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9장 21 – 27절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오늘 본문 말씀은 고린도후서 1장과 함께 보지 않으면 잘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에 나타나고 있는 바울의 원래 계획은 에베소 지역에서 배를 타고 고린도 교회에 갔다가 마게도냐 지역에 들른 다음에 다시 고린도 지역을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는 계획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확한 이유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고 있지 않지만 이런 바울의 계획이 수정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처음 계획과는 달리 실제로는 마게도냐를 먼저 들른 후에 고린도교회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으로 변경이 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전도 계획 변경에 대해서 일부 고린도 교인들은 고린도 지역을 하찮게 보는 사람, 믿을 수 없는 사람, 거짓 사도로 규정을 하면서 맹공격을 펼쳤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고린도후서 1장을 통해 바울은 변명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17절 말씀에 보면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 계획의 변경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지 결코 고린도 교인들을 쉽게 생각한다거나 업신여겨서 그렇게 결정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호소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도 봤지만 2차 전도 여행 때 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증거 하려고 했던 것이 바울의 원래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환상을 통해 마게도냐로 오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모든 계획을 다 내려놓고 순종했던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보면 아마도 원래의 계획을 취소하고 다른 방향으로 변경할 수밖에 없었던 어떤 영적인 계시가 있었지 않았을까를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엄청난 문젯거리들이 있었는데 바울이 계획한 대로 방문을 했더라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을 징계하고 처벌해야 하는 아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바울에 대한 반감이 심해져서 복음을 전하고 제자들을 세우는데 더 힘이 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 지역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해서 일부러 예정보다 늦게 고린도 교회를 방문한 의도도 있었던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에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처럼 바울은 경솔하게 계획을 하고, 경솔하게 취소를 하는 경솔한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이라고 계획을 변경했을 때 이런 문제들이 일어날 것을 왜 예상하지 못했겠습니까? 선교를 하다가 발생할 문제들 때문에 손수 천막을 만들면서 자비량으로 선교비를 벌었을 정도로 현명하고 지혜롭게 행동했던 사람이 바로 바울인데 어찌 이런 문제들이 일어나게 될 것을 몰랐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따라야 하는 것이 순리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모든 계획들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면서 나아갔던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 40년 동안 훈련 받았던 것이 순종의 삶이었습니다. 구름 기둥이 인도하지 않으면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도록 훈련 받았던 사람들이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그렇게 훈련을 받아야 가나안을 정복할 때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불순종한 사람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은 제외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이고 나머지 백성들을 무려 40년 동안 순종하는 사람들로 단련시키셨던 것입니다.
우리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의 계획이 있고, 우리의 생각이 있고, 우리가 해 왔던 습관들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하루 아침에 그 계획을 변경하시고 우리의 생각을 고치도록 명령을 하시고, 습관을 바꾸라고 지시하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쩌면 그 일로 인해 바울이 욕먹었던 것처럼 우리도 세상으로부터 욕도 먹을 수 있고, 왕따를 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바울이 보여준 단호한 모습을 본받으면서 우리도 바울처럼 살아가는 순종의 사람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내일 소풍을 가려고 하니 커다란 돌을 몇 개씩 가져오너라!" 베드로를 비롯한 많은 제자들은 말씀에 순종하여 바윗돌처럼 큰 돌을 힘들게 들고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늘 의심하던 가릇 유다는 아주 작은 돌을 두 개만 가져왔습니다. 목적지에 다다르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돌들을 내려놓고 모두 앉아서 점심 먹자.” 그러고는 하늘을 우러러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 돌에게 안수하시니 돌들이 빵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큰 빵을 실컷 먹었으나, 가룟 유다는 조약돌만한 빵 두 조각만 먹고 쫄쫄 굶어야 했던 것입니다.
며칠이 지난 후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내일 또 소풍을 가려고 하니 이번에는 작은 돌을 몇 개씩 가져오너라." 다음 날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작은 돌을 주머니에 가득 넣어서 소풍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의심 많은 가룟 유다는 지난번 일이 생각나서 큰 돌을 낑낑거리며 들고 따라왔습니다. 목적지에 다다르자 예수님께서 큰 나무 아래로 가셔서 나무를 붙들고 기도하시니 갑자기 나무에 빵이 주렁주렁 열렸던 것입니다. "얘들아, 가지고 온 돌을 던져 따 먹어라." 이번에도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배불리 먹었으나, 가룟 유다는 큰 바윗돌을 제대로 던져 보지도 못하고, 구석에 앉아 주린 배를 움키고 울어야 했다고 합니다.
