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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나의 도시] 송혜진 - 시놉시스
[제 1 부]
옛애인의 결혼식날 사람들을 뭘하까? 옛 애인 고릴라의 결혼식 날, 은수는 출근을 한다.
수요일 다른 모든 직장인들처럼 말이다. 고릴라가 누구인가, 결혼은 여자들의 감옥이오, 사랑의 무덤인지라, 사랑하는 여자와는 결혼따위 절대로 못한다고 침 튀기게 말해 놓고 은수와 헤어진 지 불과 육개월도 못돼 제발로 무덤으로 들어간 놈이다. 그러나 출근길, 은수의 기분은 그럭저럭 괜찮다. 아니, 괜찮고 싶다.
그러나 은수가 대리로 일하는 홍보대행편집회사 ‘커뮤티케이션 프렌즈’는 괜찮고만 싶은 은수의 작은 바램을 지켜주지 않는다. 자판기가 제공하는 모든 음료의 칼로리는 줄줄 꿰면서도 정작 자판기가 천원짜리도 먹어준다는 사실은 모르는 장미경 선배는 오늘도 얌체같이 “자기 동전 있어” 하고 빈대를 붙고는 눈치 없이도 고진석(고릴라) 결혼식에 대해 얘기한다.
황부장은 갑자기 일정을 당겨, 사진촬영을 해올 것을 종용하고 바쁜 장미경대신 윤포토의 스튜디오 사진촬영을 은수에게 백업하라고 지시한다. 다가올 경쟁프리젠테이션에 윤포토의 사진을 몰래 쓰기 위해 촬영일정을 당긴 것이다. 은수는 오늘 특히나 거기에 가기 싫다.
은수와 고릴라가 만난 곳이 바로 윤포토의 스튜디오. 과거 고릴라는 윤포토의 어시스트였고 신참 에디터인 은수는 그곳에서 고릴라와 사랑에 빠졌었다. 그곳에 사진을 구걸하러 가야한다니! 게다가 왠지 친해지기 힘든 후배 김명진과의 동행으로!
윤포토의 스튜디오. 사람 좋은 윤포토는 오랜만에 찾아온 은수를 반기고 은수에게 맞는 위로를 건넨다. 은수는 기분이 알록달록, 무슨 기분이 들긴 드는데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하늘이 좀 더 파래보인달까?
해질녘, 홍대앞 거리에 앉아, 낯선 사람들을 바라본다. ‘저들모두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걸어간다... ’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아늑하다. (그 사람들 속에 아직은 서로를 알지못하는 김영수와 윤태오가 섞여있다.) 이대로 좋기도 한 기분인 은수, 중학이후 십오년 지기인 대기업대리 남유희와 부모가 차려준 주얼리 공방을 운영하는 하재인에게 문자를 보낸다. 만나기로 한 약속을 취소하고 집에 돌아가 혼자서 이 기분을 느끼리라..
그러나 문자를 받은 재인이 바로 전화를 걸어온다. 다짜고짜, “아드러 아드러!”를 연발하는 재인. 어떤 남자가 이빨(사랑니)을 들고 와서 프로포즈 반지를 만들어 달랬다는 것. 무늬는 무지하게 낭만주의자이나 사실은 가장 현실적인 재인에게 사랑니 반지는 십대에게나 먹히는 찌질한 아이템인 것이다. 게다가 남의 이빨을 갈아야 한다니.., 하소연을 마친 재인은 자기도 할 말이 있으니, 무조건 오늘 예정대로 만나야 한다고 우긴다.
와인바에서 만나는 세 친구. 고릴라 얘기를 꺼내려던 은수는 재인의 갑작스런 결혼발표에 어안이 벙벙, 고릴라의 ‘고’자도 꺼내지 못한다.
불과 일주일 전만해도 다른 남자(민우오빠)를 못잊어 노래방에서 징징 울며 노래하던 재인이 아니던가. 그런 재인이 선본지 20일도 안된 다른 남자와 결혼을 발표한 것이다. 재인은 아이같이 징징대는 자기에게 지겹다고 말하고 떠나버린 강민우를 저주한다. 강민우 따위 치타에 불과 하단 것이다. 그리고 자기를 버린 강민우에게 복수를 했다고 말한다. 재인은 사랑이 끝나면 늘 복수를 한다. (재인이 제일 좋아하는 영화는 ‘복수는 나의 것’, 재인은 복수매니아다,) 그렇지만 어떻게 만난지 이십일도 안된 남자와 결혼을 하냐는 유희의 질문에 재인은 가슴에 손을 척 대며 말한다. “느낌이 와. 타.잔.”
세 살 많은 비뇨기과 의사인 재인의 타잔 닥터배에 대한 장황한 자랑을 마치고 재인이 떠난 후, 거리에 남겨진 유희와 은수는 왠지 기운이 쑥 빠졌다.
은수는 유희에게 ‘오늘 고릴라 장가갔다’고 말한다.
유희는 놀라고, 곧 이해하고, 그리고 괜찮지? 하듯 웃는다. 은수도 웃는다. 유희도 조심스럽게 새로운 고백을 한다. 회사를 그만두고 오랜 꿈인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는 것. 충격을 받는 은수. 그러나 결국 ‘넌 잘할 거야’라고 말해줄 수 밖에 없다. 유희가 얼마나 그것을 원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유희가 회사로 들어가고, 젊은이로 북적이는 홍대거리에 혼자 남겨진 은수.
술기운도 올랐겠다, 이대로 집으로는 못가겠다. “나두 우수에 찰 자격이 있다구, 나두 위로 받을 자격이 있다구우우우!“ 핸드폰을 열어 전화번호부를 검색하는 은수. 그러나 참으로 빈약하다. 고심 끝에 고른 박경훈에게 이모티콘(^^)을 넣은 문자를 보내는 은수. 박경훈은 과거 꽤 말이 통했던 고객사의 홍보담당자였다. 그러나 문자에 대한 답은 없고, 은수는 곧 후회막심이다. ”이모티콘을 넣는 게 아니었다“.
홧김에 택시를 타고 집앞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던 중, 압구정에서 재밌게 술마시고 있는데, 오라는 박경훈의 문자를 받는다. ‘누굴 놀려? 장난해?’ 싶으면서도 어느새 꽃단장을 하고 압구정 거리에 서 있는 은수.
그러나 술자리에 들어서자마자 잘 못 걸려들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삼십명도 넘는 사람들이 와글대는 술자리에 박경훈이 은수를 끌어들인 이유는, 한참 밀고 당기기 중인 미술팀 여자를 자극하기 위한 낚시밥으로 쓰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이래저래 되는 일 없이 불쾌한 은수. 미술팀 여자를 따라 박경훈이 사라져버리고, 괘씸한 마음에 소주를 들이킨다. 그리고 소주를 따르기 위해, 병을 잡은 순간, 동시에 병을 맞잡은 사람이 있었으니... 너무나 해사한 꽃청년 윤태오.
그렇게 은수는 윤태오와 만난다.
태오는 은수가 들이킨 소주잔이 자기 거였다고 말하며, 새잔에 소주를 따라준 뒤 은수와 건배한다. 그리고 자기 잔을 가리키며 말한다.
“어릴 때 이런 거 보구 뭐라그랬게요?”
“....”
“간.접.키스”
그리고 천진하게 웃는 태오. 은수도 따라웃을 수밖에 없다. 실은 이 청년에게 마음이 간다.
자리를 옮겨 90년대 풍 술집, ‘어린왕자’에서 태오와 둘이 술을 마시는 은수.
얘기가 오갈 수록 이 청년.. 끌린다.
(태오는 은수보다 7살 어린 84년생. 현재 학교를 휴학하고 영화 연출부에 들어갔으나 크랭크 인이 지연되어 대기중이다.)
몹시 취한 두 사람. 어린왕자 계단에서 키스를 하게 되고, 은수 말하고 만다.
“ 어디 편한데 가서 눕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은수는 태오와 하룻밤을 보내게 되고,
모텔에서 맞은 아침.. 은수의 심경, 죽고 싶다.. 그러나 우선 출근! 출근이 급선무!
모텔 앞, 언제 영화나 같이 보자며 전화번호를 가르쳐 달라는 태오에게,
은수는 80년대식 유머를 말하며, 완곡하게 태오의 제안을 거절하려고 한다.
이때 태오가 은수에게 말한다. 손가락을 하늘을 향한채.
“우주의 나이가 몇 살인 지 알아요? ”
“....”
“140억살. 우주의 나이를 생각하면, 우린 동갑이나 마찬가지예요!”
[제 2 부]
숙취를 안고 출근한 아침. 경쟁프리젠테이션이 코 앞인 시점에서 업무의 흐름을 끊어놓는 쓸데없는 회의만큼 한심하고 지겨운 것이 또 있으랴. 그러나 무지하게 회의 좋아하는 회의주의자 안이사의 주재로 초등학교 학급회의같은 회의가 열린다.
주제는 ‘규모있는 예산관리를 효과적인 제작비 절감방안’. 시계반대 방향으로 돌면서 의견을 말해야한다. 은수는 주로 딴생각을 통해 시간을 견딘다. 오늘의 딴생각은 주로 어제 만났던 태오로 통한다..
그러나 대충 뭉개고 지나갔어야 할 회의는 나이 어린 후배 김명진의 입바른 소리로 싸아해진다. 이런 종류의 회의의 불필요함과 함께, “이럴 거면 처음부터 덤핑가격으로 일을 맡지 말았어야 한다”고 결코 입에 담아서는 안될 금기어인 “덤핑”을 두 번이나 눈 똑바로 뜨고 내뱉은 김명진. 안이사의 눈썹이 꿈틀하고, 드디어 안이사가 입을 뗀다.
“오은수씨는, .... 오대리는 이 의견에 동의하나?”
안이사의 떨리는 물음에 마음과는 달리 “아니요”라고 말하고 마는 은수. 이어 자괴감이 몰려온다. 너무나 부끄럽다.
자괴감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은수는 미니연필깎이로 연필을 박박 깎은 후, 수첩에 이달 월급을 받으면 지출해야 할 돈들을 계산해본다.
이때, 안이사의 뜬금없는 전화.
