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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의 체온 박봉우
가로(街路)의 체온
눈물겹도록 슬픈 일이 있다면
그건
아름답다.
돈암동 종점행 합승을 타면
창경원 앞에서 시작하는
플라타너스 그늘에
누군가의
따순 손이 그립다.
여기는
피곤한 하루라도
걸어가고 싶은 길.
나 혼자만이라도
흘러가고 싶은
길이다.
모든
사랑하는 사람을
고향에 두고
빈 가슴으로
빈 가슴으로 걸어가면,
이 머언 길 위에도
비로소
시인을 알아주는
애인의 맑은
눈이 있다.
플라타너스는 길 위에
버림받은
나는, 어쩌면
순진한 부랑아.
눈물겹도록 외로운 일이 있다면
통행금지 몇 분을 두고도
이 길을 걸어가는
밤은
아름답다.
휴전선, 정음사, 1957
겨울에도 피는 꽃나무 박봉우
겨울에도 피는 꽃나무
눈이 소리없이 쌓이는
긴 밤에는
너와 나와의 실내에
화롯불이 익어가는 계절.
끝없는 여백 같은 광야에
눈보라와
비정(非情)의 바람이 치는 밤
창백한 병실의 미학자는
금속선을 울리고 간 내재율의 음악을
사랑한다.
눈이 내린다.
잠자는 고아원의 빈 뜰에도
녹슬은 철조망가에도, 눈이 쌓이는 밤에는
살벌한 가슴에 바다 같은 가슴에도
꽃이 핀다.
화롯불이 익어가는
따수운 꽃이 피는 계절.
모두 잊어버렸던 지난 날의 사랑과 회상
고독이거나 눈물과 미소가
꽃을 피우는 나무.
사랑의 원색은
이런 추운 날에도
꽃의 이름으로 서 있는
외로운 입상(立像).
나는 쓸쓸한
사랑의 주변에서
해와 같은 심장을
불태우고 있는
음악을 사랑한다.
모두 추워서 돌아가면
혼자라도 긴 밤을 남아
모진 바람과 눈보라 속에서
뜨거운 뜨거운 화롯불을 피우리.
겨울의 나무도
이젠 사랑을 아는 사람
꽃을 피우는 사람
금속선을 울리고 간 내재율의 음악을
사랑한다.
휴전선, 정음사, 1957
고구려인 박봉우
고구려인
내 애비와 어미는
고구려인
만주부터
조선 북방에까지
힘과 부가 넘쳐났다
높은 미적 감각 속에
꽃핀
압록도
백두도
평양도
대륙을 넘나들었다
신라와
백제는
우리들의 한 핏줄
광개토대왕비 곁에서
언제나 상냥스러웠다
병든 병들어가는
조국 앞에서
고구려인은 울고 있었다
기차를 타고
고향을 찾아
녹슨 철로 위를
모든 형제들과 같이 달리고만 싶었다
고구려인의 한은
지금 끝이 없다
휴전선, 정음사, 1957
고궁풍경에서 박봉우
고궁풍경에서
항시 구경을 다아 했다고 생각해도
그 경치를 떠나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더 오래도록
포옹하고 깊이 파묻힌 옥돌 같은
얼굴을 찾아보고 싶어서가 아닐까.
이조 백자기 같은 화문의 마음을
굽이돌아가면 그 뒤안길에는
어떤 이끼 푸른 고궁이 있을까.
꽃밭에는 선녀가 서서
얼굴엔 잔잔한 무늬의 그림자를
수놓고, 산너머 구름 같은 천 년을
먼동과 함께 불러보는
멀고 먼 목소리가 아닐까.
나는 몰라
나는 몰라라
그저 화사한 아양도 좋지만
살벌한 경치가 모든 주위의 병풍을
그릴 때, 끝없이 외로운 것은
누구였을까.
너는 이미 저물어가는
고궁의 뜨락인데
여기에 피어나는 꽃 한 송이는
너를 알고 간 무덤보다도
새 천년의 흰구름이 포도처럼 열려가는
문이 아닐까.
고궁은
짙어가는 고궁의
눈과
손은
너를 끝없이 울리고 가는
저어 하늘가의 보석별들보다도
머나먼 길 위에 핀 한 송이
겨울의 꽃나무.
휴전선, 정음사, 1957
광화문에서 박봉우
광화문에서
고장난 목소리가
광화문을 지나는 어느 날
울고 싶었다.
많은 훈장을 단
고장난 목소리는
모든 것 눈을 감고
광화문을 지나가버렸다.
광화문은
허술한 빈 껍질만
바람에 소요하고 있었다.
울고 싶었다
고장난 목소리는 지나가고
광화문은 하늘에
꽃버선을 신고 있었다.
광화문
우리의 서러운 사연
고장난 목소리가
오늘도 어제도 이 앞으로
떠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휴전선, 정음사, 1957
그늘에서 박봉우
그늘에서
갈색 내 가슴을 불태우고 싶다.
영영 불태우고 싶다.
어두운 밤이 빛나도록
갈색 내 가슴을 불태우고 싶다.
내가 눈물로 걸어온 길은
아무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이 혹시 나에게 있다면
내가 눈물로 걸어온 길을
그이도 모른다.
몇 번이고 자살하고 싶은
나를 모른다.
갈색 내 가슴을
영영 불태우고 싶은 밤……
끝내 어두운 밤과
질서 없는 뒷골목을 빛내주는 것.
`코리아'의 비내리는 창을,
비 내리는 창을
끝없이 지켜주고 싶은
피투성이 날개가 되기에는
아직은
머언 밤이다.
