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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 류극서(柳克恕) ( ? ∼ 1388)
시조 완산백(류습)의 둘째 아들. 출생연대는 알 수 없다. 진주 하씨를 배필로 맞아 정랑공(류정)을 낳고, 후배(後配) 수원 이씨로부터는 작은 아들 영흥공(류빈)을 낳았다. 고려시대의 문신(文臣)으로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우왕9년(1383년)에 양광도(楊廣道) 안렴사(按廉使)를 하였고, 우왕11년(1385년)에 천호(千戶)를 하였을 때 내시 김실을 옥에 가두었는데 김실이 도망하자 그 때 당직(류극서)을 옥에 가두었다.
우왕13(1987)년에는 판사복시사 임수(任壽), 전공판서 김승귀(金承貴)와 함께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로서 요동에 말 3,000필을 주고 돌아왔고 중정대부(中正大夫)로서 보문각(寶文閣) 직제학(直提學, 정4품)과 지제교(知製敎, 종3품)를 지냈는데 우왕14(1388)년 연안부사를 할 때 환관(宦官) 김실과 함께 우왕에 의하여 피살당하였다.
후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서 이조 참의(參議, 정3품)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군 녹전면 죽송리의 범바위 마을 부근 류빈동(柳濱洞)에 있다. 옛날에 신도비가 있었으나 글자를 알아볼 수 없게 마멸되어 선조39(1606)년에 경상도 관찰사 류영순(柳永詢)이 새로 작은 비석을 세웠다. 첫째 부인(婦人) 진주 하씨 묘소는 경남 진양군 미천면 오방리에 있고 둘째 부인(婦人) 수원 이씨 묘소는 직제학공 묘소 바로 밑에 있다.
[족보], [류승추술], [고려사], [동국통감], [전주류씨 대종보 "시사"]
<문헌상의 기록>
1) 고려사(高麗史)
신우 계해 9년(1383년)
양광도 안렴사 류극서(柳克恕)와 교주도 안렴사 최자(崔資)에게 내구(內廐)의 말을 1필씩 주었다.
신우 을축 11년(1385년) 내시 김실이 본처를 버리고 다시 어떤 사족(士族)의 딸에게 장가 들려고 결혼날 휴가를 청하였더니 신우가 말하기를 "네 처 될 사람을 나에게 보인 연후에 장가 들어야 한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김실이 숙비를 통하여서 휴가 허락을 받고 장가도 들었으나 신우가 마음 속으로 이것을 앙심을 품고 다른 일에 구실을 붙여서 김실을 순군에 가두고 죽이고자 하였다. 김실이 도주하였으므로 대수색을 하고 그 날 당직인 천호(千戶) 류극서(柳克恕)를 옥에 가두었다. 구정(毬庭)에서 열병식을 거행하고 신우가 순군으로 말을 달려 가서 류극서에게 욕하기를 “네가 만약 김실을 붙잡지 못하면 김실의 죄를 네가 대신으로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신우 정묘 13년(1387년)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임수(任壽),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류극서(柳克恕), 전공 판서(典工判書) 김승귀(金承貴)로 하여금 제2, 제3, 제4차로 도합 말 3천 필을 압송하고 연이어 요동으로 가게 하였다.
신우 무진 14년(1388년)
연안 부사(延安府使) 류극서(柳克恕)와 내시 김실(金實)을 죽였다. 류극서는 임견미의 문객이며, 이존성(李存性)의 말을 듣고 가만히 김실을 탈옥케 한 사람이다.
2)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계해 신우9(1383)년
○ 2월에 양광도 안렴 류극서(柳克恕)와 교주도 안렴 최자(崔資)에게 나라 마구의 말을 각각 한 필씩 주었다.
을축 신우11(1385)년
봄 정월 ○환관 김실이 도망갔다. 과거에 실이 아내를 버리고 다시 사족의 딸에게 장가들려 하니, 우가 말하기를, "그 여자를 내게 보인 연후에야 장가들 수 있다."고 하였다. 실이 용덕을 통하여 그러지 말기를 청하니, 우가 허락하였다. 그래서 실이 그 여자를 우에게 보이지 않고 장가들었는데, 우가 감정을 품고 다른 일로 칭탁하여 실을 순군옥에 가두고 죽이려 하므로, 실이 도망갔다. 우는 영을 내려 크게 수색하며 당직했던 천호 류극서(柳克恕)를 옥에 가두었다.
