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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 3인방
姜南求
1)
경인년(1170년) 8월 그믐, 전중성내급사 문극겸은 숙직이라, 성(省)에서 왕의 환궁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궁은 늘 자정이 넘어야 했다. 그날, 자정이 가까운 시각, 일단의 군인들이 성으로 들이닥쳤다. 난동을 부리고 날벼락이었다. 급히 도망쳤다. 하지만 붙들리고 말았다. 놈들이 물었다.
“복두(幞頭)는?”
“복두?”
“있어? 없어?”
머리를 만져보니 복두가 없었다. 그러자 다시금
“너, 문신이지지? 그렇지?”
하고 다그치며 방망이를 휘둘렀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왜 이러는 거요?”
“문신이야 아니야? 그것만 대!”
“문신이면?”
“문신이면 죽어야지! 잘 살았으니까.”
무신들이 난을 일으킨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사정하고 도망치고 할 일이 아니었다. 그때 ‘필사즉생(必死卽生), 행생즉사(幸生卽死)’라는 글귀가 떠올랐다. 그래서 대들었다.
“그렇소. 나는 전(前) 정언(正言) 문극겸이오. 주상께서 진작 내 말을 쫓았다면 어찌 오늘의 변이 있었겠소? 바라건대 어서 내 목을 베시오.”
그런데 일이 맹랑하게 전개되었다. 당장 죽일 듯이 덤비던 놈들이 그를 결박하여 그들 상관 앞으로 끌어갔다. 그런데 관은 그를 황성(隍城)에 가두게 했다.
황성에서 문극겸은 옥리로부터 보현원 행궁에서 왕을 호종하는 환관, 어사잡단, 지후, 태사령 등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킨 군인들이 개경으로 달려와 가구소(街衢所) 별장을 죽이고 궁으로 들어와 추밀부사, 사천감, 대부소경, 감찰어사, 내시지후, 태자궁 행궁별감, 천동댁(泉洞宅) 별상원까지 죽였다 것을 들었다. 놈들은 오른팔 소매를 빼고 복두를 벗는 것으로 약속하고 복두 쓴 사람은 문신이라 하여 죽였다고 했다. 그래서 복두를 물었던 것 같았다. 다음날 새벽 옥리는 간밤에 또 다시 판리부사 치사 최유칭, 판리부사 허홍재 등 50여 명이 죽었다고 전했다.
다음날 9월 초하루 술시(戌時), 반란자 상장군 정중부(鄭仲夫), 산원(散員) 이의방(李義方), 산원 이고(李高), 채원( 蔡元), 양숙(梁淑) 등이 중방(重房)에 모여 장차 일을 의논하였다. 9월 술시는 밤중이었다. 이고(李高)가 물었다.
“상장군께서는 왕을 어찌 하시렵니까?”
정중부는 의아했다.
“왕을 어쩌다니?”
이미 왕은 군기감에 갇힌 신세였다. 그 왕을 기어이 죽이려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대장군 양숙(梁淑)도 이고와 채원에게 왕을 시해하여 대역 죄인으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했었다. 그래서 정중부는
“대역죄인은 되지 말아야지요.”
하고 말했다. 그러자 이고가 말했다.
“그게 아니라, 새 왕을 세워야 하지 않느냐 그 말입니다.”
“그야 당연하지요. 그런데?”
“새 왕, 우리가 차지하자 그겁니다.”
“그래요?”
정중부는 잠시 수염을 매만졌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는 항상 그랬다. 젊은 시절, 해주(海州)에서 징집되어 개경으로 오자 재상 최홍재(崔弘宰)가 보고 범상하지 않다고 하여 공학군(控鶴軍)에 넣어준 그 수염이었다. 그 후 수염 때문에 왕을 가까이서 모시고 출세도 빨랐다. 그러던 인종 22년 그믐, 대궐 나례(儺禮) 행사에서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의 촛불에 타는 수모를 겪기는 했지만 당시 추밀원사 이공승, 교위 정중부, 그리고 왕의 폐첩 무비(無比)를 ‘고려 3학(鶴)’이라 했다. 무비(無比)는 어디에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미모로, 이공승과 정중부는 아름다운 수염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중부는 하급 장교 교위(校尉) 때, 산원(散員) 사직재(史直哉)와 함께 대궐로 불려가 격구를 하며 희마(戱馬)를 즐기기도 했다.