한 시간 후, 근처 중국집으로 아무도 몰래 나오라는..
이게 또 무슨 일일까.. 설마 입가에 흰침을 달고 다니는 저 오십대 대머리 아저씨가 나에게 작업이라도 걸려는 수작인가..
중국집. 안이사는 서른 한 살의 오은수를 딱해하며, 선심쓰듯 한 남자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내민다. 은수는 직장상사의 소개팅이 얼마나 골치아픈 일인지 다기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게다가 남자의 이름은 ‘김영수’. 보나마나 꽝일 것이다.
한편, 은수는 은근히 태오의 전화를 기다리지만 감감무소식. 조금씩 놀림받은 듯 기분이 나빠지던 참이다.
유희와 만난 자리, 어제의 숙취로 술을 마실 수 없는 은수.
유희는 어제 누구와 술을 마셨는지 말하라고 종용하지만 혼자 자작을 했다고 우기는 은수.
유희는 결국 맥주를 사서 재인의 공방으로 쳐들어가고,
스케일링인지 보석세공인지 알 수 없는 이빨 반지를 만들던 재인이 합세해 세 친구 조촐한 술자리를 이어가는데, 또다른 손님이 나타난다.
바로 남유준.
남유준이 누구인가. 은수의 십삼년 지기 이성친구이자 유희의 사촌이다.
열여덟에 유희의 소개로 만난 이후, 줄곧 쏘울매이트로 지내온 유준과 은수는 유준의 여자친구 민정이 둘 사이를 불쾌해 한 것을 계기로, ‘서로에게 애인이 있을 때는 연락을 자제’하던 중인데, 민정과 헤어진 유준이 불쑥 나타난 것.
실로 오랜만에 만난 유준과 은수는 재인과 유희를 남겨두고 둘만의 시간을 갖는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유준은, 왜 여자들은 연애 초기만 지나면 다 마누라 같이구는 거냐고 여자들이 심리에 대해 묻고, 은수는 남자들은 왜 여자를 만나냐? 결국 한번 같이 자보려는 거 아니냐, 근데 어떤 남녀가 만나 어쩌다 먼저 자버리면 그 남자가 여자를 다시 만날 이유는 없는 거 아니냐,고 전화없는 태오에 대한 답답함을 넌지시 떠본다.
오랜만에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헤어지는 자리, 유준은 돌아서는 은수를 불쑥 불러 세우곤,
돌발적으로 프로포즈를 한다.
“남자대 여자의 결합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결합하면 되잖아. 지금 나를 제일 잘 이해하는 사람은 너니까.. 나두 그렇구”
김영수부터 체크하고 차례차례 하자고 자연스레 넘기긴 했으나, 돌아오는 택시안의 은수는 적잖은 충격을 받은 상태다.
갑작스레 등장한 남자들 - 윤태오, 김영수, 남유준- ... 이게 무슨 일이야..
은수는 중얼거린다.
“오은수, 아직 안죽었니?”
다음날, 회사.
아침부터 안이사는 영수에게 전화를 걸라고 눈짓발짓. 비밀이라고 해놓고 동네방네 다 티나게 난리다.
회사 옥상에 선 은수. 태오에겐 여전히 전화가 없다. 이젠 어린 놈한테 놀림받은 기분이 완연하다. 은수는 보란듯이 김영수에게 전화를 걸어, 토요일 2시 모호텔 커피숍에서 만날 약속을 잡는다. 그러나 호텔 커피숍이라니.. 어쨌든 소개팅이라 우기고 싶던 만남이 맞선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상관없당. 봤지? 보란 듯이 태오의 전화번호를 삭제해버리는 은수. 그런데 웬걸, 어느새 전화번호를 줄줄 외우고 있다. 언제부터 니 기억력이 그다지도 좋았던 것이냐!
그날 밤, 전화가 오고, 액정을 보는 순간, 태오의 번호임을 바로 안다.
토요일 저녁 6시에 대학로에서 만나 영화를 보자는 태오. 은수.. 잠시 고민하다 그러자고 한다.
뜻하지 않게 더블데이트를 하게 된 토요일. 태오를 만나 뭘 하려는 마음은 결코 없다고 누누이 다짐하면서도 아침부터 은수는 사우나에가서 때목욕을 하고 속옷에 신경을 쓴다. 그나저나 호텔 커피숍과 대학로 극장 모두를 카바할 수 있는 의상이라니.. 영 옷 고르기가 어렵다.
한편 유희는 북한산을 오르고 있다. 은수와 통화하는 유희. 갑자기 등산은 왜? 맞다, 회사를 그만 둔 것이다.
유희는 오늘도 ‘입산금지’ 표지가 붙은 험한 길로 접어든다. 그리고 뭔가를 찾는다..
유희가 찾은 것은 자기 키만한 작은 나무 한그루.. 그 나무 아래서 오이를 먹는 유희.. 아무래도 사연이 있는 나무 같다.
오후 2시의 호텔 커피숍. 김영수는 의외로 멀쩡하다. 생각보다 멀쩡해서 잠시 안도했으나 볼 수록 답답할 정도로 평범하다. 도무지 가슴에 설렘이 없다.
친환경 유기농 먹거리 유통회사 ‘그린캣’을 동업으로 경영하는 서른 여섯의 남자. 나이가 좀 많은 감은 있지만, 여러모로 부모님이 좋아할 만한 신랑감이다. 은수의 솔직한 심경은 적어도 채이고 싶지는 않다, 정도?
저녁을 먹자는 영수에게 친구 돌찬지가 있다는 핑계를 대고 대학로로 가려는 은수.
영수는 대학로까지 은수를 태워다 준다.
손에 한송이 장미꽃은 든 태오. 태오를 보는 순간, 은수는 새침한 표정을 지으려해도 자꾸만 웃음이 샌다.
태오가 고른 영화는 트뤼포의 [줄앤짐]. 태오는 무지무지무지 매력적인 여자가 나온다고 했지만 은수의 눈에는 양다리 좋아하는 여자로 보일 뿐이고, 오늘의 더블데이트가 약간 뜨끔하기도 한다.
은수의 집 앞. 두 사람은 다시 키스를 하게 되고, 아쉽다.. 그러나 집으로 남자를 들일 수는 없다.. 게다가 집 상태는 무지 더럽다.. 그 모든 저항에도 불구하고 은수는 결국 진다.
돌아서 가는 태오를 불러 원룸에 들이게 되는 은수..
태오와 와인을 마시며 이런 저런 얘기. 보고 싶지 않았냐고 묻는 태오. 이어 은수의 전화를 무지 기다렸다고 말한다. 전화기를 잃어버려서 은수의 전화번호를 알아내느라 백통도 넘는 전화를 걸어야했다고. 마음이 스르륵 녹는 은수..
그렇게 둘은 다시 하룻 밤을 보낸다.
다음날 아침. 전화를 켜면, 재인의 부재중 전화 두통을 비롯해 연락불통을 걱정한 엄마의 요란한 음성메시지를 포함한 여러통의 부재중 전화 알림이 우수수...
은수, 분당집으로 가야한다.
태오는 데려다 주겠다고 따라나선다. 은수는 진심으로 혼자가고 싶다. 곤란하다.
그러나 분당 서현역에 이르러 인사를 나누고 나서도 태오는 은수의 뒤를 따라 걸어온다.
무지 곤란. 태오, 무슨 생각인지 태연하고 한가롭게 은수와 거리를 둔 채 걷는다.
딩동. 문자가 온다. 열어보면 태오가 보낸 문자. ‘뒤꼭지 예쁘다..’
은수가 돌아보면 다시 ‘ 뒤 돌아보지 마요! 이렇게 산책해요..’
은수와 태오, 그렇게 산책하며 문자 대화에 빠진다.
은수의 아파트 앞. 이제는 정말 헤어질 시간이다. 아쉽다..
짧게 돌아보는 은수, 돌아서서 아파트로 들어선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11층을 누른다. 그때 오는 문자 ‘보고.. 싶어요...’
은수의 눈에 이는 빛! 초조하게 엘리베이터 숫자판을 올려다보는 은수..
드디어 11층, 문이 열리고 은수 계단창을 향해 달려나가면,
보인다. 저 아래에 서서 가만히 은수를 올려다 보고 있는 태오가.
그리고 마지막 문자가 온다.
‘나.. 너무.. 끌려요...’
은수, 문자판을 열어 천천히 한자한자 누른다.
‘나두.. 그래애...’
이제, 가만히, 서로를 보는 두 사람...
태오 멀찍이 따라 걸으며 문자를 보내고, 어느새 문자 대화를 나누며 산책하듯 걷는 두 사람.
은수의 분당 집 앞. 두 사람은 아쉽게 헤어진다.
엘리베이터에 탄 은수에게 “보고.. 싶어요..” 태오의 문자를 받는 순간, 더 이상 제어할 수 없는 서렘과 충동에 빠지는 은수. 11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마자 복도 창을로 달려나가면, 아직도 그 자리에 서서 은수를 바라보고 있는 태오가 멀리 보인다.
은수를 바라보며 태오 마지막 문자를 쓴다.
“ 나.. 너무.. 끌려요...”
은수, 천천히 답장을 쓴다.
“나두.. 그래..”
그리고 한참을 바라보는 두 사람...
[제 3 부 / 제 4 부]
“나 너무 끌려요..” 고백의 설레임도 잠시, 분당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은수는 “한심한 짓이나 하고 다니려면 당장 짐 싸서 들어오라”는 아버지의 못마땅한 타박과 맞닥뜨린다. 한달 만에 함께 모인 가족풍경은 늘 그렇듯 일일 드라마속 화목한 가족과는 거리가 멀다. 이기적이고 쫀쫀하며 타박 많은 아버지, 평범한 잔소리꾼 엄마, 입이 댓발 나온 올케언니, 재미없는 너스레 연발 오빠, 그리고 예쁘지만 삼십분이면 귀찮아지는 조카지호..
이제는 반쯤 창고가 된 자신의 방에서 중학교 사회과부도를 펼쳐보는 은수. 세계지도가 있는 페이지를 연다. 거기, 푸르른 태평양에는 화이트로 그려놓은 섬, ‘은수 ISLAND'가 있다.