(묘갈문)
1) 묘갈명(墓碣銘)
中正大夫寶文閣直提學知製敎贈吏曹參議柳公墓碣銘
公姓柳諱克恕系出全州麗朝登科官至寶文閣直提學祖諱橒成均生員考諱濕贈司憲府掌令妣全州崔氏封三韓國大夫人有五男一女五男俱捷文科女適大提學沈孝生以此特贈公乃五男之一也公娶晋州河氏爲配贈領議政晋陽府院君允潾之女文忠公浩亭先生崙之姉也生二男長汀僉知次濱文科永興府使贈叅判僉知生二男長孝池縣監次孝川文科承文正字孝池六代孫振門新門再榮再茂居星州孝川六代孫震楨震樑居陜川叅判生四男長敬孫中部令贈吏議次義孫叅判以文雅鳴世次信孫叅判次末孫執義贈叅判叅議生二男長孟沂淸白吏郡守次之盛贈叅判郡守生二男長場次坦場四代孫潭文科正郞坦曾孫華居榮川叅判子崇祖興祖崇祖文科官至大司成學窮性理取重儒林子應台應台曾孫仁榮興祖子應賢應賢曾孫仁植俱居安東執義生三男長季潘叅判次季漳僉知中樞府事次季潼贈承旨參判子軫縣監縣監曾孫肇生武科叅扈聖功臣僉知子軒大司諫贈吏曹判書判書生四男長世鵬典簿次世麟吏曹叅判贈左贊成次世龜典籤贈吏曹判書次世鳳司果典簿子寧判官宇司果判官子永範今爲直長司果子永孚文科正郞贊成生三男長信文科佐郞次儀叅奉贈領議政次脩叅奉議政生三男永吉叅判以詩文鳴世永慶今爲領議政全陽府院君永賀直長叅奉子永孝今爲監役叅判子惺今爲文學恒水運判官領議政子悅今爲通津縣監忄業 王子師傳悌松禾縣監通津子廷亮尙貞徽翁主爲全昌尉判書生四男長堪舍人贈吏曹參判乙巳正直不撓坐謫十八年讀易不輟均縣令塤判書埏府使贈左贊成舍人子永健府使永立叅判永起今爲麻田郡守叅判子穡今爲副修撰縣令子永成今爲淸風郡守贊成子永謙禁府經歷永謹今爲司諫永詢今爲慶尙道觀察使承旨有子軾輳軾府使贈叅判叅判子潤德文科參判次潤善潤善孫復起居安東有五子輳子潤門潤門孫止信武科府使其餘內外子孫蕃衍不可殫記嗚呼我先祖積德燾後奕世冠冕愈久愈盛至今日猗歟休哉公墓在禮安縣西龍頭山之麓神道古無麗牲世代綿遠香火久絶七代孫永詢忝按本道拜奠墓下不勝感璥乃問之古老皆曰永興公嘗居廬于墓側至今樵牧稱以柳濱洞洞之西北有一刹相傳柳墓齋舍云揭板于壁以表遺蹟且定守墓人以禁樵火竪之短碣略記顚末于陰以示來世庶傳之永久云爾
萬曆三十四年丙午月日立
七代孫嘉善大夫行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永詢謹撰
出處 : 柳乘追述 柳永熙 編
공의 성은 류(柳)씨요 이름은 극서(克恕)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고려 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보문각 직제학에 이르렀다. 할아버지 운(橒)은 성균관 생원이다. 아버지 습(濕)은 사헌부 장령에 추증되고 어머니는 전주 최씨로 삼한국대부인에 추봉되었으며, 5남1녀를 두었다.
5형제 모두 문과에 급제하고 딸은 대제학 심효생에게 출가하였다. 5남1녀의 등과로 특별히 추증되었는데 공은 이 5남 중의 둘째 분이다. 공은 진주 하씨를 아내로 맞았는데 영의정에 추증된 진양부원군 하윤린(河允潾)의 딸이며, 문충공 호정선생 하륜(河崙)의 누이인데 형제를 두었다.
큰아들 정(汀)은 첨지이고 작은아들 빈(濱)은 문과에 급제하여 영흥부사를 지내고 참판에 추증되었다. 첨지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 효지(孝池)는 현감이고 다음 효천(孝川)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의 정자(正字)를 지내고 효지의 6세손 진문, 신문, 재영, 재무는 성주에 살고 효천의 6세손 진정과 진량은 합천에 산다.
참판은 4남을 두었는데 큰아들 경손은 중부령으로 이조참의에 추증되고 다음 의손은 참판인데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으며, 다음 신손은 참판이고 막내 말손은 집의로서 참판에 추증되었다. 참의는 2남을 두었는데 큰아들 맹기는 청백리 군수이며, 막내 지성은 참판에 추증되었다.
군수는 2남을 두었는데 큰아들은 장이고 막내는 탄이다. 장의 4대손 담은 문과에 급제하여 정랑을 지내고 탄의 증손 화는 영천에 산다. 참판의 아들로는 숭조와 흥조가 있다. 숭조는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성에 이르고 성리학에 통달하여 유림의 추앙을 받았으며, 아들은 응태이고 응태의 증손은 인영이다.
흥조의 아들은 응현이고 응현의 증손은 인식인데 모두 안동에 산다. 집의는 3남을 두었는데 큰아들 계번은 참판이요 다음 계장은 첨지중추부사이며, 막내 계동은 승지로 추증되었다. 참판의 아들 진은 현감이고 현감의 증손 조생은 무과에 급제하여 호성공신이다.
첨지의 아들 헌은 대사간으로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판서는 4남을 두었는데 큰아들 세붕은 전부이고 다음 세린은 이조참판으로서 좌찬성에 추증되고 다음 세구는 전첨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막내 세봉은 사과를 지냈다. 전부의 아들 영은 판관이요 우(宇)는 사과이다.
판관의 아들 영범은 지금 직장을 하고 사과의 아들 영부는 문과에 급제하여 정랑이 되었다. 찬성은 3남을 두었는데 큰아들 신(信)은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이며, 다음 의(儀)는 참봉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막내 수(脩)는 참봉이다.
영의정은 3남을 두었는데 큰아들 영길은 참판으로서 시문(詩文)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고 영경은 지금 영의정으로서 전양부원군이며, 막내 영하는 직장이다. 참봉의 아들 영효는 지금 감역관을 하고 참판의 아들 성은 지금 문학(文學)이며, 항은 수운판관이다.
영의정의 아들 열(悅)은 지금 통진현감이고 업(忄業 )은 왕자의 스승이며, 제(悌)는 송화현감이다. 통진현감의 아들 정량(廷亮)은 정휘옹주에게 장가들어 전창위(全昌尉)가 되었다.
