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습니다’는 만해의 시구(詩句)가 종일 머릿속을 맴돕니다.
최요삼 선수가 기어코 이승의 인연을 끊었다는 소식입니다. 그는 떠나면서 생명이 꺼져가고 있는 환자 6명에게 자신의 장기를 떼어주었습니다. 최 선수의 가족이 그의 평소 바람에 따라 장기이식을 결정했다는 소식에 콧잔등이 찡해옵니다.
최 선수에 대한 기사를 보면서 이현세의 만화 《지옥의 링》이 오버랩 되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만화의 주인공 혜성은 죽기 직전 엄지에게 고백합니다.
“남들은 나보고 맞아도 끄떡없는 맷집의 왕이라고 하지만…나는 맞을 때마다 죽고 싶은 고통을 느꼈다고, 정말 나에게는 지옥의 링이었다.”
최 선수의 가족은 아버지의 제일(祭日)에 맞춰 이날 호흡기를 뗄 것을 요청했다는데, 마침 이날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권투선수가 경기 중 숨진 날이기도 합니다. 1962년 ‘캥거루 복싱’으로 유명했던 송재구 선수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국 페더급 챔피언인 그는 동대문운동장 배구장에서 자신보다 몸피가 훨씬 큰 주한미군 흑인병사 슐과의 경기 중 KO패한 뒤 병원 이송 중 숨졌습니다. 30전 무패의 기록이 깨지는 순간, 그 역시 ‘지옥의 링’을 떠났습니다.
최 선수의 사고는 우리 모두의 현주소가 그대로 투영됐기에 더욱 안타깝습니다. 링에서 선수가 실신해 쓰러졌는데도 현장의 의료진은 산소마스크를 씌우거나 담요를 덮어주기는커녕 손에 감은 붕대, 복싱화도 벗겨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차장에서는 앰뷸런스가 승용차에 가로막혀 발이 묶였고, 주최사는 차를 빼달라는 방송 한번 하지 않았다 합니다. 지척에 건국대병원과 서울아산병원이 있는데 멀리 순천향병원으로 간 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의료진이 산소호흡기 사용법을 몰랐고 기도 확보조차 제대로 못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안이한 관례가 위기상황에서 얼마나 위험한지를 극명히 보여준 사례인 듯 합니다.
현장의 의사와 권투협회 임원은 관례대로 지정병원으로 향했을 겁니다. 그 상황에서 어떤 선택이 최선일까에 대해 고민할 엄두도 못냈을 겁니다.
우리나라 승용차는 앰뷸런스에게 양보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심장마비 환자가 발생했을 때 인근 병원으로 가는 시
간이 28분이어서 세계 최장 수준이라고 합니다. 승용차 운전사들도 관례대로 움직였을 겁니다. 주최 측도 관례대로 경기가 끝나면 정리에 신경을 쓰지, 사고 대처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겁니다. 그 ‘관례’ 대신 ‘생각’이 들어갔으면 생때같은 목숨을 잃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또 적어도 사고와 관련이 있는 사람은 평소에도 여러 경우의 수를 상정하고 대비해야 합니다. 정부에서도 응급사고에 대비해 공공장소마다 전자동 심장충격기를 비치하는 등 국민의 생명을 살리는데 좀더 신경을 써야 합니다.
뇌출혈이나 심장마비 등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누군가 옆에서 도와줘야 하지만 응급의료법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하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만일의 경우에 누군가를 살릴 수 있습니다. 슬픈 사고를 계기로 응급의료법을 배워,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면, 가슴이 똑바로 박힌 최요삼 선수도 하늘에서 미소 짓지 않을까요? |
첫댓글 최요삼선수가 가면서 평소 고인의 뜻으로 장기기증을 해서 9명의 목숨을 살린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최요삼선수는 9명의 다른 목숨으로 다른 삶을 살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