중학교 때 유희, 재인과 지도그리기 숙제를 하다가 실수로 떨어뜨린 화이트(수정액)로 인해 만들게 된 섬이다. 재인도 따라서 Jane's Island를 유희도 ’나뮤도‘를 그렸었다.
자기만의 섬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은수. 오늘 그 섬에 태오가 찾아들었음을 느낀다..
엄마가 싸준 밑반찬 보따리를 바리바리 들고 재인이 주재한 저녁식사 자리에 가는 은수.
재인이 그토록 자랑한 타잔, 비뇨기과 닥터배를 소개하는 자리다. 그러나 이머전시 콜을 이유로 타잔은 나타나지 않고, 재인은 무안하다. 애써 태연하려던 재인은 집을 구하는 문제를 두고 ‘왜 부모가 집을 해줘야 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냐’는 유희의 비난에 마음이 상하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화재를 돌려보려고 꺼낸 은수의 말‘ “사표는 언제낸거야?”는 비밀을 켜주지 않았다는 유희의 눈총과 자기만 빼고 지들끼리만 쑥덕쑥던 뭔가를 알고 있다는 재인의 서운함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중요한 얘기는 늘 자기만 쏙 빼고 먼저 한다는 것에 그동안 쌓인 게 많았던 재인의 기분은 완전히 틀어져버린다.
재인은 삐져서 가 버리고 유희는 유준을 만나러 가자고 한다. 유준? 프로포즈한 그 유준? 거북하다. 게다가 은수는 아까부터 문자를 보내오는 태오가 한없이 보고 싶다.
태오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은수는 이제 설레임과 행복을 감출 수가 없다.
손을 잡고 산책하는 두 사람. 바야흐로 둘의 연애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 김영수의 전화가 오고, 은수 어색하지만 아닌 척 무난히 받아 넘긴다.
오늘은 집앞에서 곱게 헤어지는 은수와 태오.
월요일. 새로운 한주는 순조로운 경쟁 프리젠테이션으로 시작된다. 은수가 강력히 주장한 풀 버전의 가책자는 고객사 홍보담당자들의 관심을 끈다. 좋은 예감이 든다. 은근히 뿌듯하다.
한편 유희는 드디어 뮤지컬 아카데미에 등록을 한다. 사기충천했던 유희는 자기보다 열 살은 어려보이는 쭉쭉빵빵 발랄난만한 여자애들과 비싼 등록금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그러나 “아자!” 뱃심을 모아 본다.
다시 은수의 회사. 여기저기 파일을 날린 비명이 난무하는 사무실. 바야흐로 마감이다. 옆자리 장미경의 비명. 은수, ‘요번엔 진짠가보네..’한다. 은수는 비명만 들어도 진짠지 가짜 엄살인지 알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밤 늦도록 이어지는 야근. 오늘도 장미경은 야식을 위한 사다리타기에서 쏙 빠진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다. 결국은 칼로리를 읊어서 좌중의 식욕을 떨어뜨린 후, 그녀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젓가락을 들이댈 것이란 사실을. 이 이여잔 왜 그러는 것일까..
바쁜 마감의 와중에도 매일 태오를 만나는 은수. 나머지 두 남자도 한번씩 만났다.
태오와는 점심시간, 퇴근시간.. 가능한 모든 시간을 함께 한다.
두 사람이 만나러 가는 길엔, 태오와 은수 둘 다 즐거움에 모두에게 친절해진다.
유준. 유희를 만나러 간 자리에 유준이 있었고, 셋은 노래방에 간다. 유희는 내도록 마이크를 놓지 않는다. 노래방은 유희의 단독 리싸이틀이 된다. 유희가 화장실에 간 사이, 잠시 어색해하는 유준과 은수. 그러다 피식 웃고 만다. 은수, "유희가 내 시누가 되는 건 좀 그렇잖아?" 완곡한 거절을 표한다. 유준, 늘 그렇듯 자연스러운 미소를 보낼 뿐. 수긍인가? 하기야, 몇 년의 우정인데 이만한 일로.. ! 이어지는 유준과 은수의 듀엣 열창. 역시 이런 일로 무너질 우정이 아니었다.
김영수. 저녁 약속을 하고 무제한 참치회를 먹는 은수와 영수. 태오의 문자가 뻔질나다.
(김영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못마시나? 은수 혼자 정종을 조금 마신다.)
영수를 만나고 돌아온 집 앞. 계단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태오는 장미꽃 두 송이로 20일을 기념한다. 은수, 태오가 마냥 좋으면서도, 현관 비밀번호를 유심히 외우는 모습을 보자 가슴이 철렁한다. 자고 가려는 태오를 늦은 시간을 핑계로 돌려보내는 은수. 내일 토요일 오전에 있을 재인의 웨딩촬영에 태오를 달고 갈 순 없는 것이다.
다음날. 재인의 웨딩촬영. 재인은 아직도 유희에게 꽁한 채다. 잘 사는 집에 태어나 별다른 자의식 없이, 부모가 차려준 공방을 심심풀이로 하고 있는 재인과, 일가친척 모두 떡벌어지게 살사는 와중에 자기집만 가난했으며, 어릴때부터 주관 뚜렷하고 독립적이며 공부 잘했던 유희는 특정문제(부모의 재력같은 문제)에 이르면 늘 부딪혀왔다. 재인은 유희가 은근히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한다.
처음 본 재인의 타잔은 신경질적이고 오만해 보인다. 재인은 전에 없이 초췌하다. 촬영직전 은수를 눈짓으로 불러 화장실에 간 재인은 순백의 드레스 차림으로 화장실 벽에 기대 담배 연기를 뿜어댄다. 뭔가 잘 못되어 가고 있나? 위태로워 보인다.
한편 핸드폰을 잃어버린 유희는 마지막으로 자기 핸드폰에 전화를 건다. 누군가 받는다. 그 전화 주은 거 아니냐고 묻는 유희에게, 한동안 말이 없던 상대방은 돌연 “유희야..”하고 말한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과거 유희에게 지독한 상처를 주고 떠났던 첫사랑 용가리다...
누군가 전화를 주은 사람이 유희의 핸드폰에 아직도 1번으로 저장된 용가리에게 전화를 걸어 유희의 핸드폰을 전한 것. 눈을 질끈 감는 유희. 그렇게 유희는 용가리와 대면한다.
다시 돌아온 월요일은 사고의 연속이다.
황부장과 김명진이 기획한 K건설 홍보 브로슈어에 오타 사고가 생긴다. 부사장의 직함이 부장으로 잘 못 찍힌 것. 김명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은수의 눈 가리고 아웅식 아이디어 - 모두 다시 찍는 대신 일부만 다시 찍는 것-가 채택된다. 오랜만에 회사의 난제를 해결한 듯 으쓱한 은수.
그러나 이번에는 ‘종일 걸려오는 전화로 당췌 살 수가 없다’는 중년여성의 항의 전화가 걸려 온다. 광고페이지 전화번호 오류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잘못은 고객사의 홍보담당자에게 있었던 것이나, 늘 그렇듯 이번에도 은수네 회사가 잘못을 덮어 써야 한다. 누가 해결할 것인가. 이때 장미경, 비명소리를 낸다. 은수는 안다. 저것은 가짜 비명소리다.
은수, 오후 내내 생판 모르는 남의 집 거실에 앉아 걸려오는 전화를 대신 받아야 한다. 집주인의 눈치를 받으며 짜장면도 시켜먹고.. 내가 이런 일까지 하면서 회사를 다녀야 하나.. .. 걸려오는 태오의 전화 "우리 크리스마스 때 뭐할까요?"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가 코 앞이다.
크리스마스 이브.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리는 멀티플렉스 극장의 화장실. 은수는 영화를 보러온 엄마와 마주친다. 엄마는 오래된 친구인 김포아줌마와 보러 왔다고 한다. 그러나 극장을 나서는 길, 은수는 보고 만다. 초로의 낯선 남자와 함께 황황히 극장을 빠져나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그렇다면 김포아줌마는 김포아저씨였던 것일까.....
[제 5 부 / 제 6 부]
크리스마스 이브, 오랜만에 고급 스카이라운지에서의 데이트.
은수는 태오에게 민트색 옥스퍼드 셔츠를 선물한다.
태오가 내민 작은 상자를 열자, 연필깎이가 들어있다. 그리고 이게 진짜 선물이라고 내미는 카드. 열어보자 정성들여 만든 팝업카드(입체카드)다. 놀라우리만치 예쁜 카드. 그러고 보니 손에 붙인 밴드는 이걸 만들다 벤 상처 때문인가보다. 감동하는 은수.
은수는 아는 아줌마 얘기처럼 조금 전 엄마와 마주친 얘기를 하고, 태오는 아무렇지도 않게 중년의 연애와 러브호텔에 대해 말한다. 은수의 가슴은 철렁. 그러나 태오에게 티를 낼 수는 없다.
물잔이 비자 잔을 들고 종업원에게 가는 태오. 아무래도 태오는 이런 고급 까페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태오는 연말에 자기 부모와 함께, 송구영신 미사에 가자고 한다. 성당에 다니냐고 묻자, 어릴 땐 다녔는데 지금은 다니지 않지만 송구영신 미사에는 파이프 오르간 연주도 있으니 함께 가자고 한다. 부모와 함께 성당이라니. 은수는 난감하다. 그런 날은 자기도 부모와 함께 보내야 하지 않겠냐고 부드럽게 거절하는 은수.
12월 31일. 하릴 없이 생생우동으로 점심을 때운 은수은 유희의 연락을 받고 유준이 집으로 간다. 유준의 집은 은수의 집에 비해 훨씬 좋다. 한번도 직업을 가진 적이 없으나 부모의 유산으로 먹고 살 걱정이 없는 게 유준이니까. 오랜만에 모인 네 친구. 은수, 유희, 재인, 유준. 화해했냐고 묻는 은수에게, 재인은 눈을 흘기며, “하루 이틀이냐”고 말하곤 웃는다.
또 한해가 지나감을 자축하는 친구들.
옛날 얘기를 나누는 친구들. 그저 농담처럼 흘려보내는 이야기지만 듣다보면 재인은 과거 유준에게 ‘약간의 관심’이 있었던 듯하다.
