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산동성 유가 문화 원류를 찾아서
유 철 식
공자, 맹자! 아 그들은 신 이었던가! 실존 일반 인물이었던가?
자기완성을 위해 평생 노력하며 제자들에게 가르침에 일생을 보낸 분들 아니겠는가!
동양인들에게 삶의 지혜와 명철을 일깨워주고, 우리들에게 올바른 이정표를 제시해준 수많은 명언들을 남기신 분들이기에 그들의 발자취를 더듬고 온고이지신의 마음으로 새로운 이정을 찾고자 장도에 나섰다.
2011년 12월, 올해가 다가기전 일 년 마무리를 유가, 특히 효의 뜻을 되새기며 종편을 의미 있게 마무리 하고 싶었다. 일행 17명은 효 학 석. 박사코스를 밟거나, 교수직을 수행하는 분들로 구성되어 나와 같은 뜻을 함께 했으리라 생각되며, 나보다 더 굵고 다양하게 인생을 걸어 왔으리라 믿어진다. 또 한 번 나를 낮추고 겸손 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잠시 생각에 잠겨 보았다.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여행은 생각할 시간을 갖고 또 다른 무엇을 보고 느끼면서 변화와 함께 성숙한 마음을 갖게 하니 그저 좋기만 하다.
처음 도착한 제남시는 산동성의 수도다. 산동성은 남한의 1.5배 크기로 인구는 1억 가까이 되니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날씨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쌀쌀한 겨울 날씨다. 생각보다 거리는 잘 정돈되었고 깨끗해보였다. 우리가 처음 방문할 산동사범대학과는 약 1시간거리. 차창 밖 오른쪽에는 그 유명한 중국 문명의 발상지인 황하강 유역 줄기가 보였다. 우리가 싫어하는 황사의 본거지라 생각하니 기분이 좀 찜찜하다. 역대 통치자들이 황하강 치수를 얼마나 잘 하느냐에 통수의 척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 길이는 600km가 넘고 이 긴 젖줄에서 문명과 교역이 시작되고 흘렀으니 그 규모의 거대함을 느낀 수 있었다.
도착한 산동사범대학(제2켐퍼스)은 학생 수만 2만명, 교수진은 2,000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 중에서 한류를 꿈꾸며 K-Pop을 즐기고 싶어 하는 한국어과 전공생 약200명을 만났다. 한국의 풍습 제기차기와 인사 예절 법을 가르치며 함께 어울렸다. “한국어를 열심히 해 한국에서 꼭 한번 만나요” 그리고 한국에서 좋은 선물사서 부모님께 드려요 이것이 효도하는 지름길의 하나라고 당부의 말도 남겼다. 한류의 맥을 이어가게 해준 발랄한 우리 젊은 가수들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꼈다. 우리는 자동적으로 어깨만 올리면 되지 않은가? 못내 짧은 시간이 아쉬운 듯 차창 밖에서 연신 손을 흔들며 잘 가라고 인사하는 여학생들을 뒤로 하고 다음 행선지로 떠나야했다. 이놈의 이데오르기와 패권주의가 아니면 우리 인류는 한 가족인데 하는 아쉬움도 가져 보았다.
다음날 우리는 태산을 등정하는 날이였다. 이곳 산동성에서 제일 높은 산(1,546m)을 오를 판이다. 완전무장 옷을 입고 그 유명한 양사언의 시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속에 태산 등정을 나섰다. 우리는 4,700여개의 계단을 오르기 전 약 600m코스의 케이블카를 탔다. 날씨는 쾌청한데 바람은 세고 모든 건물은 고풍스럽지만 음산하기만 하다. 안내하는 사람들과 장사꾼들은 산속에서만 살아서인지 왠지 험상궂은 산적과 같은 느낌이었다. 멀리보이는 계곡엔 바윗돌 조각이 겹겹이 내려 쌓였고, 이에 반사되는 햇볕과 함께 금방이라도 물살이 싹 흘러내릴 것 같은 은빛 물결을 연출하고 있었다. 올라가는 케이블카 바로 옆에 자리 잡은 한 자작나무는 사시사철 손님을 맞이하며 자기를 보라고 응시하고 있는 양 자태를 뽐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겨울은 몹시 외롭고 춥게만 보여 아름답다는 말보다 퍽 안됐다 하는 가련한 말 밖에 남길 말이 없었다. 태산은 옛 부터 신령한 산으로 역대 황제들이 봉선(封禪)의식을 거행했던 곳이다. 하늘을 숭배하고 제사하며 민국태안을 빌던 곳. 자연섭리에 따라 순리대로 살아가며 화가 아닌 복을 내려 주십사 하고 빌었던 곳. 다시 한 번 정상에서 멀리 겹겹이 이어진 산등성이에 바위위에 눈으로 화장한 아름다운 경치를 보며 맑은 하늘을 숭배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우러러 보았다.
다음은 중화사상의 뿌리 공자의 고향 곡부를 방문키로 했다. 이곳은 공묘(제사를 지내는 사당), 공부(공자의 혈족들이 거주하던 마을), 공림(공자 및 후손들의 묘)으로 나눠졌다. 처음 들린 곳은 공자의 어머니가 아들 공자를 낳기 위해 굴속에 들어가 기도하던 곳(夫子洞), 아직도 생생하게 동굴이 우리들에게 약 2,500년 전의 기도하는 모습을 엊그제 일어났던 일 인양 머릿속에 떠올리게 했다. 공자(기원전 551~479년)는 15세 때 학문에 뜻을 두고 부지런히 배우며 묻기를 즐기고 누구든지 장점이 있으면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길을 찾아 나섰다. 공자는 무엇보다도 인간들에게 “인(仁)”을 강조하고 인정정치와 평등교육을 제창하였다.
