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본 일본
안 정 훈
「혜향」 카페에 올라온 〈부자의 너무도 다른 인생길〉이란 글을 읽었다. 어렸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아는 우장춘 육종박사인데 그의 아버지의 삶이 ‘역적의 삶’이라 가슴이 뭉클했다. 가물거리는 조국의 운명을 저버린, 일본의 앞잡이인 아버지의 죄를 아들이 대신 받아들여 조국에 들어와 장관자리도 마다하고 조국을 위해 헌신한 애국심이 눈물 겹다. 과거를 진정으로 반성하지 않는 일본이 괘씸하지만, 그래도 배척만 하기에는 너무나 가깝고 관계가 깊은 것 같다.
30여 년 전 외국으로는 처음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비록 노동 현장이었지만 사람들이 부지런하고, 거짓말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여 인간취급을 안 했다. 아직도 사무라이 정신이 남아있어 계급이 높으면 나이에 관계없이 밑에 사람에게 반말하는 게 당연해서 동방예의지국에서 간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이 일본에 비해 20년은 뒤진 때라 자부심이 대단했었다. 정치적으론 한국을 무시했지만 일반인들은 한 것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노동현장에는 인도, 필리핀, 방글라데시 등의 외국인들이 일했다. 내가 일한 회사는 한국인으로는 내가 처음이었다. 동남아인들은 일당 8천엔을 받고 있었다. 나에게도 일당 8천엔으로 정하고 석 달 후 일하는 것을 보면서 결정하겠다고 했다. 일본말도 제대로 모르고, 노동일을 해보지 않아 일당 놓고 따질 계제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전날 일자리 구하러 갔다가 몸이 약하다고 퇴자를 맞은 상태였다. 일본인들도 일당 1만엔 받는 노동자가 많았다. 그런데 일주일 정도 지나니까 일을 잘한다며 처음 일한 날로부터 1만2천엔을 주겠다는 게 아닌가? 우리나라 같으면 아무리 일을 잘해도 처음 3개월간은 계약한 금액을 주는 게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터인데, 첫발을 디딘 일본공항에서의 감동과 오버랩 되며 ‘과연 선진국이구나!’ 하고 놀랐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처음 일본공항에서의 일은 지금도 생각하면 아찔하다. 외국은 처음인데 입국절차도 제대로 숙지하지 않았었다. 어릴 때부터 일본말을 쓰면 안 된다고 세뇌가 된 상태에서 일본어 공부도 소극적으로 밖에 안 됐다. 그 영향으로 말도 제대로 모르면서 동행인도 없이 혼자 나선 게 얼마나 무모했는지 모른다. 비행기에서 잠 들다 보니 입국절차 안내말도 못들은 것이다. 비행기에서 내려 사람들 뒤를 따라 들어갔는데 입국심사대에서 저지당했다. 입국심사서류를 작성해 오란다. 당황해서 여기저기 서류를 찾아 입국목적, 거주할 곳, 연락처 등을 한자와 서툰 일본어로 적고는 지갑 챙기는 것을 깜박했던 것이다. 지갑에는 전화번호랑 용돈이랑 다 들어있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심사대로 가는 데 뒤에서 ‘안상!, 안상!’하고 불렀다. 나를 부를 사람이 없는데 하면서 뒤를 돌아보니 일본인 공항 안내원 같은 사람이 내 지갑을 흔드는 게 아닌가? 달려가 고맙다고 인사하고 지갑을 받았다. 사전에 떨떠름한 나를 지켜 본 것 같았다. 여차 했으면 국제미아가 될 뻔한 상황이었다. ‘일본’의 첫인상이 ‘선진국’이었다.
작업은 건축공사 현장인데, H빔으로 골격을 만들면, ‘ALC’ 라는 기포 콘크리트제품으로 벽체나 바닥, 지붕을 덮는 것이다. 단열, 내화, 내진성이 뛰어나 그 당시 일본에서 각광받는 제품이었다. 가벼운 콘크리트라지만 무게가 250키로 까지 나간다. 그걸 둘이서 들어 리어카 위에 올려놓고 끌고 가서 벽체에 고정시키는 일이다. 몸무게 50키로인 왜소한 체격인 내가, 키 180센티에 100키로 나가는 사람과도 맞잡고 들어 올려야 한다. 일본사람들도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도대체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느냐고 놀라했다. 아마도 일본에서 기계가 아닌 사람이 하는 일로는 가장 힘든 일일 것이다. 단순한 힘만이 전부는 아니다. H빔에 얼기설기 얽혀진 장애물을 피해 제단을 해야 하는데 거기에도 머리가 필요로 한다. 몇 년 된 기술자보다 더 잘 재단한다고 회사에서 머리 좋다고 소문까지 났다. 그래서 사장이 한국인을 구해 오기도 했다. 문화가 달라 에피소드 도 많았다. 원래 인도 숫자인데 아라비아 상인들에 이해 널리 퍼진 걸 모르고 아라비아 숫자를 모른다고 나무랐던 인도인에게 부끄러웠던 기억도, 사족이 멀쩡해도 말을 제대로 못하면 병신이란 것도 외국에 가서야 절감했다.
일본에서의 소득은 불교를 접할 수 있었다는 게 제일 큰 소득이다. 항상 공부의 부족을 느낀 학구열이 있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비오는 어느 날, 숙소에서 쉬면서 누가 보다가 버린 주간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일본글은 서툴렀지만 한자들은 한국에서도 대하던 글이라 읽는데 큰 도움이 됐다. 직장인들을 위한 ‘반야심경 해설서’의 요약된 기사였다. 불교에 대해서 문외한이던 내가 호기심이 생겨 일본어사전을 펼쳐가며 4~5페이지를 번역한 것이다.
‘인연’이란 부처님 말씀이 새롭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일본을 가지 않았더라면 제대로 된 불교를 접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일본 스님, 그것도 문학가이신 비구니스님의 글이기에 쉽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한국 선승들의 고차원적인 선문답들을 먼저 대했더라면 기겁해서 아마도 나와는 거리가 먼 불교가 됐을 것이다. 남들이 믿은 2~3십년을 돌고 돌지 않고 단시간에 꿰뚫은 행운아인지도 모른다. 데미안의 아프락사스처럼, 알에서 태어나려는 자는 알을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두꺼운 껍질 즉 고정관념인 편견과 집착에서 벗어나라고 하는 중도의 원리를 알게 된 것이다.
사람은 외국물도 마셔야 더욱 성숙해 진다고 하던가? 일본을 지나치게 미화할 의도는 전혀 없다. 지금은 일본과 큰 격차가 없을 것이다. 가전이나 휴대폰, K팝 등에서는 월등한 대한민국을 자신들의 과거식민지였다는 사실만으로 무시하려는 일본이 밉다. 그렇다고 감정적으로 반일만 한다고 해결이 될 것 같지는 않다. 값싸고 안전한 원전을 누구 말마따나 멸치 몇 마리분도 안 되는 방사선이 마치 사람을 죽일 것처럼 공포를 조장해서 탈 원전을 밀어붙이는 식의 비과학적인 사고와 정책으로는 오기일 뿐이다. 우리나라가 일본을 넘어서는 선진국이 되기 전에는-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외교적으로 풀며 가까운 이웃이 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