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권 60
2023년에 읽은 정서(淨書)
새해가 밝았습니다. 독자 여러분들 모두 건강한 새해, 희망찬 새해 맞이하시길 빕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오늘은 「정신게」의 ‘받을 수’ 마지막 구절(행자정수금강심)을 공부해야 합니다만, 매년 연말이면 하는 ‘연말행사’를 못 해서 새해 벽두에 그것부터 정리하고자 합니다.
‘정서’라는 말은 우리도 안 쓰고, 일본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말은 아닌 듯합니다.
선불교의 책을 ‘선서(禪書)’라고 함에 대하여, 정토불교의 책을 ‘정서’라고 하자는 저의 생각을 담은 말입니다.
‘정서’가 우리들 사이에 우뚝 서게 될 때 정토신앙의 뿌리 역시 그만큼 깊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2023년 한 해 동안 제가 읽은 정서목록을 우선 정리해 봅니다.
① ⟪반주찬(般舟讚)⟫(善導/선도)② 정토법문원류장(淨土法門源流章)⟫(凝然/교넨)
③ ⟪정토론주(淨土論註)⟫(曇鸞/담란)
④ ⟪안락집(安樂集)⟫(道綽/도작)
⑤ ⟪선택본원염불집(選擇本願念佛集)⟫(法然/호넨)
⑥ ⟪왕생요집석(往生要集釋)⟫(法然/호넨)⑦ 대승무량수장엄청정평등각경(大乘無量壽莊嚴淸淨平等覺經)⟫(夏蓮居/샤렌 쥐)
⑧ ⟪무량수경⟫(魏源)
⑨ ⟪칠개조제계(七箇條制誡)⟫(法然/호넨)
⑩ ⟪기신론⟫ 중 전의염불(專意念佛)
⑪ ⟪관무량수경⟫ ⑫ ⟪역사 속에서 보는 신란⟫(平雅行/타이라 마사유키)
⑬ ⟪근대 일본과 신란⟫(安冨信也/야스토미 신야)
⑭ ⟪정토문류취초⟫(親鸞/신란)
⑮ ⟪관념법문(觀念法門)⟫(善導/선도)
⑯ ⟪살아계신 법장보살⟫(鍵主良敬/카키누시 료케이)
⑰ ⟪아미타경⟫
⑱ ⟪관경소현요기파문(觀經疏顯要記破文)⟫(源信/겐신)
⑲ ⟪삼국유사(광덕엄장)⟫(一然/일연)
일기 속에 적어 두었기 때문에, 어떤 인연 속에서 이러한 책들을 읽게 되었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하나 소개해 봅니다.
① ⟪반주찬⟫은 선도대사의 저서입니다. 정식 이름은 ⟪의관경등명반주삼매행도왕생찬(依觀經等明般舟三昧行道往生讚)⟫입니다. ‘⟪관무량수경⟫에 의지하여 반주삼매의 수행과 왕생을 밝히고 찬탄하다’라는 뜻의 제목입니다. 읽어보면, 반주삼매(부처님이 우리 앞에 나타나서 보이는 삼매)를 설하는 ⟪반주삼매경 내용보다 ⟪관무량수경 내용이 더 많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 두 경전의 관계를 밝히는 것은 숙제일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② ⟪정토법문원류장⟫은 일본 가마쿠라 시대 화엄종(나라 東大寺)의 학승 교넨스님의 저술입니다. 화엄종 스님이 정토종에 대한 책을 쓴 것입니다. 그만큼 호넨스님의 불교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주로 서술되는 것은, 호넨스님의 교단이 어떻게 펼쳐져 갔는지 하는 내용입니다. 이 책은 야나기 무네요시 선생의 ⟪나무아미타불⟫에서도 자주 언급됩니다. ⟪나무아미타불⟫을 번역할 때, 어려웠던 것 중 하나가 호넨스님 제자들의 정토사상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 하는 점이었습니다. 호넨스님이 ‘원’이라면, 그 제자들은 ‘류’입니다. 2018년 봄 교토에서 공부할 때, 이 책에 대한 정토종 스님학자의 강의(정토종 후원의 무료 강좌)를 세 번 들은 일이 있습니다. 류칸(隆寬) 1회, 쇼쿠(證空) 2회를 들었습니다. 다만, ⟪정토법문원류장⟫에는 신란스님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만큼 호넨스님 교단에서 존재감이 옅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마 그때까지만 해도 신란스님의 저술이나 사상이 화엄종 학승인 교넨에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③ ⟪정토론주⟫부터 ⑥ ⟪왕생요집석⟫까지는 영관스님의 석사논문을 지도할 때, 그 주제가 칠고승(七高僧)이었기에 읽어보게 된 것입니다. ⟪정토론주⟫는 세친의 ⟪정토론⟫을 주석한 책입니다. 너무나 유명하고 너무나 중요한 책입니다. 우리나라 원효스님의 정토사상을 연구할 때도 반드시 담란스님은 참조해야 합니다. 영향을 받은 바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시간이 없어서 포기하고 만 주제의 하나가, 바로 담란스님의 ⟪정토론주⟫에 나타난 무상(無相)과 무생(無生)의 사상을 통해서 원효의 ⟪무량수경종요⟫나 ⟪불설아미타경소⟫ 대의(大意)를 조명해 보는 것입니다.