재인은 은수에게 돼지저금통을 선물한다. 이게 뭐냐는 은수의 물음에 “복수복수!”하는 재인.
백원짜리 딱 백개만 모아서 장미경이 만원짜리랑 따끔하게 바꿔주라고.
유희는 용가리와 만나고 있음을 고백한다. 이혼남이 되어 돌아온 용가리.
용가리가 누구인가. 십년 전, 어린 유희의 가슴에 무참히 대못을 박고 떠난 나쁜 놈이다.
학창시절 파리한 쇼컷트에 중성적 매력으로 은수네 여중 모든 소녀들의 로망이었던 유희를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긴 생머리로 ‘성전환’시킨 장본인이 바로 용가리다.
치기어린 방황의 포스를 뽐내던 싸움꾼이었으며
군대에 가자마자 유희에게 아이를 갖게 하고 또한 지우게 했으며,
군을 제대하자마자 한마디 말도 없이 연락을 끊어버리는 방식으로 유희를 뻥 차버렸던 것 또한 바로 그 용가리였다.
모두의 걱정어린 시선에, 유희는 그 사이 용가리도 많이 변한 것 같다고, 성숙해진 것 같다고, 그러니 용가리 상관없이 나를 믿고 내버려 두라고 말한다.
새해 첫날. 숙취를 안고 각자의 집으로 향하는 친구들.
분당 집. 은수는 엄마가 거북하다. 엄마와 되도록 눈을 맞추지 않으려고 한다. 그날 낯선 남자 곁에 서 있던 아줌마가 정말 엄마였을까.
1월 2일, 시무식날 출근시간. 골탕 먹이듯 사라진 핸드폰을 찾느라 새해 첫날부터 지각이다. 전화를 찾기 위해, 공중전화로 달려가 유희에게 ‘받을 때까지 전화를 걸어달라’고 부탁하는 은수. 혼자 사는 불편을 절감하는 순간이다. 수박을 살 때처럼. 종종 혼자 사는 불편을 절감하는 순간이 찾아오지만 그걸 다 합쳐도 혼자 사는 즐거움 한 개와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은수는 독립의 자유가 아직도 절절히 좋기만하다.
지루한 시무식, 사장의 연설은 길기만 하다.
태오가 사준 연필깎이로 연필을 깎아 새 수첩 1월 1일에 ‘가족식사’, 1월 2일에 ‘시무식’이라고 적어본다.
그리고 재인이 준 돼지저금통에 백원짜리 두 개를 쨍그랑 저금한다.
오후. 은수를 호출한 안이사의 방에는 김영수가 앉아있다. '친환경유기농 그린캣'의 회원용 정기간행물을 맡기러 온 것. 안이사는 찡긋찡긋 눈짓을 보내며, 영수에게 은수가 이 일의 적임자임을 강조한다. 그렇게 영수는 은수에게 재등장한다.
한결같이 풋풋한 태오와의 연애에 처음으로 작은 다툼이 생긴다. 태오와 만나면서 지겹게 먹게 되는 저렴하고 까끌한 밥에 질린 은수가 태오를 ‘제대로 된 찻집’으로 이끌고, 차를 마시는 동안 은수는 그만 속을 들키고 만다. 급기야, 태오는 묻는다. "자기는 나를 왜 사랑해요?"
그날 밤, 태오를 보내고 들어온 은수는 조금 심란하다. 유희와 메신저를 하는데 느닷없이 여자의 비명소리를 듣는다. 잠시 후 옆집 206호 여자가 벨을 누른다. 비명의 출처가 은수의 원룸인 줄 알고 문을 두드린 것. 206호 여자가 돌아간 뒤 은수는 불쑥 한기를 느낀다. "무서워." 은수가 뱉은 말이 허공에 맴돈다. 혼자임을 그 어느때보다 절절히 느끼는 은수. 태오에게 전화를 건다. 새벽같이 달려온 태오. “걱정말아요, 함께 있어줄게”, 라고 말한다.
다음날 아침, 출근시간. 태오는 일어날 기색이 없다. 태오를 두고 출근을 하려니 걸리는 게 한두개가 아니다. 컴퓨터에 받아놓은 야동 몇 개를 급히 지우는 은수. 문 잘 잠그고 가라는 말에 지각이예요, 하는 태오.
회사. 빨리 오라는 태오의 문자에 혹시나.. 하는 은수.
아니나 다를까 퇴근한 은수를 맞이한 건, 방긋 웃는 태오, 태오가 차려놓은 다소곳한 저녁상, 그리고 방 한켠에 놓인 묵직한 배낭... “나, 이사왔어요!” 천진하게 웃는 태오. 그렇게 태오와의 어설픈 동거가 시작된다...
비명의 출처가 며칠 후 밝혀진다. 305호 여자였다는 것. 은수는 고릴라가 결혼했던 날 태오와 밤을 보내고 돌아오던 새벽에 골목에서 보았던 여자가 그녀가 아닐까, 생각하며 몸서리를 친다.
태오와의 동거는 즐겁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하다.
어쨌든 아기자기한 나날의 연속. 이제는 핸드폰이 숨어도 걱정이 없다. 태오 전화로 걸면 되니까. 조금 양이 많은 야채를 사도 걱정이 없다.
어느 주말, 은수는 태오 선배의 디지털 단편영화 촬영장에 가게 되고,
태오와 함께 행인으로 잠시 출연한다.
돌아온 태오에게 슬레이트 치는 법을 배우기도 한다.
둘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태오가 수유리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태오의 부모는 수유리의 한 초등학교 앞에서 수퍼마켓을 한다는 것, 이름이 ‘부여수퍼’ 라는 것. 수유리의 대지극장이 옛날 홍콩영화의 메카였다는 것. 지금은 멀티플랙스 영화관이 되었다는 것... 등등을 듣게 된다. 은수도 자기 얘기를 한다. 유희와 재인에 대해서도..
취재차 영수네 농장에 가게 되는 은수. 윤포토가 함께 한다. 농장에서의 영수는 건강하고 한결 활기차 보인다. 농사가 점점 옛날처럼 정다운 일이 아니라는 것, 이제는 넓은 들판에 서 하루종일 혼자서 일하는 고독한 일이 라는 것, 옛날 같은 활기차고 정다운 농장을 꾸리고 싶다는 얘기를 한다. 윤포토는 영수가 맘에 드는지 자꾸 은수를 놀린다.
비밀은 오래 가지 않는다. 토요일 오후, 하소연을 하러 들이닥친 재인에게 태오를 들키고 마는 은수. 급한대로 화장실에 숨겼던 태오가 어느새 나와 마주앉고, 곧 태오와 재인은 죽이 척척 맞는 수다를 떤다. 재인의 결혼에 부르르 하는 태오. 당장에 그만두라고 한다. 태오가 화장실에 간 사이, “불어. 쟤, 어디서 줏었냐, 재주좋다, 오은수”...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동거에 대해 “ 멋지다! 오은수!” 하는 재인.
재인은 그냥 넘어 갈 수 없다며 한강 변 고급 스카이라운지로 은수와 태오를 이끈다. 태오가 불편할까봐 마음이 쓰이던 은수는, 자리가 파하자마자 후다닥 일어나 계산을 하는데, 태오는 오히려 그런 은수가 서운하다. 재인이 떠나고 둘만 남은 대로변에서 태오는 처음으로 은수에게 화를 내는데....
[제 7 부 / 제 8 부]
"오대리, 진짜 옮겨?" 뜬금없는 장미경의 질문. 회사 내에, 안이사가 조만간 독립해 나갈 것이고, 오은수를 데려갈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는 얘기. 은수는 황당하기만 하다.
언제 화를 냈느냐는 듯, 퇴근해 들어가면 태오는 여느때처럼 다정하기만 하다.
태오는 동거생활에 완전히 적응한 듯, 영락없는 새색시다. 라면 국물은 자동으로 화장실 변기로 가져가는 은수의 습관을 질색하며, 음식물 쓰레기봉투는 냉동실에 얼리는 깔끔함을 보이기도 하고, 206호 여자와도 말을 텄는지, 그녀가 운영하는 길건너 비디오 샵에서 발견했다며 ‘헬로강시4’를 빌려오기도 한다.
주말에 집에 다녀오겠다는 은수의 말에 자기도 따라가서 인사드리면 안 되냐는 태오. 은수, 순간 멈칫한다. 처음엔 농담처럼 한말인데 은수의 반응을 보자 조금 마음이 상하는 태오. 그럼에도 은수는 거절한다.
분당 집. 엄마가 없다. 벨을 누르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현관 도어락 비밀번호를 묻는 은수. 아버지가 부른 비밀번호는 은수의 생일 네자리다. 지방으로 등산을 가 있는 아버지는 엄마가 없다는 말에, 김포친구 만나러 갔겠지, 한다. 김포아줌마 소릴 듣자 가슴이 철렁.
그날 밤 늦게 귀가한 엄마의 휴대전화를 훔쳐보는 은수. 다정한 문자 메시지를 본다. 전화번호를 따는 은수. 안방에서 같이 자자는 엄마의 말을 물리치고 창고같은 자기 방에 눕는다. 잠이 안 온다. 두근거리며 전화를 거는 은수. “여보세요.” 굵은 남자의 목소리. 은수, 마음이 내려앉는다. 밤 새 뒤척이다 맞은 새벽, 은수는 엄마에게 인사도 없이 집을 나선다. 하루 밤새 폭싹 늙어버린 기분이다. 집에 도착해 와락 태오의 품으로 파고든다..
재인의 결혼식날. 태오는 아르바이트를 가야하는 게 걱정이다. 어떻게든 시간을 빼보려는 태오에게 한사코 괜찮으니 일하러 가라고 하는 은수. 은수는 태오와 함께 결혼식에 가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재인의 결혼식. 재인의 얼굴엔 표정이 없다. 그리고 레이스에 감싸인 손바닥은 차디차다.
결혼식에 나타난 유희 곁엔 유준이 말고도 또 한사람, 용가리가 있다.
결혼식 뒤풀이, 십년 만에 만난 용가리는 변했다는 유희의 말과는 다르게 후지다.