餠占〉µ 피는 꽃나무, 백자사, 1959
나비와 철조망 박봉우
나비와 철조망
지금 저기 보이는 시푸런 강과 또 산을 넘어야 진종일을 별일없이 보낸 것이 된다. 서녘 하늘은 장미빛 무늬로 타는 큰 눈의 창을 열어…… 지친 날개를 바라보며 서로 가슴 타는 그러한 거리에 숨이 흐르고.
모진 바람이 분다. 그런 속에서 피비린내 나게 싸우는 나비 한 마리의 생채기. 첫 고향의 꽃밭에 마즈막까지 의지하려는 강렬한 바라움의 향기였다.
앞으로도 저 강을 건너 산을 넘으려면 몇 `마일'은 더 날아야 한다. 이미 날개는 피에 젖을 대로 젖고 시린 바람이 자꾸 불어간다 목이 빠삭 발라버리고 숨결이 가쁜 여기는 아직도 싸늘한 적지.
벽, 벽……처음으로 나비는 벽이 무엇인가를 알며 피로 적신 날개를 가지고도 날아야만 했다. 바람은 다시 분다. 얼마쯤 날으면 아방(我方)의 따시하고 슬픈 철조망 속에 안길,
이런 마즈막 `꽃밭'을 그리며 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설픈 표시의 벽, 기(旗)여……
휴전선, 정음사, 1957
내 딸의 손을 잡고 1 박봉우
내 딸의 손을 잡고 1
내 생활은
이제
내 딸의 손을 잡고.
풀잎들이 이슬 맺은
강이 흐르는 언덕길을
내 딸의 말을 배우며
내생활은
혁명도 자유도 독립도
사랑이거나 눈물도
내 딸의
손목잡고
잠시 멎는 시간.
내 생활은
이제
내 딸의 손을 잡고.
딸의 손을 잡고, 사사연, 1987
눈보라 속에서 박봉우
눈보라 속에서
모두들 돌아가라,
이렇게 눈이 오는 밤에는
모두들 돌아가
나 혼자 남게 하여라.
이런 밤의 실내에는
비창한 음악만 곁에 있으면
고독은
더욱 아름다운
나의 생명
나의 위안.
모두들 돌아가라,
비좁은 서울의 하늘에서
우정도 메마른 이웃에서
나 혼자만의 상념은
눈보라 속을 어서 가게 하라.
지나가버린 서글픈 이름들이여,
정신병원의 아름다웠던
징역 시간이여,
모두들 나를 멀리할지라도
이 눈보라 속을
피 흘리며, 어서 가게 하라.
사랑은 넘쳐 흐르는 강
눈보라 속의 뜨거운 나의 기(旗)를 위해
모두들 떠나, 어서 가게 하라,
어서 가게 하라.
휴전선, 정음사, 1957
능금나무 박봉우
능금나무
강물빛으로 배경한 어느 한가을의 짙은 하늘에 능금나무가 한 주 서서 홍옥(紅玉)의 능금들을 가지고 익어가는 사상을 담고 있었을 때,
능금 한 개를 따서 풀밭에 던진다. 아예 말이 없다 어떤 불안도 없다 은근한 여운이 풀잎들을 흔든다 한 개 능금이여.
사상을 담은 저 창을 열어라 음악이 음악이……들리고 바람이 이는 조그만한 분위기. 거기에는 태풍의 자세가 밀려오고 넘쳐오고,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것은 아름다운 당신. 열리지 않는 저 창 안에는 사월과 오월이, 그리고 여름 가을 겨울이 잠들고, 사랑의 연연한 손짓이 아지랑이같이 피어나는 …… 어느 봄의 언저리.
하늘을 가득 배경으로 한 한 주 능금나무. 저 많은 열매들의 의미는 전쟁에 이긴 눈물 같은 것, 서로 익어가는 사상 밑에서, 무성한 나무 그늘을 이루는 세계. 세계여…… 나의 갈망인 완숙. 완숙이여
휴전선, 정음사, 1957
니가 나의 동족인가 박봉우
니가 나의 동족(同族)인가
이젠 무너져라
터져라
슬픈 자식들
그만 가라
죽일 놈들
이태백이의 달에
똥물이나 칠하고
마음껏 오라
농가는 소도 모자라는데
서울놈들
오사하게 갈비는 잘 씹지
중농정책 잘헌다
막걸리에
밀가루나 실컷 타서 마시고
십 원짜리 만병 통치약
생명수나 퍼먹어라
시론 개 씹할 놈의 소리들
나의 조국은 두 동강인데
나의 조국은 두 동강인데
똥개 같은 놈들이
정치가
교수
시인이라고
세상 똥냄새만 나는군
갈비나 잘 씹고 잘 살아라
휴전선, 정음사, 1957
대법원 앞에서 박봉우
대법원 앞에서
□ 1
언제나 나 혼자만이 산책합니다
김병로 대법원장님을 생각합니다
리승만 대통령이 제일 무서워하는
그 길을 걸어갑니다 외로울 때나
슬플 때나 걸어가면서
휴지를 줍습니다
또 책을 읽습니다
□ 2
로마법을 사랑합니다만
점심을 싸가지고 더러는 걸어가는
이 땅의 대법관님들이 의젓해서
나는 눈물이 나옵니다
□ 3
나는 절대로 문을 열지 않습니다
억울하고 억울해도
전화도 하지 않습니다
□ 4
지금 나는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는지
어떻게 해야 할는지
휴전선, 정음사, 1957
대지의 대특호활자 박봉우
대지(大地)의 대특호활자(大特號活字)
서울의 양심은 이미 우리들의 것이 아니다.
