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대 명반
100위
아주 오랜 기억과의 조우
1980년 어느 무더운 여름날, 아직 '동서남북'으로 이름이 바꾸지 않았을 때
'N. E. W. S'의 멤버들은 동해안으로 여름 휴가를 떠났다.
그 여행길에서 만난 수도여사대 산업미술과 학생들에게 부탁하였고
그녀들에 의해 이 앨범의 재킷이 디자인 되었다고 한다.
1981년 재반되었으며, 초반의 예쁜 하얀 새가 재반에서는 무서운 독수리로 바뀌었고
구릅명도 동서남북이 되었다.
1988년 다시 출반 되었지만 상업적인 성공을 걷우지는 못하고 말그대로
'아주 오랜 기억과의 조우'로 끝나고 말았지만, 우리 음반사에
프로그레시브 록(Progressive Rock)이라는 장르의 기념비적인 앨범으로 꼽힌다.
수록곡
01 하나가 되어요
02 나비
03 모래위에 핀 꽃처럼
04 밤비
05 나비(Extended Version)
06 빗줄기
07 그대
08 바람
동서남북 1집에 수록된 전곡들
서양에서는 이미 1960년대말부터 프로그레시브 락이라는 장르가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는 80년대가 되어서야 최초로 프로그레시브 락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음반이 발표된다. 그것도 대학생들로 이루어진 '동서남북'이라는 아마추어 밴드에 의해서 말이다. 밴드의 원래 이름은 'N. E. W. S.' 였다. 그 안에는 새로운 소식 또는 4방향의 다양성을 지향하는 의미, 이중적 메타포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밴드 이름마저도 외래어로는 지을 수 없다는 군사정권의 문화말살적 정책 때문에 '동서남북'으로 바뀌게 되는데, 4방향의 다양성을 내포하는데 있어서 같다고는 하지만 'N. E. W. S.'와 ‘동서남북’은 언어의 차이만큼 뉘앙스가 다를 수 밖에 없다.
'N. E. W. S.'로 출발하여 ‘동서남북’으로 개명한 이 밴드의 결성연도는 1980년이며, 경성고등학교 동창인 박호준과 이태열이 주축이 되었고, 박호준과 고대 동기인 이동훈이 의기투합하고, 김광민 김득권 김준응 등이 가세하면서 진용을 갖추게 된 것이었다. 맴버들의 구체적인 몀면모는 다음과 같다.
Guitar &Vocal : 박호준(고대)
Bass &Vocal : 이태열(국민대)
Drum &Percussion : 김득권(서울대)
Organ : 이동훈(고대)
Electric Piano, String, Synthesizer : 김광민(명지대)
Lead Vocal : 김준응(명지대)
이들의 최대 후원자는 양병집이라고 할 수 있다. 맴버들은 양병집이 운영하는 라이브 카페 '모노'에서 영업을 하지않는 시간을 이용하여 연습을 했고, 영업시간에는 무대에 섰다. ‘동서남북’ 데뷔작이며, 유일한 LP음반인 <아주 오래된 기억과의 조우>도 양병집이 자비를 들여 제작했었다고 한다.
'동서남북'은 당시 '젊음의 행진'이나 '영 11' 같은 텔레비젼 프로그램에 모습을 보이는 식으로 활동을 했었지만, 음악적 방향이 각기 다르다는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1982년에 정식으로 해체되어 국산 프로레시브 락이라는 척박한 토양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는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분야의 개척자였다는 명예만은 영원히 따라 다닌다. 그리고 그들이 만든 <아주 오랜 기억과의 조우>는 구릅이 해체된 후에도 프로그레시브 록을 소개하던 심야 FM방송 프로그램들과 아트 록 가이드북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며, 이 앨범의 수록곡 중 '나비'는 한국 프로그레시브 록의 자존심으로 회자되고 있다.
짙은 안개 속에 다양한 광선이 교차하는 듯 환각적인 건반 군에 이어 가슴을 파고드는 기타 테마로 시작하는 전주만으로도 기존의 한국 록과는 철저히 차별되는 '나비'(Extended version)는 몽환적 코러스 라인, 철학적 가사도 인상적이지만, 드라마틱한 전개 속에 하몬드 오르간과 무그 신서사이저가 차원을 넘나드는 듯 종횡무진 활약하는 후반부는 당시 우리나라 여건에선 상상도 못할만한 신선한 것이었다.
'나비' 효과 탓에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그레시브 록 앨범으로 평가받지만 <아주 오랜 기억과의 조우>에는 하드 록(Hard Rock), 퓨젼 재즈(Fusion Jazz)등 보다 많은 장르들이 내포 되어있다. 발매당시 간판 곡이었던 '하나가 되어요'는 당시 대학 그룹 풍의 대중적 록 트랜드를 따르고 있으며, '모래 위에 핀 꽃'은 딥 퍼플(Deep Purple)을 방불케 하는 하드 록 파워다.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색감의 '그대'에서 블루스의 정취가 짙게 풍겨 나오는 가하면, '바람'에선 퓨젼 재즈와 사이키델릭 록의 기묘한 카니발이 펼쳐진다.
이는 본격 프로그레시브 록을 발표하기에는 당시 여건이 허락하지 않은 점도 있지만 개성 넘치는 멤버들로 구성된 '동서남북'의 다양한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핑크 플로이드와 킹 크림슨(King Crimson)에 심취했고 제프 벡(Jeff Beck)과 데이비드 길모어(David Gilmour)등 다양한 기타리스트의 연주로부터 영향을 받은 리더 박호준(기타, 리드 보컬), 해체 후 이광조의 곡들을 작곡해 유명해 졌을 정도로 대중적 감성의 이태열(베이스)을 주축으로 후에 재즈 피아니스트로 전향하여 명성을 획득한 김광민(키보드), 하드록 마니아인 김준응(리드 보컬)등이 포진한 7인조 밴드였던 만큼 음악 지향의 팔레트가 넓었다.
하드 록과 블루스, 퓨젼 재즈를 넘나드는 박호준의 다양한 기타도 일품이지만 3인 편성의 키보드 군을 갖춘 덕에 화려한 건반이 앨범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이미 언급한 '나비'에서는 물론이고 하몬드 오르간 사운드가 댐에서 방류된 물줄기처럼 쏟아져 흐르는 '모래 위에 핀 꽃', 건반과 클래식 기타의 랑데부로 밤풍경에 흩뿌려지는 빗방울의 모습이 그려지는 '밤비' 등에서 기존 한국 록에서 찾아볼 수 없는 짜릿한 건반의 향연을 맛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랜 기억과의 조우>는 전체적으로 볼 때 아쉬운 면이 없지 않다. '나비'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가사는 다소 통속적인 대학 그룹의 전형을 따르고 있고, 2채널로 녹음할 수 밖에 없었던 열악한 녹음시설 등이 음질을 떨어 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옥의 티가 앨범의 진가를 가릴 순 없다. 경제발전이라는 명목아래 표현의 자유를 자제해야 했던 시대에 제시한 실험정신, 대학가요제라는 허울뿐인 행사를 통해 배출 된 아마추어적 밴드들이 주류이던 시점에 선사한 이들의 세련된 연주와 혁신적인 시도들은 앨범 속에 담겨 '모래위에 핀 꽃'처럼 빛난다.
모든 악재를 뚫고 진보 음악의 소중한 성과물을 발표하여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지평을 넓히고, 한국 록의 자존심을 세워준 동서남북과 <아주 오랜 기억과의 조우>는 국내 음악 팬들에게 너무도 소중하고 고마운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