④ 안락집은 대단히 어려운 책입니다. 어려운 이유는 난삽(難澁)해서입니다. 전체적인 목차가 없습니다. 이 난점을 영관스님이 석사논문 「신란의 칠고승에 한국고승이 없는 이유 연구」에서 나름대로 12대문(大門)의 목차를 만들어서 이름을 붙였습니다(47-48쪽). 안락집은 원신(겐신)의 왕생요집에 여러 가지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⑤ 선택본원염불집은 선택집입니다. 얼마 전에 어디서 제출하라고 해서, 정리해 보니 지난 3년 동안 정토에 대한 논문을 8편 발표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하나 다 공을 들였고, 나름으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어느 것이 제일 중요한지 평가가 다를 수 있는데, 저로서는 「무량수경의 제18원 연구 – 제20원과 관련하여 -」(인도철학 제67집)를 꼽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그 논문이 ‘21세기 판 선택본원염불집’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선택집의 주제는 ‘모든 선행이 왕생의 방법론’이라고 보는 제행본원(諸行本願) 내지 제행왕생(諸行往生)의 사상이 잘못이고, 오직 염불왕생만이 아미타불이 제시한 본원임을 밝히는 것입니다. 저의 논문은 그 점을 범본이라든가 무량수경의 이역본(異譯本)까지 살피면서 문헌학적으로 증명하고자 하였습니다.
⑥ 왕생요집석은 겐신의 왕생요집에 대한 호넨스님의 주석입니다. 종래 7고승을 말할 때, 선도에서 호넨으로 이어지는 맥락은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만, 그 사이에 왜 겐신이 들어가는가? 용곡대학의 한 교수님께 질문을 한 일이 있지만, 선명한 대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대답이 왕생요집석에 보면 나옵니다. “에신(惠心- 겐신)은 이치를 다하여 왕생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정하는 데, 선도와 도작으로 지남(指南, 나침반)을 삼았다. 또 곳곳에서 많이 인용하는 것은 저 스님들의 주석인데, (읽어) 보라고 하셨다.” 왕생요집석의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함으로써, 호넨스님은 ‘도작→선도→겐신→호넨’의 맥을 긋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⑦ 대승무량수장엄청정평등각경(大乘無量壽莊嚴淸淨平等覺經)은 ‘하련거 회집본’으로 불리는 책입니다. 타이완에서 나온 오경일론(五經一論)과 같은 책에 실려있습니다. 중국불교사에서 불교경전은 세 부류가 등장합니다. 인도찬술 경전을 번역하는 것, 중국에서 새로 만드는 것, 마지막으로 번역된 경전을 다시 편찬(편집)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의 경우를 ‘편찬경전’이라 합니다. 회집본은 ‘편찬경전’입니다. 이런 전통이 중국불교사에서는 있습니다. 북송의 거사 왕일휴(王日休)라는 분이 편찬한 회집본 무량수경도 있습니다. 그 이름은 불설대아미타경입니다. 신란스님도 교행신증에서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전통 속에서 현대 중국의 독실한 염불자 하련거 거사가 새롭게 편찬한 회집본이 ⑦입니다. 무량수경의 여러 이역본들을 새롭게 편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러한 방식의 편집에는 문제도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시간성이 탈락됩니다. 경전 성립(내지 번역)의 시간성이 사라지게 됩니다. 시간성이 왜 중요할까요? 아미타불의 마음을 읽는 사람들의 해석이 시간을 내려오면서 달라지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의 흐름은 좀 더 아미타불의 마음을 올바로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작용해 왔다고 저는 봅니다. 둘째, 자칫 편집 과정에서 종래 경전들(이역본들)에 없는 내용이 창작되어서 삽입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하련거 거사 회집본에서도 그랬습니다. 