지금 왕으로 말한다면 정중부 그가 차지해야 했다. 나이나 직위로 당연히 그랬다. 하지만 이고와 이의방 등의 찬성이 있어야 했다. 그런대 결의형제를 맺은 이의방, 이고, 채원 등이 오히려 이의방을 추대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종7품 말단 무관의 신하가 되는 것이다. 상장군으로서 더 없는 수모였다. 이 또한 막아야 하였다. 이때 이의방이
“모든 문신을 제거한 마당에 어떤 놈이 반대하겠어?”
하고 말했다.
“그럼요!”
이고와 채원이 맞장구를 쳤다. 촉한(蜀漢) 소열제(昭烈帝) 유비(劉備)처럼, 채원, 이고 등과 결의형제를 맺은 이의방이었다. 이들은 왕을 그대로 유지하자는 정중부와 양숙의 의견을 거부하고 왕을 군기감에, 태자를 영은관에 가두었다. 불쾌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반란을 주도한 실세들이기 때문이었다.
지난 4월, 화평재 행궁(行宮)에서 2군 6위의 장군들 포섭해 달라고 청을 받을 때만 해도 상사였다. 그때 이의방과 이고는 산원 이하 모든 군사들이 거사키로 한다고 했다. 그런데 난이 성공한 지금 대등한 입장이 되어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 이상 실세라 할 수 있었다.
고려의 무신정변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67년 전, 현종 5년 상장군 김훈(金訓), 최질(崔質) 등이 여러 위(衛)의 군사를 거느리고 대궐로 들어가 중추원사(中樞院使) 장연우(張延祐)와 중추원 일직(日直) 황보유의(皇甫兪義) 등을 밀어내고 정권을 잡았던 것이다. 장연우와 황보유의가 거란전투에 나간 무신들의 영업전을 빼앗아 문신들에게 준 때문이었다. 그때 현종이 장연우와 황보유의를 제명하고 귀양을 보내는 바람에 무신들이 정권을 잡았다. 그런데 넉 달 후, 서경유수 이자림과 일직 김맹 등이 현종을 부추겨 무신정권의 김훈, 최질 등을 서경 장락궁(長樂宮)에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고 취기가 오르기를 기다려 연회장에 군사들을 불러들여 무신 인사 19명을 살해하여 무신정권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의방이 물었다.
“상장군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뭘?”
“새 왕 말씀입니다.”
그날, 화평재에서 정중부는 왕의 호위를 맡은 공학군, 용호군 지휘관의 사명을 유기하여 다섯 달 후 정변을 불러온 것이다. 반란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보현원 행궁에서 이의방과 이고가 왕의 측근을 살해할 때는 오히려 왕을 보필하고, 왕이 난을 그치게 명하자 네, 네 하고 쩔쩔맸다. 이고가 왕을 죽이려하자 제지하는 등 칼에 직접 피를 묻히지 않았다. 그러고도 지금 반란 3인방 우두머리가 되어있었다. 그런데 이의방이 왕이 되는 것은 막아야 했다. 그래서 입을 열었다.
“세상에는 대의명분이란 것이 있어요….”
그러자 이고가 당돌하게 물었다.
“대의명분이 뭡니까?”
(무식한 놈!)
정중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모르는 놈은 가르쳐 줘야했다.
“고려는 ‘용(龍)의 나라’, 고려왕은 반드시 태조의 후손이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자 다시 이고가 물었다.
“왕의 핏줄로 새 왕을 세우자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고작 그들에게 왕을 물리러 정변을 일으켰어요?”
“그건 아니지만…. 이웃나라도 무시할 수 없는 겁니다.”
정중부는 견룡행수 따위가 감히 맞먹자는 것 같아 불쾌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이웃나라?”
“옛날 이웃 거란은 강조(康兆)가 신하로서 목종을 시해했다 하여 고려를 침공했어요. 지금 금나라가 침공한다면 어쩔 셈입니까? 또, 전국 곳곳에서 대의명분을 내세워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르지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의방이 물었다. 정중부는 말했다.
“그 아우를 ….”