지금은 해가 넘어갈때
이조 5백 년의 가슴아픈 음모들이
고층빌딩의 창가에 반영된다
비를 들고 아스팔트를 쓸어보면
서울의 양심을 안다
슬픈 모가지들이 매달려
살아가는 광화문
오늘 회담은 있지만
서로들 피눈물나는 넋이 없다.
평화와 자유와 독립을
이 거리 이 땅 위에서 부르짖었지만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선
뱀술과 오곡밥이
무슨 자랑들인가
유언이라도 내뱉고 싶은
무덤가에,
시가 되지 않는 밤
서울의 양심을 무찌르고 싶다
진정 어느 누가
통일이란 대특호활자(大特號活字)를 안고 사는가
로마의 훨훨 타는 밤이 되는 날
죄와 벌은 이때 시작되는 역사
녹슨 철로 위에 이때 시작되는 역사
눅슨 철로 위에 은빛나는
활짝 문이 열리는
파도같이 우렁찬
그날을 위해
우리는 조선의 창호지에
지금은 사무친 눈물을 감출때이다.
황지의 풀잎, 창작과비평사, 1976
도 박봉우
도(禱)
섬 하나 없는 바다에 한 마리 나비가
날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데로 향하야 어떻게 날아갈 것인가.
저리도 연약한 나래를 가지고……
모든 아애들로 피어 잠자는 꽃밭으로,
구름밭으로 찾게 해주십시오.
저어 풍랑 많은 바다에 던져지기 전에
한 마리 나비를 어서 가게 해주십시오.
휴전선, 정음사, 1957
또 파고다 공원론 박봉우
또 파고다 공원론(公園論)
□ 1
어두운 산천에 봄이 오는가.
절단된 강산에 또 삼월이 오는가.
우리들의 삼월이 뭉쳤던 날
남과 북도 한 덩어리였다.
한핏줄은 여기 흐르는가.
슬기로운 넋은 여기 있는가.
조선독립선언문(朝鮮獨立宣言文) 앞에 엄숙히 서보면
양심이 부끄러운 사람들,
북도 남도
어서들, 이 땅을 물러나거라.
삼월, 파고다공원은
쓸쓸한 사람만 모이는가. 아니다.
모든 고향의 봄빛이 집중하는 곳
화산같이 토할 노래이다.
너와나의 힘이다.
파고다 공원 부근에서 물러나야 할 이때
여기도 저기도 멍멍개들이 짖는가.
□ 2
농주(農酒)나 한잔 들고 석탄이나 불피우고 싶은
삼월은 파고다 공원
역사는 말이없지만
이 무서운 증언을 비웃는가.
여기도 저기도 못된 반역의 얼굴들
어서, 어서 물러나라.
다시 삼월이 오기 전에……
남과 북이 화창히 풀리는,
언땅, 언 강이 풀리는 길은
`파고다 회담'이 있어야 할
노을진 무렵이다. 온 땅의
쓰레기들이 물러나야할 무렵이다.
오! 파고다공원.
황지의 풀잎, 창작과비평사, 1976
무의미한 곁에서 박봉우
무의미한 곁에서
바람
네가 사온일(四溫日)의 창을 흔들고
사랑을 말해도 나는 모른다.
바람
네가 빈 의자에 앉아 밤늦게까지
사랑을 여쭈고 가도 나는 모른다.
바람
네 곁에서
나는 풍경같이 서서도
너의 비정(非情)한 음성을 모른다.
바람
너의 곁에서 바위같이 굳은
마음이 아니어도
어떻든 너의 얼굴빛을 모른다.
바람
너를 모르는 것은 아닌데
차라리 너를 몰라버린다.
바람
언제나 너는 영웅이 되어
구름을 가게 할지라도
나는 마음속 텅 빈 음악실에서
눈, 눈을 가지고도
너를 모른다.
바람
너는 북향의 창을 흔들고 와서 그런지
네가 나를 모르듯
나도 너를 모른다.
바람
네 곁에서 무슨 환희를 말하랴.
그저 너를 모르고
그저 너를 모르고
바람
네 곁에서 사랑도 절규도, 더욱
슬픔이나 고독한 색지(色紙)들을.
지도로 그리지 않고
여백 그대로 떠나
조용히 응시해야 한다.
모른 대로 모른 대로
그저 모른 대로
바람아.
휴전선, 정음사, 1957
밖으로 나가고 싶다 박봉우
밖으로 나가고 싶다
이러한 엄청난
징역시간엔
누구도 모르게
공을 만지며
밖으로 나가
고요한 어느 숲
호수에 얼굴을 비추며
혼자만이 중얼거리고
싶은
봄아지랑이 같은
심사.
누구도 오지 않는
그러한 고지를 향해
밖으로 나가고 싶다
엄청난 징역시간에서
밖으로 나가고 싶다.
휴전선, 정음사, 1957
반 조각의 달 박봉우
반 조각의 달
내 얼굴은
상처뿐인 조국
지도를 그린다.
보름달도 되지 못한
항상 반 조각의
달.
언젠가 한 번쯤……
우리들의 보름달을 위해
모든 옷
옷들, 훨훨 벗고
나비
춤추며 모이는
그런 날,
내 얼굴은
상처뿐인 조국
지도를 그린다.
휴전선, 정음사, 1957
백두산 박봉우
백두산
높고넓은
또 슬기로운
백두산에 우리를 올라가게 하라
무궁화도
진달래도
백의에 물들게 하라
서럽고 서러운
분단의 역사
우리 모두를
백두산에 올라가게 하라
오로지 한줄기 빛
우리의 백두산이여
사랑이 넘쳐라
온 산천에 해가 솟는다
우리만의 해가 솟는다
우리가 가는
백두산 가는 길은
험난한 길
쑥닢을 쑥닢을 먹으며
한마리 곰으로 태어난
우리 겨레여
황지의 풀잎, 창작과비평사, 1976
분단아! 박봉우
분단(分斷)아!
