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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묘갈명(墓碣銘)
姜 南 求
스승은 읍성 아래 마현촌(馬峴村)의 초가에 계셨다. 집 뒤쪽으로 장기읍성(長鬐邑城)을 따라 병풍을 두른 울창한 대숲이 바닷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2월 초순 날씨는 아직도 쌀쌀했다. 마침 스승의 아우 송시도와 송시걸, 아들 송기태, 손자 송주석, 그리고 어린 증손들까지 찾아와 있었다.
“장기(長鬐)가 어디라고 이렇게 찾아와?”
스승이 물었다.
“진작 찾아뵈어야 하는데 늦었습니다.”
“아니야. 그런데 한양은 아직도 고묘(告廟) 문제로 시끄러운가?”
“아닙니다. 진작 끝났지요.”
“모를 일이지. 옛날 문정공(文正公)은 부처(付處) 끝에 끝내 사사하지 않았던가?”
문정공(文正公)은 능주로 귀양 갔다가 끝내 사약을 받은 정암 조광조였다.
“그때는 옛날이지요.”
“옛날과 지금이 무엇이 다른가?”
스승은 자못 신경이 쓰이는 것 같았다. 스승이 이곳 장기(長鬐)로 부처된 것은 인선대비의 상례 때문이었다.
2년 전(1674년) 2월, 인선대비께서 세상을 떠났다. 이때, 자의대비 조(趙)씨가 입을 복색논쟁이 있었다. 예기(禮記) 상례(喪禮)는 부모의 상에 3년 참최복(斬縗服), 아들의 상에 장자(長子) 3년 참최복(斬縗服), 중자(衆子) 이하는 1년 기년복(朞年服), 자부상(子婦喪)의 상에 장자부(長子婦) 1년 자최복(齊縗服), 중자부(衆子婦) 이하는 9월 대공복(大功服)이었다. 경국대전 국제(國制)의 경우는 약간 달리, 아들의 상에 장자(長子) 중자(衆子) 구별 없이 1년 기년복, 자부상(子婦喪)의 상에 장자부(長子婦) 1년 자최복(齊縗服), 중자부(衆子婦) 이하는 9월의 대공복(大功服)이었다.
자의대비 조씨는 인조가 본부인 사후에 맞이한 계비로 인선왕후의 연하 시어머니였다. 결혼 당시 14세로 인조의 29세 연하, 소현세자, 봉림대군보다도 어렸으며 22세 때 소현세자가, 26세에 인조가, 36세에 효종(孝宗)이 세상을 떠나고 효종 별세 14년 후 효종의 비 인선왕후의 상을 당한 것이었다.
14년 전 효종 상에도 역시 자의대비의 복색논쟁이 있었다. 당시 우암의 서인은 효종을 중자(衆子)로 보고, 윤휴와 남인은 효종이 왕위를 이었기에 장자(長子)로 보았는데 남인 윤선도는 송시열을 종통(宗統)과 적통(嫡統)으로 따져 종사를 어지럽히는 역적이라 했다. 그러자 서인들이 윤선도의 처단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때 현종은 윤선도를 갑산(甲山)으로 귀양 보내고 논쟁을 마무리했다. 인조반정 이후 모든 왕들이 그랬듯 현종 또한 서인들을 제어할 수 없었다. 서인 송시열의 승리였다.
인선왕후 상ml 복색논쟁도 같은 맥락이었다. 우암의 서인은 효종이 차남(衆子)이므로 인선왕후를 중자부(衆子婦)의 예에 따라 9월 대공복(大功服)을, 윤휴와 남인 휴옹(休翁) 허적(許積)은 장자부(長子婦)로 보아야 한다며 1년 기년복을 주장했다. 그런데 처음 기년복을 건의한 예조가 사흘 후 대공복으로 보고했다. 그러자 현종은 갑자기 예제를 바꾼 예조판서를 해임하고 외사촌 김석주에게 전말을 조사케 했다. 이때 김석주는 우암이 효종을 차남으로 본 것이라 했다. 그러자 현종은 서인 송시열, 김수항, 박세채 등을 귀양 보내고 허적, 허목, 윤휴 등 남인들을 기용했다. 이번에는 윤휴의 승리였다.
우암과 아버지, 백호 윤휴의 셋은 처음 서로 가까이 지낸 사이었다. 청나라에 대한 복수설치를 꿈꾸던 병자호란 직후에 만나서 10여 년을 그렇게 지냈다. 그러다가 우암이 윤휴의 글을 두고 사문난적이라 매도하면서 사이가 나빠졌다. 윤휴는 주자의 학설에 이설(異說)을 제기한 것이 아니고 의문점을 적은 것으로 비록 주자의 직접 제자라도 의문점을 두고 뇌동(雷同)할 수 없는 것이다.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 혼자만 아느냐. 공자가 살아서 돌아오면 자기의 손을 들어 줄 것이라 했다. 우암은 아버지에게 윤휴와 절교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는 사이 효종의 상에 적용할 자의대비 복색논쟁에서 윤휴는 우암과 견해를 달리하였다가 패했다. 아버지는 윤휴를 허목의 무리와 투합하여 뜻을 잃었다고 책망했지만 우암은 윤휴 문제로 아버지와 몇 번의 언쟁이 있었다. 그러다가 아버지 별세 5년 후, 인선왕후 상사의 복제논쟁에서는 윤휴가 승리하여 사헌부 지평으로 입조(入朝)했다. 그러나 윤휴는 운이 따르지 않았다. 윤휴의 평생 꿈은 북벌이었다. 입으로 북벌을 말하는 우암과는 달라, 그해 7월, ‘북벌 대의소’를 올렸다. 1만 대의 조선 정병이 북경으로 진격하고, 대만과 연주, 계주, 요하 이북의 모든 지역과 서촉까지 격서를 보내 함께 떨쳐 일어나게 한다면 천하의 기운을 격동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 전해(1673년) 11월의 운남 번왕 오삼계의 반란은 더욱 고무적이었지만 두 달 후 9월 중순 현종이 세상을 떠나면서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하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그해 12월, 다시 숙종에게 ‘복수설치(復讐雪恥)’ 북벌상소를 올렸다. 그런데 숙종은 화(禍)를 부르는 말이라며 영의정 허적(許積)과 예조판서 권대운에게 뜻을 물었고, 허적은 지금 사세와 힘으로는 미칠 수 없으니 마음에만 둘 뿐이라 했는데 권대운(權大運)은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큰소리하기 좋아하는 자라 하여 무산되었다. 다음해(1676년) 3월의 ‘3복(三福) 사건’도 그랬다. 숙종의 외조부 김우명(金佑明)이 현종의 4촌 복창군 3형제를 궁녀와 통간했다 하여 고발한 것이 무고로 밝혀져 김우명에게 반좌율(反坐律)이 결정되었다. 그런데 그날 밤, 숙종의 어머니가 왕과 대신들 앞에 소복차림으로 나타나 대성통곡을 하며 친정아버지 김우명의 구명을 청했다. 이때 허목은 왕후에게 사사로운 정을 버리기를 청하는데 윤휴는 숙종에게 왕후의 조관(照管)을 청하여 눈에 나고 말았다. 이리하여 이후 윤휴가 올린 호포법과 상평제, 전정의 개혁, 북벌을 위한 도체찰사부 설치, 전차 제조 등이 모두 거부되고, 4년 후 1680년 5월 그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허적의 유악(帷幄) 사건’에 말려 갑산으로 유배되어 사사되고 말았다.