2)
9월 초이튿날 아침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은 왕의 아우 익양공 호를 모시고 대관전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인종이 이자겸의 두 딸을 내치고 들인 공예태후 소생에 전왕 현(晛) 외에도 둘째 대령후 경(暻), 셋째 익양후 호(晧), 넷째 평량공(平凉公) 민(玟), 다섯째 충희(冲曦) 등 다섯이 있어, 둘째 경(暻)은 전왕이 왕위를 넘볼까 하여 천안으로 귀양 보냈고, 다섯째 충희(冲曦)는 스님으로 출가하여 셋째 익양후 호(晧)로 세운 것이다. 그러나 이고는 끝내 왕에게 배신당한다 하여 반대했다. 정중부는 그런 이고를 설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 왕의 즉위를 금나라에 알려야 하는데 다른 사람을 세우면 금나라에서 그냥 있지 않을 것이므로 왕의 아우 익양공 호로 세워야 한다고 했다.
즉위식 후, 수문전으로 자리를 옮겨 대소신료 임명을 하기로 했다. 많은 문신들이 죽었으므로 빈자리를 메워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비목(批目)을 맡길 사람이 없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반드시 학문이 출중한 문신이라야 했다. 그런데 많은 문신들이 죽어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난처했다. 그때 이의방이 말했다.
“황성에 가둔 문신 하나가 있습니다만.”
황성에서 꼬박 하루를 갇힌 9월 2일 정오, 문극겸은 갑자기 들이닥친 한 무리 군인들에게 끌려 밖으로 나갔다. 초추양광은 눈을 뜰 수도 없었다. 이제 죽이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제 죽이려는 거요?”
하고 물었다. 그러나 놈들은 시키는 대로 할 뿐이라 했다. 가족들과 작별도 못하고 이대로 세상을 떠나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끌려가 보니 수문전(修文殿)이었다. 정언 때 몇 번인가 들렀던 기억이 있었다. 용상에 익양후 호(晧)가 앉고 그 아래로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이 둘러서 있었다.
순간 왕을 쫓아낸 무신들이 익양후 새 왕으로 세운 것이라 생각되었다. 이의방이 달려와 오랏줄을 풀어주더니 정중부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정중부가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문극겸은 지금부터 비목(批目)을 초(抄)하시오.”
하고는 왕을 향하여 말했다.
“전하-! 지금부터 신들이 대소 관료들을 추천하겠습니다.”
“그러세요.”
왕이 그렇게 대답했다. 이어 정중부와 이의방의 호명이 시작되었다.
“중서시랑평장사에 임극충(妊克忠)!”
정중부의 호명이 떨어지자 새 왕이 깜짝 놀라했다.
임극충은 모후 공예태후의 오라비, 새 왕과 전왕의 외숙이었다. 새 왕이 말했다.
“외숙께서 살아계셨군요?”
“그렇습니다.”
“문신이신데…?”
“문신이라 하여 모두 죽이지 않았지요.”
사실 임극충은 전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문신 중의 문신이었다. 술만 취하면 임극충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곤 했었다. 새 왕이 말했다.
“워낙 고령이시라….”
그러자 이의방이 말했다.
“그래도 그 분만한 동량도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과인, 그저 고맙습니다.”
왕이 화답하였다. 뒤를 이어 참지정사에 승선 노영순(盧永醇), 대장군 양숙(梁淑), 상장군 정중부(鄭仲夫) 등이 호명되었다. 노영순(盧永醇)은 내시(內侍)로 입조하여 합문지후(閤門祗候) 때 병부낭중 김장 등과 함께 동북면과 춘주도에 횡행하는 도적을 토평하여 승선(承宣)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다음으로 추밀원사(樞密院事)에 한취(韓就),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에 윤인첨(尹鱗瞻), 복야(伏射)에 김성미(金成美),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김천(金闡), 좌승선(左丞宣)에 이준의(李俊義) 등이 호명되었다. 이준의(李俊義)는 곧 이의방의 형이었다. 그리고
“우승선(右丞宣)에… 문극겸!”
하는 호명이 있었다. 순간, 문극겸은 붓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러자 이의방이 말했다.
“내가 천거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럼,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용서?”
“문신은 죽어야하지 않습니까?”
“그렇소. 문신의 씨를 없앨 작정이었소. 하지만 전왕의 핍박을 받은 그대를 살려주기로 했소.”
이의방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문극겸은 자리에서 일어나 큰 절을 올렸다. 모두들 한 바탕 웃었다. 새 왕도 웃었다. 이번 경인년(庚寅年) 반란에 문신으로 화를 면한 사람은 추밀원사 임극충(任克忠), 추밀원부사 이공승(李公升), 내시합문지후 노영순(盧永醇),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문극겸 등 몇몇이었다.
