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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큐 슈(九 州)
[후쿠오카(福岡)로]
11시 40분경 시마모토(志まもと)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후쿠오카의 하카타항(博多港)으로 가기 위해 이즈하라항 선착장으로 갔다.
이즈하라항 터미널 빌딩에는 흡연구역이 1층에 있고 공기청정기가 있는 바로 옆 담배자판기에는 한글로 ‘여기는 공기청정기이니 담배꽁초를 버리지 말아주세요’라는 쪽지를 붙여놓아 마치 한국인만 그곳에다 담배꽁초를 버리는 것 같은 뉘앙스를 풍겨서 보기에 민망하다.
비너스(VENUS)호에 승선하여 13시경 출발하였다. 이 배는 정원 262명으로 1층에는 객석 158석과 매점이 있고, 2층에는 객석 104석과 기관실이 있으며, 객석은 보통・우등의 구분이 없는 자유석으로 운임은 1인당 6,620엔이다. 속도는 시속 80km에 제트엔진으로 추진되며, 배가 수상에 약 2m 떠서 뱃머리는 들리고 선미(船尾)는 낮춘 상태로 진행하는데 파도의 영향을 덜 받아 요동이 거의 없다.
배는 망망대해로 나와서 14시경 이키섬(壹岐島)의 아시베항(芦辺港)에 10여분 정박하였다가 다시 망망대해로 나가니 가슴이 탁 트이고 속이 시원하다.
주위의 바다에는 오징어잡이 소형 어선들이 여기저기 떠다니고 멀리 하카타항(博多港)이 눈에 들어오더니 약 1시간 50분만에 배는 하카타항에 도착하였다.
포구에는 6층짜리 대형 여객선인 아스카(飛鳥)호가 정박해 있는데 이 배는 상하이, 홍콩, 싱가포르 까지 운항하는 호화여객선으로 1년에 1회 부산을 넣어서 항행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또 황금빛 지붕과 붉은 기둥 모양을 한 중국식 건축양식의 배가 떠있는데 이것은 배가 아니라 중국식당(Chinese Restaurant)이다.
큐슈(九州)의 후쿠오카현(福岡縣)은 인구가 350만명 정도 되고, 후쿠오카시는 130~140만명 정도 된다.
큐슈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약 10만명의 포로가 잡혀 와서 그중 5만명은 나가사키 항에서 화란선을 이용하여 스페인, 포르투갈, 이태리, 네델란드 등지에 노예로 팔려나갔고, 나머지 5만명은 그대로 눌러앉아 살았기 때문에 400여년을 지나면서 큐슈인의 대부분에 조선인의 피가 흐르고 있어 한국에 대해 우호적이라고 한다.
큐슈에서는 부산-후쿠오카간의 선박 왕복운임이 일반인들은 17만원, 학생은 8만원이기 때문에 부산에 가서 데이트를 하는 젊은이들이 많으며, 또 1년에 중・고등학교 학생의 약 50%에 해당하는 17만에서 22만 명의 학생이 한국으로 수학여행을 간다는데 서울이 토쿄(東京)보다 운임이 싸고 볼거리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겠으나 역시 친한적인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예전에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일본에 가면 밥솥을 비롯한 전자제품을 많이 구입하였는데 지금은 그런 사람이 전혀 없고, 오히려 보따리 상들이 부산에 가서 의류 등을 사서 후쿠오카로 와서 파는 진풍경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히젠(肥前)의 나고야성터(名護屋城跡)와 박물관]
배에서 내려서 15시 30분경 대기하고 있던 버스를 타고 나고야{名護屋;현 鎭西町, 중부의 나고야(名古屋)와는 다름}성터를 향해 출발하였다.
일본에서는 현마다 도로 통행료를 내야 하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통행료가 버스 임차료 보다 더 많다고 한다.
도로는 해안선으로 이어져 경치가 좋은데 마을마다 집과 함께 공동묘지가 어우러져 있어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일본인의 내세관을 엿볼 수가 있다.