너무나 오래 지쳤다
두 동강이 난 허리
오로지 조국은 하나여야 하는데
가슴 잘린 쓰라림
백두에도
한라에도
태극기 펄럭여야 하는데
그날은
언제인가
우리가 서로 뭉친
하나 될 때
세계는 놀래리라
이 진통 이 아픔
눈물로 달래지는 않으리라
피어린 역사 속에서
우리는 5천 년을 살아온
백의(白衣)였다
휴전선, 정음사, 1957
사랑의 말 박봉우
사랑의 말
너를 향해 서면
무엇인가 온화로운 이야기를
보석같이 주고 싶다.
거울 속에서 내 얼굴을 한참 보듯이
그렇게 말없이 주고 싶다.
사랑은 네가,
나를 영 비워 놓고
떠나버리는 허전함에서
비롯하는 아쉬움이나
안타까움의 공간.
아지랑이와도 같이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아침 안개 속의 귀로.
사랑도 살며시 창을 열 때……
일요일의 우리 공원은
낙일(落日) 같은 가난이 따른다.
우리 서로 만나도
사랑은 아예 말하지 않는 언약―
은하수와 같은
골목길에서 오히려 울고만 싶은 저녁.
나의 사랑, 나의 사랑의 말은
나만이 기억할 수 있는
호수와 같은
내 엷은 가슴에 전해오는
가을의 과수원이나,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고독한 편지나,
멀리 흘러가버린
어느 양지 같은 소녀의 꿈을 담은
헬만 헷세의 구름……
울고만
울고만 싶은 들녘의 기도.
그것은 나의 사랑의 말이다.
사랑의 풍경이다.
휴전선, 정음사, 1957
사미인곡 박봉우
사미인곡
언제까지나 이러한 나라의 벌판이나 험한 산악이거나 바다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야만 하는 카키 전투복을 입은 창백한 병정은 지독하게 배암을 무담시 죽이고 싶으면서 여태 한 마리 죽여보지 못한 망나니의 슬픈 목숨인가.
휴전인 채 지독한 봄은 오는가. 어쩔라고 대각선상에 놓인 얼굴과 얼굴들이 오늘따라 유달리 고운 풍경은, 전쟁을 모르는 어머니의 모습을, 미소를 더듬는 어느 태초의 휴식을 찾는 목마른 눈이 아닌가.
우리들의 금빛 찬란한 해동기(解凍期)는 언제 오는가. 그리고 답답한 벽(壁)은 언제 무너지는가 햇살같이 퍼지는 그런, 그런 날의 희망과 꽃밭의 대열은 언제쯤인가.
신라 천 년의 꽃구름이 우리의 보랏빛 가슴 속에 충만히 익어온 수만 열매들의 모양과 얼굴 위에는……`너와 나와의 가슴에 이 착각의 금[線]을 누가 만들었는가 금의 비극이 여기서부터 싹튼 것이 요때까지 사랑할 수 없었던가' 이런 수심이 흐르고, 사랑의 자세. 단 한 번 그립고 아쉬운 손짓이어……
언제까지나 이러한 나라의 벌판이나 험한 산악이거나 바다에서 이야기를 시작한 카키 전투복을 입은 어리고 가녈픈 병정은 찢기울 대로 찢기운 오만 것을 지닌 채. 창을 열면 우선 칠색 꽃밭이 트여오는 이런 귀한 당신을 생각하며 살아가야 할 어느 기구한 왕자의 눈물 많은 목숨인가.
휴전선, 정음사, 1957
사수파 박봉우
사수파(死守派)
꽃밭은 없는가 우리가 잠을 자고 가도 좋을 그런 꽃밭은 없는가 우리의 심장을 익은 해와 같이 태워도 좋을 사랑이란 집은 사랑이란 집은 영영 없는가.
꽃밭이 아니라도 좋고 사랑의 집이 아니라도 좋다 피로 황토흙으로 얼룩진 날개를 위하여선 병실이라도 허술한 병실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땐 하늘이란 얼굴과 달밤 같은 손이라도 가까이 오는 향기 아닌가.
그만 지는 꽃잎과 같이 흩날릴 아쉬운 날개. 왜 우리는 이렇게도 모든 것에서 버림받았는가. 사랑이나 외로움은 한없이 까다로운 채 살고 싶은 살고만 싶은 날개의 마지막 생채기. 피는 흘러도 붕대를 감아줄 병실 없는 싸움터에서 아우성 아우성 치는 처참한 풍경을 보는가.
이러한 풍랑치는 자리에 신의 눈은 없는가. 우리를 돌봐줄 신의 손은 없는가 황량한 저 들판이 신의 눈이다. 질서없이 몰아쳐오는 성난 파도 같은 저 바람이 신의 손이다. 끝없는 사랑을 위하여 죽어가는 날개 위에 무덤 무덤인들 병은 아닌가.
하늘도 땅도 하나라고 부르고만 싶은데 우리가 잠을 자고 가도 좋을 토요일 정오의 꽃밭은 없는가 심장을 익은 해와 같이 태워도 좋을 사랑이란 집은 없는가. 우리 목마른 아쉬움을 들어줄 천대해도 좋을 그런 집마저 없는가. 옷을 벗어도 말갛게 옷을 벗고 몇 날이고 굶은들 정든 땅 정든 이야기 정든 얼굴 있으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을 위해서 눈감아도 좋은 것일까.
