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기독교에 대한 비판들이 만만치 않고
그 개신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망측한 일들이 많다고 하지만
서른 해 가까이 교회 언저리에 살면서
그래도 참 소중한 선배나 동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어제 찾아간 '정진동 목사님의 쾌유를 바라는 일일찻집'도
선배다운 선배인 정진동 목사님을 모시는 자리이기에
조금 불편한 자리이긴 하지만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정목사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79년으로 기억됩니다.
그 때 청주 영운동에 도시산업선교회가 있었는데
당시 우리는 그 교회를 '도산'이라고 불렀고,
그 뒤에는 '도산'이 갖는 말맛 때문에
'산선'으로 불렀는데,
아무튼 그 때 처음 정진동 목사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뭐 아직은 세상을 잘 모르던 나이였으니
도시산업선교회가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의미에 대해서는 몰랐고
그저 호기심에 가본 곳이었는데
그 때 거기서 고려대학교 이문영 선생님의 강의를 들은 적은 있어도
관심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제넘게 그 때 교회에 다닌지 얼마 되지도 않는 내 눈에
정목사님의 음주 흡연이 거슬렸습니다.
그래서 지적을 했는데
그 때 정목사님의 대답이 시원하지 못했고
그 길로 임지를 얻어 교회에 부임하는 바람에
다시 인연을 맺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보은으로 금산으로 떠돌다가 진천으로 왔을 때는
제법 교회 밥을 먹은지도 꽤 되었을 때인데
그 무렵 사회모순에 조금씩 눈을 뜨게 되었으며
때마침 불던 민주화의 바람결은 미련한 내게도 불어닥쳤고
그래서 멋도 모르고 시위에 가담하면서
정목사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신대원에 들어가 신학이 무엇인지를 제법 말할 수 있게 될 무렵
내가 정진동 목사님께 감히
음주 흡연 문제를 놓고 따졌다는 것이
얼마나 어린 짓인지를 헤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대원을 졸업하고 목사고시를 준비할 무렵
그 철없는 짓을 용서받으려고
막걸리 몇 병과 담배 몇 갑을 사들고 찾아갔을 때
'담배는 받을 수 있겠는데 술은 사양해야 되겠네요' 하시던 모습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건강이 안 좋아서 술을 하실 수 없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뉘우침과 용서를 비는 것은 언제나 한 발 늦었을 때임을 되새기게 했고,
하여 술은 그저 나 혼자 다 마시고 돌아오는 걸음
술기운 탓이 아니고 많이 흔들렸습니다.
본디 우리 교단의 목사이던 정목사님은
어수선하고 부끄러운 시절에 교단에서 제명처리되어
교단 없이 목사직을 감당하고 계셨는데
그것은 늘 나를 부끄럽게 하는 무엇으로 깔깔하게 목구멍에 걸린 가시였습니다.
그 때 나는 어서 내가 중견 목사가 되어
정목사님을 복권시켜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는데
좀 더 나이를 먹으면서 그것이 얼마나 소박한 생각이었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정목사님을 복권시켜드리는 것보다는
내가 그분의 뒤를 따라서 제명되는 것이 훨씬 빠르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오늘날 교회와 교권의 구조임을 본 까닭입니다.
정목사님은 정말 목사이셨습니다.
박정권 시절에 느닷없이 아들을 잃기도 하셨는데
그러면서도 꿋꿋하게 이 땅의 힘없고 가난한 민중들을 위해서
한 몸을 불사른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정목사님이 지난 겨울 갑자리 쓰러지셨다는 말을 듣고
충북대학교병원에 찾아갔을 때
의식을 잃고 누워계신 모습을 보면서
목사 되고 처음으로 편안하게 쉬시는가보다 했습니다.
이제 쉬실 때도 되었다는 생각,
정말 남은 여생이 얼마 되던지에 관계없이
그 남은 삶을 편안하게 쉬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정목사님의 쾌유를 바라며 치료비 마련을 위한 일일찻집을 연다는 자리에
엊저녁 가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목사님은 다시 일어나 일을 하셔야 한다고 하는데,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이대로 숨을 접으시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 나는 갑자기 한 가지 옛날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우렁새끼들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에 따르면 어미 우렁이는 새끼를 제 몸 안에 키운다는 겁니다.
그렇게 제 몸에 새끼를 키우는 까닭에
새끼들은 제 어미의 살을 파먹으면서 자라는데,
마침내 제 어미의 몸을 다 갉아먹고 껍질만 남으면
새끼들은 밖으로 기어나오고
그래서 빈 껍질이 물에 둥둥 떠내려가면 새끼들이
'우리 엄마 시집간다'고 한다는....
그 이야기를 떠올리며
예수의 부활이라는 것도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온갖 찬사도 다 필요없는 것,
그저 얼마 남았던가 편안하게 좀 쉬실 수 있었으면,
제도권 목사들은 여섯 해 일하면 한 해를 쉬는
안식년도 찾아먹고
틈 나는 대로 휴가를 즐기면서 해외 나들이도 하고 하는데
무슨 팔자가 그래 일흔을 넘기고도 쉬면 안 된다는 자리에 놓이게 되었는지
목사님이 안쓰러운 마음에 자꾸만 눈물이 나오려고 해서
자리에 오래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정목사님과는 다른 길을 가지만
정목사님은 내게는 움직일 수 없는 선배이고
우리 지역에서는 누가 뭐라 해도 큰 스승임에 틀림없는데
그 선배님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봅니다.
'정진동 목사님, 정말 사랑합니다.'
이제 나는 이 글을 끝으로
정목사님과 인연의 끈을 잘라버리려 합니다.
그래야 내가 더 자유롭게 내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글을 길게 길게 쓰는 것,
이 글이 그저 글자들의 모임이 아니라
내 가슴 깊은 곳에 있던 응어리의 풀림,
눈 밝은 이는 아실 겁니다.
정목사님의 회복과 회복 뒤의 휴식을 위해서 손을 모아 비벼보는데
내 기도는 언제나 하느님이 외면하시니
그저 비는 내 손바닥만 자꾸 뜨거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