1시간 정도 달리니 우측 언덕 위로 근래 새로 지은 가라츠성(唐津城)의 천수각(天守閣)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 보인다. 이 천수각도 원래의 것은 명치유신 때 폐번(廢藩)으로 파괴되어 근래에 새로 지은 것이다.
진제이마치(鎭西町)를 들어서서 나고야성유적지에 가까워지니 이정표에도 한글이 병기되어 있다.
17시경 사가현립나고야성박물관(佐賀縣立名護屋城博物館)에 도착하니 마침 제주도의 역사와 풍토에 대한 특별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박물관내에는 고려경(鏡)・고려수저・고려시대의 청동병・송대(宋代)의 동전・조선시대 초기 동조(銅造)아미타여래좌상・금동제 미륵반가사유상・거북선 모형・임진왜란당시의 무기 등 임진・정묘왜란 관련 유물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정유재란 때 남원 전투에서 토오도오 다카토라(藤堂高虎)군에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가서 일본 근세 주자학의 개조(開祖)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강항(姜沆)의 초상화 및 ‘蘭芳’이라는 편액의 복제본 글씨와 역시 임진왜란 때 진주성 부근에서 7세 때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군에게 잡혀서 사가(佐賀)로 끌려온 홍호연(洪浩然)이 가족에게 남긴 ‘忍’자 복제본 글씨가 눈길을 끈다.
홍호연은 잡힐 당시 손에 큰 붓을 쥐고 있었다고 하는데 일본으로 끌려가서 나오시게(直茂)・가츠시게(勝茂) 부자(父子)에게 출사(出仕)하면서 쿄토오산(京都五山)에서 수학하여 유학자(儒學者)로서 활약하였고 서예가로서도 유명하며 최후에는 가츠시게를 따라 순사(殉死)하였다.
홍호연의 처지가 오죽하였으면 처세훈(處世訓)으로 가족에게 ‘참을 인’자를 남겼을까. 이들의 피를 토하는 원통함과 고통은 400년의 세월이 지났다고 하여 조금도 감소될 수 없으리라.
17시 25분경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까마귀가 울면서 하늘을 날아간다. 서쪽으로 장엄하게 펼쳐진 일몰광경을 바라보면서 나고야 성터(城跡)와 진터(陣跡)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나고야성은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순전히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축조되었다.
부지의 면적만도 17만㎡로 1591년 가을부터 1592년 봄까지 전국의 다이묘(大名)가 총동원되어 6개월만에 축성이 완료되었고, 왜군 15만이 이곳에서 조선으로 출정하였다.
축성 후 히데요시가 1년간 머물면서 왜군을 총지휘한 이 성은 축성당시 오사카 성 다음으로 큰 규모였다고 한다.
성터로 올라가서 성벽의 유적과 본채인 혼마루(本丸), 니노마루(二の丸), 산노마루(三の丸)의 유적을 둘러보고 성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사방에 흩어져 있는 진터(陣跡)를 둘러보았다. 혼마루의 5층 천수각이 있었던 자리에는 높이 10여m의 ‘名護屋城址’라는 글씨가 새겨진 석비가 서있다.
혼마루에 올라 저 멀리 서북쪽을 바라보면 이곳이 바로 앞의 이키섬(壹岐島)과 멀리 대마도를 지나 부산으로 가는 최단거리에 있음을 알 수가 있어 한눈에 조선침략의 요충지임을 짐작케 한다.
성터 입구에는 깃대(旗竿)를 세우는 ‘旗竿石’이 있고, 성터 아래에는 ‘大手口前井戶’의 유적이 있다.
진제이마치(鎭西町)의 이곳은 원래 좁은 골짜기로서 거주하는 주민도 별로 없었으나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전국의 다이묘들이 나고야 성을 중심으로 사방 골짜기마다 진(陣)을 설치하고 군사훈련을 하였던 곳이다.
그러나 왜란이 끝난 후 조선과의 관계개선을 원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 의해 바로 파괴되어 진의 위치, 규모와 형태를 알 수가 없었으나 우연히 가노오 미츠노부(狩野光信)의 작품으로 진이 설치된 당시의 모습을 그린 병풍이 발견되어 각 진의 형태를 재현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다이묘들은 1만에서 1만 5천의 병사를 이끌고 성을 축조하고 진을 설치하여 그 진이 모두 130개소에 이르고 군사만 20만명에, 따라온 상인 등을 포함하여 약 40만명이 일시에 이곳에 몰려들어 큰 도회를 이루었다.