꽃밭은 없는가 차라리 병실이라도 없는가 핏덩어리로 산화된 전우의 날개를 묻어줄 한 주먹 고향흙과 그런 양지의 산맥도 없는가 어쩔 수도 없는 날개를 시체 그대로 버리고 날아가야만 하는 또 하나 젊은 날개의 슬픔을 너는 모른다. 죽은 혼이여 네가 부를 신의 이름이 여기 날고 있다. 멀어진 꽃밭을 찾아 병실을 찾아 억세게 날으고 있는 헐어진 고층탑에 마지막까지 남은 산만한 깃발. 아름다운 반항을 눈떠보는 것은 나의 것인가.
휴전선, 정음사, 1957
서울 하야식 박봉우
서울 하야식(下野式)
긴 겨울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모두 발버둥치는 벌판에
풀잎은 돋아나고
오직 자유만을 그리워했다
꽃을 꺾으며
꽃송이를 꺾으며 덤벼드는
난군(亂軍) 앞에
이빨을 악물며 견디었다
나는 떠나련다
서울을 떠나련다
고향을 가려고
농토를 찾으려고 가는 것은
아니겠지
이 못된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옥토를 지키는 것
봄은 오는데
긴 겨울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오랜 역사의 악몽 속에서
어서 깨어나 어서 깨어나
보리밭에 녹두밭에
석유냄새 토하며 쓰러질
서울 하야식(下野式)
외진 남산 기슭의 진달래야
찬 북녘 바람은 알겠지
소금장수
쌀장수
갈 곳도 없는
고향도 없는
어서 서울을 떠나야지
서울을 떠나야지
휴전선, 정음사, 1957
석상의 노래 박봉우
석상(石像)의 노래&
너를 믿고 살아야 너를 믿고 살아야 하늘과 태양만 있으면 그뿐인 너를 믿고 살아야 계집애 같은 눈물과 웃음의 꾸밈도 없이 벙어리인 체 살아야 너를 믿고 이 목숨이 살아가야.
풀이파리 타질 듯 징글징글한 더운 여름에 목이 마르면 소낙비를 맞으며 겨울에 매운 바람이 불면 하얀 눈송이를 이불로 만들어 살아야 말없이 살아야.
누구를 오래도록 지키는 파수병이냐고 바보냐고 비웃어도 살아야 그래도 천 근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살아야.
오월의 장미는 눈물이 있고 순간에 져버리는 넋이라도 나는 구원(久遠)한 빛을 하늘에 이고 살아야 아무런 원망도 없이 살아야 넓고 푸르른 하늘 우러러 그 같은 의지로 소리 없는 노래 부르고 보란 듯 살아야.
눈물도 쓰라림도 달게 받으며 못난 구실로 나는 살아야 말친구도 없이 그저 적적히 푸른 하늘의 태양을 바라보고 키 작은 대로 부드러운 것도 없이 무상한 역사를 노래하고 나는 나는 웃음 한번 없이 굳어버린 얼굴로 이 누리를 살아가야 살아가야.
바보라고 비웃어라 사랑의 패배자라 비웃어라 그래도 잔디밭에 버섯처럼 피어 영원한 침묵 속에 못난 체 살아야 오랜 세월을 눈물 한번 없이 살아야 웃음 한번 없이 살아야.
너를 믿고 살아야 너를 믿고 살아야 하늘과 태양만 있으면 그뿐인 너를 믿고 살아야 계집애 같은 눈물과 웃음의 꾸밈도 없이 벙어리인 체 살아야 너를 믿고 이 목숨이 살아야.
휴전선, 정음사, 1957
소묘 1 박봉우
소묘 1
사월의 피 흘린
여러 흙을 밟아보면
더러는 의미를 아는
심연의 나무가 서서
잠시 무지개빛의 중량을
생각해보는 시간도 되는데……
공간은 말없이
황홀하지도 못한 카나리아의
징역 시간을 위해
바람이 되어,
천동이 되어,
아아 소나기가 되어,
온 육체에 깊이 멍든 것이
`토할 듯, 토할 듯, 토할 듯'
몸부림치는 울타리 안의
밀려가는 한숨들이
비가, 소나기가 되어
눈보라가 천동이 되어
꿈 깬 듯한,
사월이 잠든
꽃밭의 의미와
창의 머언 나무와 목소리.
휴전선, 정음사, 1957
소묘 6 박봉우
소묘 6
병원에
한 자루 연필과
한 권의 공책을 가지고.
창이 없는
하늘을 쳐다보고
구름과 천동과
동무가 되는
징역 시간의 대낮.
미친 듯
꿈을 깨면
정신나간
나의 조소를 당하고 싶은,
뜨거운 매혹.
병원에
한 자루 연필과
한 권의 공책을 가지고.
휴전선, 정음사, 1957
소묘 26 박봉우
소묘 26
병원의 아침은
건강한 신문이
기다려진다.
편지도,
얼굴들도,
마음 터놓고 찾아오지 못하는
정신병동엔
그리움만 머금는다.
나는 알면서
나는 몸부림하면서
광상(狂想)의 노래를,
광상의 노래를, 불러야 할
시인의 공화국.
병원의 아침은
건강한 편지가
우선 기다려진다.
휴전선, 정음사, 1957
수난민 박봉우
수난민(受難民)
상처입어 탄약의 흔적에 피가 넘치는
팔도 다리도 달아나고 눈알도 파편처럼
발화되어 달아난 이 어두움 속에
차라리 비가 나려 진창인 이 진흙길을
아늑한 봄의
따사한 붕대를 감아주려고
부드러움이 그지없이 상냥한 표정을 가지고
이렇게 소식없이 왔는가, 비둘기의 젖가슴인
사(四)월같이 왔는가.
