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5월 18일 상황
o 5월 18일 01시 10분경 전남대에 진주한 33대대는 1개 지역대가 학내(學內)를 수색하여 잔류 학생 69명을 체포하였고, 조선대에 배치된 35대대는 11지역대 1개 중대가 건물을 수색하여 잔류 학생 43명을 체포하여 06시경 31사단 헌병대에 인계하였음.
o 03시 05분 2군사령부로부터 무기고 안전대책 강구 지시가 하달되었으며, 이에 따라 전교사는 예하 부대에 무기고 안전대책을 강구할 것을 지시하여 5월 18일 광주시내 직장예비군이 보유하고 있던 무기 4,717정과 탄약 116만 발을 회수하였고, 31사단의 무기고 접근자 발포 승인에 대하여는 군인복무규율에 따라 지휘관이 재량 실시하도록 지시하였음.
o 5월 18일 - 전남대학교 앞, 일요일인 5월 18일 09시경 전남대 정문에는 등교하는 학생과 출입을 통제하는 7공수여단 33대대 간에 시비가 벌어진 가운데 10시경 휴교령이 내릴 경우 학교 정문에 모여 시위를 하기로 한 행동지침에 따라 학생들이 200여명으로 증가하고, 비상계엄 해제하라, 공수부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돌을 던지는 등 시위를 하자 33대대장은 귀가를 종용하면서 불응시에는 강제 해산하겠다고 경고하였음.
o 학교 출입을 제지당한 학생들은 계엄 확대와 휴교 조치에 항의하면서 돌을 던졌고, 이에 공수부대원들은 학생들을 향해 함성을 지르며 돌진하여 해산을 시도하였는데, 일부 공수부대원들은 학생들이 던진 돌에 다친 데 분개하여 도주하는 학생들을 쫓아가 진압봉으로 어깨, 머리 등을 가격하고 체포한 학생들을 난폭하게 연행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공수부대원 7명과 일부 학생들이 부상하였음.
o 10시 30분경 전남대 후문 쪽에서는 야유를 보낸다는 이유로 시내버스에서 내리거나 시내버스를 타고 있는 학생을 공수부대원이 진압봉으로 가격하고 더러는 연행하여 꿇여 앉혔으며, 공수부대원들에 쫓긴 학생들은 도청 앞에 모이기로 한 투쟁지침에 따라 대열을 이루어 광주역, 공용터미널을 거쳐 금남로로 진출하였음.
5. 18 - (광주시내 상황)
o 5월 18일 10시 30분경 학교 출입을 거부당한 전남대 학생들을 주축으로 한 대학생 1,000여명이 광주 시내 금남로에 집결하여 '계엄 해제'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면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자, 경찰은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사용하여 진압을 시도하고, 시위대는 돌과 화분을 던지는 등 경찰과 학생들간에 일진일퇴의 공방이 벌어졌는데, 시위대 200여명은 경찰의 진압에 항의하여 충장로파출소에 몰려가 돌을 던져 파출소 창문이 파손되었음.
o 동일 오후 시위대는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12시 45분경 산수동 파출소를 습격하였고, 13시 20분경 시위대가 돌을 던지면서 기습하자, 학생회관 정문에서 점심식사를 하던 전경들이 도주한 사이에 시위대는 경찰 페퍼포그차를 전복(顚覆)시키고 방화하여, 페퍼포그차 1대가 전소(全燒)되었음.
o 14시 40분경 금남로 일대에는 1,500여명으로, 충장로 일대에는 1,600여명으로 불어난 시위대가 경찰을 향하여 보도블록과 음료수병을 던졌으며, 15시 50분경 시위대 300여명이 동산파출소에 투석을 하였고, 경찰은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사용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전교사에 군병력의 투입을 요청하였음.
o 5월 18일 10시경 진종채 2군사령관은 광주지역에서만 전남대 앞에서 계엄군과 학생들 간 충돌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 현지 확인 및 작전 지도 차 광주를 방문하였고,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14시경 이희성 계엄사령관으로부터 다른 지역에는 시위가 없는데, 광주에만 시위가 있으니 빨리 진압하라는 지시를 받고 정 웅 31사단장은 500MD 헬기를 타고 전남대와 조선대로 가서, 7공수여단 33·35대대장에게 경찰이 수세에 몰려 있다면서 16시에 병력을 투입하여 시위를 진압하되, 도청 앞은 경찰이 차단하고 있으니 35대대는 금남로를 중심으로 좌우측 도로를 차단하고 33대대는 금남로에서 도청 방면으로 압축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킬 것을 명령하였음.
o 한편 동일 09시부터 전남대 앞 충돌 상황 등 광주상황을 보고받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대응 병력이 2개 대대 600여명에 불과하여 추가 병력 투입의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 김재명 작전참모부장에게 1개 공수여단의 투입을 지시하고, 김재명 작전참모부장은 14시경 정호용 특전사령관의 지정에 따라 11공수여단을 투입하기로 결정하고 15시 11공수여단을 수경사 작전통제로부터 해제함과 동시에, 11공수여단에 광주로 이동하여 2군사령부 작전통제하에 소요 사태를 진압하라는 작전명령을 시달하였음.