과거 같은 센티멘탈한 치기는 사라진 대신에 좌중을 장악하려는 허세가 느껴진다.
아르바이트를 마친 태오에게 전화가 걸려오고, 유희는 전화를 가로채, 태오를 불러낸다.
은수는 태오와 함께 하는 자리가 불편하다. 특히 유준이 신경 쓰인다.
그 때문일까 평소보다 빨리 술을 들이키는 은수. 용가리를 비난하기 시작한다. 은수의 주정은 점점 도를 더해가고, 유희는 용가리를 몰아세우는 은수가 싫다.
태오는 묵묵히 그 모든 것을 받아주고 있다.
다음날 아침. 수치심에 목 매달고 싶은 은수. 부분부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죽을 끓여 내어 온 태오. 지각을 걱정하는 은수에게 회사에서 전화와서 아프다고 말했으니 걱정말라고 말하는 태오. 회사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다니! 하늘이 노랗다. 아무리 몰라도 그렇지, 그 전화를! 누구냐고 말했냐는 말에, 걱정말라고 그냥 친구라고 말했다는 태오. “차라리 동생이라고 하지”, 태오의 마음을 돌볼 여유 없이 곤두서 버린 은수, 빽! 소리를 지르고 만다. "정말 지겨워 죽겠어!" 죽이라도 먹고 가라는 태오의 만류에도 은수, 기어이 출근을 한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태오. 그의 내부에서 필시 무언가 움직였을 것이다. 어쩌면 치명적일, 아주 작은 것이.
회사. 가장 먼 파티션의 디자인팀, 영업지원팀 직원들까지 아는 척을 한다. 겉으로는 아픈 몸을 걱정해 주는 것이지만, 은수는 안다. 모두들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전화를 받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궁금해 하고 있다는 것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장이 소집한 긴급 회의가 열린다. 안이사가 보이지 않는다. 안이사가 기밀이라도 빼들고 나가버렸나? 그러나 사장이 비장하게 입을 연 회의 안건은 다른 것이다. 오래전 은수의 아이디어로 눈가리고 아웅했던 K건설 오타사건이 K건설에 발각된 것. 황부장은 노골적으로 아이디어를 제공한 은수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직장생활 7년차, 별의 별 꼴을 다 봤어도 억울하다. 더럽고 억울하다.
한편 완성된 책을 보여주기 위해 영수를 만나는 은수..
은수의 불안과 우울을 간파한 영수. 소리 없이 위로를 건넨다. 편안하다.
그에게 이런 섬세한 면이 있었던가.
집에 돌아오면 태오가 없다. 태오가 없는 방.. 텅비고 텅비고 텅비었다.. 쓸쓸하다...
태오가 아침에 끓여둔 죽을 보는 순간, 은수, 결국 참았던 눈물을 터뜨린다.
다음날, 브로슈어 사고의 책임을 물어 K건설은 계약 파기를 통보한다.
태오에겐 연락이 없다. 은수, 잊으려 했다가 걱정했다가 화가 나다가 결국 기다린다.. 핸드폰을 화장실에까지 들고 갔다가 불쑥 꺼버렸다가.. 그래도 연락이 없다..
유희에게 전화를 걸지만 유희의 목소리는 싸늘하다.
용가리에 대해 은수가 쏟아낸 비난에 아직도 맘이 상한듯하다.
유준이 불쑥 회사로 찾아온다. 부탁이 있다는 유준. 생애 처음으로 보습학원에 취직이란 걸 해보려는데, 시강을 요구한다고. 자기 시강을 들어봐 달라고 한다.
유준의 시강을 듣기 위해, 유준의 집에 가는 두 사람. 늘 드나들던 집인데도 단 둘만 있으려니 기분이 묘하다. 키스 할 뻔하는 두 사람.. 은수.. 못하겠어.. 하며 울음을 터뜨린다. 태오에 대해 유준에게 말하는 은수. “그 애를 사랑해.. 너무.. 너무.. 근데 왜 이렇게 겁이 나지?”
남편이 없는 날을 택한 재인이네 집들이. 세 친구, 오랜만에 수다를 쏟아낸다. 술과 담배를 곁들인 푸념이 한창일 때 예고없이 재인의 시부모가 들이닥치고, 유희와 은수, 재인을 남겨둔 채 쫓겨나듯 아파트를 빠져나온다.
유희와 은수, 원룸으로 옮겨 맥주를 마신다.
은수, 유희에게 사과한다. 유희 사과를 받는다.
용가리의 미성숙을 자기도 알고 있다고 말하는 유희. 그것이 쓸쓸하다는 것도. 사람이 누군가 한 사람은 이상하리 만치 받아주게 되는 것 같다고. 용가리의 나약함, 허세.. 그 쓸쓸함과 외로움을 이유도 모른 채 그냥 안아주게 되는 걸 보면, 아직은 자기에게 뭔가가 남아있는 것같다고. 어쩌면 끝날 날이 있겠지만.. 아직은 모르겠다고..
그리고는 용가리의 아이문제를 토로한다.
다섯 살 난 딸아이 때문에 용가리가 아직도 전부인과의 인연을 끊지 못하는 것이 답답하다고.
다음날 아침. 전날의 토로를 다 잊은 듯 유희는 용가리의 전화 한통에 달려가 버리고 혼자 남은 은수는 목적없이 버스를 탄다. 그리고 태오의 동네(수유리)에 도착한다. 멀티플렉스 극장 앞에서 태오가 들려 주던 대지극장 얘기를 떠올리는 은수.. 그렇게 곳곳이 태오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어느 초등학교 앞, ‘부여수퍼’에 다다른다. 수퍼마켓에 들어가 태오와 꼭 닮은 아버지에게서 노란 수세미를 사는 은수.
돌아오는 길, 태오가 몹시 그립다..
집. 현관문을 여는 순간, 태오가 돌아왔음을 아는 은수.
원망섞인 목소리가 먼저 나온다. 그리고 가만히 태오를 안는 은수.
그러나 이미 뭔가가 끊어졌음을 둘은 안다..
배낭을 메고 원룸을 떠나는 태오...
은수, 혼자 남겨진 고약한 낭패감을 느끼는데...
[9-10부]
되는 일이 없다..
회사를 그만 두고 싶어도 아무런 대책이 없고, 직장생활은 더 없이 까끌하다.
태오와 은수는 이제 끊어질 듯 조심스럽게 관계를 이어갈 뿐이다.
집 앞, 은수를 바래다주고 “갈게요” 돌아서는 태오. 은수도 잡지 못한다.
이제 태오는 은수의 방에 오지 않는다. 모텔에 가지도 않는다.
아버지로부터 엄마가 없다는 전화를 받은 은수는 김포아저씨에게 문자를 넣는다.
‘다 알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줄 아세요.’
태오에 대해 고민하던 은수는,
어느 저녁 공기 맑은 공원에서, 태오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며 인생에 대한 계획을 적어보라고 말한다. 고심 끝에 내놓은 제안이지만, 태오의 심정은 무참해진다..
“어떻게 이런 발상을... 자기 눈엔 내가 그렇게도 못 미더워요?”
은수와 태오는 그렇게 헤어진다...
다음날. 회사는 K건설 브로슈어 사고에 대한 책임을 물어 2개월 감봉 결정을 내린다.
더럽다, 정말. 하루 종일 사직서와 고발장을 썼다 지우길 반복하는 은수.
저녁. 안이사를 만나는 은수.
독립하실 거냐는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안이사. 회사내에 파다했던 소문을 들려주자.. 창업을 하긴 하는데, 편집 쪽이 아니라, 우거지 전문 식당을 낼 거라고.. 그것이 자기의 오랜 숙원이라고 말하는 안이사. 우거지라니, 한번도 자발적으로 먹어본 적 조차 없는 음식이다.
고민으로 며칠을 보내던 어느 날, 엄마가 양손가득 찬거리를 들고 찾아온다.
누가 건드려주기만을 바랬던 것처럼 엄마를 향해 한껏 비아냥을 쏟아낸다.
엄마는 황황히 방을 떠나고 남는 것은 무기력한 자책뿐이다.
태오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은수. 답이 없다. 언제든 손 내밀면 돌아와 줄것만 같았던 태오.. 이제 은수는 태오가 자신을 떠났음을 절감한다..
맥주를 마시는 은수와 유준. 유준은 보습학원에 취직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조만간 본격적으로 오은수 관리모드에 들어가겠다며 너스레를 떤다.
기분을 전환하려 미장원에 간 은수는 잡지를 들춰 보다가 김영수의 인터뷰를 읽는다. 사진 속 김영수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은수... 영수에게 전화를 걸려다 그만둔다.
홍보담당자를 만나러 영수의 회사 그린캣에 간 은수. 영수는 보이지 않고.. 은수의 눈은 왠지 자꾸만 영수를 찾고 있다.. 회사를 나오다 김영수와 마주치는 은수. 둘은 함께 저녁식사를 한다. 무제한 참치회 집에서.
점심, 재인을 만난 은수. 재인의 결혼생활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어느새 자조가 배어버린 재인. 술이 없으면 잠을 잘 수 없다고 한다.
한편, 오디션 준비가 한창인 뮤지컬 아카데미. 유희 곁에는 젊은 남자애 하나가 알짱댄다.
토요일 오후, 은수는 김영수와 밥을 먹고 근처 대학 캠퍼스를 걷는다.
같은 시각. 유희는 용가리 부녀와 함께 놀이공원에 간다. 아이가 예쁘면서도 쓸쓸함을 떨칠 수 없는 유희.
다시 은수와 영수의 대학 캠퍼스. 어디선가 맹렬한 속도로 축구공이 날아온다. 정통으로 영수의 머리를 강타하는 축구공. 영수, 실신한다. 구급차안, 놀란 은수는 쉴새없이 눈물을 흘린다. 뭔가 모든 게 다 자기 잘못인 것만 같다. 사죄해야만 할 것같다.
응급실, 깨어난 영수는 자신의 지갑을 들고 있는 은수에게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은수는 단지 환자의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하는 병원측의 요구 때문에 지갑을 열어보았을 뿐인데 말이다.
