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정국민학교 8
김코치가 마음을 잡지 못하고 흔들거린다.
어느 때는 말도 없이 훌쩍 나갔다가 2∼3일 들어오지도 않고, 특히 월급을 받으면 나가있는 시간이 길어진다.
월급이라고 많지도 않았지만 그 돈을 다 쓸 때까지는 종적이 묘연했다.
‘이 사람이 바람이라도 났나 ? 원래 무책임한 사람인가 ?’
애로사항이 상당히 많았다.
나 혼자서 운동을 지도하고, 밥 해 먹이고, 우리 반 학습지도에도 신경을 써야 하니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머리가 지끈 거린다.
김코치가 불쑥 들어서면 붙잡고 사정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해 봤지만, 며칠은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잘 하다가도 또, 휭하니 나가면 무소식이다.
‘코치를 바꿔보나 ? 그런데 이런 산골에 누가 오나 ? 방법이 없다.’
‘어쨌든 이미 시작된 대업인데 무슨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가야 한다. 참고 견디자’ 김코치를 살살 달래보기도 하고, 하자는 대로 따라 주는 등 상전 모시듯 했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듯 했다.
다행히도 자기 집을 떠나 남의 학교까지 와서 오랜 시간을 어렵게 운동하던 네 명은 잘 따라 주었다. 그래도 가끔가다 아플 때는 집의 부모 형제가 생각나는지 의기소침해 있는 모습이 딱해보였다. 어려서 부모를 떠나 혼자 지내야했던 내 처지를 생각하고 내 친동생처럼 대해주었다.
학선에서 온 상임이가 손가락이 아프다 해서 살펴보니 가운데 손가락 손톱 옆에 고름집이 잡혀있었다. 생이손이다. ‘얼마나 아팠을까 ? 저 손으로 핸드볼을 했으니....’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약을 먹어도 낮지 않는다. 고름집이 손톱 밑으로 파고 든다. 그대로 두면 손톱이 빠져 한참동안 운동을 못하게 된다. 고름을 빼 내야 하는데, 짜낼 수도 없고, 건드리면 소스라친다. 안 되겠다. 상임이 손가락을 내 입에 넣고 빨았다. 고름이 입안으로 들어온다, 생각과 달리 냄새도 맛고 없었다. 빨만 했다. 뱉어 내고 또 빨고를 몇 번인가 했더니 상처가 낫는다. 고통없이 치료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여름방학이 되자 내 반 아이들 학습지도의 부담이 줄어들며 나도 숨통이 트였다. 코치가 있건 없건 강화 훈련은 계속되었고, 전지훈련도 다녔다.
온양에 나와 장항선을 타고 광천까지 간다. 광천에 있는 중학교가 제일 가까운 핸드볼부가 있는 학교였다. 가는 데만 2시간 이상이 걸린다.
우리 선수들에게 핸드볼에 대한 눈을 띄워주고, 그 학교 감독, 코치 선생님의 조언을 받기 위해서 몇 번씩 먼 길을 다녔다.
점심시간에는 우리는 미리 싸간 도시락을 먹었고, 중학교는 합숙소에서 해주는 밥을 먹는데, 그 반찬이 김치하고 간장이 전부인 것을 보고 많이 놀랐었다.
‘한 참 크는 중학생들인데 저렇게 먹고 운동을 어떻게 하나 ? 마음이 아팠다.’
그 애들에 비해서는 우리 아이들은 얼마는 나았겠지만 그게 그거다,
그 당시에 운동부 실정은 대개가 그랬었다. 특히 시골 학교는 더욱 그랬고...
대부분의 지도교사들이 악전고투하던 시절이었다.
공주 탄천국민학교에 교대 선배님이신 창식이 형이 남자 핸드볼부를 지도하시고 계셨다. 1주일간 전지훈련을 갔다.
교실에서 잠을 자며 남자 선수들과 함께 훈련을 하고 연습 게임도 했다.
나는 복도에서 석유 곤로로 밥을 하고 반찬을 만들었다. 내 학교가 아니니 애로사항이 많았다. 우선 훈련비가 적은데도 그 곳에서는 모든 것을 사야하니 힘이 들었다. 탕정에서는 된장이나 호박같은 채소는 얻어서 먹일 수 있었는데...
할 수 없이 깊은 밤중에 냇갈 둑에 심은 호박 넝쿨을 더듬어서 몰래 애호박을 따다가 된장찌개를 끓여주기도 하며 겨우겨우 버텨냈다. 참으로 힘든 시간이었다. 그러나 1주일은 소중한 시간이었다.
학생들도 잘 버텨주고, 쑥쑥 성장해 주었다. 희망이 보이니 힘도 더 생겨났다.