아버지 현종을 이어 즉위한 숙종은 우암에게 아버지의 행장(行狀)을 맡기며 효종과 인선대비의 상에 예제를 잘못 적용한 사실을 써넣게 했다. 예송논쟁을 보면서 생각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우암은 두 조정의 죄인에게 지문(誌文)을 맡길 수 없다는 유생 곽세건의 상소를 핑계로 행장을 제자 이단하에게 맡기고 비껴가고 스승의 잘못을 차마 바로 적시할 수 없는 이단하가 행장을 두루뭉술하게 서술하자 숙종은 여러 번을 고치게 하여 ‘송시열(宋時烈)의 소인례(所引禮)’를 이끌어내고는 송시열(宋時烈)의 소인례(所引禮)를 ‘송시열(宋時烈)의 오인례(誤引禮)’로 고치게 하여 죄인으로 만들었다. 남인 허목, 이원정, 윤휴 등이 그런 우암의 오인례(誤引禮)를 종묘에 고하는 고묘(告廟)를 하자고 했다. 고묘(告廟)의 죄(罪)는 사사(賜死)를 면하기 어려운 죄였다. 하지만 ‘전왕의 사부를 죽일 수 없다.’는 영의정 허적의 고집으로 죽음을 면하고 함경도 덕원에 유배되었다가 반년 후, 다시 장기로 이배된 것이다.
대숲을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옛날 없는 지금이 있을 리 없지. 그런데….”
스승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묘갈명 말인데….”
명재는 깜작 놀랐다. 지난 3년 동안 묘갈명 문제로 여러 차례 서찰(書札)을 주고받으면서 번번이 이리저리 둘러대던 스승이 스스로 묘갈명 이야기를 꺼낸 때문이었다.
“저번에 보내준 것은 내가 앓을 때 대략 쓴 것이라 정본(定本)은 아닐세. 그러니 행장(行狀)을 인용한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시 고쳐 주겠네. 온당한 글자를 정확히 일러만 주게. 비록 열 번을 고친들 무엇이 해롭겠는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할 줄 모르는 우암이 이렇게 변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어쩌면 박세채가 지은 행장을 그대로 인용하여 아버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처신한 잘못을 인정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미 포기한 마당이라 이제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말했다.
“묘갈명 문제, 심려하지 마십시오.”
그러자 스승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무슨 말인가?”
“저, 이제 묘갈명 개작 필요 없습니다.”
명재는 분명히 대답했다. 그러고 나니 가슴을 막고 있던 그 무엇이 내려간 것처럼 후련했다. 아우 윤추(尹推)와 종제 윤진(尹搢)의 얼굴이 떠올랐다. 처음 우암에게 묘갈명을 청하려 할 때도 우리 집안은 ‘남’을 지나치게 배려하다가 손해를 입은 일이 많았으니 후대에 길이 전할 문자(묘갈명)를 함부로 남에게 부탁하는 것이 옳지 않다며 반대했다. ‘남’은 바로 우암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끔 아버지와 의견 충돌이 있기는 해도 아버지는 간격을 두지 않았고 또, 어릴 때부터 유일한 집우(執友)에다 파평윤씨 노종파 문중과 이리저리 얽힌 사돈 사이로 묘갈명을 쓸 가장 적임자라는 생각에서 아우들의 의견을 일축하고 우암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이곳 장기로 떠날 때 배웅을 나온 두 아우는 우암에게 묘갈명 개작을 청하지 말기를 당부했던 것이다.
“삐쳤는가? 오해 풀게. 만족스런 글을 써주지 못해서 미안하이.”
“아닙니다. 이제 묘갈명, 관심이 없습니다.”
“그럼, 왜 왔는가?”
“묘갈명 때문에 온 것 아닙니다.”
“그럼?”
“제자의 도리로 온 것입니다.”