임극충(任克忠)은 인종비(仁宗妃) 공예태후의 오라비, 노영순(盧永醇)은 무인가(武人家) 출신으로 동북면(東北面)과 춘주도(春州道) 도적 토벌 때 병가(兵家) 인사들과의 친교가 있었지만 이공승과 문극겸은 아무 이유가 없었다.
3)
이공승은 금년에 일흔하나, 문극겸은 마흔여덟으로 스물세 살 차, 부자 사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공승은 인종 조에 과거에 합격하고, 문극겸은 전왕(의종) 때 백부(伯父)의 음서로 나간 산정도감판관(刪定都監判官)으로 과거시험을 보았다. 이공승은 딱 한 번에 급제하고 문극겸은 내리 세 번을 낙방하였다. 당시 남삼(藍衫) 관리로 세 번 낙방하면 더 이상 과거를 볼 수 없었다. 그런데 문극겸은 관직에 있지 않은 사람도 열 번을 응시하는 마당에 남색 괘자 관리라 하여 세 번으로 제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상소를 올려 다섯 번으로 제도가 바뀌어 합격할 수 있었다.
이공승과 문극겸은 둘 다 전왕(毅宗)과 사이가 나빴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공승은 12년 전 59세 때 중승 송청윤(宋淸允), 시어사 오충정(吳忠正)과 함께 왕에게 불려가 환관 정함(鄭諴)의 권지각문지후(權知閣門祗候) 고신(告身=임명)의 서명을 요구받고 거절하였다. 그 3년 전에도 왕(毅宗)이 유모의 공에 보답하려고 유모의 남편 환관 정함을 권지각문지후에 명하고 서명을 요구하였다. 그때 신하들이 환관으로 조신반열환관옼른 전례가 없고, 또 정함의 선조가 태조대왕의 명을 거슬린 천예(賤隸)라 하여 반대했지만 이공승은 서명을 했다. 그런데 3년 후 다시 서명을 요구하면서 왕은 만약 거부하면 모두 죽여 젓(醢)을 담을 것이라 했다. 그래서 모든 신하들은 서명을 하는데 이공승 홀로 따르지 않았다. 왕이 까닭을 묻자 잘못된 것을 알았으므로 받들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자 왕이 노하여
“너 이공승! 당장 집으로 돌아가라!”
하고 명했다. 이를 두고 고려사절요는 ‘이날 태양에 빛이 없었다.’고 적었다. 그 후 모든 신하들이 간곡히 간하여 다시 직무를 보게 되었지만 서른한 살 젊은 왕이 쉰아홉 노인에게 취할 예가 아니었다.
문극겸의 충돌은 그 6년 후, 계미(癸未)년 8월이었다. 당시, 마흔 한 살 혈기 왕성한 정언 문극겸은 잔치를 나가는 왕의 행차를 막고 소를 올려 ‘총신 환관 백선연(白善然)이 무시로 궁(宮)을 드나들어 궁인 무비(無比)와 놀아나고 술객(術客 점장이) 영의(榮儀)는 왕의 복을 빈다며 백순(百順) 관북(館北)의 두 궁을 지어 발령 받아 대궐로 인사를 오는 양계(兩界)의 병마사, 5도(五道)의 안찰사들을 궁으로 청하여 송별연을 열고 방물(方物)을 바치게 하여 방물의 다소로 전최(殿最=근무 성적)를 삼아 병마사, 안찰사들의 가렴주구로 백성들 원성이 높으니 백선연과 무비를 목 베고, 술사 영의를 내쫓아 말 먹이는 하인으로 삼으라.’고 했다. 왕이 노하여 소장(疎狀)을 불태우고 문극겸을 밖으로 내쳐 이후 고향 공주로 낙향했다가 다시 황주판관, 진주판관 등으로 7년을 떠돌았다. 그러던 지난 3월,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 궁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수문전에서 대장군전중감, 대장군위위경 등으로 신분이 상승된 이의방과 이고는 다시 군사들을 이끌고 전왕이 총애하는 환관 백자단(白子端), 왕광취(王光就), 술사 영의(榮儀) 등을 잡아 목을 베어 저잣거리에 높이 달았다. 그리고 왕을 믿고 교만방자하게 굴던 문신들을 잡아들였다. 전 병부낭중(兵部郞中) 진윤승(陳允升)에게 사람을 보내 거짓으로 ‘왕이 먼저 입궐하는 사람에게 승선(承宣)을 임명한다.’하여 대문을 나서자 죽여 가슴에 큰 돌을 얹었다. 지난날 진승윤이 진관사 남쪽 노인성사당(老人星祠堂) 공사 감독 때 군졸들이 날라 온 돌을 반드시 저울로 달아서 받은 보복이었다. 또 전왕(毅宗)이 거만(鉅萬)의 재물을 쌓아둔 관북댁(館北宅), 천동댁(泉洞宅), 곽정댁(藿井宅)을 빼앗아 셋이 나누었다.
