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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부르심
창 12,1-9
요절: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지금까지 몇달동안에 걸쳐서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 공부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로 부터 시작하여 인간창조, 인간의 타락, 형벌과 원시복음, 최초의 살인, 가인의 자손들의 삶, 셋 자손들의 경건한 삶등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노아의 홍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왜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이 일어났습니까?
그것은 가인의 자손들과 셋의 자손들이 서로 혼인하고 사귀게 되어 불신자들과 경건한 자들간에 구분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로 인간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창 6,3a.
인간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무서운 판단의 말씀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큰 문화를 발전시키고, 인간의 존엄성과 이웃 사랑을 부르짖지만, 하나님 편에서 바라볼때는 인간이 한 점의 가치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화 상대자로, 친구로 창조하셨는데, 그들과는 잠시도 함께 할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심판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다시 축복하셨습니다. 인간은 번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번성한 인간은 다시 무엇을 하기 시작했습니까? 하나님과 힘겨루기 위해 매우 높고 견고한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를 혼란하게 하셔서 사람들을 각 종족대로, 각 지역으로 흩으셨습니다. 70개의 언어와 종족으로 흩어졌다고 했습니다.
이것으로 성경의 보도는 한 단락을 맺습니다. 지금까지 인류의 기원부터 시작하여, 그들이 어떻게 각 지역으로 또한 각 종족별로 흩어졌는가를 다루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원역사(Urgeschichte, prehistory)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성경의 기술 방법이 전혀 달라집니다.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하지 않고 단 한 사람을 대상으로 합니다. 하나님께서 수백만의 인류를 방치하시고, 단 한 사람에게만 관심을 가지시는 것 같습니다. 그 만을 사랑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제 구속사 즉 구원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단 한사람에 의해 시작됩니다. 여기에는 매우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불러내시어 그와 오랬동안 교제를 하셨습니다. 수십년간 서로 신뢰의 관계를 가지셨습니다. 그가 죽자 그 교제는 그의 아들 이삭에게로 넘어갑니다. 그 이후 계속해서 야곱, 그 이후에 요셉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되다가 드디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탄생됩니다. 그 이스라엘에서 다윗왕이 나오고 다윗왕의 후손인 예수님이 탄생하시어 구원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이 됩니다. 아브라함으로 부터 예수님까지 2000년이 흐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가지 의문을 갖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한 사람, 혹은 한 민족과만 관계를 하실까“입니다. 요즘 흔히 사용하는 말로 동시 다발적으로 일을 하시면 되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홍수 이전에는 에녹과 노아와 같은 사람이 있어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인류가 홍수라는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고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구속의 약속을 주셨지만 인간은 그것에 관심을 갖지 않고 스스로 멸망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때에는 단 한 사람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까지도 하나님을 떠났을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여호수아 24,2: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우상을 섬겼으면 집안에 우상이 있었을 것이고 아브라함도 그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단 한 사람도 하나님만을 믿는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인류는 다시 어두움에 빠져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무언가 시작을 하지 않으시면 않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시기 위해 한 사람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부르신 그 한 사람을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75세가 된 늙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의 이름을 잇고 가문을 이끌어갈 자식마저도 없었습니다. 딸이라도 있으면 데릴사위라도 데려 오겠지만 그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삶에 절망을 느끼며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는 한 노인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은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자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부르지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자신에게 대해 절망을 하고 있을 때 입니다. 자신감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한때 자신의 힘으로 동족을 애굽의 노예생활로 부터 구원을 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살인자가 되어 미디안 광야로 피신을 해야 했습니다. 거기서 40년 동안 양치기로 아무 의미가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은 그가 삶에 아무 의미도 찾지 못하고, 사람들을 상대도 하고 싶지 않을 때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죽음을 기다리는 나이 80세였습니다.
1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떠나라!“ 입니다. 떠나라! 그는 왜 떠나야 하며 무엇을 떠나야 합니까?
그는 먼저 우상을 떠나야 합니다. 우리 생각에 우상이라면 황금 송아지나 신상이 먼저 머리에 떠오르겠지만 우상은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는 더우기 우상숭배가 아니면 살 수가 없는 사회였으므로, 우상을 효과적으로 피하려면, 그가 살고 있는 사회를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곳에 가서 혼자 살아야 합니다. 과거의 삶과 완전한 단절을 의미합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던 안락한 거주지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특히 당시는 도시를 떠나서 혼자 산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도시는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는, 성곽으로 둘러쌓인 안전한 곳이었습니다. 광야에는 도적떼들이 많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여러 씨족들로 구성된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혈연을 떠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동안 도시의 안락한 삶이 몸에 배였는데, 또한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들을 떠난다는 것이 75세가 된 할아버지에게 가능한 일이었겠습니까?
부르심의 핵심, „떠나라“ 라는 말은 결국 무슨 의미입니까? 마음에 두고 있는 모든 것을 떠나서 마음을 하나님께 돌리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이것 없으면 못살겠다고 하는 것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하나님께만 향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난자의 자유입니다. 거듭난 자는 어떠한 곳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던 시절인 4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습니다.
2,3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즉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야 하는 이유에는 더 큰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커녕 딸도 없는 아브라함에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약속을 하십니다.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다 늙은 할아버지가 큰 민족을 이룬다는 것이 상상이 갑니까?
또한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축복을 너무 많이 받아서, 축복이 넘쳐나서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축복이 전가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가 축복의 샘이 된다는 말입니다. 샘에는 끊임없이 생수가 솟아나지 않습니까? 그러면 아브라함의 자손인 우리가 받는 축복이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갈 3,7-9: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축복이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입니다. 구원이란 영생으로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단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이 영생이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큰 축복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삶속에서 이 하늘에서의 영생을 단지 몇 초만이라도 체험을 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달라질 것입니다.
영생이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는 영생이 생 지옥이 될 것입니다. 평소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 진리를 사모하지 않는자, 거룩함의 갈망이 없는 자에게는 영생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들은 영생을 갈망합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떠나는 것입니다.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는 것입니다. 자기가 신뢰하던 모든 것을 떠나 단지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집착과 근심을 버리고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다고 했습니다. 그가 진짜로 고향을 떠난 것입니다. 마음으로만 떠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위해 과거의 삶을 청산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늘 말하는 믿음이란 것이며, 이것이 구원이며, 이것이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 원리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길때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지만, 그러나 바로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이제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실제로 얼마나 축복하셨는가를 보게 됩니다. 이제 인류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 서사시가 벌어집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축복과 사랑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창세기 공부를 해오면서 이것을 배웠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축복하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분이 축복하시는 정도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런데 그 분은 우리를 어떻게 축복하십니까? 우리를 먼저 부르십니다. 우리를 모든 속박에서 풀어주시어 자유인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자유인의 몸으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성도님들 모두가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개인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우리를 개인적으로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제 마음을 모두 하나님께 드리지 않아 괴로웠습니다. 제 몸이 좀 더 편하고자 그런 일을 저질렀던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를 체험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에게로 갈 자신이 없어 스스로 세상에 족쇄를 채우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2000여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명하신 말씀이 저에게도 살아있는 말씀으로 다가왔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모든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려 내일을 염려하며 살지 않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Denn wie durch den Ungehorsam des einen Menschen( Adam ) zu vielen zu S?ndern geworden sind, so werden auch durch den Gehorsam des Einen(Jesus Christus) die vielen zu Gerechten. R?mer 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