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최고의 장인, 기와노 시게루
염동호 호세이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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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 신칸센으로 약 한 시간, 일본의 대표적인 관광지 이즈반도를 가로지르는 국도 136호에 자리한 우동집 ‘문화공로상’을 찾았다. 부인 토미에 씨와 함께 운영하는 이 우동집의 주인이 바로 ‘인력거의 신’이라 불리는 가와노 씨다. 20석이 될까 말까 한 그리 크지 않은 우동집 중앙 벽면에는 ‘저는 사회문화공로상을 수상한 사람입니다. 세상과 인간에게 유익한 일을 하고 싶습니다’라는 글이 걸려 있다. 옹고집 장인의 곁을 지켜온 부인 토미에 씨와 함께 그가 반가운 표정으로 필자를 맞이한다. 부부는 서로 기억을 더듬어가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둘은 평생 부부싸움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바보처럼 성실해요. 한번 한다면 그대로 하는 옹고집이지요. 게다가 지독한 마마보이이기도 해요.”
그는 효성이 지극한 소년이었다. 어머니가 아프기 시작한 13세 때부터 돌아가시던 날까지 매일같이 직접 수타 우동을 만들어드렸다고 한다. 개업한 지 3년 된 이 집 우동의 역사는 그래서 73년인 셈이다. 그는 인력거 공장이 완전히 불타자 우동집을 냈다.
“2008년 12월 공장 화재로 모든 것을 잃었어요. 40여 년간 쌓아온 것이 한순간에 날아가버린 거죠. 부품을 만들던 각종 공구와 기계는 물론 납품을 하루 앞둔 인력거 12대와 가마 13대까지 모두 불에 탔어요.”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는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달리기를 멈추려 하지 않았다. 모두 말렸지만 그는 인근에 토지를 빌려 공장 재건에 나섰다. 인력거에 들어가는 부품은 자그마치 573개. 직접 만든 공구도 있지만 대부분 자동차 부품 제조에 사용하는 고성능 기계라 구하기 어려웠다.
“의욕은 왕성했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공구가 갖춰지지 않으면 예전과 같은 제품을 만들 수 없죠. 40년간 만들고 닦아온 공구들을 1~2년 사이에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의 인력거는 부품 제조에서부터 조립에 이르기까지 모두 수작업이다. 대당 평균 제작기간 35일. 한 달에 두 대밖에 못 만든다. 그러다 보니 가격도 비싸다. 표준 모델이 165만 엔, 전동인력거는 225만 엔에 달한다. 첨단장비를 탑재한 자동차보다 비싸다. 여기에 옵션을 추가하면 부르는 게 값이다. 그래도 가격을 깎자는 고객은 없었다고 한다. 그의 인력거는 자동차에 버금가는 정밀도와 견고함을 자랑한다. 차륜을 제외한 부품의 98%를 직접 수작업으로 가공해 가볍고 내구성이 뛰어나다. 수명은 자동차의 10배인 150년이나 된다. 그의 독창성이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차체의 흔들림을 제어하는 용수철. 그는 단순 스프링 대신 활 형상의 커브를 한 세 장의 금속판을 사용했다. 자갈길에서도 차륜의 흔들림을 흡수하는 그만의 롤러베어링 방식을 채용했다. 그래서 자동차보다 승차감이 좋다는 평이다.
차체 무게 80kg짜리 인력거에 체중 200kg 스모 선수를 태워도 20도 경사의 언덕길을 가볍게 산책하듯 올라갈 수 있다. 자동차공학 전문가들은 이런 부드러운 주행이 가능한 것은 특유의 균형감 때문이라고 한다. 인력거 손잡이를 끄는 위치까지 올린 후 손을 떼어도 인력거가 그대로 수평을 유지하도록 설계되었다. 부품 제조 작업은 목수, 연금, 판금, 도장, 봉제 등 기본기술을 포함해 23가지 직종의 전문기술이 필요하다. 그는 이 모든 것을 혼자서 해결했다. 여기에는 그의 초인적인 노력과 다양한 경력이 크게 작용했다.
원래 그는 일본도를 만드는 장인, 도장(刀匠)이었다. 14세 때 도장의 제자가 되어 일본도를 만들면서 철의 특성을 온몸으로 체득했다. 일본도 스승이 자동차 수리공장을 겸업했던 터라 자동차 수리도 거들었다. 지기 싫어하는 성격에 뛰어난 눈썰미, 장인 기질을 보유한 그는 눈을 감고도 자동차 볼트 번호를 맞추고 설계도를 그릴 정도가 됐다. 전후(戰後) 일본도 제조가 금지되자 그는 자동차 부품공장을 차렸다. 그의 나이 20세 때였다. 매출은 눈부시게 신장했다.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확대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30종류의 사업에 손을 댔다. 손대는 사업마다 모두 성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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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으로서, 사업가로서 모든 것을 인정받고 경제적인 부도 얻었다. 하지만 가슴 한켠이 뻥 뚫린 것 같은 허전함을 느꼈다.
“좌우명으로 가슴에 새겼던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말이 떠올랐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이에요.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는 자신의 공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 이름을 남기고 싶었다. 전 세계의 탈것을 모아 박물관을 만들기로 했다. 탈것을 수집하던 그는 1971년 메이지 시대에 만들어진 허름한 인력거를 보곤 소름이 끼쳤다.
“바로 이거다! 했지요. 자동차 부품기술을 응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메이지 시대 최대 발명품 가운데 하나였던 인력거는 일본에서 거의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는 만사 제쳐놓고 인력거 연구에 몰입했다. 그의 나이 45세, 잊었던 장인정신에 인력거가 뜨거운 불을 지핀 것이다. 닥치는 대로 해체와 조립을 반복했다. 6개월 후 오리지널 설계도를 그리는 데 성공했다. 그 후 인력거, 다이묘 가마, 마차, 왕실 어용차 등 역사성이 짙은 탈것은 모두 재현할 수 있는 1인자가 된 그는 자동차 부품공장 문을 닫고 인력거 공장을 열었다. 그의 장인정신의 원천은 끝없는 도전정신. 세계적인 특허만 13개를 보유하고 있다. 아이드링크스톱을 비롯해 속도제한장치, 원터치스탠드, 레미콘, 레지스터, 냉장고 좌우개폐장치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발명품은 십 수년이 지난 지금 빛을 발하고 있다. 자동차의 아이드링크스톱 시스템은 최근 닛산자동차에 채용됐고, 냉장고 좌우개폐장치는 수년 전 상용화됐다.
사회를 위해 살겠다는 그의 인생목표에는 멈춤이 없다. 최근엔 양로원 건설을 위해 토지를 구입했다. 3년 후 실행에 옮길 생각이란다. 그에게 후배를 위한 메시지를 부탁했다.
“항상 생각하고, 항상 연구하고, 그리고 손을 놓지 말고 지속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