순종은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가라하면 가고, 서라하면 서는 것이 순종이지 생각해 보고 나서 이해가 되는 부분이나, 이익이 되는 것에만 순종하는 것은 절대 순종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잠언 16장 3절 말씀을 기억한다면 우리도 바울처럼 능히 순종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바울은 그런 순종함으로 살았기 때문에 달려갈 길을 다 마칠 수 있었다고 자신 있게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렇게 순종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면서 살아가는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순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처지가 전혀 나아지지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바울이 전한 복음 때문에 에베소 지역에 난리가 났습니다. 특별히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아데미 신상을 만드는 상인들의 조합장이었습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바울이 전한 복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아데미 신상에 대해서 관심을 안 갖게 되니까 그들이 팔던 아데미 신상의 모형을 구입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감소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다가는 망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사람들을 선동했던 것입니다. 데메드리오가 사람들을 선동한 내용을 보면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우리가 은으로 만드는 아데미 신상으로 인해 우리의 생활이 풍족했었는데 바울이라는 사람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권유하기를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다.'라고 말을 해서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영업이 천하여 질 위험에 빠지게 되었고, 우리에게 돈 벌이를 제공해 주고 있던 아데미의 위엄도 떨어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인데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 이런 논리였습니다.
결국 이 사람들은 믿음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모여서 소리를 지르면서 분노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로마서 14장 17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런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먹고 마시는 것이 우선 시 되는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 하고는 늘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그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바로 우리들의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참 한심한 모습이지 않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그 위엄이 쉽게 떨어지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들에 의해서 그 영광이 훼손되는 분도 아닌데 데메드리오가 말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상은 하나님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연약함 그 자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런 하찮은 우상을 좇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상은 어려움이 닥치게 되면 모여서 소리를 지르고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분노가 가득한 모습으로 외쳐야 하지만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시고 영원부터 영원까지 홀로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서 일 하시는 것을 지켜보라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믿고 있고, 또 그런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고, 이런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자긍심을 가지고, 올바른 믿음의 정체성을 가지고 강하고 담대함으로 기뻐하면서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내려놓음’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몽골 이레교회에 일흔이 넘은 노모를 모시는 한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 노모는 1년 전부터 교회에 나오고 싶어 했지만, 거동이 불편해서 교회에 출석하지 못하고 계셨습니다. 2005년 초 그 분 댁에 심방해서 그 노모를 위해 기도드리게 되었는데 할머니는 “예수님을 믿으려고 보니 집에 있는 우상이 있어 마음에 걸린다.”고 하셨습니다. 간등사(몽골에가 가장 큰 라마 불교 성전)에 우상을 보낼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주저하고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고 합니다. 몽골 사람들은 우상을 그냥 없애버리면 재앙이 있을 것이라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용규 선교사님이 처리해 주겠다고 넘기라고 했더니 오히려 교회에 다니는 따님이 난색을 표하더랍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수십 년 전 간등사에서 그 우상을 받을 때 라마승이 집에 도둑이 자주 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하니까 라마승이 그 우상을 주어 받아왔는데, 그 뒤로는 도둑이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는 그 우상이 신통력이 있다고 생각해서 차마 내려놓지 못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술을 마시고 화가 나면 자기를 때리는 동생이 있는데 그 동생이 알면 큰일이 난다고 걱정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우상들 때문에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모세에게 말씀해 주셨던 그 말씀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하신 말씀이기에 얼마나 큰 의미가 있고, 얼마나 큰 위로가 되고, 얼마나 큰 힘이 되고, 능력이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모세가 이 말씀을 붙들고서 그 당시 가장 강대국이었던 애굽을 향해 믿음으로 나아가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이 손으로 만든 신하고는 차원이 다른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가야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에 현혹이 되어서 정작 구해야 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올바른 믿음의 생활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부터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승리하는 하루가 되시고,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먹고 마시는 것에 빠지지 마시고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구하는 삶을 통해 기뻐하면서 일평생 살다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만나 넉넉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