판서는 4남을 두었는데 큰아들 감(堪)은 사인으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는데 성품이 바르고 곧아 뜻을 굽히지 않으니 을사사화 때 남의 죄에 걸려들어 18년간 귀양을 가서도 주역공부를 그치지 않았고 다음 균(均)은 현령이며, 훈(塤)은 판서이고 연(埏)은 부사로서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사인의 아들 영건(永健)은 부사이고 영립(永立)은 참판이며, 영기(永起)는 현재 마전군수를 하고 있다. 참판의 아들 색(穡)은 지금 부수찬을 하고 현령의 아들 영성(永成)은 지금 청풍군수이다. 찬성의 아들 영겸(永謙)은 의금부의 경력이고 영근(永謹)은 현재 사간이며, 영순(永詢)은 지금 경상도 관찰사를 하고 있다.
승지의 아들은 식(軾)과 주(輳)인데 식은 부사로서 참판에 추증되고 참판의 아들 윤덕(潤德)은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을 지냈고 다음은 윤선(潤善)이다. 윤선의 손자 복기(復起)는 안동에 사는데 다섯 아들을 두었다. 주(輳)의 아들은 윤문(潤門)이며, 윤문의 손자 지신(止信)은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이다.
그 밖에 내외 자손이 번성하여 다 기록할 수 없으니 아! 우리 선조가 덕을 쌓고 두루 비추어 대대로 벼슬아치가 끊이지 않고 그 번성함이 오늘 날에 이르러 더하니 아! 거룩하도다. 공의 묘는 예안현 서쪽 용두산(경북 안동군 녹전면 죽송리) 기슭에 있는데 신도비는 오래되어 빛이 바래고 오랫동안 향화가 끊어졌다.
8세손 영순이 본도의 관찰사로 와서 성묘하고 비통한 감회를 이기지 못하여 옛 노인에게 물으니 모두가 말하기를 영흥공(빈)이 묘 옆에 초막집을 짓고 살았는데 지금은 나무꾼과 목동들이 류빈골이라 부른다고 하고
마을 서북쪽에 절 하나가 있는데 류묘(柳墓)의 재사(齋舍)라 전하니 벽에 현판을 걸어 유적을 표시하고 또 묘지기를 정하여 나무꾼의 불작란을 막고 작은 비를 세워 그 전말을 기록하고 후손에게 보이니 오래도록 전하기를 바란다.
선조39(1606)년 월 일 세우다.
8세손 가선대부행경상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영순(永詢)이 삼가 짓다.
2) 묘하비명(墓下碑銘)
有明高麗中正大夫寶文閣直提學柳公墓下碑銘
惟我先祖永興公奉先大夫直提學府君義理之藏于宣城西虎巖負甲之原廬墓終制土人以永興公姓諱呼其洞至今五百有餘年矣中間失傳省掃久廢七代孫岐峯公復起誠求而得之觀察公永詢鑱石而表之撰次頗詳尙恨有闕誤始祖之上復著一世而家譜己正謬始祖諱字書以習字而本碣有傳信俱所當改府君仕麗季有履歷雖畧未可闕府君有二配淑夫人晋州河氏贈領議政晉陽府院君允潾之女生諱汀淑夫人水原李氏密直副使仁壽之女隋城府院君子松之孫生諱濱卽永興公今只載河氏不載李氏爲莫大闕典諸宗議追補依神道碑例立石墓下命必永記之必永謹述舊聞而書曰府君諱克恕姓柳氏本貫全州麗世全州柳有三平章奕世冠冕而文獻無徵以贈司憲府掌令追封完山伯諱濕爲始祖卽府君考也妣全州崔氏以五子一婿俱捷文科封三韓國大夫人完山伯受封疑或以是也始祖府君平生勤愼國大夫人治家有法一府稱美積德胚光厥有本矣府君登文科從仕在洪武中在內爲宗簿令巡軍衛堂直千戶中正大夫寶文閣直提學知製敎在外爲驪興郡事楊廣道按廉使正順大夫延安府使間而判典客寺事奉使遼東其任延安也以當直千戶時罪人金實逮獄而逸被禍卽辜命前四年戊辰也入本朝以孫義孫貴贈通政大夫吏曹參議府君事蹟之見於麗史及家乘而可攷者只此居官聲蹟遘禍寃狀無以詳也然危亂垂亡之世刑政必濫而忠貞正直之士尤難免焉百世之下亦可以求其古矣按高麗史列傳府君多受誣然列傳多失史例則王氏舊臣之仕於其時者鳥得免譏貶哉雖以鄭先生貞忠大節尙有事之不去之義府君受誣何足怪乎又按惕若齋金九容竄驪興李陶隱崇仁贈詩有會有團欒日仍煩報柳州之句而自註曰柳君克恕時爲驪興守金李二公俱以當時善類有去國傷時之句而特致意於府君未知團欒之日所講爲何事然苟非素行順明見重於僚友者二公豈肯傾倒至此耶卽此亦可見府君之爲麗世完名而史氏典筆不待辨矣噫府君旣顯仕孫曾以下益昌而熾鍾鼎相望家傳宜不翏翏何故記載多闕爲雲仍無窮之限也世傳山下聖泉寺爲柳氏齋舍板上揭事實一夕而燼意家先文籍之藏盍齋中者蕩然於其始耶河夫人之系貫葬地舊譜幸傳李夫人不幸家牒中失傳幾世昧然後孫僉正公錫昌因權金南三氏譜始詳自出載之譜牒始雖晦而終必顯亦天也于後始求宅兆之所在府君墓下十許武有一古墓規模位置酷類府君墓且有許多證案領中諸孫俱發尊奉之議純廟丙子修築而殷祭之事蹟之原委議論之梗槩備詳於十五代孫參奉公徽文所撰修墓記及榜齋文中至於祭禮一款謹愼之地不敢改定仍舊式一體瞻拜合享上墓子孫錄舊碣旣詳向後益蕃衍碁布一國難以悉記獲霑朝恩者文武蔭進千有餘人而間出碩輔以鳴國家之盛世降儒賢克闡家學之傳岡非餘慶之攸廕遺敎之所曁世之知德而尙論者其必因流而測源矣玆敢不揆僣越用贊闔族之誠而進述先德與華寧儉故序而終焉
萬曆丙午立碣後三百五十四年己亥十月 日立
十八代孫 必永 謹撰
十七代孫 河根 謹書
出處 : 西坡先生文集 柳必永 著
생각건대 우리 선조 영흥공은 부친 직제학공의 묘소를 받들어 예안 서쪽 범바위의 서남향 산기슭에 초막을 짓고 살아 3년상을 마치니 주민들이 영흥공의 성함을 그 마을 이름으로 하여 지금까지 5백여 년이나 내려왔다.