그전까지 다이묘들은 각기 독립되어 상호 왕래가 없었다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의해 통일의 기운이 조성되면서 교류의 기회가 많게 되어 모모야마문화(桃山文化)가 싹트게 되었는데 모모야마문화는 특히 이곳에 같이 모여 각기 다른 서로의 문화가 활발히 교류되는 전기를 이루면서 활짝 꽃을 피우고 에도(江戶)시대 초기까지 발달되기도 하였다.
이곳 성터(城跡)와 진터(陣跡)는 모두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어 이 지역 전체가 문화재이기 때문에 이 지역은 개발이 금지되고 있다.
사명당은 왜란이 끝난 후 일본과의 화평교섭사명을 띠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회담을 위해 이 부근을 배를 타고 지나가면서 나고야성을 바라보고 그 감회를 ‘배를 돌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결진처를 지나다(廻舟浪古城過平秀吉結陣處)’라는 제목으로 시를 읊었으니 다음에 소개한다(浪古城은 나고야성을 말하고 平은 豊臣이전의 姓임).
우주는 지극히 넓고 크고
만고흥망은 다시 아득하구나!
하・상・주・한・당・송나라는
뜬 구름 흐르는 물같이 모두 잠깐 지나갔도다.
성인과 미친 놈 잘못 분별하기 쉽고
착하고 그른 것은 가지런히 하기 어렵다
저놈이 천하를 움직일 줄 누가 알았으랴
세상일 번복함은 생각도 할 수 없도다.
玄黃宇宙極洪荒 萬古興亡更杳茫 虞夏商周漢唐宋 浮雲流水太悤忙
聖狂易得分邪路 臧丕難齊履大方 誰料奚奴動天下 世間飜覆絶思量
나고야성 근처에서 입춘을 맞이하니
푸른 바다 천리 나그네의 시름을 새롭게 하도다
조각배 타고 또다시 적관을 향해 가는데
머리를 삼한으로 돌리니 궁궐(北宸)이 아득하도다.
浪古城邊逢立春 碧波千里客愁新 片帆又向赤關遠 回首三韓杳北宸
[가라츠(唐津)에서 하룻밤을]
나고야성터를 출발하여 시사이드 호텔 629호실에서 여장을 풀었다. 이 호텔은 8층 건물로 가라츠에서 가장 시설이 좋다고 한다.
가라츠는 인구가 약 80,000명 되고, 사츠마(薩摩), 아리타(有田)의 자기(瓷器)와 더불어 도기(陶器)로 유명하며, 해산물로는 고래고기가 유명하다.
호텔 1층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다. 나이 많은 일본여자가 기모노를 입고 시중을 드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1시간가량 식사를 하면서 대담과 토론을 하고 나오니 마침 가이드가 로비에 비치된 피아노로 영화 ‘실크로드’ 중에서 ‘돈황’편을 정열적으로 연주하고 있어 다른 가이드보다 돋보였다.
호텔 3층에 있는 ‘展望溫泉’이라는 욕탕에 가서 욕탕과 사우나 실, 노천탕을 들락날락 하면서 온천욕을 하고 나니 피로가 싹 가신다.
로비에 길이 70~80cm, 두께 20cm되어 보이는 엄청나게 큰 대왕조개가 진열되어있어 나이가 얼마나 될까 생각하면서 숙소로 들어가서 잠을 청하였다.
[도자기의 고장 아리타(有田)]
10월 25일 온도조절장치가 없는 줄 알고 밤새 떨면서 자고나니 온 몸이 다 뻣뻣하다.
이곳 솔밭이 좋다고 하여 밖으로 나와 해변을 산책하니 하늘에는 아직 달이 떠있고, 호텔은 앞이 바다가 탁 트인 만곡의 가장 안쪽에 위치하여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있다.
4km쯤 전방에는 해안에 건물이 늘어선 타카시마(高島)섬이 중절모처럼 떠있으며 바다위로는 까마귀 떼가 울면서 날아간다.