우리의 조용한 마음 속의 도시와 세계는
모두 다 회색빛 폐가가 되어버리고
3등병실마저 아쉬운
끝없이 먼 벌판 같은 황량한 목숨은
그래고 꼭 한 번 사랑의 꽃씨를 뿌리며
살아보겠다는, 보다 눈물겨운 핏빛 호소.
전쟁에 울고 이그러진 가슴에……
붕대를 감아주려고 온 다사로운 너의 숨결
그것은, 겨울을 풀어헤치는 긴 강.
목을 베어버릴 만한 손도 마지막 빼앗긴
영토에게. 심연한 포옹과 사랑을 끝없이
노래부르려는,
아직도 울어서는 안 될 금빛 아침의 목숨.
무던히도 메마른 우리의 땅에
살고 싶은, 살고 싶은
비가 온다. 강이 언제나 푸르게 흐를 날은
상처 입은 가슴에 푸른 나무가 무성히 자랄 날이……
창같이 열려올 간절한 아침은 언제인가
시들어버린 폐가에 누구를 응시하는
당신의 눈. 당신의 눈은……
휴전선, 정음사, 1957
신세대 박봉우
신세대
헐어진 도시 또 헐어진 벽 틈에 한 줄기 하늘을 향하여 피어난 풀잎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봄, 봄, 봄인가 그렇지 않으면 가을을 말하는 것인가. 모질게 부비고 부비며 혼 있는 자세여.
강물도 흐르고 바람도 스쳐가며 나무들이 손짓하는 그리고 해와 별들도……이 영토 위에 조용히 오는 풍경. 살고 싶은 것이나 새롭고 싶은 것인가.
살벌한 틈사구니에서 모질게 부비고 부비고 피어나는 내 가슴의 휴전지대에서 너를, 너를 울리는 나. 나는 무엇인가.
바다. 너는 그 섬에서 노래를 들으리라 무엇을 의미하는 풀잎의 소리를. 한 포기 꽃이 제대로 피어나는 통일을 영토를 세계를……
헐어진 도시에 아직은 창. 창은 있는가 병들고 시들은 봄이나 가을이란 그런 계절이 우리는 없어도 고목 속에 이젠 피어야 할 너를, 너를 울리고 창을 향해야 하지 않겠는가.
휴전선, 정음사, 1957
악의 봄 박봉우
악의 봄
내 영혼이 시달리는
시가지에도
내 고독이 회색되어 가는
자유항에도 눈물 같은
봄은 내린다.
산과 공원과 포도 위의 가로수는
청색을 머금는데……
내 나무는 귀로에 서서
더욱 심야를 부른다.
울어도 끝없이 울어도
우리 가난한 시민을 위해
그 누가 보듬어줄 것인지……
내 영혼은
지치고 시달린 시가지에서
빛나는 아침 해를
안아보고 싶은데
자꾸만 의미를 잃은 계절이
나의 주변 가까이 와서
악의 꽃씨를 뿌리게 한다.
모든……
사랑한 체하는
입상(立像)들에게서 떠나고 싶은,
영원히 부드러운 무덤의
육체여, 음악이여, 바람이여,
나의 고요한 나무여……
휴전선, 정음사, 1957
언제나 우리 땅 박봉우
언제나 우리 땅
사랑을 기다렸다
너 하나만을 기다렸다
북풍이 부는 날
새벽
눈부신 햇살 앞에
너의 모습을 그렸다
고향 없는 사람아
사랑이 불꽃처럼 불탄다
북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녹슨 철로를 밟아본다
언제나 우리 땅
말이 없다
피흘린, 피흘린 자국이여
휴전선, 정음사, 1957
우리는 가슴이 아프다 박봉우
우리는 가슴이 아프다
남북으로 나누어진 지도
오래 되었다
새와
나비들은
백두산으로
한라산으로
가고오고 하지만
우리의 피맺힌 한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언제고 간에
벽이 무너지긴 하지만
우리는 지금
가슴을 앓고 있다
가슴을 앓고 있다
녹슨 철로 위에
햇살이 부실 때까지……
휴전선, 정음사, 1957
중립지대 박봉우
중립지대
내가 나를 미워하고 싶어졌을 때. 나를 믿었던 기쁨과 눈물과 외로움은 차라리 석상(石像)이 향하여 있는 풍경보다 못한, 강물 위에 띄워보내고 싶은 그러한 가랑잎 같은 것이었을까요.
내가 나를 미워하고 싶어졌을 때. 나를 위해 있었으리라고 믿었던 사랑도 당신도 또 오만 것도 차라리 높이 솟아 펄럭거리는 깃발보다 못하는 것이라고……잊은 채 살 수는 없었을까요.
내가 나를 미워하고 싶어졌을 때. 지난 날의 여전한 모습으로 도대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아요 꼭 그 무엇이 불어오지 않으면 커어다란 노도를 헤치고 몰려올 폭풍이라도 이제 나를 스쳐가야겠어요.
내가 나를 미워하는 것은…….사랑도 당신도 아닌 것 같은데 전운이 불고 간 폐허에서 한 톨의 꽃씨를 찾기 위해 나를 미워하는 것이라고 말해볼까요 그래도 미련처럼 내일도 미워질 수밖에 없으리라고 마음 아프게 믿어버리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휴전선, 정음사, 1957
지성을 앓고 있는 공동묘지 박봉우
지성을 앓고 있는 공동묘지
나는 공동묘지에 살고 있다
해와 별들의 체온을 가까이 누리며
슬피 울지도 못한
불행한 새 세대의 새라 이름하면 된다.