중간에 실전되어 오랫동안 성묘를 못하다가 7대손 기봉공(복기)이 성심으로 찾아서 관찰사공 영순이 비석을 세우고 상세히 기술하였으나 오히려 빠뜨리고 잘못한 바가 있으니 시조 위에 1세를 더하여 족보도 정오(正誤)를 하고 시조의 이름자를 습(習)자로 써서 본 비석문에 전하고 있으니 모두 고처야만 할 것이다.
직제학공은 고려 말에 벼슬을 한 이력이 있으며, 비록 간략하지만 직제학공은 두 부인이 있었다는 것을 빠뜨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숙부인 진주하씨는 증영의정 진양부원군 하윤린의 따님으로서 정을 낳고, 숙부인 수원이씨는 밀직부사 이인수의 따님이며, 수성부원군 이자송의 손녀로서 빈을 낳았으니 바로 영흥공이다.
그런데 지금 하씨만 기록되고 이씨는 기록이 안 된 것은 중대한 결점이다. 그러므로 여러 일가들이 의논해서 이를 추가로 보완하여 신도비의 예에 따라 묘소 아래에 비석을 세웠는데 나(필영)를 명해서 비문을 쓰라고 하기에 삼가 구문(舊聞)에 따라 서술하는 바이다.
직제학공의 이름은 극서이고 성은 류씨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고려 때 전주에 세 평장사가 있어 대대로 고관이었으나 문헌을 실증할 수 없다. 사헌부장령에 추증되고 또한 완산백에 추봉된 습(濕)을 시조로 하였으니 바로 직제학공의 부친이다.
부인은 전주최씨로서 다섯 아들과 한 사위가 모두 문과에 급제했다고 하여 삼한국대부인에 추봉되고 시조가 완산백으로 추봉된 것도 아마 이 때문인 듯하다. 시조는 평생 근신하였고 삼한국대부인은 집안을 다스리는데 법도가 있어서 전주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였으니 덕을 쌓아 영광을 가져온 그 근본이 있는 것이다.
직제학공은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 우왕 때 내직으로 종부령 순군위의 천호로서 당직을 하고 중정대부 보문각 직제학 지제교를 하였고 외직으로는 여흥군수, 양광도안렴사, 정순대부 연안부사를 하였다.
연안부사로 있을 때는 판전객시사로서 요동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천호로서 당직을 할 때는 죄인 김실을 체포하여 투옥했는데 도망을 가서 화를 당하였다. 이는 혁명이 일어나기 4년 전인 우왕14(1388)년 때의 일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손자 의손이 귀하게 되어 통정대부 이조참의로 추증되었다.
직제학공의 사적은 고려사와 가보에서 볼 수 있는데 고증할만한 것은 이것뿐이다. 관직에 있을 때의 사적이나 해를 당했을 때의 일은 상세히 알 수 없으나 망해 가는 위태한 나라의 정치는 반드시 혼란해서 충실하고 정직한 인사가 더욱 곤란했을 것임은 백대(代) 뒤에도 또한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고려사의 열전에 의하면 직제학공은 많은 모함을 당하였으나 열전에는 사례(史例)를 잃었음이 많으니 고려의 옛 신하로서 그 때 벼슬한 이가 어찌 악평을 면할 수가 있었을 가?. 비록 정몽주의 곧은 절개와 충성심으로도 오히려 섬기고 갈 수 없는 의리가 있었는데 직제학공이 모함을 당했음이 어찌 괴이할 것이 있을 가?.
또한 생각건대 척약재 김구용이 여흥으로 귀향을 갔을 때 도은 이숭인이 증정한 시(詩)에는 “단란하게 모이는 날엔 번거로이 류(柳) 고을 원(員)님에게 알리리”라는 시구절이 있는데 스스로 주(註)를 달아 “이 때 류극서(柳克恕)는 여흥(驪興)고을 원(員)님이다”라고 하였다.
김(金)과 이(李) 두 사람은 모두 당시의 선량한 인사로서 망국(亡國)을 한탄하는 구절이 있었는데 특히 직제학공에게 마음을 두었으니 그 화목하던 날에 강론한 바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만약 평소에 순진하고 현명하여 친구 사이에서 존경을 받지 않았다면 두 분이 어찌 그처럼 마음을 기울였을 가?
