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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Alfred Stieglitz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1864-1946)
? 나는 사진을 만들지 않는다. 나는 인생을 보는 시선을 가지고 있으며 단지 그것을 사진이라는 형태 안에서 동일성을 찾으려고 노력할 뿐이다... 물론 나는 성장하였고 훨씬 많이 깨닫게 되었다. 또한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더욱 자각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성장하면서 얻은 것은 아마 다른 방향에 있어서는 잃은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술에서는 과정이라는 것과 성장이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오직 예술이냐 예술이 아니냐만 있을 뿐이다. 그 중간에는 아무것도 없다.?
Alfred Stieglitz, Camera 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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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fred Stieglitz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는 20세기 미국 사진 계 그 첫머리에 존재한다. 그는 미국 사진 초창기를 풀어나간 위인이며 스트레이트 사진의 매듭을 지어 놓은 천재라는 의미로, 이후의 미국 사진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를 일러 '근대 사진의 아버지'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1864년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난 Alfred Stieglitz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는 미국 예술 사진운동을 이끈 주도자였다.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아버지의 배려로 유럽에서 1882년부터 1890년까지 9년 동안 유학생활을 하였다. 그는 베를린 공과대학에서 전기 기계 공학을 전공하던 중 1883년 사진 화학자인 포겔(H.W. Vogel)교수의 사진 실험실을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어 2년 후 사진 화학을 전공하였다. 세계 예술 사진의 역사를 새로 쓴 스티글리츠의 열정은 베를린의 작은 가게에서 처음으로 카메라를 구입하면서 시작되었다
그의 본격적인 사진 활동은 그가 1887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다가 찍은 사진이 런던에서 공모한 현상에 1등으로 당선 되면서 시작되었다. 이로부터 채 3년이 안되는 기간동안 150개가 넘는 상을 받을 만큼 그는 사진 활동에 몰입했고 사진은 그의 전부가 되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Alfred Stieglitz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는 1902년 Photo Secession (사진 분리파)을 결성, 사진 그 자체의 순수한 기계적 기록성을 되찾자는 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그의 생각은 다른 사진가들에게 사진 적 리얼리티를 기초로 한 Straight Photography (스트레이트 사진) 의 올바른 자각을 유도했다. 이것은 사진 역사의 흐름을 뒤바꾸어 놓은 새로운 지표가 되었다. 그가 주장한 ‘스트레이트 사진’이란 사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능력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대상을 표현하고자하는 곧은 의지의 산물이다.그는 Photo Secession (사진 분리파)을 홍보하고 회원들의 작품을 알리는 공식 기관지로 사진 저널인 'Camera Work (카메라 워크, 1903-1917)' 를 발행, 연 4회 정기적으로 출간하였다. 또한 자신이 벌이고 있는 운동을 전개할 전시 공간의 필요성을 느껴 1905년 뉴욕 5번 가에 현대사진의 산실일 뿐만 아니라 미국 현대 예술의 모태이며 전위적인 예술혁명의 진원지가 된 Gallery 291(1905-1917)을 개관했다.
세계 제1차 대전과 재정 악화로 문을 닫는 1917년까지 그는 Gallery 291의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유럽의 독창적인 사진과 예술을 미국 대중들과 예술인들에게 전달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미국 사진의 근대적 자각(photography as modernism)을 유도하는 커다란 전기를 마련하였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는 그의 아내인 Georgia O'Keeffe (조지아 오키프)와 Paul Strand (폴 스트랜드)를 통해 예술과 사진을 재발견 하였고 그 후 몇 년 동안 그 자신의 작업을 위해서만 시간을 투자했다. 또한 그는 그의 초기 작품처럼 사진의 순수성과 자연주의적인 특성을 강조하였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사진세계는 1917년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그의 전기 사진은 철저한 사실주의의 추구이고, 후기는 사실주의를 딛고 넘어서 은유적 사실성(v�g)의 세계를 새롭게 전개한 시기이다. 전기를 대표하는 사진으로는 <The Steerage : 삼등선실 >, <Winter on Fifth Avenue : 5번가의 겨울 >, <The terminal : 종점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Winter on Fifth Avenue : 5번가의 겨울 >는 추운 거리에서 3시간이나 버틴 끝에 찍은 작품이며 명암의 배분과 원근 구성이 완벽할 뿐만 아니라 하물마차의 모습이 인상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후기를 대표하는 사진으로는 1920년대부터 구름을 주제로 한 <Equivalent : 이퀴벌런트>시리즈를 들 수 있는데 '이퀴벌런트' 는 '동등한 것', '대응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사진가 또는 감상자가 그 사진 속에 내재하는 어떤 이미지와 자신의 내적 경험과의 상충/융합 작용을 통해 사진 속의 대상을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스티글리츠는 사진이 관념적이고 개념적인 추상적 언어로서의 역할을 갖게 해 비가시적인 내면적 심상을 추구해 나갈 수 있는 '사진 적 추상'의 발판을 구축했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는 1887년 런던의 The Amateur Photographer (아마추어 사진가)가 개최한 경연 대회에서 P. H. 에머슨이 수여하는 상을 받았다. 또한 1924년, 1905년 왕립사진협회의 명예회원이었던 스티글리츠는 미국 사진학교의 지원과 양성, Camera Work의 창시와 15년이 넘는 기간 동안 발행 그리고 사진이 가지고 있던 모든 예술적인 기록들을 뛰어 넘었던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The Society's Process Medal (협회 진보 메달)을 수상했다.
