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오전 11시이후 오후 6시무렵까지의 낮동안 학생과 시민이 가세한 시 위대는 光州시내 곳곳에서 공수부대와 격렬한 공방전을 벌인다. 이중에서도 경찰력이나 공수부대와 직접적으로 맞붙은 곳은 대략 15군데 정도이다.
계림동 光州고앞, 계림극장, 지산동파출소, 동명동파출소, 동명동 구 도교 육위원회(지금의 과학관), 장동로터리, 구 공용터미널(지금은 광주은행 본점 신축중), 한일은행앞, 광주일고앞, 학생회관, 황금동 구시청사거리 일대등이 다. 이중에서도 18일 중 가장 치열한 공방전이 치러졌고 많은 부상자가 난 곳은 역시 구 공용터미널일대와 계림동 光州고앞 시위에서였다.
공용터미널과 光州고앞 시위는 이후 10일동안 전개되는 5.18 전과정을 통 틀어 중요한 기폭제역할을 하게된다. 공용터미널은 湖南의 중심도시인 光州 와 인근 시.군을 연결하는 통행로로, 이곳에서의 시위와 참혹한 진압은 光州 시민들과 같은 정서를 가진 湖南지역민들에게 분노의 불을 붙이기에 충분 했다.
더구나 이날은 5월들어 세번째 맞는 휴일로 볼일을 보거나 결혼식에 참석 하기 위해 光州를 찾은 湖南지역민들이 많았다. 이들은 직접 목격한 공수 부대의 만행을 그대로 이웃들에게 전해주었다. 5.18이 全南과 全北지역으로 확산되는 기폭제가 된것이다.
光州고등학교앞 시위도 그런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최초의 충돌지점은 光州고앞이었지만 인근에 光州최대의 재래시장인 대인시장이 있었다는 점이 다.
잔인한 진압방법을 본 시장상인들 사이에서는 6.25때도 이러지 않았다 나라지키라고 세금냈더니 이제는 국민들을 죽이고 있다는 분노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이후 5.18 전기간동안 이곳 시장상인들은 모두 철시하고 장엄한 항쟁의 대열에 나서게된다. 특히 재래시장 상인들의 전파력은 무서웠다.
더구나 공용터미널과 광주고앞은 바로 다음날 벌어지는 공용터미널에서의 학살과 최초의 사건으로 본격적인 시민무장항쟁을 가져오기도 한다. 18일 오후 3시무렵, 공용터미널광장에는 자갈을 가득실은 경남번호판의 트럭이 한대 서있었다.
금남로와 충장로 일대에서 밀린 시위대는 그차량을 끌어다 광장 한가운데 세우고 불을 질렀다. 공수부대에 위축된 시위대의 열기를 높이고 돌멩이를 쉽게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잠시후 공수부대가 시위대의 전면과 후면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피하려했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총검술하듯 찔러총자세로 공격해오는 공수부대의 대검에 전면과 후면ㄹ에서 미처 피하지 못한 시위대가 찔리고 말았다.
시위대중 일부가 공용터미널안으로 도망쳤다. 곧 뒤쫓아간 공수부대는 밀 폐된 터미널안에 최루탄을 터트렸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유 리창을 깨고 달아났다.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 진압봉에 난타당한 사람들의 신음소리로 터미널안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공수부대의 만행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인근 북동, 유동, 대인동일대의 주택가를 뒤져가며 청년들을 무조건 두들겨 패고 연행해갔다. 시민들은 분 노로 얼어붙었다. <남풍출판사 刊 광주민중항쟁 비망록중에서 발췌>
비교적 객관적으로 작성된 광주시청 상황일지를 인용한다. 당시 동사무 소등 행정력을 통해 작성된 자료란점에서 중요하다. 18일 오후 3시45분, 금남로에서 군인들에게 쫓긴 학생들이 북동쪽 민가에 잠입하자 군인들이 가정집을 수색하고 대학생으로 보이는 장발청년과 여자를 마구때리고 대검을 찌르는등 난폭한 행동을 한후 차에 실어 강제 연 행함
공용터미널에 이러 오후 6시께 광주고 부근에서 청년.학생 수백명이 공수 부대와 충돌했다. 이들의 손에는 어느새 자위를 위한 각목.쇠파이프.식칼등 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공수부대의 무차별 난타로 시위대는 쓰러지며 사 방으로 흩어졌다. 공수부대는 광주고앞에서 수 km 떨어진 산수동.풍향동일 대에 대한 공포의 수색을 해갔다.