정중부는 이쯤에서 머물러야 한다 생각하여
“크게 잘못이 없는 문인들은 살려두어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날지도 모르오."
하고 제지했다. 그러나 이의방과 이고는
“반란의 싹은 처음부터 깨끗이 잘라야 합니다."
하고 듣지 않았다. 모든 문인들을 죽이고 나면 자문할 곳이 없었다. 또 당장 금나라에 사신도 보내야 했다. 사신은 반드시 문신이라야 했다.
정중부는 이제 실질적 1인자가 되고 싶었다. 이의방과 이고가 정신없이 문신들을 주륙하는 틈에 금나라와의 관계개선을 통하여 실질적 1인자가 되는 것이었다. 이의방과 이고를 제거하는 것은 그 다음이었다.
논공행상 며칠 후, 정중부는 서둘러 문극겸을 찾았다. 그런데 열 살 정도 연하였지만 의지할 곳은 오직 문극겸이었다. 정중부는 말했다.
“우승선. 상국 금나라에 새 왕의 즉위를 고하는 사신을 보내려고 합니다. 선린의 예의를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상장군.”
문극겸은 깍듯이 예의를 차렸다. 누가 뭐래도 이웃 금나라를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반세기전 현종(顯宗) 때, 세 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공 명분은 목종(穆宗)을 시해한 강조(康兆)의 응징이었다. 당시 강조의 목종 시해나 이번 전왕의 폐위는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송나라와 대치하는 상황이긴 하지만 금나라가 군사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정중부는 문극겸에게 말했다.
“마땅한 사신을 천거해 주시고, 아울러 황제에게 올리는 표문도 부탁드립니다.”
“상장군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문극겸은 즉시 공부낭중(工部郎中) 유응규를 천거하였다. 금년에 서른아홉 젊은이였다. 과거에 세 번을 낙방하고 음보로 내시에 들어와 그간 남경(南京) 유수, 합문지후(閤門祗候) 등을 역임하고 공부낭중으로 있었다. 특히 그와는 과거시험에 세 번을 낙방한 동병상린이 있었다. 사신은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야 한다는데 유응규는 풍채가 아름답고 언변도 좋았다. 붓을 들어 바로 표문을 썼다. 하지만 왕을 쫓아냈다고 할 수는 없어 아래와 같이 썼다.
「신(臣)의 형 현(晛)이 오랫동안 주나라 왕실(金)을 높이 받들고 즐거이 번국(漢藩)의 도리를 따르다가 중년에 병이 들어 이름난 의원도 손을 대지 못하고 여러 해를 신음하다가 근자에 나라를 보전하고 책임에서 벗어나 여생을 보전하려고 선왕(인종)께서 체대(遞代)하게 되면 동생에게 하라는 유언을 따라 동모제 신(臣) 호(晧)에게 임시로 군국의 사무를 맡아보게 하셔서 신(臣), 회피할 계책도 없고 진실로 받기도 어려워 대국(金)에 호소하려 했지만 산천의 길이 더욱 멀고, 번국 백성의 주인으로 종묘를 지켜오다가 이제 사실을 갖추어 황제께 진달하는 바입니다.」
한 달 후 시월 초엿샛날, 정중부는 공부낭중 유응규(庾應圭)에게 표문을 주어 금(金)나라로 보냈다. 그리고 전왕은 거제현(巨濟縣), 스물여덟 태자 홍(泓)은 진도현(珍島縣)으로 추방하고 생후 넉 달의 태손은 죽여 없앴다. 전왕이 늦둥이 탄생을 기뻐하여 금나라에 사신까지 보내려 하던 태손이었다. 그때 금나라에서 축하할 일이지만 번거롭게 사신까지 보낼 것은 없다하여 무산되었지만-.
이날 정중부는 또 무비(無比)에게 전왕을 따르게 했다. 그간 청교역(靑郊驛)에 숨었다가 붙잡힌 것을 공예태후 간청으로 죽이지 않고 두었던 것이다. 왕은 전국에 크게 사(赦)를 내리고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을 벽상공신에 봉하여 화상을 공신각에 걸게 했다.