1933년 그는 자신이 수집한 사진 분리파 회원들과 다른 회화주의 사진가들의 600점이 넘는 사진들을 뉴욕에 있는 Metropolitan Museu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기증하였다.
Edward Steichen (에드워드 스타이켄, 1879-1973)
Edward Steichen (에드워드 스타이켄)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사진 분리파 창설, 갤러리 291의 개관에 함께 함으로써 미국 근대 사진을 예술로 끌어올리는데 있어서 지표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뉴욕 근대 미술관'에서 사진 Director를 하면서 사진을 대중을 향한 드높은 영상매체로 끌어올린 혁명가이기도 하였다.
Edward Steichen은 1879년 룩셈부르크에서 태어났으며, 1882년 가족 모두가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어린 시절 석판 인쇄회사의 화공 견습생일을 하면서 틈틈이 그림과 사진을 공부했던 에드워드 스타이켄은 1899년 그의 사진이 'Second Philadelphia Photographic Salon (세컨드 필라델피아 살롱)’에 받아들여지면서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902년 알프레드 스티글리츠가 창립한 Photo Secession (사진 분리파) 의 창립 맴버이기도 한 그는 근대 사진의 선구자였던 스티글리츠와 함께 미국 예술 사진 운동을 이끈 사람이다. 'Camera Work'의 2호에 그의 열 한 장의 회화 주의적인 사진이 실렸고 스티글리츠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에드워드 스타이켄은 사진에서의 빛의 중요성을 깨닫고 빛의 사진 적 효과를 연구하기 위해 접시와 컵을 첫 컷 이상 촬영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것은 스트레이트 포토의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실험에 스타이켄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알프레드 스티글리츠가 갤러리 291을 개설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특히 파리에 머무는 동안 세잔 (Cezanne Paul), 피카소 (Picasso, Pablo Ruizy), 마티스 (Matisse, Henri), 로댕 (Rodin, Francoiu August Rene)등의 작품을 갤러리 291로 보내 미국에 근대 미술을 소개하는데 노력했다.