병원을 나서는 길, 은수는 이 일로 인해 영수와의 관계가 새로운 단계로 집입할 것을 예감한다. 그리고 그 날 이후 김영수는 달라진다.
일요일, 영수의 제안으로 은수는 영수와 함께 그린캣 직원의 결혼식을 보러 대전에 내려간다. 예식장에서 만난 직원들은 은수를 영수의 여자친구로 대한다.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 영수의 얘기를 듣던 은수는 처음으로 영수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은수 집 앞에서 동지적 악수를 나누는 두 사람. 맞잡은 영수의 손은 단단하다.
그날 밤, 메신저로 유희와 대화를 나누는 은수. 유희는 스킨쉽이 지나치게 없는 영수를 게이로 의심한다. 이어 요즘들어 재인에게 통 연락이 없다는 유희.
다음날(월요일) 이른 아침. 재인의 전화에 잠에서 깨는 은수. 밖으로 나오란 말에 세수도 안하고 나가보니 재인의 차가 서 있다. 일단 타라는 재인. 배시시 유희도 고개를 든다. 유희 입모양으로 “이혼한대”라고 말한다. 오늘 새벽 이혼에 합의 했다는 재인. 무작정 서해안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핸드폰을 집에 둔 채 본의 아니게 무단결근을 하게 되는 은수.
차안. 영화 델마와 루이스의 한 장면 같다는 은수. 누가 델마고 누가 루이스냐는 유희. 무조건 예쁜 쪽이 자기라는 재인. 그럼 니가 델마하고 자기가 루이스를 하겠다는 유희. 그럼 난? 묻는 은수. 너는 ‘와’라는 재인. 델마 와 루이스. 기분은 나쁜데 너무 그럼직하다며 그래서 더 기분이 나쁘다며 웃는 은수.
서해안의 밤.
재인은 결혼생활과 이혼 얘기를 한다. 신혼 여행가는 비행기 안에서 고단함에 머리를 기대자 신경질적으로 자기 머리를 털어내더란 얘기. 헤어지기로 합의 한 후, ‘마지막으로 한번만 하자’고 하더란 얘기 등등. 분노하는 은수와 유희.
유희는 용가리와 아이문제로 냉전중이라는 얘기.
서울로 돌아오자. 열통의 부재중 전화가 기다리고 있다. 회사와 영수.
늦은 밤, 해물탕 집에서 만난 영수는 걱정을 했던 듯 짐짓 화를 억누르며 조용히 은수를 나무란다.
영수를 앞에 두고 태오를 떠올리는 은수. 곧 그런 자신을 탓한다.
델마도 아니고 루이스도 아닌 ‘와’인 자기. 꿈이 없는 자기. 맹물. 회색. 대한민국 모든 77년 생 여자들을 줄 세우는 상상을 한다. 나는 도대체 어디쯤 있는 걸까.. 모든 걸 새로 시작하고 싶다. 그러려면 먼저 그만두어야 한다. 그날 밤 은수는 사직서를 쓴다.
다음날. 사직서를 제출하는 은수. 사장은 선심쓰듯 실업수당을 받아야하니 ‘권고사직’으로 해주겠다고 한다.
마지막 출근 날. 점심 회식 겸 송별회. 동전을 모아왔던 돼지저금통을 곱게 장미경에게 건네주고 회사를 떠나는 은수...
명동에 백화점에 가서 티파니 목걸이 하나를 사고,
혼자서 고급 레스토랑에 앉아 와인을 곁들여 스테이크를 먹는다.
그동안 온전히 자기 힘만으로 자기를 먹여살려온 노고를 치하하며..
[제 11 부 / 제 12 부]
백수 첫날의 낯설음. 기계처럼 6시 반에 눈이 떠진다. 출근은 없다. 다시 잠을 청해보지만 그다지도 길었던 잠끝은 다 어디로 갔는지, 말똥말똥. 하루 종일 한발짜국도 밖으로 나가지 않은채 하루가 간다. 유준이는 그 오랜세월 이런 걸 어떻게 했단 말인가.
백수 둘째 날, 무작정 출근시간에 밖으로 나가는 은수.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 안도감과 낯설음을 동시에 느낀다. 충무로 거리에 선 은수. 미아가 된 기분이다.
종일 빈둥대다가 느즈막한 저녁 김영수를 만나러 나갈 준비를 하는 은수. 영수는 두 시간 가까이 지각이다. 벌써부터 백수라고 무시하나?, 마음이 꽁해지는 은수. 거듭 미안해 하는 영수에게 밥 대신 술을 마시자고 하는 은수. 미안하면, 술 한잔만 같이 마셔달라는 은수. 영수는 곤란한 기색이 역력하다. 홍이사를 부를까 묻는 영수에게 은수는 "오늘은 우리 둘만 있었으면 좋어요"하고는 이어 농담처럼 “저두 사석에선 오빠라구 부를까요” 한다. 은수의 말을 들은 영수, 소주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킨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태오의 문자를 받는 은수... 태오에게 답하는 대신, 영수에게 집에 가기 싫다고 말한다. 그럼 어디로? 묻는 영수에게 ‘가양동’(영수의 집)으로 가자고 하는 은수. 영수는 당혹스럽다. 그러나 은수는 정말 집으로 가고 싶지 않다. 지금 집에 가면 태오가 못견디게 그리울 것만 같으니까..
영수의 집. 고양이 빠오를 소개하는 영수. 은수, 자기가 이집에 온 첫 번째 여자일 거란 생각이 든다.
영수와의 나직한 대화.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티슈를 뽑아 건네며 등을 가만히 쓸어주는 영수.
“은수씨만 그런 거 아니예요. 나도 그래요, 항상”
영수의 나직한 음성에 울음이 터지는 은수. 걷잡을 수 없이 흐르는 눈물. 은수 한 없이 운다. 영수, 가만히 은수에게 입 맞춘다.
오빠로부터 전화가 온다. 엄마가 아버지에게 이혼하잔 소리를 했다는 말을 전해 듣는 은수. 가슴이 내려 앉는다. 오빠는 그 나이에 무슨 이혼이냐며, 지호 엄마 보기 민망하다고 말하고 발끈한 은수는 그 와중에 엄마편을 들게 된다.
주말 오후. 우울할 땐 햇빛이 좋다며 영수가 이끈 창이 넓은 찻집에 마주 앉아, 은수는 아늑함을 느낀다. 어느새 영수가 자기 삶 안에 들어와 있는 느낌.
은수, 불현듯 이상한 시선을 느낀다. 돌아보면, 창 밖에 노란 안전모를 쓴 한 사내가 영수를 빤히 보고 있다. 돌아보는 영수. 사내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이 굳는다.
창을 사이에 두고, 사내와 짧은 대화를 나누는 영수를 바라보는 은수. 돌아온 영수는 누구냐고 묻는 은수에게 그냥 아는 사람이라고만 말한다. 더 이상의 답변을 회피하는 영수. 은수도 더는 묻지 않는다.
영수, 미안한데 오늘을 데려다 주지 못할 것 같다고 말하고 어디론가 휘적휘적 사라진다.
영수와 일찍 헤어진 은수는 유희에게 전화를 건다. 유희는 북한산에 있다. 어린나무 아래.
오디션에 떨어졌다고 너스레를 떠는 유희. 직장 다닐때는 부디 돈 꿔가 달라고 사정하던 은행들이 이제는 신용카드 하나 만드는데도 유세라고도..
그런데 은수와의 전화를 끊은 유희. 훌쩍훌쩍 울기 시작한다. 오디션 때문인가? 아닐 것같다.
같은 시각. 재인은 가게 자리를 보고 있다. 공방을 새로 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날 밤. 유희와 은수의 메신저 대화. 오디션에 붙은 건 자기보다 열 살은 어리고 가슴은 두 배 큰 핏덩이라고 조만간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여전히 너스레를 떨던 유희..
불쑥 ‘이제 끝이 보인다’고 말한다.. 용가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곤 어디 갔는지 뚝 끊어지는 메신저.
메일함에는 발신자이름이 ‘BLUE’인 메일이 도착해 있다. 태오임을 직감하는 은수.
‘나예요..’로 시작되는 메일에서 태오는 그동안 몸이 조금 아팠음을, 이제는 다 나았음을, 곧 영화가 들어감을, 그전에 마지막으로 한번만 만나고 싶다는 말을 한다.
태오를 만나기로 한 일요일. 일찍 집을 나서지만 역시나 태오가 먼저 와 있다. 여전히 곱고 뿌리 깊은 아이인 태오. 태오는 밥을 사주고 싶다고 고급 레스토랑을 은수를 이끈다. 오무라이스를 먹는 두 사람. 술을 마시자는 제안을 어렵사리 거절하고 돌아서는 은수.
지하철 밖으로 나오면 봄 눈이 오고 있다. 문득, 태오가 겨울에 만난 아이라는 생각. 눈이 오기 시작하는 계절에 만나 눈이 그치는 계절에 헤어진.. 그와 함께 봄과 여름과 가을을 나보지 못했다는 생각을 한다.
영수에게 전화를 걸어보는 은수. 영수는 너무 바쁘다..
눈을 맞으며 돌아온 집 앞에 소주가 든 비닐통투를 든 태오가 서 있다.
“봄눈이 오잖아요.”하는 태오.
은수의 원룸. 은수는 태오를 위해 두부김치를 만든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해주는 요리다.
태오는 오래전 은수와 함께 행인으로 출연했던 단편영화의 DVD를 준다. 그리고 돌아간다.
DVD 껍질을 오래오래 들여다보는 은수. 보지는 않고, 서랍을 열고 태오가 만들어주었던 팝업카드 옆에 넣어둔다.
새로 연 재인의 공방. 오래전 사랑니 반지를 만들어간 남자가 여자친구와 함께 찾아온다. 여자의 손에는 사랑니 반지가 끼워져 있다. 둘만의 추억이 담긴 돌을 내밀며, 결혼 반지를 만들어 달라는 두 사람. 두 개의 작은 돌을 내려다 보던 재인, 그만 눈물을 떨꾼다.
당황하는 커플에게 “너무 낭만적이잖아요”하고 웃는 재인.