공묘의 규모는 역대통치자들이 숭배하고 제사를 지내며 끊임없는 증축을 거쳐 저택의 길이는 2km, 부지면적은 21.8ha다. 대성전에 이르기 위해서는 7개의 문을 지나며 곳곳에 수백 년 된 편백나무와 역대 황제들의 찬문이 새겨진 비석들이 곳곳에 즐비하다. 특히 편백나무는 병충해에 강하고 향이 좋아 건물보존에 최적인 나무다. 후손들의 정성이 엿보인다. 아쉬운 것은 역사의 흐름을 멈추게 했던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에게 동간 난 비석들이 이어진 모습들로 아픈 상처가 여기저기서 보였다. 공자님을 모신 대성전 앞에는 공자가 제자들에게 학문을 강연했던 행단(杏壇)이 있고 앞에는 살구나무를 심어 놓았다.
공부는 공묘 뒤쪽, 동편에 있다. 공부의 안채는 공자후손들이 생활하던 곳, 황실의 은혜로 충족한 생활을 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화원도 크고 꽃과 나무가 심어져 편안하고 우아함 마저 나타내고 있었다. 공자의 후손은 82대를 거쳐 그 수는 400만 명에 달해 지구상에서 천하제일가로 불리 운다. 지금도 곡부에는 10만 명이상 이 살고 있다 한다.
공림은 무덤이 10여만 자리이며 주위에는 홍색 담이 3m높이, 길이가 7km나 된다. 규모가 방대하고 각종 나무가 10여만 그루 이상 되는 그윽하고 조용한 풍치림을 자아내고 있었다. 공자묘는 공림의 중심에 위치해 동쪽은 아들인 공리가 남쪽은 손자인 공급(자사)의 무덤이 있어 마치 품(品)자와 같은 묘의 배치로 자식을 데리고 손자를 품에 안은 형태를 나타내고 있었다. 자연그대로의 공자 묘 앞에 잠시 참배를 하며, 노벨상을 탄 세계석학들이 무덤 앞 에서 2,500년 전의 공자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고 선언했다니 공자는 인류의 미래까지 내다 본 영원한 사상가가 아닌가 잠시 묵상에 젖어 보았다.
곡부를 떠나 공자의 아성(亞聖)으로 추앙받는 맹자를 만나기 위해 추성으로 향했다. 아성은 성인의 버금가는 뜻으로 공자 다음 맹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맹자는 공자사후 107년 뒤에 노나라에서 태어나 어머니 훈육과 자사의 가르침을 통해 공자의 도를 계승하여 인의(仁義)를 중시하는 민본정치를 역설하였고 “군주는 배 백성은 물”이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맹자는 인간은 측은지심(도덕심), 시비지심(옳고 그름)등을 갖고 있는 성선설을 주장하여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와 대조되기도 하다.
맹묘의 부지는 5만여㎡로 역시 수백 년 된 편백나무와 수백 개 이상의 찬문비석들이 늘어 서 있었다. 맹자의 어머니는 맹자의 공부를 위해 맹모삼천사(孟母三遷祠), 맹자가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오자 어머니가 짜던 베를 칼로 끊고 훈계했다는 맹모단기처(孟母斷機處)등이 적힌 비석들이 눈에 번뜩 띄어 다시 한 번 읽어 보았다. 맹묘의 중심건물인 아성전(亞聖殿)에 이르니 건륭황제가 쓴 금박현판이 걸려 있었다.
맹부에 이르니 앞쪽은 관아였고 뒤쪽은 가족들의 안채 그 뒤는 역시 화원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 곳 중심 건물인 대당(大堂)은 공적업무를 보던 곳으로 그 뒤쪽에 사합원(四合院)으로 지어진 주택이 맹자가 생활하던 곳이었다.
맹자는 집에서 부모님을 섬기고 밖에서는 웃어른을 모시며 자식을 귀여워하고 남의 자식도 사랑하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손놀림처럼 쉬워 질 것이라 했다.(孟子曰, 老吾老, 以及人之老, 幼吾幼, 以及人之幼, 天下可遺子掌)
마지막 날 우리는 산동성 박물관을 방문했다. 1,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박물관으로 우람한 건축물은 중국대륙의 위용을 과시 하듯이 보였고 이곳은 진귀한 물품 50만점이상이 현대적 전시방식으로 중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내다 볼 수 있는 산실로 꾸며져 있었다. 신석기시대의 갑골문자는 무려 5,000점 이상 돼 중국내에서 가장 많다고 한다. 수많은 고대국가의 물품과 고서(손자병법 등)등이 전시돼 우람한 건축물과 함께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거대한 중국을 보면서 그들의 힘을 몸소 다시 한 번 느꼈으며, 위대한 사상가각 국가의 리더로 영원히 추앙 받고 그의 사상을 본받아 생활의 이정표로 삼는 것이 부럽기도 했다. 이에 우리는 마냥 작아질 수만은 없다. 한민족 특유의 끈기와 근성이 있지 않는가. 우리만의 특징과 색깔을 찾아 작지만 알차게 자랑거리를 소중히 보존 발전시켜 특유의 고유성을 갖춰야 될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4박5일의 일정은 많은 감명과 교훈을 받았다. 옛것을 중시하며 현재와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가져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고, 하늘을 경외하며 순리와 이치를 깨달으며, 어질고 착하게 또 겸손하게 살아야지 하는 각오도 해보았다. 특히 효운동하는 나는 공자, 맹자 및 그의 제자들과 가까워진 느낌을 갖고 많은 힘을 얻은 게 만족스럽다. 처음부터 끝까지 친절하게 안내해 준 김 교수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2011.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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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감사!
좋은 여행하시고 오셨습니다.