에드워드 스타이켄은 1920-1930년대에 패션잡지인 'Vanity Fair (베니티 페어)' 와 'Vogue (보그)'에서 초상사진과 패션사진을 찍었으며 그 시기는 그에게 부와 명예를 주었다. 그는 또한 세계 제 2차 대전에 참전, 전쟁사진을 찍으면서 대중들에게 깊이 있게 파고드는 르포르타주 사진의 위력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것은 이후 그가 ‘Museum of Modern Art (MOMA, 뉴욕근대미술관)’의 사진부 Director 가 되면서 기획한 많은 전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Museum of Modern Art (MOMA , 뉴욕근대미술관) 은 1947년 68세였던 에드워드 스타이켄을 사진부 Director로 임명하면서 전 Director 였던 버먼트 뉴홀의 사임을 받아들였다. 이는 미술관이 사진이 가지는 예술성에 묶이기 보다는, 국민 대중 혹은 세계 관객에게 세상을 이해시키는 대중매체로서의 역할 수행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러한 '뉴욕근대미술관' 의 역할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적임자라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에드워드 스타이켄은 '뉴욕근대미술관' 에서 1951년 'Korea : Impact of War (한국, 전쟁의 상흔)' �, 1962년 'The Bitter Year (고통의 나날)' �등의 많은 기획전시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사진은 주체가 아닌 매체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하며, 동시에 인간의 위대한 성취와 그 순간을 시각적으로 표현해 내야한다고 역설했다. 또한 정서적 즉시성과 그래픽적인 창조성을 사진이 가지는 최고의 가치로 여겼으며, 절대로 난해하지 않아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특히, 1955년의 '인간가족 (The Family of Man)' 띆�세기적인 사진 전시로 평가 받고 있다. 이는 우주창조, 남녀간의 사랑, 결혼, 출산, 육아 의 테마로 전시돼 관람객들에게 말을 거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으며, 사진을 영상언어로서의 새로운 장르로 이끌었다. '인간가족' 띆�뉴욕과 유럽,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에서 동시에 열렸으며 그 후 2년 동안 순회전시 되어 백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전시를 보았다. 한국에서도 1957년 4월 3일부터 28일까지 경복궁의 미술관에서 전시 되었으며, 그 당시 30만 명이 넘는 관중들을 끌어 모았다. 이것은 룩셈부르크의 Clevaux Castle에 영구적으로 보관되고 있다.
Paul Strand (폴 스트랜드, 1890-1976)
스트레이트 사진을 개혁자의 입장에서 시작한 사람이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라면 이것을 완전히 정립시킨 사진가는 Paul Strand (폴 스트랜드)라 할 수 있다.
?스트랜드의 사진은 현존하는 사물을 매우 직접적인 표현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사진을 매우 강한 방식으로 프린트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동안 사용하던 일본 종이의 사용을 포기하였는데, 이는 경제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일본종이가 가지는 반투명한 재질감이 스트랜드 사진의 장점인 ‘표현의 직접성’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의 사진을 이 잡지에 게재하면서 우리는 사진에 내재하는 대상에 대한 강렬한 표현력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었다.?
Alfred Stieglitz 의 고별사, Camera Work 마지막 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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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Paul Strand (폴 스트랜드)는 1900년에 알프레드 스티글리츠가 제안한 '스트레이트 사진 (Straight Photography)'의 출현으로 기존의 '회화주의 사진 (Pictorial Photography)'이 차츰 사라지는 시기부터 1950년대 영상사진의 시대가 진행되기 직전까지 사진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활동하였다.
폴 스트랜드는 에티컬 컬쳐 스쿨 (Ethical Culture School)에 입학하여 포토 캠페인으로 널리 알려진 Lewis W. Hine (루이스 하인)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본격적인 사진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 후 루이스 하인의 소개로 Alfred Stieglitz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를 알게 되었고 약 8년에 걸쳐 스티글리츠로부터 사진 수업을 받았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는 “그의 작업은 거칠고 직접적이다. 그는 진정한 사진가다”라고 말하며 폴 스트랜드를 높게 평가하였다. 스티글리츠는 스트랜드의 첫 전시를 Gallery 291에서 개최하였고 그의 ‘스트레이트 사진 (Straight Photography)'을 ‘카메라 워크 (Camera Work)’의 마지막 호에 특집으로 내보냄으로서 전폭적인 지지를 하였다. 이 때에 스티글리츠는 스트랜드의 사진을 평하여 ‘지적(
�r)이며 순수하다’라고 하였다. 또한 스트랜드의 작품이 스티글리츠가가 피카소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사진의 추상적 시선을 표현한다고 보았고 이것을 통해 그가 처음으로 품었던 사진에 대한 열정을 다시 되찾았다.
이후 계속적으로 같은 방향의 길을 고수하다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게 되어 스티글리츠를 떼어 놓고는 스트랜드를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따라서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와 폴 스트랜드는 하나의 맥락 속에 들어온다. 당시 예술 사진은 회화적 사진에 기초를 두고 있어야 한다는 기본적 입장이 있었는데, 이를 반박하면서 원래 사진의 기계적 특성에 초점을 두고 사진예술을 접근한 것이다.
폴 스트랜드 사진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그만의 개성을 표출시켰다. 스티글리츠는 사회 속으로 접근해 들어갈 때 Snapshot (스냅사진)을 주로 찍었다. 스트랜드는 대상 가까이 다가가서 정공법으로 정면을 찍음으로써 대상의 전형적인 본질을 파악했다. 그래서 스티글리츠의 사진에 비해 시간성 보다는 공간성이 강조되고 박력이 넘치며 직관적인 호소력이 있다.