예를 들면, 강승개 역본의 무량수경 제22원을 제35원(일생보처원)으로 하여 제36원(교화수의원)과 함께 하나의 원 속으로 편집하고 있습니다만, 그 내용 중에 “비록 타방세계에 태어나더라도 영원히 악취를 떠나고 혹은 설법(說法)을 즐기고 혹은 청법(聽法)을 즐기고 혹은 신족통을 나타내고 뜻에 따라 수습하여 원만하지 않음이 없다”는 말은, 하련거 거사의 창작입니다. 이러한 창작이 경전의 의미를 확장하고 발전시킨다면 모르겠습니다만,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제22원은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는 신분(=일생보처보살)이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중생제도를 위해서 오직 보현보살의 행을 행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저의 논문, 「무량수경 제22원의 번역문제 – 범본 및 한역의 대조를 중심으로 -」, 인도철학 제63집, 2021년, 참조) 오직 이타만 말하고 자리는 말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그런데 회집본에서는 타방세계에 태어나더라도 자리와 자각의 길에는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강승개의 역본 무량수경의 뜻이 많이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는 경전의 뜻이 아니라, 편집자의 뜻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회집본은, 즉 편찬경전은 ‘경전’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해석’으로 받아들여서 참조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현대 중국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타이완에서도 회집본 일색은 아닌 것으로 압니다. 타이완의 정토종에서 펴낸 정토삼경에는 회집본이 아니라 강승개 역본의 무량수경을 수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도 강승개 역본 무량수경이 지고지선한 것은 아닌 줄 압니다. 이역본의 대조를 통해서 몇 가지 문제가 있음도 확인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이역본 중에서는 가장 발전된 경전임은 분명합니다. 이 회집본과 무량수경의 대조 등에 대해서는 논문이 한 편 정도는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⑧은 청나라의 염불거사 위원이 만든 회집본 무량수경입니다. 이는 타이완 불광사에서 간행된 정토삼경이라는 책 속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제가 전체를 다 대조해서 살핀 것은 아니지만, 「사서게」의 경우를 살펴보았을 때는 강승개 역본 무량수경을 좀 더 존중해서 만든 것으로 보였습니다. 앞의 ⑦ 하련거 거사 회집본보다 말입니다.
⑨ 칠개조제계는 그 제목의 의미가 ‘일곱 조항으로 이루어지는 제계’라는 뜻입니다. ‘제계(制誡)’는 ‘제어하고 경계한다’는 말입니다. 누구를 제어하고 경계하느냐? 바로 제자들입니다. 왜 제자들을 제어하고 경계하는가? 제어하고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염불 하나만으로 왕생할 수 있다고 가르쳤더니, 제자들 가운데에서는 아미타불의 본원을 과신(過信)하여 행위는 어떻게 해도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알아듣고 행동을 함부로 해서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다가 당시 구불교(舊佛敎) 측에서는 호시탐탐 호넨스님 교단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사태를 미연에 예방하고자 해서입니다. 일곱 가지 윤리강령을 제시하고서, 제자들로부터 싸인을 받았습니다. 잘 지키겠다는 맹서를 시킨 것입니다. 이틀 동안 싸인을 한 제자들의 수는 모두 197명입니다. 서명이 다 남아있습니다. 그 86번째에 ‘僧綽空’이라는 서명이 보입니다. 바로 신란스님입니다. 그 당시에 ‘작공’이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 이 「칠개조제계」는 번역할 생각입니다.