한편, 고려를 떠난 유응규는 금나라 국경에서 관리에게 체포되었다. 금제(金帝) 세종(世宗) 완안옹(完顔雍)이 파사로(婆娑路)에 조서를 내려 진상을 조사케 한 것이다. 금제(金帝) 앞에 불려간 유응규는 시종일관, 전왕이 오랜 병으로 정신이 흐리고 기력이 쇠하여 동복아우 호(晧)로써 나랏일을 임시로 대행케 했다고 되풀이했다. 그러나 금제는
“나라를 물리는 중대한 일을 어찌 사전에 보고하지 않았느냐? 너의 나라가 비록 작지만 예를 알 것인데 형을 폐위시켜 왕위를 빼앗고 허위로 말을 꾸며 상국을 속이려 하느냐? 내가 하늘을 대신하여 주벌할 것이다.”
했다. 하지만 유응규는 표정하나 흩트리지 않고
“아닙니다. 전왕께서 질병이 있고 또 아들이 현명하지 못하여 부왕의 유명으로 아우에게 왕위를 넘겼습니다. 어찌 천자를 속이겠습니까? 배신(陪臣)이 비록 탕확(湯鑊)과 부월의 주벌을 받는다 하여도 다시 다른 말은 없습니다.”
하고 조아렸다. 이런 유응규에게 금제가 아래 봉서를 주어 고려로 돌아가게 했다.
「근래에 사신을 보내지 않아 혹시나 변고가 있는 것이 아닐까 했는데 봉장(封章)에 병이 오래 끌어 다스리는 일을 오래 궐(闕)하는 것이 두려워 아우에게 나라 일을 대행케 했다지만 믿을 수 없으니 뒤에 사신을 보내 다시 묻겠다.」
그러나 유응규는 듣지 않았다.
“배신은 새 왕의 표문 회답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사신의 직책은 왕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고 궁을 향하여 서서 해가 지고 밤이 되어도 음식도 먹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3일째 되는 날 관반(館伴)의 보고를 받은 황제가 사람을 보내 먹게 하는데도 듣지 않았다. 밤에 수종하는 사람이 먹을 것을 갖다 주자
“너도 사람일 텐데, 어찌 간사하기가 이다지 심한가?”
하고 꾸짖었다. 닷새 째 되는 날, 안색이 파리해지며 자꾸 쓰러졌다. 보고를 받은 황제가 사람을 보내
“너의 나라가 비록 작으나 그대 같은 신하가 있어 짐이 문죄를 중지하고 윤허의 조서를 내리려 하는 바이니 너 또한 음식을 먹고 생명을 손상치 않게 하라!”
했다. 그러나 유응규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만 배신, 회답의 조서를 받지 않고는 감히 먹을 수 없습니다. 폐하의 조서를 받는 날이 곧 신의 생명을 잇는 날입니다.”
했다. 그리고 이틀이 더 지난 7일째, 윤허의 조서와 어찬(御饌), 폐백이 내렸다.
4)
유응규가 금나라에 머무르는 사이, 정중부는 이공승(李公升)·서공(徐恭) 등을 기용하여 국정을 묻고 문극겸에게 용호군(龍虎軍) 대장군으로 명하여 문신으로 무신의 일을 보게 했다. 그리고 언제일지 모르는 그날을 위해 누구든 친하게 지냈다. 특히 대장군 한순(韓順), 장군 한공(韓恭), 장군 신대여(申大與), 장군 사직재(史直哉), 장군 차중규(車仲規) 등과 가깝게 지냈다. 이리하여 ‘이의방과 이고가 조정 신하들을 함부로 죽이고 있으니 의(義)가 아니다’는 여론을 조성했다. 이를 알게 된 이의방은 새 왕 원년 정월, 한순, 한공, 신대여, 사직재, 차중규 등을 일망타진하여 모조리 죽였다. 다만 차중규는 너무도 친한 사이여서 목숨을 살려 귀양을 보냈다.
정중부로서는 이이제이(以夷制夷)였다. 하지만 섬뜩한 했다. 이때 또 대장군 위위경 이고가 법운사, 개국사 중들과 결탁하여 여정궁 태자의 관례식에 참석하는 이의방을 죽이려다 발각되어 이의방과 채원에게 주륙되었다. 그리고 4월, 채원과 그 문객들이 이의방에게 살해되었다. 채원이 조정 신하들과 이의방을 제거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정중부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관북택(정중부의 집) 문을 닫고 들어앉았다. 다음 차례는 자신이라 생각되었다. 이때 사위 송유인과 아들 정균이 찾아와 이의방 타도를 부추겼다. 그러자 정중부는
“아차하면 죽어! 조신하고 기다려-.”