작년(1673년) 11월, 명재는 아버지의 연보, 박세채가 지은 행장(行狀), 당숙 윤원거(尹元擧)께서 찬한 아버지의 묘표(墓表), 아버지의 유찰(流札) 등을 가지고 우암을 찾아가 아버지의 묘갈명을 부탁했다. 이렇다 할 출사는 없었지만 아버지의 묘비를 세워야 했다. 아버지는 약관에 증광시 생진(生進) 양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을 출입하며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탄옹 권시, 시남 유계, 초려 이유태 등과 교유했다. 당시 자신의 생부(生父) 정원군(定遠君) 부(琈)를 원종(元宗)으로 추존하려는 인조에게 예가 아니라는 상소도 올리고, 병자년(1636년) 4월에는 성균관 유생들을 이끌고 청나라 사신 용골대의 목을 베어 대의를 밝히라며 상소를 올렸다. 그런데 병자년(1636년) 12월 청나라의 조선 침공이 아버지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그때 조부 윤황(尹煌)은 4남 윤문거(尹文擧)와 남한산성으로 왕을 호종하고 아버지 윤선거(尹宣擧)는 모후 성(成)씨, 부인 공주이씨, 자녀들을 이끌고 숙부 윤전(尹烇)과 함께 강도(江都)로 들어가 다음해 1월 22일 강화성이 함락으로 부인을 잃었다. 그리고 전란 후 그해 3월, 여덟 살 명재와 한 살 위 딸 하나, 다섯 살 막내 윤추를 데리고 영동에 유배된 척화신 부친을 따라가 뒷바라지를 했다. 그 1년 후 조부 윤황은 유배가 풀려 고향 이산(尼山)으로 옮겨가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아버지는 3년 상 후에도 그곳에 머물러 학문만 궁구했다. 함께 교유한 친구,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탄옹(炭翁) 권시(權諰), 시남(市南) 유계(兪棨),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 등은 모두 속속 출사했지만 아버지는 효종이 내린 전설사(典設司) 별검(別檢), 왕자사부(王子師傅), 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 형조좌랑(刑曹佐郞) 등을 ‘죽어야 할 죄인(死罪臣)’이라 하여 사양했다. 효종이 지나친 사양은 오히려 의혹을 부를 수 있다며 만류했지만 듣지 않았다. 효종은 당시 강도에서 아버지가 진원군 이세완을 따라 강화성을 탈출하여 남한산성 행재소를 갔다가 실패하고 강도로 돌아와 적영(敵營)에서 함께 있었던 것이다. 효종을 이은 현종도 아버지에게 집의(執義),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 등을 내렸지만 끝내 사양하고 그곳에 친구 유계와 함께 학문을 연구했다. 덕분에 명재 형제는 유계에게 글을 배우고, 유계의 자제 유명윤 형제는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다. 자기 자식은 가르치기 힘들어 이렇게 서로 바꾸어서 가르치는 것이라 했다. 명재 열셋에 시경(詩經)을, 열다섯에 사서삼경과 사기(史記), 한서(漢書), 한유(韓愈)와 두보(杜甫)의 글을 가르친 아버지는 당신의 친구 시남市南) 유계(兪棨) 외에도 탄옹(炭翁) 권시(權諰), 당신의 스승 신독재 김집 등을 스승으로 모셔주었다. 특히 신독재 김집(金集)은 연산(連山)의 임리(林里)로 5년 동안 찾아다니며 예학을 배웠다. 신독재 별세 후 겨우 몇 개월 주자대전을 배운 우암과는 같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냥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뜻을 깨칠 때까지 반복케 하고, 한편 배운 것은 반드시 실천케 했다. 그래서 그날 배운 것은 밤마다 100번 이상을 외웠다. 명재가 우암에게 주자대전을 배우려 할 때 아버지는 ‘우암은 특출한 면에서 아무도 따를 수 없는 분인데 선(善)을 수용하는 도량이 넓지 못한 병통이 있으니 좋은 점을 본받고 병통을 경계하여 옛 사람이 시경 300편을 간한 것처럼 열심히 배워라.’ 하고 당부했다. ‘시경 300편’의 고사는 한나라 소제(昭帝)를 이어 즉위한 창읍왕(昌邑王)이 음란한 행동으로 폐위되자 유사(有司)가 사(事) 왕식(王式)에게 ‘어찌하여 왕에게 간하는 글을 올리지 않았느냐?’고 묻자 ‘매일 조석으로 왕에게 시경 305편을 가르치고, 충신과 효자에 관한 부분에 이르러서는 눈물을 흘리며 진달하였기에 따로 간(諫)하지 않았다.’고 대답하여 죽음을 면한 고사(古事)였다. 비록 출사는 없었지만 아버지는 학자로써, 스승으로써, 아버지로써 훌륭했다. 아버지는 생전에 가례원류(家禮源流), 후천도설(後天圖說), 첩천도(疊天圖), 계갑록(癸甲錄) 등의 저술을 남겼다. 가례원류(家禮源流)와 후천도설(後天圖說)도 아무나 쓸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가례원류에서 주자(朱子)의 의례(儀禮)와 주례(周禮), 예기(禮記) 등에 주(註)를 붙여 원(源)으로, 그 후의 예설(禮說)을 유(流)로 하여 예설(禮說)의 본원(本源)과 분류(分流)를 정리했다. 후천도설(後天圖說)은 복희씨(伏犧氏)의 선천역(先天易)과 주(周) 문왕(文王)의 후천역(後天易)의 관계, 주역의 이치적 배열 서괘전(序卦傳)과 현실적ㆍ점술적(占術的) 배열의 잡괘전(雜卦傳)에 대한 고찰이었다. 첩천도(疊天圖) 또한 주역에 관한 저술, 계갑록(癸甲錄)은 선조 때에 사림(士林)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선 원인과 곡절을 밝힌 것이었다. 이 외에도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유고를 정리, 외조부 성혼의 우계속집(牛溪續集)을 간행, 외숙(外叔) 성문준(成文濬)의 문집을 편찬한 업적 등이 있었고, 종형 윤원거(尹元擧)와 고향 노성(魯城)에 파평윤씨 종학당을 세워 문중의 자제들을 가르쳤다. 호서(湖西)의 이산(尼山)과 노성(魯城)은 조선 유가(儒家)의 우복동(牛腹洞)이었다. 조선 인재의 절반이 영남에서 나고, 영남선비의 절반이 안동에서 난다고들 하지만 공자님의 함자 중니(仲尼)에서 유래한 이산(尼山)과 노(魯)나라에서 유래한 노성(魯城)이 아니던가. 훗날 명재가 노성 종학당에 초학화일지도(初學畵一之圖), 위학지방도(爲學之方圖) 등을 걸고 집안 자제들을 가르친 것도 아버지의 유지를 따른 것이었다. 훗날 종학당 출신에서 대과(大科) 급제자 47명이 나온 것도 아버지의 덕이었다. 이런 아버지의 반듯한 묘비를 세워야 했다.