⑩ 기신론은 전체로 보아서는 성도문의 책입니다. 전체가 다 ‘정서’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부분에 ‘전의염불’이라는 짧은 문장이 나옵니다. 이는 기신론에서 제시한 가르침대로 수행하여 일심(一心)을 회복할 수 없는 ‘겁이 많고 나약한 중생’을 위하여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바로 정토사상입니다. 그 전부터 그 부분은 알고 있었지만, 기신론의 두 가지 역본(진제 역, 실차난탄 역), 원효스님 주석서, 또 기신론을 기본으로 해서 만들어진 논서인 석마하연론까지 두루 해당사항을 살펴보았습니다. 일본의 오오다케 스스무(大竹晉) 선생이 대승기신론 성립문제 연구(이상민 옮김, 씨아이알)에서 기신론의 정토사상이 무량수경과 관련한다고 했으나, 실제로 자세히 대조해 보면 관무량수경과 더 잘 연결됨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오다케 선생은 관무량수경은 고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⑪ 관무량수경을 다시 읽게 된 동기는 그 속에 나타난 ‘견불(見佛)’과 ‘관세음보살’에 대해서 체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2022년 하반기부터 관세음보살이라는 저의 책(품절된 것)을 다시 부활시키기 위하여 수정, 보완, 편집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미완입니다만, 그 중에 ‘정토사상 속에서 말하는 관세음보살’을 정리하기 위하여 읽게 되었습니다. 이 관세음보살에 대한 저의 책은 2024년에는 나올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⑫ 역사 속에서 보는 신란은 작년 여름방학 때, 5년 만에 간 교토에서 구입한 책입니다. 이 책의 저자 타이라 마사유키 선생의 논문 2편을 읽은 일이 있습니다. 한 편은 교행신증의 후서(後序)를 다룬 것이며, 다른 한 편은 신란스님이 아들 젠란(善鸞)과 의절(義絶, 부자의 인연을 끊는 것)할 당시에 쓴 편지글을 다룬 것이었습니다. 배울 바가 매우 많았습니다. 그래서 교토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서는 기쁜 마음으로 구입해서 읽었던 것입니다. 타이라 선생은 역사학자입니다. 역사학자라는 말은, 신란스님과 관련한 역사를 다룰 때 그 사료의 범위가 종문(宗門)에 전승되는 것 이상이라는 점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유배를 가게 되는 사건 역시 그 전후에 조정이나 관료사회에서도 여러 가지 움직임이 있게 됩니다. 그러한 일들에 대해서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사료나 관료들의 일기 등을 폭넓게 수집하여 논증하기 때문에, 상당히 설득력이 높다고 생각되어졌습니다. 작년 연말에 도쿄를 다녀왔습니다만, 서점에서 또 이 선생님의 책 신란과 그의 시대를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방학 중에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⑬ 근대 일본과 신란은 야스토미 신야 선생의 책입니다. 이 분은 저에게 교행신증 제3 신권 강의를 해주시는 콘웨이 선생님의 지도교수입니다. 작고하신 분입니다만, ‘진종문고’라는 시리즈 속에 이 책을 집필하였습니다. 근대는 메이지 유신(1868) 이후를 말합니다. 특히 진종 대곡파의 변화나 움직임을 개설적으로 다룬 책이었습니다. 저는 ‘진종문고’와 같이, 문고판 형식으로 시리즈물이 나오는 것을 부러워합니다. 가격이 싸지기 때문에 좀 더 널리 읽힐 수 있는 것 같아서입니다. 유감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요즘 문고가 거의 없습니다.
⑭ 정토문류취초는 영관스님의 우리말 번역을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더러 원문과 대조해보았습니다. 이는 일본불교사공부방 제24호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때 편집하면서 교정삼아서 읽었습니다. 정토문류취초는 ‘리틀 교행신증’이라고 부릅니다. 「정신게」와 비슷한 「염불게」, 즉 「염불정신게」도 있습니다. 공부방 있으신 분들은 한 번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⑮ 관념법문은 선도대사 저술입니다. 교행신증 제3 신권 중에 선도대사 인용이 연이어서 7회 나오는 부분이 있습니다. 오타니 대학의 콘웨이 선생님께 온 라인으로 강의를 듣고 있습니다만, 7회 인용의 첫 번째가 반주찬입니다. 그래서 제가 작년에 읽은 정서 중 첫 번째가 반주찬이었던 것입니다. 이 관념법문은 5번째 인용문입니다. 1년에 10번(2월과 8월은 휴강, 1회 90분)하는데, 현재 진도는 7번째 인용문을 하고 있습니다. 관념법문은 갖추어 말하면, 관념아미타불상해삼매공덕법문(觀念阿彌陀佛相海三昧功德法門)입니다. 교행신증 신권에는 두 게송이 인용되어 있는데, 그 중 첫째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미타불의 몸은 황금의 산과 같으니
얼굴에서 나오는 광명은 시방세계 비추네.