하고 나무랬다. 바로 다음날 이의방이 형 이준의와 함께 술과 안주를 들고 정중부를 찾아왔다.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날 이의방 형제는 정중부와 부자의 의를 맺었다 했다. 그런데도 정중부는 관북택에 들어앉아 왕과 공예태후의 눈치만 살피며 살았다. 이처럼 신중했다. 그러던 새 왕 원년 5월, 유응규가 돌아왔다. 작년 10월 고려를 떠나 반 년만이었다. 그리고 다시 이듬해 새 왕 2년 정월, 정중부는 판동북면병마사, 정중부 사위 송유인은 서북면병마사에 올랐다. 부자 의를 맺은 이의방 덕이었다.
국내사정은 여전히 혼란하기만 했다. 서북면 창주(昌州)에서 지방 수령의 애기(愛妓)를 죽이고, 성주(成州)에서 관내 삼등현(三登縣) 존폐문제를 의논하다가 반대파 수십 명이 죽고, 철주(鐵州)에서 그 장리(長吏)를 죽이려 하다가 서로 죽이고 죽었다. 그러자 사위 송유인이 병을 핑계로 체대를 청하였다. 잘못하다간 죽을 것 같았던 것이다. 정중부는 송유인 후임으로 금오위(金吾衛) 대장군(大將軍) 우학유(于學儒)를 천거했다.
반역 직후 이의방과 이고에게 죽을 번한 우학유(于學儒)였다. 반란을 계획한 이의방과 이고가 군사의 주모를 부탁하여 찾아갔다가 거절당한 보복이었다. 당시 우학유는 “무관이 문관에게 굴욕을 당하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문관이 해를 당하면 무관에게도 해가 미치므로 삼가라.”는 선고의 유언 때문에 거절한 것이었다. 그때 정중부는 우학유로 하여금 이의방의 맏누이에게 청혼케 했다. 그리하여 목숨을 건졌다. 사위 송유인도 출세를 위하여 본처를 귀양 보내고 그의 딸에게 청혼했던 것이다. 정중부는 문극겸에게도 이의방의 동생 이린(李隣)에게 딸을 출가시킬 것을 권했다.
새 왕 2년 5월, 금나라 세종은 태부감 오고론중영, 한림직학사 장향 등을 고려로 보내 새 왕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고려국왕(高麗國王)>에 봉하고 면복(冕服), 금인(金印), 상로(象輅), 안마(鞍馬), 필단(匹段), 궁시(弓矢) 등을 내였다. 새 정부를 승인한 것이었다. 물론 유응규의 공이었지만 문극겸과 정중부의 공이기도 했다.
이때 국내사정은 여전히 혼란했다. 새 왕 3년 정월, 귀법사 승려 수천 명이 이의방을 죽이기 위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이의방은 폭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3월, 그의 딸을 태자비로 들여보내 권세를 오로지 했다. 그러던 8월, 동북면병마사 간의대부 김보당이 군사를 일으켰다. 정중부와 이의방을 토멸하고 전왕을 복위 시킨다는 명분이었지만 그해 9월 이의방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이의방은 다음 달 10월, 경주로 이의민을 보내 전왕을 죽이게 했다. 그냥 두었다가는 반란의 소지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김보당 신국(訊鞫) 과정에 ‘모든 문신들이 같이 모의하지 않는 자가 누가 있겠느냐’는 이야기가 나와 다시금 문신들을 잡혀죽는 경신(庚申)의 난이 일어나 10일 사이 많은 문신들이 살해되었다. 이때 문극겸은 딸을 이의방의 아우 이인에게 출가시킨 덕분에 화를 면하였다. 정략결혼을 권한 정중부가 고맙기만 했다. 김보당의 난 평정 후 이의방 천하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다음해 새 왕 4년 9월,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이 군사를 일으켜 연주성(延州城)을 제외한 절령(岊嶺) 이북 40여 성이 호응했다. 역시 정중부와 이의방 타도가 명분이었다. 장군 윤인첨, 이의민, 정중부 아들 정균 등을 보내 토벌에 나섰다. 하지만 반군의 기세는 만만치 않았다. 이의방은 그해 말,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전개했다. 조위총 난을 평정하면 천하는 완전히 이의방에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정중부는 설자리가 없었다. 이의방 제거가 급했다. 그해 12월 초, 조위총 진압군을 독려하기 위하여 선의문을 나서는 이의방 뒤를 승병 하나가 따랐다. 이의방이 돌아보며 물었다.