9월이 들어서며 훈련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견디다 못해 코치도 해고했다.
코치가 있건 없건 우리 갈 길을 꾸준히 걸어갔다. 눈앞에 산의 정상이 보이는데 주저할 수 없지 않은가 ?
시합을 눈앞에 둔 어느 날 아산교육청 장학사님께서 학교를 방문하셨다.
‘시합을 앞두고 격려를 하러 오셨나 ? 훈련비를 주시러 오셨나 ?’
어쨌든 반가운 분이 오셔셔 기대가 됐다.
“이선생, 미안해서 어쩌나.” ‘응, 이 게 무슨 말씀 ?’
“어제 갑자기 도에서 연합팀이 안 된다고 연락이 왔어요. 탕정도 단일팀으로 나갈 수밖에 없게 됐어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돼 몇 번이고 되물었다. 머리가 띵하고, 광풍이 휘몰아 친다.
“장학사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 연합팀이 된다고 하셔서 다른 학교 선수들을 데려다 놓고 갖은 고생을 다했는데, 시합을 눈앞에 두고 안 된다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 분통이 터졌다. 길길이 뛰고 싶었다.
장학사님은 연신 미안하다는 말만 하신다.
“그럼, 우리는 선수가 부족해서 시합 출전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건 안돼요. 그 동안 탕정에 준 훈련비가 있어서 시합 참가는 해야 돼요”
미치겠다. 이 게 웬일인가. 어떻게 길러온 핸드볼부인데....
교장선생님께서도 옆에서 연신 달래신다.
한 참을 번민했다. 그렇지만 공인인 이상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우리 학교에 와서 훈련한 4명의 선수들도 시합장에 데려가겠습니다. 시합은 못 뛰더라도 구경이라도 시켜야 겠습니다”
떨떠름 하시다. “왜 ? 그애들을.... 시합도 못 뛰는데....”
“그 아이들은 그 동안 집 떠나 남의 학교까지 와서 죽도록 고생을 했습니다. 비록 시합은 못 뛰지만 자기 동료들이 뛰는 모습을 구경이라도 시키는 게 그 애들에 대한 제 도리입니다. 그 것도 못한다면 절대로 시합 출전을 하지 않겠습니다.” “좋아요. 그렇게 하세요”
탕정 아이들만으로는 겨우 한 팀은 꾸려지지만 이미 볼 장은 다 본 셈이다.
허탈하다. 그마나 타 학교 학생들은 시합에 데려 간다니 그 것만이라도 좋아서 뛴다. ‘철 없는 놈들,,,,’
대전으로 떠나는데 교장선생님께서도 따라 나서신다.
‘어라, 이길 가망도 희망도 없는 억지로 출전인데 교장선생님께서 왜 ?’
“이 선생이 다른 학교 선수를 출전시킬까봐 감시하러 따라가라는 교육청 지시야” 상관 없었다. 무슨 일이 닥치든지.... 이미 자포자기 했으니까.
첫 게임이 우승팀 대전과 붙었다.
솔직히 우리 팀의 주전인 다른 학교 선수들 4명을 1분이라도 뛰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교장선생님께서 바짝 붙어 계신다. ‘고집을 부려볼까 ?’
아침에 하신 교장선생님 말씀이 떠 오른다.
“이선생 이것 좀 봐. 나 하도 신경을 써서 치질이 터졌어.”
바지 겉까지 젖어 있었다. ‘교장선생님께서 무슨 죄가 있나 ?’
탕정 아이들끼리만 뛰었어도 전반전이 동점으로 끝났다.
“저것 봐. 다른 학교 아이들이 없어도 저렇게 잘 뛰잖아”
“교장 선생님, 후반전에는 안돼요. 우리 아이들은 전반전을 악에 바쳐 죽자사자 뛰어서 체력이 고갈됐어요. 그런데 우리는 교체할 후보 선수도 없잖아요.”
후반전에 우리는 무너졌다. 그러나 우리 선수들은 끝까지 잘 뛰어줬다. 다른 학교 출신들은 목이 쉬어라고 응원을 했고... 아이들이 엉엉 울어댄다.
내 눈에서도 눈물이 줄줄 흐른다.
‘이제 다시는 핸드볼은 안한다’ 결심을 했다.
지금도 그 때 그런 일이 왜 생겼는지 알지를 못한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아산에 무서운 연합팀이 큰다는 소식을 들은 중심지의 팀이 협회를 움직였다는 풍문도 귀에 들어왔지만 나에게는 관심 밖이었다.
그 때 그 아이들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첫댓글 탕정국민학교가 점점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