그저 염불해서 (아미타불의) 광명이 거두어 주시는 것을 받으며
마땅히 본원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것임을 알지어다.
이 내용은 정확히 관무량수경에 기반하여 지어진 정토시입니다.
⑯ 살아계신 법장보살은 오타니 대학의 교수였고, 진종대곡파 스님이었던 카기누시 료케이 선생의 유고집입니다. 왕생 1년 후에, 선생의 말년 강의나 글을 편집한 것입니다. 작년 여름 오타니대학에 가서 콘웨이 선생님을 뵈었을 때 주셨습니다. 저는 이런 책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카기누시 선생은 화엄학을 깊이 연구한 화엄학자입니다. 콘웨이 선생과는 같은 동네 살아서, 말년에 교류를 깊이 하셨다고 합니다. 왕생 이후 책들 중 상당수는 콘웨이 선생에게 왔다고 합니다. 오타니대학의 교수 중에 오다니 노부치요(小谷信千代)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그레고리 쇼펜의 책 대승불교흥기시대 인도의 사원생활이라는 책을 일본어로 번역하였던 분입니다.(이 책은 임은정 선생이 번역해서 운주사에서 나왔습니다.) 전공은 구사론 등 부파불교 쪽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정년하시고서 신란스님에 대한 책을 몇 권 냈습니다. 그러면서 주장한 것이 “신란스님은 현생정정취를 말씀하시지 않았다”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에 격분한 분이 카기누시 선생입니다. 그래서 살아계신 법장보살에는 오다니 노부치요 선생에 대한 비판이 강력하게 전개됩니다. 저는 아직 오다니 선생 책을 읽어보지 못하였고, 논쟁의 내용도 어려웠습니다만 좋은 공부가 된 것 같습니다. 같은 종파, 같은 대학의 선후배 사이에 종론(宗論)을 둘러싸고 이러한 논쟁이 있다는 것은 부러운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좀 더 공부해서 다시 읽어보려고 합니다. 다만, 하나 신란스님은 교행신증 신권에서 ‘현생의 열 가지 이익’을 제시합니다. 그 중에 열 번째가 바로 ‘정정취를 얻는다’는 말입니다.
⑰ 아미타경은 뜻밖에 읽게 된 경전입니다. 고(故) 김성철(金星喆) 교수가 급작스럽게 왕생하였는데, 영안실에서 독송하였습니다. 문상 오시는 분들이 뜸한 시간대에 갔는데, 아미타경이 있었습니다. 목탁도 있어서, 모처럼 목탁을 치면서 독송하다보니 뒤에 몇 몇 분들이 오셔서는 함께 읽었습니다. 마치고는 ‘나무아미타불’ 염불도 좀 했습니다. 김성철 교수님은 작년 2월에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를 정년 했을 뿐이었습니다. 학문적으로는 중관불교 전문가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인격적으로나 신앙적으로도 정말로 ‘타의 모범’이 되시는 분이었습니다. 불교계나 불교학계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저보다는 3살 위의 형님이지만, 대학원 생활을 함께 했습니다. 그날 문상을 다녀와서 조시(弔詩)를 써놓고, 이재형 기자가 인도에서 돌아오면 법보신문에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종단에서도 뜻밖에 큰 일이 생겼기에 신문사 투고의 타이밍은 놓쳤습니다. 김교수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또 안타까워 하는 마음으로 우리 편지 독자들께 그날 쓴 저의 시를 공개합니다. 제목은 「검은 넥타이 - 故 김성철 선생 문상길-」입니다.