o 15시 30분경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11공수여단이 주둔하고 있는 동국대학교로 가 최 웅 11공수여단장에게 광주에 7여단 2개 대대가 계엄군으로 나가 있으나 고전을 하고 있다면서, 광주에 가서 7여단을 도와 임무수행을 잘 하라고 지시하고 최 웅 11공수여단장은 즉시 여단 작전참모와 61대대 1지역대 병력을 선발대로 하여 16시 30분경 성남비행장을 출발하였고, 61대대 잔류 병력과 62·63대대는 17시 청량리역에서 열차편으로 광주로 출발하였음.
o 정 웅 31사단장의 출동 명령에 따라 15시 35분경 전남대를 출발한 7공수여단 33대대는 유동 삼거리를 거쳐 북동 180번지 앞 횡단보도 금남로 끝 부분으로 이동,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던 중 16시경 자진 귀가하라는 선무(宣撫) 방송에도 시위대가 해산하지 않자 33대대장은 시위진압 명령을 내렸음.
o 공수부대원들은 M16 소총을 등 뒤에 메고, 손에는 진압봉을 든 상태에서 진압대형을 유지하여 도청 방향으로 진군, 시위대를 압축해 나가다가, 돌격 명령이 내리면 함성을 지르며 시위대를 향하여 돌진하면서 진압봉으로 시위대를 타격하는 방법으로 시위대를 해산시켰는데, 시위대의 투석으로 부상자가 발생하자 흥분한 공수부대원들은 인근 점포나 골목, 건물 안까지 진입하여 시위대를 체포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대와 시민들을 진압봉으로 가격하고, 도주를 방지한다는 이유로 체포된 시위대의 상의나 하의, 혁대를 벗기거나 머리를 땅에 처박게 하는 등 기합을 주기도 하였음.
o 조선대를 출발한 7공수여단 35대대는 16시경 광주전화국 부근과 광주일고 부근 천교에 도착, 시위진압 작전에 들어갔는데, 35대대장은 돌을 던지며 경찰과 대치하고 있던 1,000여명의 시위대에 자진 귀가하라는 선무 방송을 하였으나 시위대가 계속 돌을 던지고 구호를 외치며 해산하지 아니하자, 대대원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음.
o 공수부대원들은 M16 소총을 대각선으로 등 뒤에 메고, 방독면을 차고, 방석망은 내린 채 시위대를 향해 돌격하면서 진압봉으로 시위대를 가격하여 해산을 시도하였고, 35대대의 시위 진압은 시위대를 추적, 체포하는 과정에서 부근 공용터미널 일대에까지 확대되었음.
o 18시 전남북계엄분소는 광주시내 통금시간을 1시간 앞당겨 21시 - 04시로 발표하였음.
o 17시 50분 광주공항에 도착한 11공수여단 선발대인 61대대 1지역대는 숙영지인 조선대로 이동하면서 시내 상가지역에서 위력시위를 하였고, 18시 11공수여단 3개 대대를 5월 19일 00시부로 31사단장이 작전통제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음.
o 19시 정 웅 31사단장은 7공수여단 35대대장으로부터 시위 진압을 완료하였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그후에도 23시경까지 한일은행 뒤·노동청 앞·카톨릭센터 앞 등지에서 2,000여명의 학생들이 산발적으로 시위를 벌였음.
o 이날 시위대는 모두 273명이 체포되어 31사단 헌병대에 인계되었으며, 시위 진압 과정에서 부상을 입은 김경철(남·28세·제화공)은 통합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후두부 찰과상 및 열상으로 5월 19일 03시 사망하였고, 이종남(남·27세)등 광주 시민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음.
o 이날 광주지역에는, 여학생을 발가벗긴 채 칼로 유방을 도려내어 죽였다, 임산부를 대검으로 찔러 태아를 꺼내 길에 뿌렸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는 등 출처를 알 수 없는 유언비어가 유포되었음.
o 정 웅 31사단장은 5월 18일 21시 31사단 상황실에서 작전평가회의를 열고, 7공수여단 33, 35대대 병력을 전남도청을 중심으로 주요 시설 및 교차로 등 거점에 배치, 시위대가 집결을 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지시하여, 22시 30분 - 23시 20분 사이에 경찰 지·파출소와 도로 교차지점을 중심으로 33대대는 17개 거점에, 35대대는 19개 거점에 각각 장교 1명, 사병 10명으로 구성된 공수부대 1개 지대와 경찰 2개 분대 24명씩을 배치하였으나, 11공수여단의 추가 투입에 따라 23시 40분 다시 작전회의를 열어 33, 35대대 배치 거점을 11공수여단에 인계하고 33대대는 전남대로, 35대대는 조선대로 각 복귀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