묘갈명을 부탁한 이듬해(1674년) 정월, 명재는 교산(交山)의 부모 산소, 파주(坡州)와 장단(長湍)의 선영을 참배했다. 그리고 귀로에 한양의 유란동(幽蘭洞) 청송당(聽松堂) 옛터도 둘러보고 그날 저녁 수락산 아래 박세채 우거에서 묵고 다음날 과천 수원을 경유하여 사흘 후 이산으로 돌아왔다. 청송당(聽松堂)은 외조부의 부친 성수침께서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친 곳으로 백악산(白岳山)을 등지고 남산을 바라보는 좋은 조망에 우거진 솔숲이 그윽했다. ‘소리는 일정한 틀이 없어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서리나 눈이 내려도 서로 돌아가며 운율을 이루어 하루 낮, 하룻밤, 한 겨울, 한 여름을 그치지 않는다(聲則無方曰雨曰風曰霜曰雪' 相旋爲韻律 不已一晝一夜一寒一暑)는 당호(堂號)의 뜻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선조(宣祖) 때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된 조선 사림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도학이 율곡(栗谷) 이이(李珥), 우계(牛溪) 성혼(成渾)을 통하여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의 서인으로 이어지고, 성혼의 사위 팔송(八松) 윤황(尹煌)을 통하여 아들과 손자 명재(明齋)에게 전해졌다.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의 학문을 배워 두 학파를 아울렀다면 명재(明齋)는 조부를 통하여 배운 성혼의 학문과 김장생 김집 부자로부터 율곡의 학문을 배운 사람이었다. 꼭 그 때문은 아니지만 명재는 성묘 길에 외가 성혼의 묘소, 율곡의 자운서원, 청송당 옛터 등을 둘러보곤 했다. 그런데 이산으로 돌아온 10여 일 후, 박세채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묘갈명을 부탁받은 우암이 박세채에게 따로 편지를 보낸 것을 그대로 베껴 보낸 것이었다.
‘자네(박세채)가 지은 행장을 보니 다시 상량(商量)해야 할 부분이 상당히 많았네. 을사년(1665년)에 내가 산사(東學寺)에서 초려(草廬) 이유태와 길보(윤선거)를 만나 여윤(驪尹)에 대한 생각을 물었는데 ‘윤휴는 흑(黑)이고 음(陰)이며 소인(小人)’이라 했다네. 그래서 장차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물었더니 ‘흑이고 음이며 소인이라고 여기면서 어찌 절교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고 대답했네. 그래서 내가 형은 이제 깨끗해졌다고 말했는데 뒤에 초려(草廬)가 내게 ‘길보(吉甫)는 겉으로 엄정해 보이지만 내면은 허약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므로 그날 한 말은 믿을 수 없을 듯하다.’하고 했네. 그래서 크게 책망까지 했지만 그가 죽은 후, 그의 문인 하나가 ‘여윤(驪尹)에 대한 교제는 시종 변함이 없었으니 절교했다는 말은 믿지 말라’고 했네. 그래서 내가 첫 기일(忌日) 연제(練祭) 제문에 대략 몇 마디 말을 엮어 여윤(驪尹)에 대한 취사(取捨) 문제를 슬쩍 내비쳤는데, 지금 연보를 보니 허목(許穆)과 윤휴(尹鑴)를 쓸 만하다고 허여(許與)했고, 또 듣건대 그의 영구가 도성(都城) 서쪽을 지날 때 여윤이 아들을 보내 제문과 제전(祭奠)을 올렸다는데 절교를 당한 여윤(驪尹)이 죽은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것도 의심스럽고 절교한 집에서 거절하지 못한 것도 이해하기 어렵네. 뒤에 초려가 자기는 ‘강도의 일(於江都事)’ 때문에 길보가 탐탁지 않았지만 애써 참았다고 했는데 혹 그 집에서 이를 미봉하고 보합하려 한 것은 아닐지 모를 일이네. 그 집에서 절교한 뒤에 구차스럽게 붙좇아 마치 서로 절교하지 않은 것처럼 처신한 이유를 알 수가 없다네.’
명재는 바로 문갑을 뒤져 우암이 ‘여윤(驪尹)에 대한 취사(取捨) 문제를 슬쩍 내비쳤다’는 제문(祭文)을 찾아보았다. 과연 <강(江)에 대해서는 생각이 서로 조금 달랐지만 만약 형(윤선거)이 해(海)에게도 관대했더라면 의심이 한두 마디 말만으로 즉시 풀렸을 것>이란 대목이 있었다. ‘강(江)’은 여강(驪江), 즉 여주(驪州)에 사는 윤휴(尹鑴), 해(海)는 해남의 윤선도(尹善道)를 지칭하는 은어(隱語)였다.
명재는 그간 누차 윤휴로부터 제문과 제전(祭奠)을 받은 일로 스승의 책망을 받아왔지만 ‘강도의 일(於江都事)’을 미봉하고 봉합하기 위하여 붙좇은 계책이라고 의심하는 스승을 그대로 두고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즉시 우암에게 붓을 들었다.
‘윤휴의 제전을 받은 것은 정의(情誼)로 보낸 것이라 거절할 수 없어 받았을 뿐인데 ‘강도의 일(於江都事)’을 미봉하고 봉합하려고 ‘구차스럽게 붙좇으려는 계책’이라고 의심하는 것은 억울합니다. 또, 초려(草廬)께서 운운한 것은 아버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소치에서 나온 것인데 정말 그렇게 여기시니 개탄스럽습니다. 아버지의 논의가 스승과 조금 다른 것은 스승의 견해가 너무 지나치거나, 아버지의 견해가 미치지 못한 것이며, 아버지가 윤휴를 간파하지 못한 것도 명도(明道)가 형서(刑恕)를 알지 못하고 문정(文正)이 진회(秦檜)를 알지 못한 것과 다르지 않으니 마땅히 백세의 평론에 맡기면 그만일 것을 꼭꼭 한 두 구절씩 끄집어내어 서로를 곤란한 지경에 빠뜨리십니까. 기유(己酉)년의 유찰(流札)은 친구를 위하여 정성을 다한 아버지의 유의가 담긴 것이라 뒤늦게나마 전한 것인데 이를 세상에 퍼뜨려 아버지를 사후에 비난을 받게 하십니까.’