산을 넘으면 강.
강을 건너가면 또 산
나는 이런 공동묘지에서
대답이 없이 살고 있다.
불러도 오지 않는 도시. 장밀 곁에 두고
바람만이 바람만이 울고 가는 기슭의
희망을 위하여
나는 서러워도 살 수 있는
공동묘지에 살고있다.
나의 참신한 거처를 물으면
그저 공동묘지
번지를 말하지 않아도 좋을
공동묘지.
정신과에서
시수업을 하였다고
나를 몹쓸 놈이라고
어떤 처녀가 결혼을 배반해도
허어허 웃어버릴 수 있는 행복한
공동묘지에 살고있다.
그레도 끝끝내 나를
사랑하는 이 있다면
나의 가까이 있는 주점으로 오라
모두들 오라
나의 공동묘지의 노을빛 주점으로 오라
그리고 뜨거운 가슴의 이야기를 들어라.
`바이블'은 당분간 필요 없다.
은병(銀甁)을 들고 술이 넘치는
은병(銀甁)을 들고
나의 노을진 공동묘지에 오라.
오늘은 이 거칠은 중립지에
살고 있다는 기(旗)를 세우고
유배당한 세대의 찢어진 기(旗)를
펄럭이고 싶다.
나는 언제부터 이런 전운(戰雲)에 핀
공동묘지를 거처로 했는 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이 혹시 있다면
나의 살고있는 공동묘지에서
목이 터지도록 불러다오
나는 오늘도 잠을 못 자는
약보다 술이 없으면 더욱
잠을 못 자는 지성을 앓고 있는
정신병자.
이런 처참한
공동묘지에 살고있다.
도시의 장미가 시들 무렵
나를 더욱 처첨하게 불러줄
사랑하는 사랑할 뿐인
공동묘지의 창백한 얼굴들이
보고싶다.
통곡에 지친 묘지에
내 정신이 묻힐
내 이름이 죽을 묘지에
머언 먼 날 사랑이 넘칠 강이여
나는 지금 너희들이 오면 대답할 수 있는
공동묘지에서
신록같은 출발을 준비하고 있다.
지성들이 앓고 있는
우리들이 더욱 사랑할 수 있는 도시
공동묘지를 위하여
태양 같은 장미를 곁에두고 싶다.
餠占〉µ 피는 꽃나무, 백자사, 1959
지평에 던져진 꽃 박봉우
지평에 던져진 꽃
소슬한 바람이 불고 간다
꼭 시인대회라도 한번 했으면
좋을 나라
너는 사상을
너는 형식을
너는 운율을
너는 서정을
너는 조화를
너는 통일을
너는 노래하는
너는 생각하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시인대회를
광화문 네거리에서나
부산 도떼기 시장에서
한번 했으면 특등(特等)이 되겠는데
망할 놈의 시인대회는 없고
엉터리 시인들이 3백이고 5백이 되는
이 나라 풍경
제 조국은 좀먹어 들어가도
시인이라고 히히덕거리고
기묘한 정치들을 한다
망할 놈의 것 침이나 뱉고
고함이나 토하고
로타리의 몇 평되는 잔디밭에서 차라리
소월시집으로 가리고싶다
모든 것을 가리고 싶다.
황지의 풀잎, 창작과비평사, 1976
창문을 열면 박봉우
창문을 열면
창문을 열면
마음의 평화.
더 가까이 오렴
해가 솟는데, 해가 솟는데
멀리
산마루에서는
바람이 인다.
창문을 열면
마음의 평화.
거기에
나의 영원히
고독한 집이 있다.
휴전선, 정음사, 1957
창백한 병원 박봉우
창백한 병원
꿈과 동경에 그득 젖은
내 육신의 이파리들도
이젠,
가을의 병원을 찾는 시간.
가난한 가로수가 대열을 지은
밤이면 몹시도 그 가로수들이나마
사랑하는 이처럼 따뜻한 대화를 주는
이 길을 얼마쯤 가다 보면,
나는 양림교(楊林橋)에서 무엇을 잊은 듯이
서 있는 생각하는 낙엽.
여기 슬픔과 외로움이 있는 것
참으로 울고 싶은 가난한 마음아
둘이서 가는 것도 더 외롭지만
혼자서 가는 것도 외로운 길.
어디쯤이나 나를 사랑해줄 사람은
기다리고 있을까
바람에 이파리들이 무수히 날을 때
나는 나의 병원을 뚜벅 뚜벅……
걸어가야 하는 걸.
텅 빈 가슴에
진주알 같은 별들을 심어준
밤이 그리워
시월이 다가오는
귀뚜라미는
그렇게도 울어보았다.
가을을 위하여……
휴전선, 정음사, 1957
창이 없는 집 박봉우
창이 없는 집
어쩌자는 건가
괴로운 시대에
시인은 무엇을 하는 것인가
어둠이 깔리는
대지에 서서
별들에게
고향(故鄕)을 심는 것인가
어쩌자는 건가
어둠이 쌓이는
무덤가에 서서
시인은 무엇을 노래할 것인가
구름이 흘러가는 심중(心中)에
그래도 저항할 것인가
자유지대에서
괴로우며
시인의 혁명은
싹트는 건가
창이 없는 하늘에
남겨둔 꽃씨를 뿌리는 건가.
휴전선, 정음사, 1957
표정 박봉우
표정&
원숙한 것들 앞에서
원숙한 것들 앞에서
내 눈은
피로한 오후가 된다.
바람은,
나의 내실(內室)을
흔들고 가는 쓸쓸한 음악.
자살하고 싶은
사람들이
억지로 사는 도시엔,
화려한 외로움이
저녁 노을처럼
빗발치는 공휴일.