검은 넥타이를 매는데
울컥, 눈시울이 붉어져 오네
“내가 김성철 선생 문상을 다 가네”
“그러게 말이에요”
문상 문상 많이도 다녔으나
오늘에사 이 길이 다리부터 무겁구나
세 살 터울의 형제라 해도
동생동사(同生同死)로 서른 해를 넘겼으니
아이고야
눈물은 거두소서
“한 곳에서 만나리니”
(2023년 11월 25일)
마지막 구절, “한 곳에서 만나리니”라는 말은 아미타경에 나오는 ‘구회일처(俱會一處)’라는 구절을 그렇게 번역했습니다. 시의 형식은 제가 요즘 공부하고 있는 향가의 형식입니다. 향가의 형식은 4행체, 8행체, 11행체(종래 ‘구체’라 했으나, 저는 ‘행체’라 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셋이 있는데, 이 시는 11행체입니다. 다시 한 번 김성철 교수님의 왕생극락을 기원합니다.
⑱ 관경소현요기파문은 도쿄대학에 유학 중인 송동규 학우의 석사논문에서 읽은 텍스터입니다. 이 문헌은 겐신스님의 저서라고 하는데, 송나라 천태종의 원청(源淸)이라는 스님이 보내온 관경소현요기라는 제목의 저술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문헌입니다. 이때 관경소는 천태종 개조 천태지의(天台智顗)의 관무량수경에 대한 주석서를 일컫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도쿄대학에 제출한 석사논문인데, 파일을 보내왔기에 읽어보는 중입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논문을 집필하고, 또 그것을 회향해 준 송동규 학우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지금처럼 정진하노라면 좋은 학자로 대성(大成)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마음으로라도 응원합니다.
⑲ 삼국유사(광덕엄장)은 향가 「원왕생가」가 수록되어 있는 조(條)입니다. 일연(一然)스님 덕분에 우리는 정토시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원왕생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종래 국어국문학계에서 이 노래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축적해 왔으나, 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는 수정해야만 하는 주장들 역시 적지 않았습니다. 2018년에 「원왕생가」에 대해서 논문을 쓴 것 역시 그 점을 바로 잡고 싶어서였습니다. 그 논문은 저의 책 정토불교성립론의 첫 번째 논문으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업이고 인연인 것 같습니다. 작년 가을에 다시 「원왕생가」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경주시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주최의 국제학술회의에서 「삼국유사 광덕엄장조의 불교적 이해」를 구두 발표하였습니다. 그 중에 여러 가지 문제를 언급하였으나, ‘서방(西方)’ 개념만을 추출하여, 수정, 보완하여 발표한 것이 「원왕생가의 ‘서방(西方)’에 대한 고찰」(한국문학연구 제73호, 동국대 한국문학연구소)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노래 하나만은 온전히 지킬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금년에도 한 2, 3편 정도를 더 쓸 생각이고, 장차는 하나의 학술서로서 완성시켜보고자 합니다. 「원왕생가」 연구는 원래는 저의 장기적 목표에는 없었으나, 그 노래가 저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상으로 작년에 읽은 정서를 하나하나 간략히 설명 드렸습니다. 크게 보면, 제가 제 마음대로 읽은 것이 아니라, 어떤 인연이 저로 하여금 그러한 책들을 읽게 만들었음을 알게 됩니다. 금년에는 또 어떤 인연이 저로 하여금 어떤 정서를 읽고 공부하게 할 것인지 저로서도 궁금해집니다.
다만 하나 아쉬운 점은, 모두가 한문책이 아니면 일본어책이라는 점입니다. 단 한 권도 우리말로 씌어진, 우리나라 저자의 책이 없습니다. 정서가 쓰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서를 쓸 사람들이 없어서일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을 기우려야 하는 것도 바로 이 분야입니다. 우선, 인재양성에 힘을 기우려야 할 것 같습니다. 단기간에 해결될 일은 아니겠으나, 장기적인 전망을 갖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저부터도 계속 노력해 갈 생각입니다. 이 ‘편지’ 역시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봅니다.
다음 편지에서는 ‘법보론’을 마감하겠습니다. ‘받을 수’의 세 번째 구절(행자정수금강심)에 대해서 공부할 것입니다. 기대해 주십시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더 새해 인사를 전합니다. 새해에도 아미타불께서 뒤에서 광명을 비추어 주실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2024년 1월 4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