폴 스트랜드는 1910년부터 스트레이트 포토의 극한으로 표현되는 즉물 사진을 추구하게 되었다. 즉물 사진이란 렌즈의 심도를 최대한 깊게 하여 대상을 최대한 정밀하게 재현함으로써 객관화를 한층 높이려는 시도의 사진을 말한다. 즉 조리개는 최대한 조이고 대상에 가깝게 접근하여 클로즈업 하여 팬 포커스 효과를 얻어내는 것이다.
즉물 사진은 스트레이트 포토에 비해 훨씬 객관성을 중시하고 사물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강조하고 일체의 정서적 요소를 거부하게 된다. 폴 스트랜드는 조형성을 강조하여 식물이나 기계, 생활 주변의 정물, 건축 등을 즉물적으로 찍었다. 육안의 한계를 넘어서는 정밀묘사와 클로즈업을 중점적으로 다룬 스트랜드의 즉물 사진은 이전과는 또 다른 세계의 새로운 느낌을 준다.
폴 스트랜드의 즉물 사진은 후에 Edward Weston (에드워드 웨스턴) 이 그 영향을 받아 보다 심층적으로 파고들었다. 스트랜드의 즉물 사진이 주제와 함께 부수적인 요소들이 어울릴 수 있다고 표현할 수 있다면, 에드워드 웨스턴의 즉물 사진은 모든 것과 단절되고 주제만 강조해서 대상의 생명성과 신비감마저 느껴지게 한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에서 시작된 스트레이트 사진이 폴 스트랜드와 에드워드 웨스턴에게 이어지면서 새로운 미국사진의 길을 만들었다.
Gertrude Ka?sebier (게르트루데 케세비어,1852-1934)
Gertrude kasebier (게르트루데 케세비어)는 1852년 지금은 Des Moines (디 모인) 라고 불리우는 Fort Mes Moines (포 메 모인)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녀의 가족들은 곧 Colorado Territory (콜로라도 테리토리)에서 제재소 사업으로 성공한 아버지(Stanton)를 따라 Colorado (콜로라도)로 이주했다. 케세비어의 부모님은 그녀가 어렸을 때 음악가가 되길 원했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녀는 미술을 너무 좋아하는 아이였다.
1894년 게르트루데 케세비어는 The Quarterly Illustrator가 주는 최고의 사진가 상과 New York Herald 의 두 사진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사진가로서의 길을 본격적으로 가게 되었다. 1894년 사진과 회화를 더 공부하기 위하여 11년간 유럽으로 긴 여행을 떠났던 그녀는 독일을 여행하면서 Alfred Stieglitz (알프레드 스티글리츠)가 일을 도왔던 화학자 포겔 (H.W. Vogel)교수 아래에서 공부를 하였다.
19세기 말 무렵에 만난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와 게르트루데 케세비어는 사진이 예술의 독립적인 한 장르라는 것에 의견을 같이 하였다. 그녀는 사진 분리파의 초기 멤버였으며 분리파의 회원이 되기 이전부터 사진 장르에서 유명했던 최초의 여성 전문사진가였다. 그녀의 작품들을 낭만적이고 감상적이었던 초기 회화주의 사진의 특징을 이상적으로 반영했다.
1902년 스티글리츠가 창간한 Camera Work의 첫 번째 이슈에 케세비어의 포토그라뷰어 6점과 그녀에 대한 두 개의 아티클이 실렸고, 1912년 그녀가 사진 분리파에서 정식으로 탈퇴할 때까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와 게르트루데 케세비어의 우정은 지속되었다.
게르트루데 케세비어의 초상화 스타일은 인기가 높았으며 그녀의 스튜디오는 굉장한 성공을 이루었다. 그녀는 피사체의 숨겨진 부분을 노출시키는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주 작은 소도구만을 사용하면서 배경은 심플하게 처리하였다. 케세비어는 뉴욕의 저명한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미국 인디언 원주민들을 촬영하였다. 그녀가 촬영한 몇몇의 인디언 원주민 사진들은 후에 그녀의 최고의 작품이 되었다. 그녀는 미국 인디언 원주민들을 광범위한 사진 기록으로 남긴 첫 번째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사진들은 예술적으로 충분한 자극을 주었다.