재인의 공방에서 만난 세 친구. 사랑니 커플 얘기가 화제에 오른다. 돌(보석)이 정말 좋다고 말하는 재인. 돌하면 다이아몬드지, 하고 놀리는 유희. 재인은 그렇지, 뭐니뭐니 해도 돌중의 돌은 다이아몬드지, 라고 말하지만 다이아몬드를 좋아하는 이유가 변했다.
이어 얼마전 태오를 만났다고 말하는 은수. 유희, 전에 없이 강경하게 은수의 양다리를 비난한다. 비윤리적이라고. 비윤리적이라는 말에 발끈한 은수가 용가리의 아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이와 떼어놓으려 하는 유희의 처사를 상기시키자 유희는 지난 8년간 한번도 다시는 입에 담지 않았던 아픈 과거 - 용가리의 아이를 지웠던 일- 를 꺼낸다.
순간, 은수는 얼마전 재인과 함께 갔던 보석 전시장에서 보았던 호박(보석)을 떠올린다.
수천만년 전의 곤충을 그대로 간직한 채 굳어진 호박을 보았을 때, 은수는 왠지 유희가 떠올렸었다.. 꼭 유희 같다고.. 유희에게 그토록 깊숙이 박혀버린 용가리를 같다고...
다시 재인의 공방. 유희는 먼저 자리를 뜨고 재인과 둘만 남은 자리. 재인은 조심스레 전자사보 전문회사 컨텐츠 기획직 자리를 소개한다.
다음날 아침, 면접오라는 전화를 받은 은수. 오늘 당장 오라는 전화에 그러겠다고 말하는 은수. 그날 오후의 면접. 희망연봉을 말해달라는 면접관의 말에 지난 회사 연봉의 1.5배를 불렀다가 한껏 비아냥을 듣는 은수.
다음날, 엄마가 집을 나가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분당집에 가는 은수. 심란하기 그지없다. 개수대에는 아버지가 끓여먹은 라면 냄비 세 개가 고스란히 놓여있다. 물에 담그지도 않은채 말라비틀어진 채. 사단은 콩자반에서 시작되었다. 사소해보이는 발단이지만 은수는 안다. 엄마가 얼마나 오랫동안 작은 모멸을 참고 살아왔는지를.
이튿날 아침이 되어도 엄마는 돌아오지 않고, 회사를 핑계로 무작정 집을 나선 은수는 김포아저씨에게 전화를 건다. 그도 엄마의 가출을 모르고 있다. 전화를 끊으려는 은수에게 괜찮으면 만나고 싶다고 말하는 아저씨.
김포아저씨와 만난 자리, 은수는 엄마와 김포아저씨의 오래된 얘기를 듣는다.
“남들 눈에는 요상해 보일 수도 있지만, 세상엔 꼭 집어서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그런 사이도 있거든, 그저 마음을 나누는 사이, 그 사람이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 의지가 되는 사이, 욕심내지 않는 사이.. 그런 관곌 뭐라고 해야할까..?”
심란한 마음에 유희와 함께 산에 오르는 은수.
유희는 산길을 헤치고 들어가 늘 찾아가던 작은 어린 나무 아래로 간다.
며칠 전 날카로워던 대화에 대해 은수가 말을 꺼내려는데, 유희..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는 듯, 다 괜찮다는 듯 웃는다. 그리고는 나무의 비밀을 들려준다. 8년전 아이를 지울 때, 용가리는 낳지 못하는 아이대신 나무 한그루를 심어 함께 가꾸자고 했었다. 그리고 둘은 작은 묘목을 한그루 심었다. 8년 내내 잃어버린 아이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건 아니다. 그저 가끔 이 나무 아래 오면, 마음이 편안해서 나만의 아지트가 된 것 뿐이다. 근데, 요놈 예쁘지 않아? 묻는 유희. 얼마 전 용가리와 함께 이곳에 왔었는데, 용가리가 울더라는 얘기도 한다. 그렇구나.. 이제 아홉 살이 된 어린 나무를 올려다 보는 은수. 나무고 뭐고 하산하면 어떻게든 가슴이나 키워봐야겠다고 너스레를 떠는 유희.
산에서 내려오고 나서도 분당 집에 가기 싫은 은수는 재인의 공방으로 유희를 이끈다.
세 친구의 회동. 재인은 돌로 만든 결혼반지를 보여준다. 어느 때보다 열정적인 재인.
은수와 유희는 재인의 내부가 변했음을 느낀다.
유희는 불쑥 재인에게 사과한다. “뭐가?”, “ 뭐든지 다.” 웃는 두 사람.
유희, 가슴 수술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놀라는 은수. 신난 재인. 그 방면에 정통한 재인은 성형외과 이름과 특징을 줄줄 읊으며 유희와 죽이 척척 맞는다.
오랜만에 영수의 농장을 찾은 은수. 영수와 함께 하우스의 채소를 거두는데 엄마의 전화가 온다. 114에 문의해 엄마가 있는 리조트를 알아내는 영수. 은수를 엄마가 있는 곳에 데려다 준다. 엄마에게로 가는 차안, 은수는 전에 없이 영수가 가깝게 느껴진다.
엄마를 만나는 은수.
돌아오는 길, 집에 가기가 싫다. 어딘가로 나를 데려가 달라고 말하는 은수...
[제 13 부 / 제 14 부]
영수와 찾아든 지방의 관광호텔... 고단한 은수가 먼저 잠이 들고, 두 사람은 나란히 누운 채로 곱게 아침을 맞는다.
서울에 돌아오자 두 가지 소식이 은수를 기다리고 있다.
지난 번 면접을 본 회사에서 온 탈락 소식과 우거지 월드 개업기념 책자를 맡아 달라는 안이사의 전갈이 그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맞은 아침. 은수는 급기야 참아왔던 화를 터뜨리고 만다. 왠일인지 묵묵부담인 아버지.
도서관과 피씨방을 전전하며 우거지와 관련된 자료들을 찾다가 집에 들어가면,
익숙한 엄마의 된장찌개 냄새가 난다. 엄마가 돌아왔다. 새삼, 엄마가 끓여준 된장찌개를 몇 번이나 먹었을까.., 생각하는 은수. 출근하려면 어서 돌아가라는 엄마에게 회사를 그만 두었다고 고백하는 은수. 엄마, 별다른 말없이 은수를 배웅한다.
술집. 유희, 재인과 만나는 은수.
은수 엄마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기뻐하는 친구들.
은수가 결혼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유희와 재인은 청혼을 받았냐고 묻는다.
그건 아니다.. 그러고 보니 영수는 결혼에 대해 한번도 말한 적이 없다..
다음 날, 영수를 만난 은수를 엄마의 귀가 소식을 알린다.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영수.
은수, 넌지시 결혼에 대해 떠보지만 영수의 반응을 멀뚱하기만 하다. 친구들은 결혼들 많이했죠? 은수의 질문에 친구가 없다는 영수. 그럼 그때 그 노란 안전모는? 글쎄 그 사람이 결혼을 했나, 잘 모르겠다는 반응.. 그런 식이다. 은수, 기분이 상한다..
꽁해진 은수는 연거푸 영수의 전화를 받지 않는다.
심란한 마음에 괜히 대청소를 하기도 한다. 걱정스런 영수의 음성메시지에도 답을 하지 않는다.
유준에게 빌린 노트북을 들고 근처 찻집으로 나와 우거지에 대한 아티클을 써보는 은수.
그러나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밤. 재인과 메신저. 은수의 진지한 상담에 이제야 니들이 날 사람 대접 하는구나, 즐거워하는 재인. 그리고 “왜 네 맘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느냐”고 묻는다.
남산타워. 스카이 라운지에서 은수는 영수에게 청혼을 한다. 영수는 시간을 좀 달라고 말한다. 시간을 달라..., 이거야 말로 청혼을 받은 여자들이 하는 전형적인 대사가 아니던가.. 대관절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은수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한편 마음이 시원하다. 아무튼 나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막상 영수에게 연락이 없자, 슬금슬금 약이 오르고 자존심도 상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은수.
사흘 후 밤. 드디어 영수가 찾아온다.
“나, 은수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멀쩡한 놈은 못돼요...그래도 괜찮다면...”
은수의 프로포즈를 고맙게 승낙하는 영수.
분당 식구들에게 영수를 소개하기 위해 마련한, 급조된 저녁식사 자리.
아버지의 음식타박은 여전하고, 오빠는 이게 웬 횡재야 하는 눈길이다. 좋아할 줄 알았던 엄마만이 의외로, “우리 은수, 어디가 좋아요?”하고 묻는다. 그러고 보니 은수도 궁금하다.
모두가 영수의 답을 고대하는 순간. 조카 지호가 말한다. “어? 피다!” 영수의 코에서 흐르고 있는 코피.
본격적으로 결혼준비에 들어가는 은수.
영수는 회사일이 바빠져 모든 준비는 은수에게 일임된다..
택일을 하러 점집에 가기로 한 날, 영수는 일이 생겼다고 미안하다고 말한다. 은수는 또 혼자 가야한다.
같은 시각. 영수는 낯선 손님과 마주 앉아있다. 보면, 노란 안전모 사내다.
굳은 표정으로 사내를 바라보고 있는 영수. 겨우 말을 꺼낸다.. “형..”
같은 시각. 점쟁이 앞에 앉아있는 은수.
영수의 사주를 보고 고개를 갸웃하는 점쟁이.
6월 5일을 점지해준다. 너무 빠른 것 같다는 은수의 말에, 빠른 게 낫다고 말하는 점쟁이.
은수는 유희와 점심을 먹고 백화점 가전매장을 둘러본다.
유희는 용가리와의 이별을 전한다. 유희의 길고 질긴 첫사랑이 드디어 끝난 것이다.
유희는 결혼하고 영수의 집에서 들어가 살거냐고 묻고는, 그 집이 영수 거냐고 묻는다.
모르겠다는 은수. 어떻게 그런 것도 모르냐는 유희. 그러고 보니 은수는 영수에 대해 아는 게 없다.
게다가 영수와의 스킨쉽은 아직도 키스에 머물고 있다.