“뭔가?”
“비밀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그럼 따라와!”
성큼성큼 걷는 이의방을 따르던 승병이 갑자기 철퇴를 내리쳤다. 정중부 아들 정균(鄭筠) 휘하의 승병 종참(宗旵)이었다. 이의방을 제거한 정중부는 이의방의 형 이준의, 심복 고득원 등을 죽이고, 태자비 이의방의 딸을 폐출시키고 바로 문하시중에 올랐다. 이의방에게 눌려 6년을 기다린 끝에 아들 정균, 사위 송유인으로 하는 새 3인방 천하를 연 것이다.
이듬해(왕 5년) 5월 병신일, 정중부는 전왕을 장사하지 않는다는 조위총의 명분을 수용하여 전왕(毅宗)의 상사를 발표하였다. 모든 관원들에게 3일 동안 검은 갓에 흰옷을 입으며, 내시 10명으로 장사를 호행케 하고 능을 희릉, 시호를 장효(莊孝), 묘호(廟號)를 의종(毅宗)이라 했다. 그 후 여전히 조위총이 날뛰는 가운데 새 왕 6년(1176년) 정월, 공주의 명학소에서 남적(南賊) 망이·망소이 형제가 반란을 일으켰다. 다행히 정중부 타도는 아니고 관료들의 수탈에 대한 항의였다. 그런데 시중에 ‘남적(南賊)의 근원은 정중부와 그 아들 승선 정균, 그리고 사위 송유인의 방자한 횡포 때문이니 남적을 제거하려면 반드시 먼저 이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대자보가 나돌았다.
정중부는 놀랐다. 당장 자객이 달려들 것 같았다. 그래서 한동안 아들 정균과 함께 두문불출했다. 그해 6월,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고 다음해(1177년) 7월, 망이·망소이의 남적까지 진압되자 정중부는 이듬해 새 왕 8년(1178년) 11월, 사위 송유인, 아들 정균에게 권력을 물리고 2선으로 물러났다. 이미 칠십이 넘은 나이였다.
그런데, 이듬해(1179년) 아들 정균이 공주에게 혼인을 청하여 왕이 난처해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미처 만류할 겨를도 없었다. 그해 대궐에서 장경법회가 끝난 다음날 새벽 9월 3일, 수하 하나가 관북택으로 달려왔다
“큰일 났습니다, 합하! 지성도사(知都省事)께서 ….”
정중부는 깜짝 놀랐다. 지성도사는 정균의 직함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균(筠)이?”
“합하! 대궐에서 숙직 중….”
아들 정균이 숙직 중, 견룡군 허승에게 살해되고 궁중을 장악한 경대승의 30명 결사대가 지금 이리로 오고 있다고 했다. 하늘이 노랬다.
“전하가?”
왕이 경대승에게 밀지를 내린 것 같았다. 문득 10년 전, 왕의 배신을 염려하던 이고(李高)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중부는 다급히 민가로 도망치다가 뒤따라온 경대승의 결사대에 잡혀 송유인과 함께 살해되었다. 반란 3인방 최후 1인자 정중부는 이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반란 10년만이었다.(끝) 참고도서 : 고려사절요.
본명, 강종홍(姜宗弘). 진주사범 졸업(59년). 소설 등단(58년, 嶺文). 수필 등단(09, 월간수필문학).
저서 : 백두대간 답사기 12권(02년, 正岩).
현재, 하늘소산악회 회장, 남강문학회 회원,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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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필이 아니고 소설임
문신이지지?→문신이지?
그런대→그런데
복야(伏射)→복사(伏射)
조신반열환관옼른→조신반열환관에 오른
섬뜩한했다 →섬뜩했다
문신들을→문신들이
지성도사(知都省事)께서→지성도사(知省都事)께서
예, 선생님~^^ 고맙습니다. 수정했습니다.
반란 3인방
정신없이 읽었습니다
너무 재미있고
고려의 역사에 폭 빠져 헤어나오는데 한참 걸렸습니다
강남구형의 소설은 늘 이래요
사람을 정신도 못차리게 만드는 ..........
참 멋진 소설 오랜만에 읽었습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건강하십시요
안병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