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그 밀사(密使)-100년전으로의 여행
1.
1904년 개전된 러일전쟁의 승리와 1905년 7월의 가쓰라-태프트 밀약(The Katsura-Taft Agreement)으로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조선 지배가 서로 용인되었고, 또한 포츠머드 조약(Treaty of Portsmouth)에서 러시아도 일본의 조선지배를 승인하게 되었다. 이로써 일본은 구한말의 세계적인 군국주의(軍國主義)로 진입되었으며, 조선(朝鮮)을 합병하고자 하는 간악한 의도가 세계적인 열강들에 의해 협의되고 인정받게 되었다.
1905년(乙未) 11월18일 새벽 고종(高宗)이 기거하던 중명전(重明殿)에서 일본은 경운궁(慶運宮-현 덕수궁) 내외에 일본군을 배치하여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가운데 고종과 대신들에게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에 조인할것을 강요하였다.
이보다 앞선 15일 이등박문(伊藤博文)은 수옥헌(漱玉軒)에 들어가 뜰에서 고종을 뵙고 보호조약(保護條約)을 제청하였으나, 고종황제는 다음과 같이 배척하였다고 기록은 전한다.
“짐(朕)은 차라리 몸을 바쳐 순국(殉國)할지언정 결코 승인할 수 없다“
이에 이등박문이 병력(兵力)으로 처리하겠다고 위협하였으나, 끝내 고종황제로부터 윤허(允許)를 얻지 못하였다고 한다.
고종은 이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에 대해 도장을 찍은 적도, 권한을 위임한 적도, 조약을 비준한 사실도 없다는 점에서 볼때, 을사보호조약은 성립된 것이 아니며, 당시 외부대신(外部大臣) 박제순(朴齊純)과 일본공사 하야시(林勸助)사이에 조약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고, 또한 그 문서가 남아있다. 1905년 11월20일 우국지사(憂國之士) 장지연(張志淵)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실리게 된다.
1905년 11월에 일본정부가 조선의 종주국이라는 합의를 조선정부로부터 받았다는 발표가 있은지 단 며칠만에 미국(美國) 공사관(公使館)은 이 문제에 대해 조선인들이 아무런 설명을 할 틈도 없이 일본의 동맹국인 영국(英國)보다도 먼저 조선에서 철수해 버렸다.
2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의 성립을 고종은 인정하지 않고, 이를 여러곳에 알리려 노력했고 그 노력의 하나가 바로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밀사(密使)를 보낸 일이었다.
1906년6월 평화회의의 주창자인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2세는 1907년7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의 초청장을 보내오게 된다. 이에 고종(高宗)은 이상설,이준,이위종 세사람을 특사(特使)로 임명하여 비밀리에 파견하게 되고 이를 통해 을사보호조약의 부당함을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한 조치였다. 결국 이 사건은 고종(高宗)의 강제퇴위를 가져오게 되며,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고종황제의 나라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절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헤이그 특사(特使)파견은 철저히 비밀리에 이루어졌고, 고종에 의해 특사로 임명되었던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 : 1863-1949)의 주도적인 역할에 힘입은 바 크다.
이상설과 이준, 헐버트는 모두 블라디보스톡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통해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는데, 1907년의 블라디보스톡은 이미 고증한 바와 같이 현 바이칼호수 서남쪽의 이르쿠츠크였고 그 아래에 조선의 경흥(慶興)이 위치하고 있었다.
드디어 1907년 7월9일 이위종이 조선인 특사(特使)들을 대표하여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호소(A Plea for Korea)를 프랑스어로 연설한다. 그러나 서구열강들은 조선에 대해 어떠한 관심도 표명하지 않았고, 또한 일제(日帝)의 사전 정지작업으로 인해 모든 것은 일본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좌절을 견디지 못했던 특사(特使) 이준(李儁)은 7월14일 울분으로 토하고 순국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준(李儁)선생의 순국과 관련해 그동안 우리는 선생이 배를 갈라 피를 뿌리고 순국한 것으로 배워 왔는데, 사실은 얼굴에 난 종기가 분노로 인해 악화되어 분사(憤死)했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쪽의 검열로 인해 우리는 그러한 자초지종을 정확히 알수 없었고, 누군가에 의해 뿌려진 소문이 할복자살의 영웅담으로 회자되어 왔다는 것이다.
3.
최초 러시아는 대한제국을 초청했으나, 막상 1907년6월30일 회의가 개막되자 러시아는 대한제국 대표의 회의장 입장을 거부하게 된다. 고종임금 최후의 시도가 좌절된 것이다.
러시아는 대한제국 헤이그 특사(特使)의 파견을 일본측에 알려주었던 것이고, 이후 7월30일 러시아와 일본은 러일 비밀협약을 통해 만주(滿洲)와 몽고그리고 조선(朝鮮)에 대한 이해관계를 조율하게 된다. 이 협약에서의 만주(滿洲)는 알타이산의 북쪽에 있는 거대한 지역이 되며, 이 협약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는 세계강대국들의 용인과 묵인하에 조선의 강제합병과 반도이주를 본격적으로 추친하게 된다.
러시아는 조선의 마천령(摩天嶺)이북과 우랄산의 동쪽에서 바이칼호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확보하게 되었고, 미국은 백두산인 알타이산의 남쪽 기슭에 있었던 세계최대의 운산금광에 대한 최초 25년간의 채굴권(採掘權)을 이상없이 실행할 수가 있었다. 미국은 일본의 조선지배 용인에 대한 댓가로 이 채굴권을 25년 만기인 1922년이 아닌 1939년까지 운영하다가 일본인에게 넘기게 되는데 이는 조선(朝鮮)의 운산(雲山)금광에서 천문학적인 금의 채굴이 있었음을 반증해 주고 있기도 하다.
이를 통해 막대한 금(金)을 비축한 미국은 1944년 브레튼우즈 체제를 만들어 금본위제(金本位制)를 강화해 달러와의 연동을 형성시켜 세계경제는 미국의 달러에 의해 운영되는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2020.12.17.송계(松溪)
첫댓글 지금 한반도는 금광을 비롯하여 기타 자원이 거의 없는데 19세기 말 당시 조선에 외국의 여러나라들이 벌떼처럼 달려 든 것을 보면 참 이상하기도 했죠. 고등학교때 배운 역사책에는 뭐 금광이 천지에 깔려 있더구만요. 엘도라도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이 엘도라도 였던 것으로 생각이 드네요. 이걸 보아도 조선은 한반도에 있지 않았던 것이 거의 분명해 보이네요.
맞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가짜 허구의 역사를 모두 알수 있는데, 아쉬운 부분입니다.
늘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읽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모두
건강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항상 멀리서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지인도 퍼스지역에서 호주공무원으로 생활중에 있습니다. 정년끝나면 고국으로 들어온다고 하네요.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