즉, 이것만 보아도 직제학공이 고려 때 아주 이름이 있었다는 것을 가히 알 것이니 역사가가 올바르게 쓴 글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아! 직제학공은 고관이 되었고 손자와 증손 이하가 더욱 번성해서 관작이 있어 가문이 쓸쓸하지는 않았는데 어찌해서 기록 없이 후손의 무궁한 한을 갖게 했을 가?
전설에는 산 아래의 성천사가 류씨의 재사라는 말이 현판에 기록되어 있었는데 어느 저녁에 타버렸다고 하니 아마 그 곳에 보관했던 조상의 사적이 그 때 소실된 듯하다.
하씨부인의 계보와 장지(葬地)는 구보(舊譜)에 다행히 전해오나 이씨부인은 불행히도 족보 중에서 실전되어 거의 없어질 뻔했으나 후손인 첨정 석창씨가 권씨, 김씨, 남씨의 세 족보로부터 비로소 알게 되었으니 처음은 비록 어두웠으나 끝내는 반드시 드러나는 것은 하늘의 이치인 것이다.
후에 비로소 묘소의 소재를 찾으니 직제학공 묘소 아래 10보 되는 곳에 한 옛 무덤이 있는데 직제학공 묘소의 규모와 위치가 흡사하였고 또한 많은 증거가 있으니 영남의 여러 후손들이 모두 받드는 발의를 하여 순조16(1816)년에 수축하고 제사를 올렸다.
그 사적의 시말(始末)과 의론의 개요는 16세손 참봉 휘문의 지은 “수묘기”와 “방재문” 중에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제사를 받드는 한가지의 일에 근신하여 감히 개정하지 못하고 먼저대로 모두가 배례(拜禮)하여 위의 묘소와 함께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자손 기록은 옛 비문에 이미 상세히 있으며, 그 후로 더욱 번성하여 전국에 널리 퍼져있으니 다 기록할 수 없구나. 문관과 무관, 음사와 진사 등이 천여 명이나 되고 간혹 큰 인물이 나와서 명성을 날리기도 하였다.
그 후 유교에 정통한 선비가 능히 집안 대대로 전해오는 학문을 전하기로 천명(闡明)하였다. 이것이 모두 조상 덕의 보답이고 유훈이 파급(波及)된 것이니 세상에서 지식과 덕이 있고 고인의 인격을 논하는 자는 반드시 그 유래와 근원을 알게 될 것이다. 이에 감히 분수에 넘치게 모든 문중의 정성으로 조상의 덕을 차례로 기록하였는데 번화보다는 검소해야 하기 때문에 서문만으로 마치는 바이다.
선조39(1606)년 비석을 세운 후 광무3(1899)년 10월 일 세우다.
19세손 필영이 삼가 짓다.
18세손 하근이 삼가 쓰다.
3) 유적비명(遺蹟碑銘)
高麗國正順大夫延安府使寶文閣直提學全州柳公克恕遺蹟碑銘
직제학부군(直提學府君)이 개경(開京)에서 별세하시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汀), 영흥대도호부사(永興大都護府使) 빈(濱) 형제는 천리(千里)를 운구하여 호암(虎巖) 을좌원(乙坐原)에 모시니 그 곳을 류빈골이라 이름하여 지금까지 육백여년이나 불려왔다.
한때 실전(失傳)하여 성묘를 못하다가 7대손 임란의병장 복기(復起)가 성심으로 찾아 영의정 영경(永慶)이 주선하고 1606년 병오(丙午) 관찰사 영순(永詢)이 묘전(墓前)에 비를 세웠다. 1899년 기해(己亥) 18대손 필영(必永)이 누락된 부분을 바로잡아 묘하(墓下)에 비를 세웠으나 한문이고 글씨가 마멸되니 이제 신도비(神道碑)의 예(禮)에 따라 유적비(遺蹟碑)를 세운다.
완산백(完山伯)에 수봉(受封)되신 휘(諱) 습(濕)을 시조(始祖)로 하였으니 바로 부군(府君)의 고위(考位)시다. 비위(妣位)는 전주최씨(全州崔氏)니 오자일서(五子一婿)가 다 문과에 급제하여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수봉(受封)되셨다.
시조께서는 평생에 근신(勤愼)하시었고 국대부인(國大夫人)은 치가(治家)에 법도(法道)가 있어서 일부(一府, 全州)의 사람들이 다 칭송하였으니 적덕(積德)하사 영광(榮光)을 후손에게 남기셨다. 부군(府君)의 휘(諱)는 극서(克恕), 성은 류(柳)씨, 본관은 전주(全州)이시다.
부군(府君)께서는 고려말(高麗末)에 관직(官職)으로 전주류문(全州柳門)을 빛내셨다. 숙부인(夫人) 진주하씨(晉州河氏)는 증영의정(贈領議政) 진양부원군(晉陽府院君) 윤린(允潾)의 여(女)며, 영의정(領議政) 호정(浩亭) 윤(崙)의 누이로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汀)을 생(生)하고, 숙부인(淑夫人) 수원이씨(水原李氏)는 추밀원사(樞密院使) 수평군(水平君) 인수(仁壽)의 여(女)고 영흥대도호부사(永興大都護府使) 빈(濱)을 생(生)하였다.
부군(府君)은 문과에 급제하사 고려 공민왕 연대(年代)에 종부령(宗簿令), 순군위(巡軍衛), 여흥군수(麗興郡守), 보문각(寶文閣) 직제학(直提學) 지제교(知製敎), 1383년 양광도(楊廣道) 안렴사(按廉使) 판사(判事), 요동 특사(特使)를 하였고 1387년 연안부사(延安府使), 당직 천호로 계실 때 모함을 받아 우왕에게 참화를 당하셨다.
