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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세상] 3대에 걸친 보이어가문의 '한국사랑' | ||||||||||||||||||||||||
2대 보계선선교사와 홍은섭장로의 47년 우정, 함께 제주기독의원 설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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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미 기자 jbm@kidokongbo.com [조회수 : 22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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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줘서 고맙습니다. 비가 많이 오는데 고생 많았습니다." 서울에 있는 홍은섭장로(여의도제일교회 은퇴)가 대전에 특별한 손님이 와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 찾아간 곳. 그곳에는 지난 1960년대 미국 남장로선교회 파송으로 한국에 건너와 선교 사역을 펼쳤던 보계선선교사 부인 실비아여사(74세)가 있었다. "한국말은 오랫동안 안 써서 거의 다 잊어버렸습니다." 한국말로 떠듬떠듬 안부를 묻던 실비아여사(보계선선교사 부인)에게 홍은섭장로는 유창한 영어로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두 사람은 홍 장로가 준비한 옛 사진을 한 장 한 장 들여다보면서 웃기도하고 "기억난다"며 박수를 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홍 장로는 이 추억의 사진들을 일일이 캠코더로 찍어 DVD로 제작, 실비아여사에게 선물로 건넸다. 실비아여사는 뜻밖의 선물에 놀라움을 나타내며 먼곳까지 걸음하게 한 것게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거듭 표현하면서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선물을 받아들었다. 미소를 띤 두 사람에게서 은은한 눈빛이 오갔다. 옆에 있던 실비아여사의 아들 디모데선교사가 이 장면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디모데선교사는 대전외국인학교의 과학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아들 내외와 손자 손녀를 보기 위해 노령에도 불구하고 쉽지않은 한국행을 결심한 실비아여사. 또 그러한 실비아여사를 만나기 위해 서울에서 대전까지 내려온 홍은섭장로. 이들에겐 과연 어떤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것일까? "1961년부터 미국 남장로선교회 직원으로 들어가 일하기 시작했죠. 그때 케니스 보이어선교사(Kenneth E. Boyer, 한국명 '보계선')를 만났어요. 남장로선교회 파송으로 제주지역을 담당하던 보계선선교사와 함께 제주로 가서 병원을 짓고 평신도들을 훈련시키며 주민들을 전도했죠. 그렇게 78년도까지 장장 18년 동안 우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끈끈한 우정을 맺게 되었답니다." 서울, 목포, 광주 등에서 근무하던 홍은섭장로가 1972년 제주로 파견되며 보계선선교사와 그의 부인 실비아여사의 인연은 더욱 깊어진다. 홍 장로에 따르면 당시 제주는 선교사 자녀들의 교육여건이 마련돼 있지 않아 선교사들은 광주에 주거하면서 제주를 비행기로 왕래하며 선교활동을 벌였다고 한다. 미국 남장로선교회 최초로 지역 텃세(?)가 유난히 드센 제주에 파송됐던 보계선선교사는 간호사인 부인 실비아여사와 일주일에 이틀, 많게는 5일까지 체류하며 제주에 있던 홍 장로와 함께 다양한 선교 사업을 병행했다. 이들이 특히 주목한 사업은 의료선교와 평신도 훈련 사역. 노력의 결실은 그해(72년) 9월 1일, 홍 장로의 명의로 비영리 의료기관 제주기독의원 설립을 제주도 지사로부터 허가받으며 시작된다. "병원이 생겼지만 진료할 의사가 없어 문제였어요. 당시 광주기독병원 소장 카링톤의사가 매주 주말 이틀간 제주로 와서 진료해 주며 겨우 운영해나갔죠. 주민들을 위해 제주 지역에 상주하며 진료해줄 의사가 절실히 필요했죠." 제주노회와 협력해 개척교회를 짓고, 평신도 센터를 지어 학생들을 훈련시켰다. 사역은 순풍에 돛을 단 듯 했지만, 정작 뚜렷한 결과물을 보이던 병원이 상시 근무할 의사가 없어 골칫거리였다. 때문에 보계선선교사와 홍 장로는 전주예수병원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두드리는 자에게 열린다고 했던가. 제주기독의원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전주예수병원 이사회에서 기독의원을 예수병원의 분원으로 받아들이며 상주 의사 2명을 파견해 주었다. 