늦은 저녁. 영수의 차안. 라디오에서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가 흘러나온다.. “가벼운 풀밭위로 나를 걷게 해주세. 봄과 새들의 노래 듣고 싶소, 울고 웃고 싶소, 내 마음을 만져주..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테야..” 나직히 따라 부르는 영수. 은수도 따라 부른다.. 문득 영수의 스무살이 궁금하다. 그러나 영수는 또다시 대답을 피한다. 속이 답답해지는 은수. 결혼식장을 결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중에.. 라고 답하는 영수. “나중에.. 나중에.. 그 나중이 대체 언젠데요?” 급기야 참았던 화를 터뜨리고 마는 은수.
“우리 결혼하는 거 맞아요? 우리 둘이 진짜 결혼해요?”
“.....”
“근데 왜 나는 자꾸 혼자서 맨땅 파헤치는 느낌이 들죠?”
“......”
오래도록 고개를 들지 않는 영수....
[제 15 부 / 제 16 부]
< 15부 >
그날 이후.. 영수에겐 연락이 없다. 아니 영수가 사라졌다..
처음엔 그냥 조금 화가 났나보다 생각했던 은수는 이틀 넘게 연락이 오지 않자 슬슬 걱정이 든다. 전화를 걸어보지만 받지 않는다. 영수의 회사 ‘그린캣’으로 전화를 걸어보지만 사장님은 지금 안계시다는 답변 뿐.
가양동 영수의 집 앞에 갔다가 경비로부터, 며칠째 차도 안보인다는 얘기를 들은 은수는 덜컥 겁이 난다. 영수와 형제처럼 지내는 홍이사에게 전화를 거는 은수.
그러나 홍이사도 영수의 행방을 모른다. 실종신고를 해야겠다는 은수를 황급히 말리는 홍이사. 은수는 이 상황을 납득 할 수가 없다.
영수가 얼굴없는 괴한에게 쫓기는 꿈을 꾸고난 아침, 은수는 경찰서에 가지만, 실종신고는 직계가족이나 배우자만이 할 수 있다는 답변을 듣고 돌아온다.
경찰인 재인의 사촌형부을 통해, 영수의 행방을 알아보려는 은수.
주민등록번호가 필요하다.
어려사리 안이사를 통해 영수의 주민번호를 알아내는 은수.
다음날 재인에게 뜻밖의 얘기를 듣게 된다.
“은수야, 좀 이상해.. 이미 가출 신고가 돼 있다는데?”
재인의 말에 따르면, 김영수는 이미 94년에 가출신고가 돼 있는 실종자라는 것이다.
영수의 주민등록상 주소지를 찾아 부산에 내려간 은수는 부산역에서 ‘행복의 나라로’를 부르는 청년들을 본다.
어느 허름한 식당, 김영수의 주소지에서 은수는 김영수의 형수라는 중년 여인에게서 김영수의 사진을 본다. 그러나 사진속의 김영수는 은수가 아는 영수가 아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사진속의 남자는 노란 안전모의 사내인 것 같다. 그렇다면 나와 결혼하기로 한 남자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딛고 선 땅이 흔들리는 듯한 은수.
영수가 사라진 하루 하루, 시간을 견디기 위해 은수는 매일 아침 초등학교 운동장을 전속력으로 달린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돌아오던 어느 아침, 은수는 우편함에서 농구티켓 한 장이 든 흰 봉투를 발견한다. 영수의 전갈임을 직감하는 은수. 봉투엔 소인이 없다. 그가 왔다가 간 것인가..
농구장. 비어있는 옆자리. 농구가 한창 진행되고 두 번째 쿼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모자를 깊이 눌러 쓴 영수가 나타난다. 자기를 보지 말아달라고 그냥 들어달라고 말하는 영수. 오래된 얘기를 들려준다.
나는 김영수가 아니라고.. 열일곱 살, 강가에서 술을 마시다가 시비가 붙고 어쩌다 한 친구를 죽게 했다고... 농구를 잘했던 훤칠하고 서글서글한 눈매를 가진 친구였다고.... 스무살을 감옥에서 맞았다고..... 밖으로 나왔을 땐, 자기 이름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고..... 방황하던 시절, 다시는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던 떠돌이 형을 만나게 되고 그 이름으로 살게 되었다고..... 언제나 많이 행복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치만 아주 조금은... 그러니까 불행하진 않게 살고 싶었다고.... 그런데 은수를 만나고 욕심이 생겨버렸던 것같다고.... 어쩌면 나도 행복해질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은수씨처럼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그런데 그 형이 돌아왔다고.. 다시 자기의 이름을 찾고 싶어한다고...
어느새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 은수에게,
“용서해달라는 말, 안 할게요.. 정말.. 미안해요...”
은수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면.. 그 사이.. 영수는 다시 사라지고 없다.....
<16부>
(16부는 은수가 영수에게 보내는 두 통의 메일과 은수에게 영수가 보낸 한통의 메일로 진행된다.)
시간이 흘러, 늦은 봄. 5월 말이다.
은수는 빨간색 마티즈를 집 앞에 주차한다.
집에 돌아와 서랍을 여는 은수. 영수의 명함을 찾는다.
그리고 첫 번 째 메일을 쓴다.
“오늘 나 차를 샀어요.. 99년식 빨간색 마티즈.. 20세기 끝자락에 태어난 녀석이란 게 마음을 끌었어요.. 왠지.. 내비게이션은 달지 않을 것 같아요.....”로 시작되는 메일.
은수의 부모는 결국 별거에 합의하고, 40평짜리 아파트는 공평하게 20평짜리 2개로 나누어 살고 있다는 얘기,
안이사의 우거지 월드 개업 기념책자의 ‘우거지 홀릭’을 만들면서 어쩌다 보니 ‘오은수 편집회사’ 사장님이 되었다는 얘기. 물론 직원도 사무실도 없는 사장님이라는 얘기. 그치만 마티즈를 산 돈은 그 회사에서 번 것이라는 얘기, 그런데 안이사의 우거지 집에서 먹은 우거지가 맛있더란 얘기.. 한번도 원해서 먹어본 적이 없고, 제대로 맛을 음미한 적도 없었던 그 우거지가 정말로 맛있더란 얘기.. 어디로 살아온 건지 모르겠단 얘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일은 마티즈를 타고 멀리까지 가볼까 한다는 얘기.. 가서 사랑했지만 그 사랑을 주지는 못했던 오래된 친구를 만나고 오려고 한다는 얘기.....
메일을 보내고, 서랍을 여는 은수. 오래전 태오가 주었던 DVD를 꺼내다 팝업카드를 열어보는 은수. 환하게 튀어 오르는 입체카드.
그리고 어설프게 촬영된 디지털 단편 영화 속엔 사랑을 속삭이는 주인공들 뒤로 다정하게 지나가는 행인, 은수와 태오가 보인다. 아주 짧게, 아주 짧게 보인다.
그 모습을 아련하게 보는 은수. 담담하고 가벼워 보인다. 그리고 은수의 얼굴에 이는 부드러운 미소.
마티즈를 타고 강원도 홍천으로 가는 은수. 자꾸만 차를 세우고 지도를 보고 사람들에게 길을 묻는다. 그 위로 영수의 메일이 흐른다.
“제 이름은.... 서찬석이예요..”로 시작되는 메일..
강원도 홍천 강가에 마련된 영화 촬영장에 도착하는 은수.
분주한 스탭들 사이를 오가는 태오를 발견하는 은수.
“그 친구에게 그렇게 진지한 표정이 있었는지 몰랐어요...”로 시작되는 은수의 두 번째 메일이 시작된다..
은수와 마주한 태오.. 놀라워하며 반기는 태오의 얼굴..
담담한 해후다..
서울. “유준이 쓰러졌대” 유희의 전화에 놀라는 은수.
병원. 달려 들어오는 은수와 재인. 걱정스럽게 앉은 유희 곁 침상에 이불을 머리까지 덮고 누워있는 유준.
금방이라도 울음이 쏟아질 듯 굳어지는 은수와 재인의 얼굴.
불쑥 이불을 들추고 얼굴을 드러내는 유준, “놀랐냐?”하고 웃는다.
“우씨, 놀랐잖다.” 패듯이 웃으며 안도하는 은수와 재인..
“기억해요? 오늘.. 6월 5일인데.. 점쟁이가 정해준 날이잖아요.. 오늘은 오래된 친구 유준이가 쓰러졌다는 얘길 듣고 병원에 갔었어요...” 이어지는 메일..
오랜만에 병원 내부 잔디밭에 나 앉은 네 친구.
즐거운 수다가 벌어진다.
은수의 메일 이어진다..
처음으로 얻은 직장인 보습학원에서 천부적 재능을 발견한 탓에 인기강사로 이름을 날리다 못해 과로로 쓰러진 유준이 얘기,
식염수 200CC의 자신감 덕인지, 가을에 막이 오를 뮤지컬 오디션에서 합격해 첫 무대를 기다리고 있는 유희 얘기, 아주 작은 역이라는 얘기, 그리고 오래도록 유희 곁은 알짱대던 젊은이와 아무래도 뭔가가 시작되고 있는 듯하다는 얘기,
돌들과 새로운 사랑에 빠져, 보석 공부를 하러 유학을 떠나기로 했다는 재인이 얘기... 그리고 아무래도 재인인 유준에게 마음이 있는 듯 하다는 얘기, 그러나 돌들과 유준이 중 어느 쪽에 마음이 더 있는 지는 알 수가 없다는 얘기...
친구들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 거리에는 예보에 없던 빗줄기가 쏟아진다.
비를 맞으며 정류장까지 뛰는 은수.
정류장에 서서 내리는 비를 향해 가만히 손을 내밀어보는 은수.
손바닥에 고인 투명한 빗물을 입술에 가져가 덴다..
“서울의 비에는 아무 맛도 없었어요. 맹탕이에요.. 모르겠어요. 지금 내 마음이 어떠한지.. 가득차 있는지, 텅 비어 있는지, 달콤한지, 쓸쓸한지, 가벼운지, 무거운지, 붉은 빛인지, 푸른 빛인지, 차가운지, 뜨거운지, 하나인지 둘인지, 아니면 여러 개인지.... 나는 종종 내가 느끼는 내 마음엔 이름이 없다고 느껴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