그러자 편지를 보낸 한 달 후 4월 초, 자신은 도를 갖춘 군자에게 질정과 충고를 받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으로 유찰 때문에 감정이 나빠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편지와 함께 아버지의 묘갈명을 보냈다. 묘갈명 시작은 다음과 같았다.
<숭정(崇禎) 기유년(己酉年) 4월 18일, 휘(諱) 선거(宣擧), 자(字) 길보(吉甫) 미촌(美村) 선생 파평(坡平) 윤공(尹公)이 이산(尼山)의 거제(居第)에서 졸(卒)하였다. 원근의 선비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와서 곡(哭)하고, 제물을 올리거나 부의를 하는 사람들이 길에 끊이지 않았다. … 장례 때에 뒤따르는 자가 수백 명에 가까웠고, 장례를 마친 뒤 그가 살던 고장이나 지나간 고을에서 ‘군자(君子)들의 성덕(盛德)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이와 같구나.’하고 모두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려 했다.>
생년(生年), 졸년(卒年), 관력(官歷) 등을 기술한 첫 부분은 여느 묘갈명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읽어 갈수록 점점 이상해졌다. 특히 아래와 같은 대목들이 그랬다.
‘나는 공(公)에 견주어 뽕나무벌레와 고니(白鳥)의 차이가 나는 사람이라 내면의 깊은 부분을 엿보기에 부족하다.’ ‘늙고 병이 들어 죽을 때가 되어서인지 덕(德)을 나타내는 글을 지으려 하니 아득하여 무슨 말을 어떻게 써야 할지 알 수 없다.’ ‘여러 사람들 글 중에서 박화숙이 쓴 행장이 모든 것을 유감없이 표현했다고 하겠다.’ ‘박화숙이 쓴 행장에 의거해 서술하면 참솔(僭率)하다는 죄는 면할 것이라 생각 된다.’ ‘박세채가 마음으로 좋아하고 감복을 받아 쓴 글이니, 사람들이 좋아하는 자에게 아유(阿諛)했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뒷부분에 중용(中庸)의 지(知) 인(仁) 용(勇)의 삼덕(三德)을 인용한 후, 그 아래에
‘공(公)은 여기에 뜻을 두었건만(公志于此) 하늘이 수명을 멈추게 했네(天闕其年). 진실한 현석이(允矣玄石) 극도로 잘 선양했기에(極其揄揚) 나는 따로 짓지 않고(我術不作) 그대로 따라 명을 게시하노라(揚此銘章)’
하고 명(銘)을 붙여 놓았다.
고인의 가계, 생시의 행적, 가족관계, 인품과 자질, 풍모 등을 들어 고인을 칭송하는 묘갈명에 뜬금없는 뽕나무벌레와 고니(白鳥)를 끌어들여 자신을 뽕나무 벌레, 아버지를 고니(白鳥)에 비유하며 자신을 낮추는 척하며 아버지를 비하하는 역설적 수사였다. 또, ‘덕(德)을 나타내는 글을 지으려 하니 아득하여 무슨 말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며 아버지를 칭송할만한 덕을 찾을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젊은 시절부터 지근(至近)에서 서로 격려하며 학문을 절차탁마한 친구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또 ‘박세채의 행장에 의거하여 서술하면 참솔(僭率)하다는 죄를 면할 것이다’, ‘박세채가 진실로 좋아하고 감복하여 쓴 것이니 사람들이 아유(阿諛)했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는 것들은 모두 박세채가 아버지의 행장을 아유해서 썼음을 비꼬는 것이었다. 마지막 명(銘)에 ‘나는 짓지 않고(我述不作), 박세채가 지은 행장에 따라 비명을 게시한다.’는 것은 40년 이상을 교유한 사람으로 오만의 극치였다. 그것이 아니라면 아버지를 얕보고, 파평윤씨 노종(魯宗) 문중을 폄하하는 의도적 처사가 분명했다. 생각하면 우암은 평생 아버지를 경쟁의 상대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살았던 사람 같았다.
파평윤씨 노종파(魯宗派)의 세계는 병마사 윤선지(尹先智)의 2남 윤돈(尹暾)이 이산(尼山)의 첨정(僉正) 유연(柳淵)의 둘째딸에게 장가를 들어 윤창세(尹昌世)를 낳고, 윤창세가 윤수(尹燧), 윤황(尹煌), 윤전(尹烇), 윤흡(尹흡), 윤희(尹熺) 등 다섯 아들을 낳아 이산(尼山)에 세거하며 비롯되었다.