이로써 제주기독의원에는 한국인 의사 2명이 매일 제주 주민들을 돌보게 됐다. "제주 지역은 유난히 바람과 햇볕이 강해 안질환자들이 많았어요. 또한 해녀들은 코나 귀에 물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이빈후과가 꼭 필요했죠." 그렇게 해서 안과, 이빈후과 의사 2명이 파견됐다. 타 과목 의사들은 전처럼 제주를 왕래하며 환자들을 돌봤다. 그중엔 조선대 의과대학 치의학과를 만든 뉴스마 박사도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군의관으로 참여했던 뉴스마 박사는 일본 오키나와 공군병원에서 쓰던 의료장비의 일부를 제주로 가져와 치과시설을 만들어줬다. 보계선선교사와 홍 장로 등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드디어 제주에도 반듯한 모양새를 갖춘 병원이 탄생했다. 물론 찾아오는 환자들에게는 돈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배 이상으로 정성을 다해 돌보면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닫힌 그들의 마음을 열어나갔다. 실비아여사도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육지에는 기생충 환자들이 많았어요. 때문에 마을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구충약을 보급했죠. 그런데 제주는 육지보다는 환자들이 적었어요. 돼지들이 화장실을 같이 쓰며 깨끗이 해줬기 때문이죠." 실비아여사는 간호사로 선교하며 즐거웠던 기억도 있지만 영양실조로 몸이 약해진 환자들, 특히 소아마비에 걸린 어린이들을 지켜보며 가슴 아팠던 때가 더 많았다고 회고했다. 실비아여사에 따르면 보계선선교사는 79년 미국으로 건너가 버지니아주에서 뉴햄튼장로교회 담임으로 사역했다고 한다. 은퇴한 지금은 건강이 많이 쇠약해져 요양 중이라고 했다. 보계선선교사는 이제 더이상 한국에 없지만 보이어 가문은 지금도 한국에 선교사로 남아 그 뿌리를 이어가고 있다. "한국 초대 선교사 중 한분이신 할아버지(엘머 보이어, Elmer T. Boyer)가 1대, 아버지가 2대, 제가 3대째죠." 1962년에 전주에서 태어나 80년도에 미국으로 건너 갔다가 대전외국인학교 초청으로 지난 1992년 다시 한국으로 온 보계선선교사의 아들 디모데 보이어선교사. "한국은 이제 우리 가문의 고향이 됐어요.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한국에서 선교활동 하신 것을 듣고 보면서 자랐죠. 우리 가족의 마음은 한국인이나 다름없어요." 보이어 가문의 한국사랑은 애틋했다. 이들 가문에 의해 또 한사람, 함께 젊은 시절을 선교 열정을 불태웠던 홍은섭장로의 인생관도 변했다. "보계선선교사는 은퇴 후에도 생활비를 따로 떼어 자신이 처음으로 사역했던 호남지역에 매년 5천불씩 지원했다고 들었어요. 가난한 신학생들을 위해 써달라면서. 보계선선교사와 함께 하며 그의 신앙을 본받은 것 같아요. 남은 시간동안 저도 선교사역에 전념하고 싶어요." 홍 장로는 이르면 다음달, 아프리카 가나의 컴퓨터센터 선교를 위해 현지로 떠날 예정이다. 보이어 선교사들이 남긴 한국 사랑이 이제 해외로 퍼져나가는 것이다. 잠자코 듣고 있던 디모데선교사의 아들 윌리엄 보이어 군이 한마디 거들었다. "한국이 좋아요. 할아버지랑 아빠와 같이 한국에서 살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할아버지가 자랑스러워요." 김밥을 제일 좋아한다는 윌리엄 군. 한국을 얘기하는 그의 큰 눈망울이 반짝반짝 빛났다.
1921년, '좋소' '고맙소'라는 두 마디의 한국어만을 구사할 줄 알았던 보이열선교사가 한국 땅을 밟았다. 세계선교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한국으로 파송된 그는 마루에 앉아 램프를 키고 소년 소녀들에게 복음 메시지 들려주기를 좋아했다. 초대 선교사들 중 한 명인 보이열선교사는 전주에서 순천으로 사역지를 옮기며 요양소를 건립해 나환자와 고아들을 돌보고 성경학교를 열어 복음을 전파했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나병이 완치된 3백30명은 갱생센터인 '보이열 마을'에서 새 삶을 꾸려나갔고 순천고등성경학교에서는 90명의 젊은이들이 성경을 공부하게 됐다. 선교 사역을 반드시 해야 하는 구세주의 명령이라 여겼던 보이열선교사. 그는 자서전 '한국 오지에 내 삶을 불태우며'(개혁주의신행협회 출판)에서 "44년간 내가 사랑하는 한국에서 선교사로서 봉사하는 멋진 삶을 살았고 믿음과 복종이라는 모험 아닌 모험을 결코 후회해 본 적이 없다"고 기술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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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년 01월 17일 11:30:10 / 수정 : 2008년 01월 17일 11:38: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