Baron Adolf De Meyer (바론 아돌프 드 메이어, 1886-1946)
Baron Adolf De Meyer (바론 아돌프 드 메이어)는 1886년 독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에 자주 이사를 하였으며 어린 시절 대부분을 파리에서 보냈다. 그는 항상 사진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으며 그것을 한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14살이 되었을 때 그동안 작업했던 그의 작품들이 책으로 출판되었으며 1900년과 1910년 사이에는 미술관과 스튜디오에서 전시되었다.
27살이 되던 해, 드 메이어는 런던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 시기부터 그는 Royal Photographic Society (왕립 사진 협회) 와 The Linked Ring Brotherhood 그룹과 멀어지기 시작하였다. The Linked Ring Brotherhood는 The Photographic Society (왕립 사진 협회)의 전 회원 이었던 15명의 사람들이 최초로 분리 되어 만든 그룹으로 유럽의 사진 분리파 그룹이었다. 이들은 협회가 지나치게 강조했던 기술적 또한 상업적인 것들에 실증을 느껴 그들 자신들의 모임을 갖고 또한 전시를 하기 시작하였다.
드 메이어 인생의 전환점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를 만나면서부터였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는 그의 작품들을 주목했고 또한 사진 분리파 회원이 되기를 요청했다. 그의 뛰어난 조명 기술과 함께 그의 작품들은 사진 분리파 회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의 업적 중 가장 큰 성과는 그가 1914년 Vogue (보그)와 Vanity Fair (베니티 페어)에서일한 것이었다. 하지만 잡지들이 새로운 경향으로 바뀔 때 그는 그곳을 떠나 파리에 있는 Harper (하퍼)의 Bazzar (바자)에서 일 하기 시작했다.
인생 전반에 걸쳐 바론 아돌프 드 메이어는 정물 사진 찍는 것을 선호했다. 그는 과일이나 꽃, 유리병 등을 유리로 덮은 탁자 위에 배치시켜 놓고 촬영하곤 했다. 그래서 화병과 탁자 표면의 투명성, 그 반영들, 초점의 흩어짐이 공간감이나 깊이의 느낌을 사라지게 했다. 또한 독특한 조명 스타일을 개발해 로맨틱한 효과를 주었다. 그는 피사체의 다양한 각도에서 이러한 조명을 사용했다. 또한 드레이핑 (drapping), 커튼 그리고 조명 등 등을 그의 피사체 뒤에 세움으로써 로맨틱한 스타일을 창조해냈다.
Clarence H. White (클라렌스 H. 와이트, 1871-1934)
클라렌스 H. 와이트는 1871년 미국 오하이오(Ohio)주 에서 태어났으며 1887년 Newark(뉴웍크)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1893년 취미로 사진을 시작했으며 빠르게 사진의 기술을 익혔다. 1896년 그의 사진은 오하이오 사진가 협회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사진기술은 순전히 그 스스로 터득한 것이었으며 그 기술은 균형 잡힌 구도의 창조와 자연스러운 빛을 잘 이용하는 것에 있었다. 그는 플라티넘, 고무 중 크롬산염 프린트, 그리고 1906년 이후에 사용했던 팔라듐 프린트 등 그것들 자체의 미적인 표현 가능성을 위해 다양한 재료를 이용하였다.
1898년 클라렌스 H. 와이트는 그의 작품들을 필라델피아에 선 보였다. 그때부터 그의 작품들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와 Joseph. T. Keiley (조셉 T. 케일리)에게 주목 받기 시작했다. 그의 이미지들은 1899년 런던의 사진가들의 그룹인 Linked Ring에 의해 조직된 사진 살롱에서도 선보였다. 1900년부터 1910년까지 와이트는 미국 전역은 물론 런던, 파리, 글라스고, 베를린 그리고 비엔나 등 국제적으로 전시를 가졌다. 그는 1906년 뉴욕으로 이주하였고 Columbia University Teachers College (콜롬비아 대학 교육학과, 1907-1925)와 Brookyn Institute of Arts and Science (부룩클린 예술 과학 대학, 1908-1921)에서 사진학을 강의하면서 교육자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하였다.
1910년 와이트는 Seguinland, Maine의 여름학기에서 강의를 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경험은 은 1914년 뉴욕에 그의 사진학교인 Clarence H. White School of Photography in New York (뉴욕 클라랜스 와이트 사진 학교)을 열게 하였다. 그는 여름동안 내내 Maine(메인)주 와 Connecticut (커네티컷)주 그리고 뉴욕에서 강의를 진행하였다.