윤창세는 임란이 발발하자 고향 이산(尼山)에서 ‘서멸차적(誓滅此賊) 관부오왕(毌負吾王)’이란 팔자기(八字旗)를 앞세우고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가 이듬해(1593년) 3월, 진중에서 세상을 떠났지만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장남 윤수는 승문원 정자, 영변부 판관, 능성현령, 영해부사를, 2남 윤황은 승문원(承文院) 권지정자(權知正字), 대사성(大司成), 대사간(大司諫), 이조참의(吏曹參議)를, 3남 윤전(尹烇)은 저작(著作), 호조좌랑, 시강원 필선(弼善)을, 4남 윤흡(尹흡)은 한성부 서윤(庶尹), 5남 윤희(尹熺)는 전부(典簿)를 역임했다. 그런데 윤창세의 2남 윤황이 우계 성혼의 딸에게 장가들어 윤훈거(尹勳擧), 윤순거(尹舜擧), 윤상거(尹商擧), 윤문거(尹文擧), 윤선거(尹宣擧)의 다섯 아들과 측실에서 윤민거(尹民擧), 윤경거(尹耕擧), 윤시거(尹時擧) 등의 세 아들을 낳고, 아우 3남 윤전(尹烇)은 첨지중추부사 윤효지(尹曉之)의 딸에게 장가들어 용서(龍西) 윤원거(尹元擧) 등을 낳아 윤창세의 손자 스물하나와 증손 쉰둘은 훗날 윤수(尹燧)의 설봉공파, 윤황(尹煌)의 문정공파, 윤전(尹烇)의 충헌공파, 윤흡의 서윤공파, 윤희(尹熺)의 전부공파(典簿公派) 등 ‘노종(魯宗) 5방파’를 이루어 호서(湖西) 이산(論山)에서 ‘광산(光産) 김씨’, ‘은진(恩津) 송씨’와 어깨를 겨루었다. 윤황의 아들도 모두 출중하여 장남 윤훈거는 현감, 2남 동토(童土) 윤순거는 장령, 3남 윤상거는 교관(敎官), 4남 석호(石湖) 윤문거는 이조참판, 동래부사 등을 역임했다. 윤수의 아들 동토(童土) 윤순거(尹舜擧)는 문중의 기둥이었다. 윤황의 2남으로 백부 윤수에게 입적되어 일찍이 외숙 성문준(成文濬)으로부터 학문을,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으로부터 예(禮)를 배우고 열다섯 살에 윤황의 임지 영광(靈光)으로 따라가 수은(睡隱) 강항(姜沆)으로부터 시(詩)를 배웠다. 이런 인연으로 중부 통토(童土)께서는 훗날, 사재를 털어 스승 강항(姜沆)의 문집과 간양록(看羊錄) 발간을 주도했다. 명재도 중부를 도와 문집 발간에 찬여했다. 간양록은 강항이 일본에서 겪은 포로생활의 기록이었다. 본디 이름은 적국의 포로가 된 자신을 죄인을 뜻하는 건거(巾車)를 붙여 건거록(巾車錄)인데 동토께서 책을 낼 때 제자가 스승을 욕되게 할 수 없다하여 간양록(看羊錄)으로 바꾸었다. 간양록이 간행되자 강항의 행적이 비로소 알려져 조정의 포증(褒贈)을 받기도 했다. 또 중부(仲父) 동토(童土)는 경자년(1660년)에 영월 군수로 나가 200년 동안 퇴락하여 겨우 승사(僧舍) 하나가 남은 노산군(魯山君) 단종의 능을 중수(重修)하고, 숙부에게 위를 뺏기고 영월로 쫓겨와 억울하게 죽어 200년을 고혼으로 떠도는 조선 제6대 왕 이홍위(弘暐)의 혼백을 안무하는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라.’로 시작되는 노릉지(魯陵誌)를 지었다.
현종3년(1662년) 3월, 명재는 영월군수 동토공의 부름으로 그해 4월 함께 유점사 등 금강산 일대를 유람한 후 노릉(魯陵)과 공자의 구산서원(丘山書院)을 참배하고 돌아와 7월에 단양의 구담(龜潭), 도담(島潭)을 둘러본 일이 있었다. 당숙 용서(龍西) 윤원거(尹元擧) 또한 노성을 지키는 문중의 기둥이었다. 병자호란 때 강도(江都)에서 순절한 부친 후촌(後村) 윤전(尹烇)을 고향으로 모시고 살면서 학행으로 내린 벼슬을 모두 사양했다. 계룡산 서쪽에 살았기에 호를 용서(龍西)라 했는데 아버지와 함께 파평윤씨 노종파(魯宗派) 종학당(宗學堂)을 세워 문중 자제들을 가르친 것이었다.
현종4년(1664년) 6월, 명재에게도 처음으로 내시교관이 내렸다 그 후로 해를 거듭하며 세자익위사 익찬(翊贊), 전라도 도사(都事), 사헌부 지평(持平) 등이 내렸다. 그러나 아직 삼십 중반이라 사양했다. 그런데 6년 후 불혹의 나이에 또 다시 아버지, 당숙 윤원거(尹元擧), 계부(季父) 윤문거(尹文擧)와 함께 별유로 부름을 받고, 두 달이 지난 3월, 현종께서 온천을 행행(行幸)하는 길에 다시금 징소(徵召)하는 가운데 다음 달 4월 18일,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상에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추증하고 제수와 별도의 부의를 많이 내렸다. 그러나 명재는 아버지의 명정(銘旌)에 생원(生員)을 쓰고 상례(喪禮)에 선비의 예를 따랐다. 아버지께서 다른 직함을 쓴 일이 없고, 아버지의 유의(遺意)를 어길 수 없었다. 그래서 제물과 부의(賻儀)까지 사양하려 하다가 상중에 소를 올리는 것이 온당치 않을 것 같아 그만 두었다. 그해 여름 장마에 3월장(三月葬)을 맞추지 못하여 영구는 7월 28일, 계부 윤문거의 독축 속에 발인하여 8월에 교산(交山)의 어머니 산소 옆에 이르러 장사를 지냈다. 그 후 명재는 묘소아래 묘려(墓廬)에 머무르려 했다. 그런데 몸이 아픈 계부(季父) 윤문거의 곁을 멀리 떠날 수 없어 아우와 번갈아 가며 묘려를 지키며 조석(朝夕)으로 정성을 다하여 신해년(1671년) 6월, 3년 상을 마쳤다. 상을 마친 명재는 바로 이산(尼山)의 미촌(美村)에 내려가 묘갈명은 세우기 위하여 아버지의 연보와 유사를 짓고, 현석 박세채에게 아버지의 행장(行狀)을 부탁하여 드디어 우암에게 묘갈명을 부탁한 것이었다.
이런 묘갈명으로는 묘비를 세울 수 없었다. 반드시 크게 고치거나 다시 다른 사람에게 의뢰해야 했다. 그런데 한번 부탁했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다른 사람에게 다시 의뢰하는 것도 사대부가 취할 처신은 아니었다. 별수 없이 처음 묘갈명을 쓴 우암에게 수정이나 개작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명재는 즉시 우암에게 묘갈명 고칠 부분 곳곳에 찌를 붙여 편지를 보냈다.
‘고인과 40년을 함께 한 친구께서 자신의 뜻은 보이지 않고 <나는 알지 못하는데 박모(朴某)의 말이 이와 같았다.>하여 애당초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하고, <뽕나무벌레와 고니 이상의 현격한 차이가 나는 사람이라 내면의 깊은 부분을 엿보기에 부족하다.>는 말로 도외시하니 이럴 바에야 박세채의 행장으로 충분할 것을 굳이 청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묘갈명을 부탁한 뜻이 쓸쓸해질 뿐 아니라 혹 후세에 스승의 인품을 논하는 일이 있을까 염려도 되오니 부디 총론을 다시 더 고쳐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한참 후, 박세채가 쓴 행장은 다른 사람들이 미칠 수 없는 글이라, 팔을 걷어붙이고 산정(刪定)하고 조절할 수 없었고, 화숙을 존경하고 우러르는 마음이 태산과 같아 서문(序文)에 ‘아부했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고 했으며, 명문(銘文)에 ‘중용(中庸)’의 도를 논하고 ‘공(公)이 여기에 뜻을 두었다.’라고 했는데 박세채의 논찬은 수정해야 할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주자(朱子)가 위공(魏公)의 행장을 지은 것과 같은 생각으로 감히 바꾸지 않았다는 답서가 왔다.