이 솔밭은 니지노마츠바라(虹の松原)라고 하는 길이 약 16킬로미터나 되는 울창한 자연림으로 해변을 감싸고 있어 방풍림역할도 하고 있다.
해변에는 여기저기 쓰레기들이 밀려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밀려온 것들이라고 한다. 추워서 솔밭을 제대로 거닐 수가 없어 도로 들어와서 뜨거운 온천욕으로 언 몸을 녹이니 좀 낫다.
아침식사를 하고 버스에 올라 사가현(佐賀縣)에 있는 도자기의 고장 아리타(有田)로 출발하였다.
조림이 잘 되어있는 산지 사이의 좁은 길을 넘고 해변을 따라 내려가다가 이마리(伊萬里)를 지나 아리타(有田)에 들어서니 도자기의 고장답게 도자기와 관련된 간판이 많이 보인다.
가라츠(唐津), 이마리, 아리타 등은 모두 임진・정유왜란 당시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 후예들의 손으로 이루어진 도자기 고장이다.
09시 40분경 아리타의 도자기 거리에서 하차하여 5분 정도 걸어서 철길을 지나 도산신사(陶山神社)에 도착하였다.
신사(神社)의 이름이 ‘陶山’이고 입구에 일본 유일의 백자로 만든 도리이(鳥居)가 높이 서있으며, 경내에 커다랗게 빚은 고마이누(狛犬), 물독(大水甁)등 도자기 조형물들이 여기저기 놓여있는 것으로 보아 도조(陶祖)를 모시는 신사(神社)임을 한눈에 알 수가 있다.
신사(神社)의 제신(祭神)중 주제신(主祭神)은 오오진천황(應神天皇)이고 상전신(相殿神)은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와 도조 이삼평(李參平)이나 실제로는 이삼평을 모신 신사(神社)라 하겠다.
이삼평은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충남 공주에서 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잡혀서 큐슈로 끌려와 처음에는 가라츠의 해안 타구(多久)에서 질그릇을 굽다가 1616년 아리타의 이즈미야마(泉山)에서 질 좋은 백자광맥을 발견하여 조선식 가마인 노보리가마(登窯)를 걸고 조선자기를 빚어 아리타야키(有田燒)로 알려진 아리타의 영광을 이룩함으로서 이 지방에서 도자기의 신(神) 도조(陶祖)로 숭앙받고 있는데 아리타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29일부터 5월 6일까지 <아리타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이삼평의 이와 같은 업적은 심당길(沈當吉)이 이룩한 심수관가(沈壽官家)의 사츠마야키(薩摩燒)와 더불어 일본 도자기 역사상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다고 하겠다.
신사의 뒤편 아리타산(有田山)은 도산공원(陶山公園)으로 꾸며져 있다. 좌측으로 난 산길을 따라 300여 미터 올라가면 공원 정상에 1917년 도조송덕회(陶祖頌德會)에서 건립한 ‘陶祖李參平碑’가 서있다.
그 앞에는 ‘(사)한국도자기문화진흥협회’에서 증정한 것으로 좌우에 동자좌상(童子坐像)이 있고 가운데에 두 마리의 사자가 마주서서 뒷다리로 연화대를 딛고 앞다리로 등을 떠받치는 모습으로 조각한 쌍사자석등이 있으며, 그 옆에는 ‘建碑寄附芳名錄’이라고 쓴 둥근 돌기둥이 서있다.
또 공원 경내에는 이삼평의 고향인 충남 공주군 반포면에 세워놓은 이삼평 기념비의 사진을 넣어 만든 표석(標石)이 서있다.
이삼평이 일본으로 끌려와서 당한 고초는 눈물겨운 바가 있겠으나 한편으로 이렇게 도조(陶祖)로 떠받들어 모시고 있는 것을 보면서 오히려 고국에서는 감히 생각지도 못할 호강을 누리고 있다고 위안을 삼아야겠다.
실제로 조선의 도공(陶工)들은 왜란이 끝난 후에도 자진하여 일본으로 많이 건너갔다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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