이때가 바로 조선왕조개국 4년 전(四年前) 1388년이다.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목은(牧隱) 이색(李穡) 같은 명현(名賢)들과의 교유관계로 볼 때 부군(府君)의 인품을 알 수 있다. 묘하(墓下)에 성천사(聖泉寺)가 류씨재사(柳氏齋舍)라는 말에 따라 되찾았으나 하룻밤 화재로 선적(先蹟)이 소실된 듯하다.
부군(府君)의 후손중(後孫中) 조선조(朝鮮朝)에 들어난 이로는 회헌(檜軒) 의손(義孫), 문목(文穆) 숭조(崇祖), 낙봉(駱峯) 헌(軒)이 있고, 시호(諡號)에는 문목(文穆) 숭조(崇祖), 충렬(忠烈) 희철(希哲), 정의(貞毅) 의함(宜涵), 효정(孝靖) 부마(駙馬) 정양(廷亮), 정간(貞簡) 복명(復明), 효간(孝簡) 당(戇), 봉군(封君)은 완원군(完原君) 빈(濱), 완안군(完安君) 효찬(孝纘), 완원군(完原君) 조생(肇生), 완능군(完陵君) 파(坡), 완창군(完昌君) 시성(時成), 전릉부원군(全陵府院君) 의(儀), 전양부원군(全陽府院君) 영경(永慶), 전원군(全原君) 열(悅), 전창군(全昌君) 정량(廷亮), 전평군(全平君) 심(淰), 충신(忠臣)은 증좌찬성(贈左贊成) 희철(希哲),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복립(復立), 철원부사(鐵原府使) 질(秩), 선교랑(宣敎郞) 유흥(惟興), 상선(尙膳) 재현(載賢), 청백리(淸白吏)는 대호군(大護軍) 맹기(孟沂), 대사간(大司諫) 헌(軒), 대사헌(大司憲) 경창(慶昌), 현감(縣監) 정립(貞立), 부사(府使) 경시(敬時), 문(文)으로는 참판(參判) 의손(義孫), 세자사부(世子師傅) 승식(承湜), 대사성(大司成) 숭조(崇祖), 사인(舍人) 감(堪), 참판(參判) 영길(永吉), 진사(進士) 직(㮨), 참판(參判) 의양(義養), 참판(參判) 치명(致明), 벼슬로는 영의정(領議政) 영경(永慶), 형조판서(刑曹判書) 훈(塤), 예조판서(禮曹判書) 복명(復明), 공조판서(工曹判書) 당(戇), 참판급(參判級)으로는 신손(信孫), 계반(季潘), 윤덕(潤德), 세린(世麟), 지신(止信), 영길(永吉), 영립(永立), 영순(永詢), 항(恒), 색(穡), 경창(慶昌), 지(榰), 심(淰), 경(炅), 이복(以復), 강(焵), 의양(義養), 정양(鼎養), 치명(致明), 의(誼), 정수(正秀)다.
[7대손 영립(永立)은 감사 색(穡), 군수(郡守) 계(稽), 군수(郡守) 비(秠) 삼자(三子)가 문과에,] 8대손 인무(仁茂)는 현감(縣監) 정립(貞立), 부사(府使) 경립(經立), 부사(府使) 영립(英立) 삼자(三子)가 문과에, [18대손 찬(瓚)은 부사(府使) 봉수, 시어(侍御) 현수(賢秀), 시어(侍御) 지수(芝秀), 시어(侍御) 난수(蘭秀), 시어(侍御) 홍수(泓秀) 오자(五子)가 무과에,] 독립지사로는 성근(聖根), 호근(浩根), 준군(濬根), 근(瑾), 임(林), 인식(寅植), 시연(時淵), 근세 인물로는 국회의원(國會議員) 기수(驥秀), 치송(致松), 승번(升蕃), 승규(昇珪), 기홍(基洪), 문화공보부 장관(文化公報部 長官) 혁인(赫仁), 산림청장(山林廳長) 종탁(鍾卓), 극동대학교 총장(極東大學校 總長) 택희(澤熙), 시인(詩人) 안진(岸津), 건축가(建築家) 춘수(春秀) 등 각 분야에서 우뚝한 자손들이 부군(府君)의 유덕(遺德)을 빛내고 있다.
부군(府君)의 큰 아들 정(汀)은 칠형제(七兄弟)를 두었는데 현감(縣監) 효지(孝池), 현감(縣監) 혜생(惠生), 목사(牧使) 효산(孝山), 직제학(直提學) 효천(孝川), 효택(孝澤), 집의(執義) 효담(孝潭), 효연(孝淵)이다. 효지후(孝池后) 증참판(贈參判) 종립(宗立)의 후손은 대구, 생원(生員) 재형(再亨)의 후손은 성주, 혜생후(惠生后) 계남(繼男)의 후손은 광양ㆍ옥곡, 호군(護軍) 만영(萬榮)의 후손(後孫)은 산청ㆍ여수, 사정(司正) 사영(士榮)의 후손은 춘천, 효천(孝川)의 아들 세자사부(世子師傅) 승식후(承湜后) 한림학사(翰林學士) 진정(震楨)의 후손은 합천, 감역(監役) 진량(震樑)의 후손은 부산ㆍ대구, 첨추(僉樞) 득춘(得春)의 후손은 밀양 등지에서 살고 있으나 나머지 사형제(四兄弟)는 자손이 없다.