당시 친구 아이 돌잔치에 갔다오다 부상당한 李장의씨(당시 30세)의 증 언이다. 광주고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계림동 동원예식장 앞을 지나다보니 거리에 공수부대원들이 쫙 깔려있었다. 두려움을 느낀 나는 빠른 걸음으 로 그 앞을 지나쳤는데 갑자기 등뒤에서 저놈 잡아라라는 소리가 들렸다.
이리처럼 달려든 공수부대원들이 이렇다 말한마디 없이 곤봉으로 때리고 대 검으로 4군데나 찔렀다
<현대사사료연구소편 광주민중항쟁사료전집중에서>
그러면 18일 오후중 군부대의 움직임을 설명해주는 특전사 전투상보와 전 교사 상황일지등을 그대로 옮겨본다.
*오후 1시30분 2군사령관 작전지도차 내방
*오후 3시 계엄군 장교 38명 사병 2백94명 투입, 시내 진압작전 실시(7공수)
*가톨릭센터 33대대 충장로 35대대
*학생회관부근 페퍼포그 차량 1대전소(전교사 작전일지)
*오후 3시40분 7공수 33대대 가톨릭센터 투입, 가두데모대 강력저지 및 분산(31사단 전투상보 및 특전사 전투상보)
첫댓글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실이 밝혀진후에 그때 광주에 투입되었던 공수부대원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들이대고 대검을 휘둘러야만 했던 그들은 그 사실을 남들에게 밝히지도 못하고 속으로 얼마나 괴로워했을까? 그들의 영혼은 얼마나 상처받았을까..상상만해도 가슴이 저려옵니다.
첫댓글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실이 밝혀진후에 그때 광주에 투입되었던 공수부대원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들이대고 대검을 휘둘러야만 했던 그들은 그 사실을 남들에게 밝히지도 못하고 속으로 얼마나 괴로워했을까? 그들의 영혼은 얼마나 상처받았을까..상상만해도 가슴이 저려옵니다.
터미널은 방송이나 책에서 본 기억이 없는 듯한데 ...그곳에서 자갈실은 트럭이 있었군요 . 터미널의 밀폐된 곳에 최루탄도 처음 접합니다. 트럭의 경남 번호판으로 언론에선 지역감정으로 매도 하는데 또 한 몫 했겠군하는 생각이 듭니다. ....
공수부대원들의 심정이요? 그놈들은 무뇌아들이라서 느낀 감정이 전혀 없었을것입니다. 쬐께라도 국가관이나 민족의식 아니 양심찌꺼기만이라도 있는 놈이 있었다며는 시민에게 들이민 총구를 동료들을 향해 드리대고 총을 난사한 국군이 한놈쯤이라도 있었어야 희망바라기님의 말씀에 제가 동의할수 있는거 아니겠습니까?
삼겹행님 공수부대아들이 잘못은 했지만 글마들은 시키면 ㅇㅇㅇ가지고도 ㅇㅇ까는군발이아닌교? 진짜 직일놈은 뒤에서 여론조작.유언비어.등 다른쪽으로 이목을 돌리고 정권을 잡을려는넘들이 직일놈이죠..하여튼 뒤에서 지휘하며 잔머리쓰는넘들 .....확.!!
다시한번 뜨거운 피가 솟구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