입하 전후. 이후 메밀을 심어 가을엔 봉평과 견줄만한 하얀 꽃송이들이 구릉을 뒤덮는다.
농장 한쪽에는 진의종 전국무총리를 기리는 백민기념관이 있다. 역대 유명 인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비롯해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고가구 등이 있다. 기념관 앞으로는 작은 석탑과 소나무 숲이 있어 운치를 더한다.
봄바람 살랑살랑 부는 때에 청보리를 봤다면, 꼭 함께해야 할 동무가 있다. 구시포 주꾸미다. 공음면으로 나가서 77번 국도를 타고 선운사 이정표를 따라 상하면에서 좌회전하면 구시포에 닿는다. 시간상으로는 15분 정도 소요된다. 서해안 어디서나 이맘때가 되면 알이 오동통한 주꾸미를 맛볼 수 있다. 밥알을 씹는 듯한 고소한 주꾸미 알은 해변을 따라 늘어선 몇몇 가게에서 맛보면 된다.
다음은 선운사. 22번 국도를 따라 구수한 장어냄새 맡으며 선운사로 향한다. 구시포에서 심원, 동호를 거쳐 선운사까지 풍천장어 벨트가 형성 돼 있다. 입맛 당기지만, 이동 시간이 낮이라면 저녁으로 잠시 미뤄 두시라.
사시사철 좋은 절 선운사 당도한다. 선운사 입구엔 하얀 클로버 꽃이 만발했다. 한 송이를 뜯어 꽃반지를 만들어 본다. 예쁜 반지를 끼고 아름드리나무가 하늘을 가린 선운사 부도에 앉는다. 청아한 새소리에 잠시 눈을 감는다.
이어 느린 걸음으로 절로 향한다. 개울에 초록의 나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절로 들어가기 전 선다원에서 잠시 쉬었다 간다. 맑은 풍경 소리와 마음까지 편안해지는 목탁 소리를 들으며 녹차를 마신다. 그윽한 향기에 취하다 보면 허전했던 마음은 온데 간데 없어진다. 좌우로 눈길을 돌린다. 귀여운 동자 인형부터 예쁜 풍경 등 불교 관련 기념품이 가득하다. 마음의 요기, 눈요기를 채우고 동백나무 아래로 향한다. 유난히도 늦었던 봄이라 한껏 기대를 했건만 동백 몇 송이만 떨어져 있다. 아쉽지만 상관없다. 이미 선다원에 마음을 비우고 왔기에.
절 구경을 한다. 경내에 대웅전, 금동보살좌상, 지장보살좌 등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를 둘러본 후 삼단으로 된 경내 우물에서 시원한 물 한 바가지를 마시면 절 나들이는 일단락된다.
고창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면 사하촌에서 숙식을 해결한다. 그렇지 않다면 동쪽으로 방향을 잡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매산마을 일대 고인돌군을 찾는다. 일대의 나지막한 야산에 돌 무덤이 1.8㎞의 길을 따라 6군데로 나뉘어져 있다. 고인돌이 확인된 것만 447기에 이를 정도로 광범위하다. 그 중 6코스 도산리 고인돌이 가장 많다. 약 2천5백 여 년 전부터 약 5백 여 년 간 이 지역을 지배했던 족장의 가족 묘역이었다고 추정된다. 탁자 같은 돌 판을 작은 돌이 다리처럼 받치고 있는 고인돌이 수 십 개씩 모여 있는 걸 보면 청동기 시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온 기분이 든다.
고창 여행의 마무리는 고창 읍내에 자리한 고창읍성에서 한다. 봄이면 붉은 철쭉이 성을 둘러싸고 있어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성은 조선 단종 원년에 왜침을 막기 위해 쌓았다고 한다. 둘레 1,684m.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부른다. 연유는 백제 때 모량부리였던 것에서 유래된 듯하다. 축조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계유년(癸酉年)에 호남의 여러 고을 사람들과 힘을 합쳐 축성하였다고 성벽에 새겨져 있다.
성은 자연석 성곽으로 무너진 곳이 없고 거의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성내에는 동헌, 객사 등 관아건물이 복원돼 있고 숲이 우거져 있어 어느 고궁보다 아름답다. 성곽 위에 올라서면 고창 읍 전경이 시원하게 보인다. 성곽을 따라 천천히 걸어도 돌아보는데 1시간도 채 안 걸린다. 한 바퀴 돌면 다리 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 승천한다는 전설도 있다. 고창군에서는 음력 9월 9일인 중앙절에 작은 돌을 하나씩 들고 성벽을 타고 도는 성밟기놀이를 재현한다.
고창은 판소리의 고장. 읍성 입구에 자리한 전래 판소리 여섯 마당의 사설을 집대성한 이론가 동리 신재효(1812~1884년) 생가와 판소리 박물관은 고창의 봄나들이의 마지막 보너스다.
[여행메모]
<찾아가기>
자가운전: 서해안고속도로 고창IC를 나오면 각 관광지마다 이정표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다. 학원농장은 무장면 방면으로 방향을 잡는다. 고창 읍내 반대 방향이다. 헛갈릴만하면 전봇대에 ‘청보리밭’이란 이정표가 붙어 있다. 모양성은 고창 읍내에 있다. 선운사를 먼저 찾는다면 선운사IC를 이용하는 게 빠르다.
대중교통: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고창까지 하루 16대의 버스를 운행한다. 고창과 무장을 연결하는 군내버스는 아침 6시20분부터 저녁 9시40분까지 운행한다. 그밖에 선운사 등을 지나는 버스가 많다. 시외버스는 고창시외버스터미널(063-563-3388)에 문의하면 된다.
<숙소>
선운사 사하촌에 숙소가 많지만 대부분 오래된 게 흠이라 흠이다. 햇살가득한집(063-562-0320, www.sunwoonsa.com)은 선운사 입구에 자리한 펜션이다. 객실도 깔끔하고 외관도 멋있다.
<음식>
인천강에서 잡히는 풍천장어 요리 집이 가득하다. 선운사 입구 삼거리에 자리한 연기식당(063-562-1537, www.yeonki.co.kr)이 2대에 걸쳐 30년간 장어를 구워 온 원조 장어집이다.
구시포 주꾸미는 털보네(063-563-0219)에서 맛보면 된다. 주변에 새로 생긴 주꾸미 집에 비해 외관은 허름하지만 구시포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여행문의>
고창군 문화관광과(063-560-2208, www.gochang.go.kr), 학원농장(063-564-9897), 선운산관리사무소(063-560-2508)
<주변볼거리>
서정주 생가와 묘: 선운사 인근에는 미당 서정주 선생의 생가와 시문학관이 자리잡고 있다. 사후에도 말이 많은 시인이라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 문학계의 거두임에는 분명하다. 문학탐방 후, 시문학관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서해의 풍경이 멋지다. 가을, 미당묘소에는 7만 그루, 1억 송이에 달하는 국화가 피어난다. 노랗게 만개한 국화 사이를 걸으면 그의 시 ‘국화꽃 옆에서’를 절로 읊조리게 된다. 미당 묘소의 국화는 지난 2004년에 조성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