둘째 빈(濱)은 아들 사형제(四兄弟) 장(長) 중부령(中部令) 경손(敬孫), 차(次) 참판(參判) 의손(義孫), 삼남(三男) 참판(參判) 신손(信孫), 사남(四男) 집의(執義) 말손(末孫)을 두셨는데 경손(敬孫)은 아들 대호군(大護軍) 맹기(孟沂), 증참판(贈參判) 지성(之盛)을 두었다. 맹기(孟沂)의 후(后) 부사(府使) 응성(應聖)의 후손은 백천ㆍ장단, 지성(之盛)의 후(后) 참봉(參奉) 응태應台)의 후손은 봉화, 습독(習讀) 흥조(興祖)의 후손은 봉화ㆍ의성에 산다.
둘째 의손(義孫)은 아들이 없어 말손(末孫)의 삼남(三男)인 도승지(都承旨) 계동(季潼)을 후사로 손자 부사(府使) 식(軾), 봉사(奉事) 원(轅), 군수(郡守) 주(輳), 목사(牧使) 곡(轂)을 두셨으며, 식(軾)의 큰아들 참판(參判) 윤덕(潤德)의 후손은 용인, 사자(四子) 인의(引儀) 윤선(潤善)의 후손은 안동, 원(轅)의 증손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지신(止信)의 후손은 파주, 주(輳)의 후(后)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정(檉)의 후손은 고양, 곡(轂)의 아들 별제(別提) 윤방(潤邦)의 후손은 이천, 교관(敎官) 윤범(潤範)의 후손은 강화에 산다.
막내이신 말손(末孫)은 참판(參判) 계반(季潘), 첨추(僉樞) 계장(季漳), 도승지(都承旨) 계동(季潼)을 두셨는데 계반(季潘)의 후(后) 참봉(參奉) 항(沆)의 후손은 음성, 진사(進士) 한(瀚)의 후손은 토산, 악(渥)의 후손은 공주ㆍ김포, 계장(季漳)의 후(后) 전부(典簿) 세붕(世鵬)의 후손은 임실ㆍ춘천, 참판(參判) 세린(世麟)의 후손은 충주ㆍ양주ㆍ순흥ㆍ괴산ㆍ화성, 전첨(典籤) 세구(世龜)의 후손은 진주ㆍ정읍ㆍ여주ㆍ횡성ㆍ순창ㆍ파주ㆍ장단ㆍ청양ㆍ보령ㆍ괴산ㆍ음성ㆍ옥천ㆍ천안ㆍ의정부ㆍ가평ㆍ양평ㆍ정산, 사과(司果) 세붕(世鳳)의 후손은 남원에 산다. 계동(季潼)은 중부(仲父)의 후(后)로 출계(出系)하였다.
부군(府君)의 자손들은 근세에 더욱 번성하여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시호(諡號)를 받은 분이 6, 봉군(封君) 10, 충신(忠臣) 5, 청백리(淸白吏) 5, 영의정(領議政) 1, 판서(判書) 3, 참판(參判) 20, 문과(文科) 85, 무과(武科) 136, 사마(司馬) 263, 열녀(烈女) 11, 효자(孝子) 44, 수직(壽職) 111, 음사(蔭仕) 230인이고 최근세에는 독립지사(獨立志士) 40, 장차관(長次官) 2, 국회의원(國會議員) 5, 대학총장(大學總長) 1인, 문인(文人) 등 천(千)여명에 이르며, 손세(孫勢)는 일만 오천(一萬五千)여 세대(世帶)나 되고 많은 자손들이 국내외에서 부군(府君)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부군(府君)께서는 학덕(學德)이 높으시어 명현(名賢)들과 교유(交遊)하시며, 선정(善政)을 베푸시던 중 난신(亂臣)의 모함으로 천수(天壽)를 못 누리심이 애통(哀痛)하기 그지없다. 여말(麗末) 격동기라 남기신 사적(事跡) 전해오지 않아 후세에 아쉬움이 끝이 없으나 후손(後孫)이 진진함은 모두가 음덕(蔭德)이니 세상에서 지덕(知德)있고 강상(網常)을 상론(尙論)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유래(流來)에 근거해서 원천(源泉)을 알 것이다.
이제 문화재(文化財) 지정으로 재사(齋舍)를 중수(重修)하고 후손들이 힘 모아 묘역을 정화하여 자손만대의 성역(聖域)으로 보존(保存)하여 선조님의 유덕(遺德) 기리 전하렵니다.