박세채가 명재의 연보를 토대로 행장을 기술하여 용이 지나치게 미화되었음을 빈정대는 것이었다. 명재는 다시 반박 편지를 보내, 지나친 미화가 오히려 욕되게 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문제는 평소 아버지와 충(忠), 신(信), 도의로 기약한 분의 글이 시종 범범하여 도무지 정의(情義)를 느낄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한참 후 약간 수정한 묘갈명을 다시 보내왔다. 총론은 식견이 나아지기를 기다려 다시 힘을 다하겠다는 편지도 동봉했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몇 번을 고친들 진실한 마음이 없으면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장기로 출발하기 전부터 마음을 고쳐먹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공연히 욕심을 부려 선인에게 불효만 지었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나 스승이
“불효라니?”
하고 물었다. 그래서
“묘갈명을 청하지 않았다면 강도지사(江都之事)와 여윤(驪尹)의 일로 선인을 욕되게 하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우암은
“미안하이. 어쨌든 온 김에 고칠 부분을 직접 지적해 주게.”
하고 나왔다.
“소생, 문하(門下)의 도리로 왔을 뿐입니다.”
“그럼, 강도지사(江都之事)가 오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스승께서는 35년 세월을 언필칭, 아버지를 가리켜 강도(江都)에서 천인 선복(宣伏)이라 변성명하고 도망쳤다며 헐뜯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봉림대군의 문서를 전하러 가는 왕족 진원군 이세완의 청으로 강화성을 떠나 남한산성으로 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강화성으로 돌아와 봉림대군과 함께 청군 진영에 머물다가 항복 후 풀려난 것입니다.”
그러자 우암이 물었다.
“본인 스스로 죄인이라 하지 않았는가?”
“스승님은 맹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도 모르십니까? 호연지기에서 편벽된 말에 가려진 것을 아는 것을 지언(知言)이라 했습니다. 같은 날에 함께 죽지 못한 자책(自責)으로 하신 말씀의 본뜻을 알지 못하십니까?”
“ … ”
“그리고….”
“또, 뭔가?”
“아버지는 여강(驪江)을 한 번도 양(陽)이나 백(白)으로 여긴 일도 없고 더불어 왕래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다시 교제했다 하십니까? 다만 스승의 절교(絶交)는 여지를 남기지 않고 철저히 끊는 절교지만 선인의 절교는 여지를 남겨둔 절교였습니다. 그래서 백호가 거상(居喪)에 제전(祭奠)과 제문을 보내 정을 보였고 그것을 거절할 수 없었던 겁니다. 또, 선고께서 남신 유찰(遺札)은 비록 당류가 다르고 약간의 과오가 있다 하더라도 백호와 조경(趙絅), 허목 등을 참적독물(讒賊毒物)로 단정하지 말고 좋게 지내라는 진정한 친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충고인데 그걸 오해해서야 되겠습니까?”
장기는 전부터 향교와 서원도 있는 제법 큰 고을이었다. 명재는 장기에서 사흘을 머물고 귀로에 경주 양동마을 옥산서원(玉山書院)을 들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참배하고 이레 만에 이산(尼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듬해(1677년) 1월, 장기에서 다시 보낸 고친 묘갈명을 받았다. 동봉한 편지에 <지적한 대로 고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산교악처럼 여긴다.’는 것은 집사가 써야할 자리에 썼으므로 그 말을 빌려서 썼기에 큰 죄가 되는 줄은 몰랐다.>고 했다. 박세채가 쓴 행장에 태산교악이라는 말이 있어서 썼다며 빈정대는 것이었다. 기대하지 않았지만 혹시나 했는데 역시 실망이었다. 스승은 또 박세채에게 따로 편지를 보내 부사경중(父師輕重)을 논했다고 했다. 스승을 바로 지적하여 깨우쳐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붓을 들어
‘아버지의 학문은 내면에 힘을 써 자신의 덕을 닦는 실(實)을 위주로 하고, 스승의 학문은 남들의 평가에 무게를 두어 겉으로 드러나는 명성을 추구하여 시작이 달랐습니다. 사문(師門)은 주장이 너무 지나쳐 남의 장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을 너무 내세우기 때문에 굳세고 준절(峻截)한 쪽으로 치우쳐 남을 공격하고 이기려고 할 뿐, 널리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진실과 성실함이 없습니다.’
하는 편지를 썼다. 그리고 이듬해(1678년) 10월, 당숙 윤원거가 짓고 계부 석호 윤문거께서 쓴 묘표로 아버지의 묘비를 세웠다. 그런데 이듬해 무오년(1678년) 9월, 우암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묘갈명 초본에 정정할 글자와 단어를 분명하게 말해 주면 초본을 고집하지 않고 고치겠다는 것이었다. 묘비는 이미 세웠고, 세 차례나 고쳐주겠다 하고는 외면하는 사람을 더 이상 믿을 수 없었다. 상대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박세채가 찾아 와서 이쪽에서 먼저 관계를 끊어서는 안 되며 또, 지금 우암이 ‘원본을 고집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믿고 응하라는 바람에 마음을 바꾸어 먹고 박세채와 함께 묘갈명을 수정해야 할 부분에 찌를 붙여 장기(長鬐)로 보냈다. 그런데 이듬해(1679년) 여름, 명재는 이산에 거제로 동상리에서 보내온 새로 고친 묘갈명을 받았다. 우암은 그해 4월, 장기에서 거제 동상리로 이배된 것이었다. 그 때문인지 새로 고친 묘갈명은 역시 실망스러웠다. 찌를 붙여 보낸 것은 모두 헛수고였다.