슬프고 아름다운, 행렬
행렬……속에서
시달린 이웃과, 얼굴들에서
나는
행복과 산다는 의미를
버린 오후가 된다.
휴전선, 정음사, 1957
해방 20년 1 박봉우
해방 20년 1
해방의 기쁨은
모란이 지듯
어느덧 가고
우리들에겐
금간 가슴이
조선사(朝鮮史)를
벽, 벽가게 하였다.
금강산으로
백두산으로 가는
철둑길은
이젠 녹슬고,
우리 형제들의 숨은 막혀
`돌아오지 못하는 다리' 너머론
여윈 아이들이 그대로
아카시아꽃 속에 묻혀
가위, 바위, 보
가위, 바위, 보
동심의 고향과
동심의 지도가
모란이 지듯 애처롭다.
휴전선, 정음사, 1957
해방 20년 2 박봉우
해방 20년 2
찔레꽃이 환히 핀
6월의 언덕은
피바다가 되고
모두들 봇짐을 싸고
남으로 남으로 쫓겨가는
기러기의 행렬, 행렬……
한강은
한강은 절단되고
임진왜란보다 더한 외국산 총소리
전차 소리가……
양보다도 순한
우리 백의(白衣)의 가슴에
눈물을, 끝없는 눈물을
적시게 하였다
6월은
온통 형제들의
피바다가 되고
죄없는
산과 들의
찔레꽃은
피먹은 선혈의 6월
아아 우리들은
눈물의 바다 속에서
모란이 지듯 가버린
우리들의 8월을
마음 가다듬어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불러보는 역사 속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었다
휴전선, 정음사, 1957
황지에 꽃핀 박봉우
황지(荒地)에 꽃핀
남과
북으로 나누어 산 지도
오래 되었다.
녹슨 철로 위에
진달래만
서글프다.
어떤 이는 절실히
통일을 부르짖고 갔지만
역사는 잔잔하다.
언제 서로 만나고
살 것인가
조국은 아프다.
오늘
우리가
서로 만나는 것은,
고향과 자유와 평화를
목마르게 부르짖는
절규다 진통이다.
나는 남
너는 북
양단된 가슴팍에
서로의 비극은 뼈아프다.
나비들은 나비들은
철조망을 오고가고 하는데
답답한 벽은
언제 무너질 것인가
누구의 힘으로 무너질 것인가.
한 핏줄
한 겨레가
온통 합창하는 날
남북이 서로 마음 터놓고 만나는 날……
녹슨 철로 위에
진달래는 훤히 피어 웃으리라.
그때 내 조국의 무덤 곁에
역사는 아지랑이같이 다시 피어나고
우리는 가난하게 산 것을
후회하지 않으리라.
휴전선, 정음사, 1957
황지의 풀잎 박봉우
황지(荒地)의 풀잎
언젠가는 터져야할
나의 혁명 앞에
나는 귀여운 잠고대를 한다
하나하나 저금통에 넣은
여러모의 얼굴들이
자기와 자유를 찾을 때
장엄한 깃발은 휘날리고
엄청난 행진곡은 시작되는 것
누구를 위해 죽을 순 없다.
나를 위해서도 죽을 순 없다.
녹슨 철로 위에
무성한 잡풀들의 철로 위에
나의 사랑은 빗발쳐야 하는 것
이렇게 사는 것을
용서받을 순 없다.
사형대 위에 사라지는 목숨일지라도
나는 어머니와 조국과
사랑의 손이 있는 것
언젠가는 터져야 할
나의 묵중한 혁명 앞에
목이 마른 황지(荒地)의 풀잎
목이 마른 황지(荒地)의 태양
내가 사는 땅이 있는 한
험악한 가시길이라도
더욱 굳건한 의지와 신앙으로
나는
나의 황지(荒地)에
조그마한 풀잎의 욕심으로
혁명을 모독하고
더욱 사랑하련다
혁명의 아침을……
황지의 풀잎, 창작과비평사, 1976
회색지 박봉우
회색지(灰色地)
나에겐, 나의 주변에서는
나를 애무해주는
그늘이라곤 없는 7월의 회색지(灰色地)가 있을 뿐.
음악과 회화와
그리고 육체의 썩어가는
조각에서 느끼고 싶었던 모든
의미들을
안개낀 머나먼 항만에
보내드리고 싶다.
슬픈 종일을 느끼게 하는 나를,
이 육체를
녹슬은 철조망의 사슬에
나비처럼 두고 싶은
불모의 영토가 있을 뿐.
시와
나의 순수우정과
모든 언어들의 주변에서 떠나
이역(異域)의 바닷빛 나의 기(旗)를
슬픈 대로 슬픈 대로 펄럭이고 싶은
불타는 야망이 있을 뿐.
`아아'
나는 왜 이렇게 소리질러야 하나
피가 나오도록 넘쳐 밀려 나오도록
소리질러야 하나.
세계의 가족
광장의 가족. 참으로 무의미로운
사랑할 줄 모르는
가족과 나에게……
애무의 그늘이라곤 없는
7월의 회색지(灰色地)와
갈망의 `눈'이 있을 뿐.
휴전선, 정음사, 1957
휴전선 박봉우
휴전선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동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 같은 정신도 신라 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던가.
모든 유혈(流血)은 꿈같이 가고 지금도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 아직도 정맥은 끊어진 채 휴식인가 야위어가는 이야기뿐인가.
언제 한 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같이 징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 번 겪으라는가 아무런 죄도 없이 피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를 더 살아야 하는가 아름다운 길은 이뿐인가.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동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휴전선, 정음사, 19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