2004年 갑신(甲申) 10月 日
二十代孫 前直提學公派大宗會 會長 國會議員 升蕃 謹撰
國立江原大學校 敎授 文學博士 平海後人 黃在國 謹書
十九代孫 直提學公派大宗會 管理理事 太植 謹竪
出處 : 虎巖 柳忠秀ㆍ柳基松 編
4) 배묘갈명(配墓碣銘)
가) 증숙부인진주하씨묘갈명(贈淑夫人晉州河氏墓碣銘)
晉州北雪梅里桐坊原有古墓墓南有繫牲石銘曰正順大夫延安府使柳克恕妻河氏之墓永樂十五年所辦也紀元四十二年柳公止信受鉞兵營兼知晉州事晉今爲營公乃夫人七世孫詢古老摭其銘聿鋤蓁蕪重崇四尺而封之四時香火又伐他山改表墓而叙系爲藏按夫人晉姓麗朝左司郞中贈門下侍中同中書平章事諱拱辰之裔曾祖諱湜贈純忠補祚功臣崇祿大夫判司評府事晉康君祖諱恃源贈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判兵曹事晉康府院君考諱允潾贈忠亮翼戴愼德守義協贊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晉陽府院君行奉翊大夫順興府使晉陽娶贈崇祿大夫議政府贊成事判戶曹事姜承祐之女生夫人領議政晉山府院君崙其弟也延安亦完山大姓考諱濕贈司憲府掌令妣完山崔氏五子一壻俱捷文科公其一也以故封三韓國大夫人公歷職寶文閣直提學知製敎而夫人之葬事在其前故以延安考之夫人生二男一曰汀戶曹正郞二曰濱永興府使府使生叅判義孫叅判生缺都承旨季潼承旨生廣興郡守輳郡守生贈戶曹叅議潤門叅議生贈兵曹判書參判書生三男長曰止孝生員次止敬都摠都事次節度公生員生應時宣傳官節度生應泂今爲都摠都事夫人表內宗介蟬聯珥玉麟趾螽斯固記節度之仍孫而節度今爲武宗來作嶺南保障國家倚爲場城前隆爵崇秩其無涯矣
萬曆四十四年二月 日立
通政大夫 咸陽郡守 李成吉 謹撰
生員 韓夢寅 謹書
出處 : 柳乘追述 柳永熙 編
진주의 북쪽 설매리 동방 언덕에 옛 무덤이 있는데 묘의 남쪽에 있는 묘표석[계생석(繫牲石)]에 새긴 글에 이르기를 정순대부 연안부사 류극서의 처 하씨의 묘라 하고 태종17(1417)년에 세운 것이다. 광해군6(1614)년에 지신(止信)이 병영 겸 지진주사(知晉州事)가 되었는데 진주는 지금 영(營)이 되었다.
공은 부인의 8세손인데 옛 노인에게 물어 호미로 파서 우거진 잡초 속에서 마침내 글을 새긴 비석을 찾고, 1.2m(4척) 높이로 봉분을 쌓고 춘하추동으로 제사를 지내게 하고 또한 다른 산의 나무를 베어다가 묘를 표시하고 가계(家系)를 적어 묻었다.
살펴보니 부인께서는 진주의 성씨로서 고려 때 낭중을 지내고 문하시중동중서평장사에 추증된 하공진의 후예로서 증조할아버지 하식은 증순충보조공신 숭록대부판사평부사 진강군이고 할아버지 하시원은 증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판병조사 진강부원군이다.
아버지 하윤린은 증충량익대신덕수의협찬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진양부원군 행봉익대부순흥부사이며, 진양부원군이 증숭록대부의정부찬성사판호조사 강승우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부인을 낳으니 영의정 진산부원군 하륜은 그녀(하씨부인)의 아우이다.
공(연안)도 또한 완산의 큰 성씨이다. 아버지 습은 증사헌부장령이고 어머니는 전주(완산) 최씨로서 다섯 아들과 1사위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삼한국대부인에 봉해졌는데 공은 그 중의 한 분이다.
공은 보문각직제학지제교를 지내었으나 부인의 장례(葬禮)가 그 전에 있었기 때문에 연안[부사]로 하였다. 부인은 2남을 낳았는데 큰 아들 정(汀)은 호조정랑이고 막내 빈(濱)은 영흥부사이다.
부사는 참판 의손을 낳고 참판은 도승지 계동을 양자로 맞았다. 도승지는 광흥군수 주(輳)를 낳고 군수는 증호조참의 윤문을 낳고 참의는 증병조판서 삼(參)을 낳았다.
판서는 3남을 두었는데 큰아들 지효는 생원이고 둘째 지경은 도총도사이고 막내가 절도공이다. 생원은 응시를 낳았는데 선전관이고 절도공은 응형을 낳았는데 지금 도총도사를 하고 있다.
부인은 집안을 잘 다스려 훌륭한 자손이 연이어 나니 모두 기록할 수 없구나. 절도공은 부인의 7대손이니 절도사로서 무관의 수령으로 와 영남을 방위(防衛)하여 나라의 간성 역할을 다 하니 앞으로 벼슬의 융성과 승진에 장애가 없을 것이다.
광해군8(1616)년 2월 일 세우다.
통정대부 함양군수 이성길이 짓다.
생원 한몽인이 쓰다.
다) 증숙부인수원이씨묘표명(贈淑夫人水原李氏墓表銘)
夫人은 水原李氏 樞密院使 水平君 仁壽의 女로 高麗國 延安府使이신 全州柳氏 諱 克恕의 配位이시다. 生沒年代는 알 수 없으나 夫君의 墓下에 禮葬한 것으로 보아 夫君보다 후에 돌아가신 것으로 推定되며, 孫 義孫의 貴로 淑夫人에 追贈되셨다.
민망하게도 지금까지 表石을 세우지 못하다가 虎巖齋가 慶尙北道 地方文化財로 指定되어 오늘 重修 竣工됨과 때를 맞추어 墓域을 擴張 淨化하고 譜牒에 根據하여 表石을 세우니 子孫 萬代에 奉審을 게을리 하지 말고 追遠報本할 지어다.
2004년 甲申 9월 25일
二十代孫 範烈 謹撰
全州柳氏 直提學公派宗中 謹竪
첫댓글 중간에 실전되어 오랫동안 성묘를 못하다가 7대손 기봉공(복기)이 성심으로 찾아서 관찰사공 영순이 비석을 세우고 상세히 기술하였으나 오히려 빠뜨리고 잘못한 바가 있으니 시조 위에 1세를 더하여 족보도 정오(正誤)를 하고 시조의 이름자를 습(習)자로 써서 본 비석문에 전하고 있으니 모두 고처야만 할 것이다.
우리 고흥유씨의 10대조 이신 양정공 유습 할아버님의 함자가 전주유씨 시조로도 거론되니 이는 필시 전주유씨측의 착오라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