허적의 유악(帷幄) 사건(1680년)으로 5월 15일 우암은 거제에서 풀려나고 그해 10월,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겸 영경연사(領經筵事)에 올라 다시 권력을 잡고 조정을 좌지우지 했다. 이때 명재에게도 사헌부 집의(執義), 성균관 사업(司業) 등이 내렸지만 사양했다. 출사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유봉(酉逢) 옛집에서 아우의 병을 보살피며 국휼(國恤) 중에 사가4례(私家四禮)의 변절을 고찰한 <국휼중4례사의(國恤中四禮私議)>를 저술했다.
그런데 다음해(1681년) 초에 ‘병천(倂川) 목천사원(木川書院) 괴담’이 돌았다. 오랑캐에게 허리를 굽히고 종(奴)을 자처한 윤선거를 목천서원에 배향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알아보니 서원 측은 전혀 알지도 못하고 순전히 우암이 혓바닥으로 날조한 것이었다. 명재는 참담한 심경이었다. 잘못 부탁한 묘갈명 때문에 무한한 구설수를 일으켜 아버지를 욕되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참고 조용히 해결해야 하는 결자해지(結者解之)였다. 그런데 다시 조정에 들어간 우암은 1683년, 위화도회군삼백주년(威化島回軍三百週年)을 맞아 태조에게 소의정륜(昭義正倫)이라는 휘호를 올리자고 난리를 부리고 있었다. 드디어 스승의 병통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해 6월 명재는 우암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갑인예송’ 이후 늘 스승의 병통 시류(時流)에 대하여 충언(忠言)하려 하다가 정계를 떠났기에 그냥 두었는데 이제 다시금 사류들을 헐뜯고 사람을 억눌러 명망을 잃고 있는 것이었다. 결코 묘갈명 같은 사사로운 문제 때문은 아니었다. 스승이기에 반드시 병통을 깨쳐줘야 했다.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스승께서 회옹(晦翁)이 경계한 왕도(王道)와 패도(霸道)를 병용하고 의(義)와 이(利)를 병행하기 때문에 조정 관료는 뜻이 같고 다름으로 편을 갈라 사대부 풍습이 무너져 사의(私意)가 횡류(橫流)하고, 초야는 세력과 위세ㆍ선동ㆍ아첨ㆍ협박으로 입신출세를 도모하여 향당의 풍속이 무너졌습니다. 스승의 대의(大義)는 말로만 밝힐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효종 즉위 초는 내정(內政)을 닦고 외이(外夷)를 물리쳐 백성을 편안히 하고,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는다는 기대에 사람들이 따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일은 없고, 오직 문하의 녹(祿)과 지위(地位)와 명성만 높아졌습니다. 문하의 강덕한 기질 때문에 하는 일이 순수하지 못하고 병폐가 되어 참된 학문을 할 수 없습니다. 의(義)는 천리(天理)요 이(利)는 인욕(人欲)이며, 왕도(王道)는 천리에 순수하고 패도(霸道)는 인욕에 잡된 것인데, 왕도(王道)와 패도(霸道)를 병행ㆍ병용함으로써 총명하고 강의(剛毅)한 학문이 바로 서지 못하고, 자기를 극복하지 못하여 처음 마음을 저버리게 되었으니 부디 본디의 굳센 기질과 학문으로 분발하여 꺼림칙한 것을 씻고 모난 성품을 제거하여 정성이 바르게 서고 온갖 뜻이 곧아져 충심이 드러나고 작은 것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천리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고 전통(前統)을 잇고 후서(後緖)를 전하여 초지(初志)를 따르는 것이 문지도리(樞)처럼 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편지는 보내지 않았다. 뜻은 좋지만 우암이 받아들일 도량이 없어 도리어 분열만 초래하고 또 세도에 누를 끼칠 것이라 하여 박세채의 만류 때문이었다. 그 3년 후(1683년),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 학암(鶴庵) 최신(崔愼)이 명재가 스승을 배반했다는 상소를 올렸다. 함경감사로 나간 민정중이 회령에서 데려온 우암의 10년 제자였다. 지난해(1882년) 겨울, 박세채에게 보낸 또 다른 편지를 손자 송순석이 훔쳐다 우암에게 전한 때문이었다. 뒤를 이어 우암의 문인 김엽(金曄), 이진안(李震顔), 이경화(李景華) 등이 소(訴)를 올리고, 우암이 직접 글을 지어 윤선거가 병자호란 때 오랑캐에게 절개를 굽히고 사문난적 윤휴(尹鑴)를 편들었다며 중외(中外)에 퍼뜨렸다. 그러자 상신(上臣) 민정중 등이 왕에게 명재를 예대(禮待)하지 말기를 청하는 가운데 삼사(三司)와 향곡(鄕曲)의 유생(儒生)들까지 명재를 비난하고 나섰다. 그 2년 후 갑자년(1684년) 5월, 명재는 우암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자네가 지적한 것은 모두 나의 실제 병통이었네. 의리(義理)와 사리(私利)를 아울러 행하고 왕도(王道)와 패도(覇道)를 함께 쓴다는 대목은 침(針)으로 몸을 찌르는 것 같았네. 비유컨대 고질병으로 죽음에 이른 환자가 훌륭한 의원에게 신단(神丹)의 묘약을 처방 받아 살길을 찾는 것 같았네. 의원의 본심이 환자를 사랑하는 뜻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지만 그 은혜 한량이 없었네.’
신유년(1681년)에 썼다가 보내지 않고 감추어 둔 편지를 송순석이 장인 박세채의 서재에서 훔쳐 조부 우암에게 전한 것이었다. 명재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편지를 쓰던 신유년 당시만 해도 진심으로 스승을 도울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목천서원(木川書院) 괴담’을 날조하고, 얼토당토 않는 ‘옥천(沃川) 상소’를 올려 끊임없이 아버지를 시기하고 헐뜯는 우암은 더 이상 스승일 수 없었다. (끝)
참고 서적 : 明齋연보. 農隱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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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데기 어렵소이다
쓸 데 없는 이름이 너무 많이 나열되어 있군요
뭐가 뭔지 통 모르겠사옵니다
역사사전 입니까
안병남
강 선배님의 역사재해석 정말 존경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