클라렌스 H. 와이트는 1900년 런던에 위치한 사진가들의 그룹이었던 Linked Ring 에 이름이 올랐으며 1902년에는 사진 분리파의 회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일본 예술, 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제임스 아보트 맥네일 휘슬러) 그리고 시대를 앞서가는 예술들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의 스타일은 상상력이 풍부했으며 부드러웠다. 그는 사진은 순수예술의 한 장르라고 강하게 믿었으며 또한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1893년부터 1906년 사이에 훗날 그가 작업한 것 중 가장 최고라 꼽히는 작품들을 제작하였으며 작품들은 아주 심플했고, 주제는 그의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미국 중서부의 풍경들이 주를 이루었다.
Alvin Langdon Coburn (앨빈 랭던 코번, 1882-1966)
1882년 미국 보스턴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Alvin Langdon Coburn (앨빈 랭던 코번)은 8살이 되었을 때 삼촌으로부터 생애 첫 번째 사진기를 선물로 받은 뒤 예술적인 표현의 한 방법으로서 사진을 찍는 것에 깊숙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회화주의 사진의 주류를 이루고 있을 무렵 당시 회화주의 사진가이자 화가인 홀렌드 데이의 영향으로 코번은 회화주의 사진을 찍는 것에 주력하였다. 1899년 어머니와 런던으로 이사한 코번은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런던의 사진가 그룹이었던 The Linked Ring Brotherghood와 함께 첫 번째 전시를 선 보였다. 1901년 코번은 Edward Steichen (에드워드 스타이켄), Robert Demachy (로버트 드마쉬)와 함께 파리에서 공부를 하였고, 1902년 뉴욕으로 돌아와 자신의 사진을 선보이기 위하여 스튜디오를 열었다. 그곳에서 그는 사진 분리파를 이끌고 있는 스티글리츠의 눈에 띄어 그의 작품의 예술성에 대하여 열렬한 호평을 받게 되었다. 1902년 12월26일 그는 최연소자로서 사진 분리파의 멤버가 됨과 동시에 1903년 11월에는 21살 나이로 런던에 있는 사진가들의 그룹인 The Linked Ring Brotherhood 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Grasgow(글라스고)의 J. Craig Anan은 코번에게 포토그라뷰어를 소개해 주었고, 코번은 1906년에서 1909년까지 영국에 머물면서 London County Council School of Photo-Engraving (포토 앤그레빙) 학교에서 포도그라뷰어 기술을 공부했다. 1906년 코번은 런던에 있는 Royal Photographic Society (왕립 사진 협회)에서 One - Man 전시를 하였고 1907년 Gallary 291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1913년 출판한 그의 작품집 "인간의 흔적(Men of Mark)"은 그의 손으로 직접 인쇄한 포토그라뷰어 프린트로 출판되었으며, 이 사진은 대도시의 풍경을 찍은 것으로 도시의 생생한 생동감과 구성미를 다이나믹하게 잘 표현해 주고 있다.
1916년 이후 앨빈 랭던 코번은 Vorto Scope (보르토 스코프)라는 상자를 고안, 이것을 이용해 찍은 사진을 Vortograph (보르토그라브)라고 이름 지었는데 이것은 최초의 추상 사진에 속한다. 코번은 20세기 예술로서의 사진을 정착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던 선각자 중의 한사람이자 또한 최초의 추상사진을 전개하여 오늘날 추상사진의 모태를 이루게 했던 화가이자 사진가이다.
그 외 작가들
Joseph. T. Keiley (조셉 T. 케일리, 1869-1914)
Heinrich Kuehn (헨리치 쿤, 1866-1944)
W.B. Post (W.B. 포스트, 1857-1925)
George H. Seeley (조지 H. 쉴리, 1880-1955)
Annie W. Brigman (애니 W. 브리그만, 1869-1950)
Frederick H. Evans (프레드릭 H. 에반스, 1853-1943)
Paul B. Haviland (폴 B. 하빌랜드, 1880-1950)
Edward Weston (에드워드 웨스턴, 1886-1958)
Ansel Adams (안셀 아담스, 1902-1984)
W.W. Renwick (W.W. 랜윅 1864-19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